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빈이는 관노였어. 태생이 노비는 아니었고 머리를 틀어올릴 때까지는 양반집 막내 도련님으로 귀하게 컸지. 근데 청렴결백하던 아버지를 아니꼬워하던 다른 세력들이 수빈이의 가문을 몰아간 거야. 역모를 꾀했다고. 그래서 아버지와 형은 바로 목이 잘렸고 어머니는 충격으로 돌아가셨어. 하나 남은 누나는 기생으로 팔려갔고 수빈은 관노로 신분이 내려가게 된 거야. 태생이 고왔던 도련님이 무슨 일이나 제대로 하겠어? 안 그래도 관아로 잡혀올 때 돌팔매질을 맞으며 왔는데 하물며 관아는 어땠겠냐고. 몸을 쓰는 일은 그렇게 고되지 않았어. 해가 저물어 갈수록 몸에 익었거든. 문제는 관아에서 생기는 따돌림이었지. 매일 맞고 또 맞고 밥도 뺏기고 하는 일 중에서 제일 더럽고 힘든 일을 맡아하고. 그나마 수빈이를 안타깝게 여겼던 기생들이 행수들의 눈을 피해 가끔씩 떡고물이라도 몰래 챙겨줬기에 망정이지. 관아에서도 수빈이 골칫거리였어. 일은 서툰 데다 맨날 어디 쥐어터져와서 휘청휘청거리니까. 근데 이 고을로 오신 대감께서 집에 부릴 종이 부족하신가 봐. 관아에서 쓸만한 노비들을 사겠다고 한 거야. 관아에서는 넙죽 꽤 쓸만한 여종들 사이에 수빈이를 끼워 팔았어. 그렇게 수빈은 한양에서 이 고을로 오신 대감님의 집으로 가게 됐지. 근데 생각보다 사노비가 훨씬 할만하더라? 일단 수빈에 대해 아는 사람이 없으니 더 괴롭힐 사람이 없는 거야. 거기서부터 숨통이 트였지. 사노비들은 어릴 때부터 이 집에서 크고 자랐으니 서로 끈끈하기도 해서 분위기도 좋았고. 대감마님 네도 화목한 분위기여서 문제가 아무것도 없었어. 그나마 문제라면 이 집 아기씨가 자꾸 수빈을 불러와서 마당을 쓸게 시킨다는 거? 방금 석쇠가 다 쓸고 간 자린데 허구한 날 불러다 마당을 손가락을 대충 짚으며 여기 좀 쓸어봐라- 시켰거든. 수빈은 그냥 고개 한 번 꾸벅하고 묵묵히 쓸었지. 주인님이 시키니까 시키는 데로 해야지 뭐 어쩌겠어. 근데 그 마당 쓸기가 점점 달라지는 거 있지. 마당을 쓸다 아기씨가 계시는 대청마루를 닦다 이제는 아기씨가 상 앞에 앉혀놓고 글을 읽게 시켰거든. 수빈이가 전에 노비들에게 한자로 이름을 써주는 걸 들킨 뒤로 어린애들이 읽는 소학을 가져와 수빈의 앞에 턱 펼쳤어. 결국 수빈이는 매일매일 한 장씩 아기씨 앞에서 소학을 읽어야 했어. 이미 수빈이는 어렸을 때 다 뗀 건데. 근데 자꾸 아기씨 옆에 있는 여자애한테 눈이 가는 거 있지? 아기씨 뒤에 늘 앉아있는 몸집이 작은 그 애. 아기씨는 걔를 '단이'라고 불렀어. 그래 그 단이. 아마 그 소학은 단이가 들어주길 바라며 읽은 게 아니었나 몰라.
