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한 시 사십오분 걸려온 전화 한 통에 모자 푹 눌러쓰고 나가면,
"성이름 왔어?" 개자식 하나가 뚱한 얼굴로 앉아있다. 그 개자식 이름은 김선호. 삼년째 친구라는 타이틀 하나 거머쥐고 그 애 곁에 꼭 붙어있지만, 새벽에 걸려온 예고없는 전화 한 통에도 바로 뛰쳐나갈 정도로 나는 그 애를. 단 한 순간도 친구라고 생각한 적이 없다.
"미리 사왔는데. 네가 좋아하는 걸루." 바닥에 놓여있던 하얀 편의점 봉투를 들어 흔드는 김선호를 빤히 내다보다 옆에 털썩 앉았다. 어떤 일로 불렀을지 뻔히 알고있으면서도 그 애의 눈치를 살살 보다, 용건을 묻는다. "이 시간에 왜 불렀는데?" 선호가 내미는 봉투 안 맥주 한 캔을 꺼내며 물음을 던지면 선호는 입을 비죽이며 답한다.
"차였어, 나. 방금 은정이한테 시원하게 차이고 왔어 이름아." "근데 뭐, 어쩌라고."
"어쩌라고... 는 좀 심하지 않나? 친구한테." 거봐, 이 개자식은 은근히 친구라는 벽을 두기를 참 좋아한다.
"내가 이 시간에 위로 받을 친구가 또 있겠냐. 나 좀 위로해줘어."
똥강아지같은 얼굴로 바라보는 김선호를 보다 생각했다. 얘가... 위로 받을 입장인가?
"네가 위로받을 입장은 아니지 않나? 아무리 걔가 널 찼다지만, 차일 짓 한 건 너 아냐?" 그래, 김선호가 백타 잘못한 입장이다. 왜냐면 김선호의 일과에는 내가 꼭 있기 마련이니까.김선호가 애인이랑 다툼이 있을 때마다, 김선호가 애인이랑 갈라설 때마다 발 동동 굴리는 것은 언제나 내 몫이었다. 이별 사유에 내가 있음이 분명하니까. 한 번은 그런 말도 했다. 나같아도 너랑 헤어지겠다, 라고. 물론 구라였다. 나라면 안 헤어지지. 이게 웬 떡이야 하고 덥썩 잡지. 근데 내가 그 여친이었다면 헤어졌겠다는 소리다. 뭐 하고 있냐하면 이름이랑 밥 먹고 있다, 어디냐고하면 이름이랑 만화방 와있다. 헤어질만도 하지. 최악이잖아. 계속해서 여사친 이름 불러대는 거. 그 중에 더 최악인 건, 그 여사친이 제 남친 좋아하고 있다는 거. 머리채 잡고 걷어차도 할 말이 없다 이거지. 근데 그걸 김선호만 모른다. 내가 늘 이별 사유임을, 얘만 모른다. "야 그럼, 자꾸 뭐만 했다하면 너 잡고 늘어지는데 가만 있어? 하도 어이없어서라도 뭐라 해야지. 너랑 나는 그냥 친한," "...너가. 너가 뭐만 했다하면 나 찾으니까 그렇지. 어떤 사람이 그런 걸 좋아하겠어? 누가봐도 네가 잘못했어. 영 아쉬우면 가서 빌면서 말해. 이제 성이름이랑 안 놀겠다고.""싫은데. 나 너랑 계속 놀 건데." 진짜, 김선호는... 개자식이다. 몇 달 전부터 생각해왔던 일이 있다. 김선호랑 친구 관두기. 김선호가 새 애인을 만들 때부터 그런 생각을 하기 시작했는데, 이제서야 실행에 옮길 준비를 마쳤다. 이제 진짜 그만해야겠다. 얘랑 친구같은 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