title: 붉은 참혹상
written by: 규피덴셜
state: 공유, 배포 xX
nick: 테라규, 감성, 씨규빠, 타라, 베긔, 체리펀치, 소라빵, 코알라, 모닝콜, 찹쌀떡, 뇨뇽
붉은 참혹상 -09-
“선배님, 부탁드릴 것이 있습니다.”
고개를 갸우뚱하면서 쳐다보는 줄로 알았더니만 고개를 갸우뚱 하는 척 목 운동을 하듯 뻐근한 목을 풀어내는 명수의 행동에 우현은 도대체 부탁을 들어줄 것인지 아닌지에 답이 없는 명수에게 답답함을 느끼면서 짜증을 내고 있었다. 그 와중에 다시 고개를 돌려서 우현을 무시하고 가만히 앉아 있는 명수의 행동은 우현의 화를 불러 일으키는 데에 소질이 있어보였다.
“부탁 드릴 게 있다고요.”
명수는 그제서야 우현과 제대로 눈을 마주치면서 있는 줄도 몰랐던 이어폰을 귀로부터 빼냈다. 우현은 순간적으로 성규 형이 이런 놈이랑 매일 싸우는 이유를 알겠지 싶었다. 명수는 우현의 얼굴서부터 명찰까지를 계속 훑다가 그제서야 한 마디 말을 꺼냈다.
“뭐.”
우현은 아랫 입술을 내밀어 앞머리와 이마 사이에 흐르는 식은 땀에 바람을 불어넣었다. 주머니 속에서 반듯하게 접어진 채로 나오는 노란색 종이에 쓰여진 편지를 우현이 다시 펴서 접고서는 명수에게 내밀었다.
“성규 형 사관학교 갔다면서요. 명수 형 사관학교 구경할 겸 가서 이것 좀 전해주세요. 성규 형한테.”
“내가 왜?”
내가 왜? 라고 묻는 명수의 행동에는 분명 모순이 있었다. 이미 물어보기도 전에 그 노란색 종이를 손에 쥐고서는 빙글 돌려대었다는 것. 평소에 싸가지 없고 까칠하기로 유명한 김명수가 제 편지를 받아주었다는 사실만으로도 우현은 씨익 웃어보였다. 하지만 우현의 웃음을 곧바로 가시게 하는 명수의 행동은 정말이지 싸이코가 아닌가 의심해볼만치 어이가 없었다. 한 손으로 그 작은 노란 종이를 한 손 안에 가득 쥔 채로 구겨버리는 명수의 행동에 우현은 말이 안 나왔다.
“전해줄게.”
“지, 진짜요? 그, 근데 그거 구겨진 거…”
“대신 너도 같이 가.”
우현은 빠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성규 형에게 사과할 기회가 생겼구나 싶어서 말이다. 그 때 그 밤 중에 우발적으로 또 충동적으로 벌여냈던 일이 정대 고의가 아니고 갑자기 해보고 싶은 마음에 주체하지 못하고, 내 이성이 이끄는대로 갔을 뿐이라고. 대놓고 그 편지에 쓰지는 못했지만 충분히 성규가 이해하리라 우현은 믿었다. 절대 나를 그런 일로 배신할 형이 아니니까.
명수가 사관학교에 들어가서는 성규랑 이것저것 얘기를 하는 것이 흐린 창문에 실루엣이 보이긴 했다만 무슨 얘기를 하는지 잘 들릴 리가 없었다. 잘 들리지도 않는 거 뭐하러 마음 조아리면서 이렇게 서 있는담? 나가서 구경이나 하자 싶어서 건물 밖으로 나와서 잘 정돈된 정원과 그 뒤로 펼쳐진 큰 훈련장을 보았다. 언젠가는 저런 곳에서 성규 형이랑 같이 훈련받길 바랬는데.
그렇게 몇 십분이나 지났을까? 아니, 한 시간정도는 지났으려나 명수가 어울리지 않는 축 쳐진 걸음으로 우현 앞에 나타났기에 우현은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명수의 태도 하나로 이렇게 영향을 받는 것도 웃겼지만 당연히 신경 쓰는 것이 옳았다. 곧이어 저를 무시하고 지나가는 것 같아 곧바로 쫄랑쫄랑 명수 옆으로 붙어섰더니만 명수가 자꾸 기운 없이 구니 저도 모르게 어깨가 축 쳐진 듯 싶었다.