소학을 읽다 간간이 수빈하고 눈이 마주치면 이젠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어. 아씨가 말은 안 하시지만 이 사내한테 관심이 있으신 게 분명했거든. 아니면 이렇게 오래 붙잡아 놓을 일이 없잖아? 아씨는 눈을 감고 이 사내의 목소리를 들었어. 적당히 낮은 목소리. 듣기 좋았어. 처음에는 바느질거리라도 들고 와서 아씨 옆에서 하곤 했는데 이제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어. 이 사내가 입을 열기 시작하면 그 목소리에 집중하느라 도저히 뭔가를 할 수가 없었거든. 소학이라면 단이도 어렸을 때 읽었던 것이었는데 말이지. 그 사내가 소학을 잔잔히 읽기 시작하면 노비가 되기 전의 일들이 마구 떠올랐어. 여우털로 만든 볼끼를 사주신 아버지와 값비싼 옥으로 된 비녀를 하고 있는 어머니 그리고 아버지가 주신 약과를 볼이 빵빵하도록 밀어 넣는 동생들. 이젠 얼굴 한 번 다시 보기 힘들어. 그리고 그렇게 아득해져. 가장 아름다웠던 때를 떠올리다 수빈과 눈이 마주치면 어쩔 줄 몰라 그대로 눈을 계속 맞추고 있다 얼굴이 화끈거리는 걸 느끼면서 고개를 푹 숙였어. 너무 바보 같았어. 어느 날 아씨의 다과 상을 올리러 부엌에 들어갔는데 아주머니들이 모여 앉아 호들갑을 떨고 있는 거야.
세상에 글쎄 난 그렇게 훤칠한 총각은 또 처음이라니까~?/그럼 광주댁이 홀랑 잡아먹던가 우리 광주댁이 뭐 어때서/아이고 성님아! 그게 되겠소? 내가 딸린 애가 몇인디/그러면 우짠디야. 다른 집 계집이 낚아채기 전에 우리가 잡아둬야 할 것인디./그래 자네가 오랜만에 맞는 말을 했네. 힘도 잘 쓰고 또 얼마나 친절해. 계속 데리고 있어야 되겄어./어야 단이 왔냐~ 왔으면 왔다고 말을 허지. /아이구 다리 아프게 왜 거서 서가 있어. 쪼매 쉬었다 가야~
단이가 아니라고 손을 휘저었지만 아주머니들이 자리를 만들어 단이를 앉혔어.
쪼매 늦게 가도 암도 모르니께 앉아서 얘기도 좀 듣고 숨 좀 돌려./아니 근데 단이야 정말 우리 아씨가 그 총각한테 홀딱 반했다는 말이 사실이냐?/성님은 고걸 또 우째 알고 계신당가?/아 이 사람아 아씨 눈을 못 봤는가. 그냥 호올딱 빠져서 정신을 못 차리시는 것 같은 눈이었어./이러다 우리 아씨 그 총각이랑 손잡고 도망가는 거 아니여~?
아주머니들은 다들 웃는데 단이만 혼자 심란했어. 단이는 사랑이 처음이란 말이야. 그래서 정말 속으로 아씨가 그 사내랑 도망가 버리면 어쩌나 하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누가 부엌문을 열었어. 아. 그 사내다.
수빈은 아주머니들이 떠드는 소리에 부엌문을 열지 않고 가만히 들었어. 땔감이 부족하다는 얘기를 듣고 나무를 이만큼이나 이고 왔는데 무거운 줄 모르고 계속 그 얘기를 들었어. 단이도 같이 있다는 걸 듣고는 긴장까지 했지. 근데 점점 얘기가 듣다 보니 이상한 거야. 수빈은 단 한 번도 아기씨가 본인을 연모하기 때문에 이런 행동을 하는 건지 몰랐거든. 사람이 괴롭히는 경우도 여러 가지니까 그냥 또 괴롭히는 거구나 하고 말았지. 수빈이는 아차 싶었어. 단이가 오해하면 어쩌지? 아기씨랑 손잡고 도망 간다니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게다가 아기씨는 이미 정혼자도 있는 모양이던데. 그래서 문을 밀고 들어갔어. 아주머니들은 능청스럽게 땔감을 보고 좋아라 손뼉을 쳤고 단이만 어찌할 줄을 모르고 우왕좌왕 거리다 다과 상을 찾아 들고 급하게 부엌을 나갔어. 수빈은 이고 온 땔감을 바로 내려놓고 단이 뒤를 따라갔어. 오해하게 만들기 싫어.