“성규 형이 반응이 안 좋았어요?”
“…….”
“성규 형이 뭐래요?”
명수는 계속 답이 없었다. 예전도 그랬지만 오늘은 뭔가 더 말이 없다고 해야할까. 없던 말도 더 없는 듯한 기분에 우현은 물어봐놓고 머쓱해진 기분을 달래려 팔을 부르르 털면서 명수를 쳐다보았다. 그렇게 곧이어 기운 없던 표정은 싸악 굳으면서 비웃는 듯한 태도로 넘어갔다. 가만히 걸어가면서도 명수답지 않게 뒤 돌아서 성규가 있을 집을 한 번 훑어보았다.
“너 쟤랑 섹스했지.”
“예, 네?”
“섹스했냐고.”
“거기까진 아니었는데…”
“그럼 키스?”
그럼 키스? 하고 물어오는 명수의 질문에 고개를 끄덕거렸더니 명수가 그제서야 이해 됐다는 듯 고개를 끄덕거렸다. 우현을 쳐다보면서 약간은 한심하다는 듯한 눈초리를 보였지만 명수는 아랑곳하지 않고 앞을 보고 걸어갔다. 우현은 느낌이 이상했다. 약간은 해도 될 거짓말이었음에도 거짓말을 했다는 사실에 기분이 꽁기해졌다. 키스도 섹스도 아니었던. 성규 형이 굳이 따지고 들면서 나를 신고했다면 강간미수범으로 그쳤었을까?
“너 쟤 왜 좋아하냐?”
우현은 뒤늦은 생각이지만 명수가 제 편지를 읽었구나 싶은 생각에 잠시 인상이 써져서는 명수와 눈을 맞춘 채로 째려보았다. 명수는 '뭐, 어쩌라고'식의 대답을 하듯 괜히 턱으로 뒷 쪽, 그러니까 성규가 지금 살고 있는 아파트 단지를 가리키면서 대답해주기를 독촉했다.
“그냥 뭔가… 모르겠어요. 사람 좋아하는데 이유 있나.”
“나도 모르겠다.”
“뭘요?”
“니가 왜 저딴 쓰레기를 좋아하는지.”
우현이는 분명 자신의 편지를 받은 성규가 무슨 일을 했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그래도 쓰레기라고 표현할 만큼 그런 나쁜 짓을 했을까? 별 거 아니라는 식으로 편지를 옆에 내팽겨쳤을까? 아니면 성규 형이 나를 좋아해주는 척만 했던 걸까? 우현은 도저히 예상할 수 없었다. 그리고 성규 집 앞까지 와서 성규를 보지 못한 것도 억울했다.
“그나저나 일단 감사해요.”
“됐어.”
“김명근 대령님 조카잖아요. 듬직한 형 둔 것 같아서.”
“됐어. 나도 김성규 그 새끼가 얼마나 잘 사나 보러 간 거니까.”
말은 딱딱하게 해도 제법 마음 씀씀이가 된 사람이다. 우현은 생각했다. 성규 형을 쓰레기라고 표현한 명수 형의 말을 듣고 분명 마음 한 켠이 무거워져야 맞는 일인데 전혀 그렇지 않았다. 오히려 가벼운 발걸음. 성규 형에게 그래도 제 뜻을 전달할 수 있어서 그랬을까? 이제 명수의 차가운 말투에 상처를 받더라도 그것이 제 비수를 꽂는 만큼 아파오지는 않았다.
*
성규는 멍하니 저를 등지고 앞으로 걸어 나가는 명수와 우현의 뒷모습을 보면서 계속 서 있었다. 저 멀리, 더 멀리 갈 때까지도 성규의 발은 도무지 걸음할 생각을 하지 않는 듯 했다. 아니, 떨어지질 않았다. 오히려 가만히 있는 발에 비해 온 몸이 덜덜 떨리는 듯 했다. 혹시나 우현이가 들었을까? 내가 찢은 쪽지 명수가 우현이에게 말했을까? 그러고도 남을 놈이라는 것을 알았기에 성규는 그 후가 너무 두려웠다.
“성규 군 무슨 일 있나?”
화들짝 놀라서는 옆을 보자 이상민 대령이 떡 하니 서서는 성규를 걱정하는 말투로 쳐다보며 뒷짐을 지고 있었다. 아버지, 어머니란 존재가 어떤 인물인지는 몰라도 성규는 상민을 보자마자 안심하기 시작하면서 인사를 꾸벅했다. 어쩌면 아버지라는 게 이런 것일까? 성규는 생각했다.
“아, 아뇨.”
“학교 측으로부터 네 건강검진 자료는 다 받았을거다. 간호병들이 있는 곳으로 가서 얘기 나눠봐.”
상민의 말에 성규는 끄덕거리고서는 간호병이 있는 길로 향했다. 우연찮게 이상민 대령이 가는 길과 같은 방향이라 거의 쫓아가는 행태로 걸음을 옮겼다. 그 와중 떠오르는 생각에 성규는 입을 열었다.
“이상민 대령님은…”
“음?”
“왜, 저를 이렇게 챙겨주십니까? 저, 저보다 뛰어난 인물들이 세상에 널렸을텐데요.”
이상민 대령의 호탕한 웃음에 성규는 약간 실례되는 말을 한 건가 싶어서 주먹을 쥔 채로 헛기침을 내뱉었다. 평소 때 같았으면 상민이 웃기 시작함과 동시에 성규도 같이 따라 웃었을 법했는데 오늘은 꽤나 진지한 모습을 보이자 상민 대령도 뻘쭘히 웃음을 거두었다. 고민을 하는 듯 하면서 걸음을 살짝 멈추었다가 다시 걸어서 앞으로 향하는 상민을 성규는 다시 쫓아나섰다.
“성규 군은 본래 사관학교에서 입학생을 받아주는 시기가 잘 안 맞아 떨어져서 하나하나 개인적으로 알려줘야하는 점도 있고…”
“아…”
그것뿐인건가. 성규는 약간은 실망한 내색을 감추지 못하고 고개를 푹 숙여버렸다. 상민은 고개를 푹 숙인 성규를 보면서 꽤나 예리한 놈이 틀림없다는 생각을 했다. 하얗고 찢어진 눈이 정말이지 야한 흉내를 내는 어린 아이들과는 달리 타고난 형태가 마음에 들었을 뿐. 상민은 성규를 계속 자신의 조력자로 둘 생각이었다. 저 정도 어린 나이에 저만치의 명석한 두뇌를 가지고 있는 놈이라면 충분했다. 지금 권력주의에 빠져 허우적대는 김명근보다는 백 배 낫다고 생각했으니까.
“아들 같아서.”
성규는 푹 숙이고 있던 고개를 빠르게 올려내면서 크게 뜬 눈으로 상민을 쳐다보았다. 아들이라는 말 정말 처음듣는데 내가 이상민 대령님을 아버지 같다고 느낀 것처럼 이상민 대령님도 나를 아들처럼 대해주신 것일까? 성규는 그 떨림에 약간 다리에 힘이 풀리려던 것을 힘을 주어서 이상민 대령님을 쳐다보았다. 이제는 다른 길로 서로 헤어져야 하는 시간이었다. 이미 서로의 마음을 알아버렸기 때문이었을까? 아버지라는 존재와 헤어지는 기분. 이런 것일까? 언젠가 당연히 만날 것이지만 지금 당장은 아쉬운 그런 거?
성규는 터벅터벅 걸어나갔다. 그리고 간호병들이 있을 곳에 도착하자 동네의 큰 병원 못지 않게 거대한 건물을 옥상 위까지 고개를 들어 올려다 보면서 훑어보았다. 빨리 할 거 해야지. 성규는 발걸음을 빠르고 씩씩하게 저벅저벅 걸어내면서 간호병 총 관리 사무소의 손잡이를 콱 돌려내었다.
봐서는 안 될 장면이었다. 분명 내가 기억하는 것이 맞다면 옷을 다 벗고 있는, 아니 벗겨지고 있는 한 남자와 그 위에 올라타서는 씨익 웃고 있는 남자. 그리고 그 중 한 명은 서인국 훈련병이 확실했다. 하얀 간호병의 군복과 어두침침한 초록빛의 훈련병 군복의 분위기는 이루 말로 설명할 수 없었다. 순간 그들의 행동이 멈춰지고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이, 씨발…”
서인국 훈련병은 바지춤을 추스리고서는 제 쪽으로 뛰어오는 것이 아마도 자신을 잡으러 오는 듯 싶었다. 성규는 놀라서 옷이 벗겨지고 있었던 그 남자를 쳐다보다가 놀란 눈으로 인국을 응시하고 바로 뒤로 돌아서 냅다 뛰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