단이는 또다시 고개를 푹 숙였어. 설마 다 들은 건가? 내가 무슨 말을 했더라? 아으으... 하필 그때 아주머니들하고 같이 앉아있어서... 그렇게 자책 아닌 자책을 하며 아씨의 방으로 갔어. 그런데 단이가 들고 있던 다과 상을 누군가가 힘을 주어 가져갔어. 단이가 고개를 급하게 들자 그 사내가 단이를 걱정스럽게 쳐다보고 있었어. 어디 아프십니까? 단이가 다시 열이 오르는 볼 숨기려 다시 고개를 떨어뜨리고 다과 상을 가져오려 손을 뻗었어. 아니에요... 근데 다과 상이 안 잡히는 거 있지. 상도 무거운데 제가 아씨 방 앞까지만 들어드려도 되나요? 아 진짜 미치겠다. 단이가 입술을 꾹 깨물고 고개만 끄덕였어. 수빈이 그 위에서 웃고 있는 것도 모르고. 마당을 가로지르는데 수빈이 대뜸 그러는 거야. 자기는 이 집에서 쫓겨나지 않는 이상 나갈 생각이 없다고. 그 말을 들은 단이가 눈치챘어. 아까 한 말을 들었구나. 단이가 치마를 움켜쥐었어.
그... 아주머니들이 다 당신을 좋게 여기고 있어서 한 말이니 굳이 마음 쓰실 필요 없어요... 어차피 다 농인데요./당신도 저를 그리 여기십니까?/예?/저는 당신을 그리 여기는 것 같습니다.
단이가 어안이 벙벙한 채로 수빈을 올려봤어. 이제 벌써 아씨의 방 앞이야. 수빈이 단이에게 다과 상을 살살 건넸어. 조심히 들어가세요. 수빈이 이 말을 남기고 자리를 떴어. 단이는 다과 상을 아씨의 방에 들여놓고 구석에 앉아 아까 그 사내가 한 말을 다시 되짚었어.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이야. 넋을 놓고 있는 단이를 아씨가 불렀어. 얘 단이야. 오라버니께서 나에게 보내신 환인데 의원의 말로는 이게 내 몸에는 맞지 않는다고 하더구나. 필요한 아이들한테 나눠주렴. 단이는 여전히 정신이 팔린 채로 아씨에게서 환을 받아 갔어. 아씨는 다과 상을 물리려다 단이의 상태가 이상하다는 걸 알아챘어. 단이가 아파 보이길래 그냥 일찍 들어가 쉬라고 했지. 단이는 그 환을 꼭 받아들고 아씨의 방을 나왔어. 도라지 환을 꼭 쥔 손을 콩콩 뛰는 심장 위에 올렸어. 단이는 그 사내를 찾아다녔어. 누구한테 그 사내를 봤냐고 하기도 부끄러워 종종걸음을 하며 찾았지.
수빈은 뒷마당에 있었어. 사람들 눈을 피해 몰래 쉬는 중이었거든. 그걸 단이가 용케 찾아낸 거야. 단이가 쭈뼛거리면서 수빈의 앞에 오자 수빈이 벌떡 일어났어. 단이가 눈을 꾹 감고 수빈에게 도라지 환을 건넸어. 아씨가 주신 도라지 환인데 도라지가 목에 좋으니... 아, 아씨가 요 근래 계속 서책을 읽으라 하셔서 목이 많이 상했을까 염려되어서... 하며 횡설수설 말을 했지. 수빈은 함박웃음을 지으며 단이가 준 환을 받았어.
처음이 많이 어려웠을 뿐이지 이제 그다음은 술술 풀렸어. 이따금씩 보이는 양반의 모습에 놀라는 단이에게 수빈은 양반이었음을 고백하고 단이도 본래는 양인이었다고 털어놓았지. 그게 공통점이 되어서 서로가 서로를 잘 이해했어. 서로를 더 잘 이해하고 그렇게 감정을 공유하고 마음도 나누고. 수빈은 대감마님의 집 밖에 따로 사는 외거노비였어. 재물도 따로 모을 수 있었고 집도 따로 있었어. 아씨의 심부름을 다녀오는 틈을 타 구경도 간 적이 있어. 그때 수빈의 집을 둘러보고 난 뒤로 단이는 집에 부족한 게 많다면서 옷이며 이불도 만들어 가져오곤 했어. 수빈은 단이의 손에 구멍이 나는 게 싫다면서 한사코 거절했지만 이미 단이가 만들어 온 걸 어째. 이제 단이가 만들어준 것만 열심히 써야지. 아주머니들 몰래 단이를 빼와서 일부로 쉬게 만들기도 하고 단이가 힘들어 보이는 날에는 단이 몫의 일은 대신해주는 날도 잦았어. 이제 대감마님 댁에서 일하는 노비들은 다 알아. 수빈이랑 단이가 그렇고 그런 사이라는걸. 다들 잘 됐다며 축하해 줬지. 단이는 누구한테 시집가려나 걱정했는데 믿을만한 총각한테 가게 돼서 잘 됐고 수빈이는 이제 이 집에 묶였으니 잘 된 일이지. 이러나저러나 아씨는 여전히 수빈에게 서책을 읽으라 시켰고 수빈은 묵묵히 따랐어. 읽어주고픈 사람이 생겼고 듣고 있으니 마다할 이유가 없었지. 수빈과 단이가 손도 잡고 입도 맞출 무렵 아씨에게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이제는 시도 때도 없이 수빈을 불렀어. 창밖을 바라보다 수빈이 지나가면 불러 세워 놓고 난감한 질문만 던졌지. 전 같았으면 어쩔 줄을 몰라 했을 것 같은데 이젠 아니야. 아기씨의 질문을 쳐내야 할 이유도 생겼고 수빈이는 이미 단이하고 약조도 했거든. 부부가 되기로 말이야. 지금은 말고 좀 나중에. 수빈은 단이한테 해주고 싶은 게 많았거든. 그러려면 돈도 좀 모아야 하고 집도 조금 더 큰 곳을 가야 할 거고. 준비를 먼저 확실하게 하고 싶었거든.
아씨가 체한 것 같다며 의원을 불렀어. 단이는 스르륵 감기려는 눈을 억지로 부릅뜨고 아씨 옆을 지켰어. 의원이 방 안으로 들어와 아씨의 맥을 짚고 약을 처방했어. 일단 임시방편으로 아씨에게 몇몇 약초를 챙겨주는데 그걸 받아들던 단이가 약초 냄새에 못 이겨 헛구역질을 하는 거 있지. 아씨는 의원에게 단이의 맥을 짚도록 시켰어. 주인 따라 너까지 체하면 어떡하냐고 농을 하던 찰나 의원이 단이의 산맥을 짚었어. 단이가 놀라서 입을 막았지. 아씨는 단이에게 축하한다는 말과 아비는 누군지 아냐고 물었어. 단이는 눈물을 닦으며 고개를 끄덕였어. 알다마다.
산에 다녀온 수빈이 급하게 단이를 찾았어. 단이는 다시 눈물을 흘리고 수빈은 단이를 안았어. 행랑아범에게 부탁해 급히 혼인을 치르고 단이가 머리를 틀었어. 머리를 올린 단이가 낯설어 한참을 말없이 바라보다 말했지. 머리를 올려도 고와. 지금은 돈이 없어 엉성하게 깎아 만든 나무 비녀를 썼지만 나중에는 꼭 단이에게 예쁜 비녀를 선물해 주리라 다짐했어. 그렇게 살림을 합칠 준비를 차근차근해 나갔어. 그리고 이제 단이가 주인댁을 떠나는 날 아씨는 단이의 손을 잡은 그 사내를 보고 배신감에 치를 떨었어. 등잔 밑이 어둡다더니 딱 그 꼴이 난 거잖아. 산달이 다가온 단이가 일을 쉴 수밖에 없었고 아씨는 이참에 저를 시중들던 아이를 아예 바꿔버렸어. 그리고 이 일을 오라버니에게 달려가 털어놓았지. 절절한 목소리와 눈물까지 더하니 이렇게 비련 할 수가 없더라. 같이 화를 내준 오라버니 방을 나오면서 아씨는 훤히 뜬 달을 보며 두 손을 모았어. 저를 농락한 단이 그년만은 꼭 제 눈앞에서 죽게 해주시길.
수빈이 행랑아범의 도움을 받아 새끼줄에 숯과 고추를 번갈아 넣고 꼬았어. 건강한 첫아이가 태어났거든. 울음소리가 어찌나 우렁차던지 누가 봐도 아들이었지. 행랑아범이 새끼줄을 꼬는 수빈의 어깨를 두드렸어. 수빈은 좋은지 행복하게 웃었지. 양반 출신이었기에 성이 있었던 수빈이 제 아이에게도 같은 성을 물려줬어. 이헌아- 최이헌- 수빈이 자는 아이의 위에서 아이의 얼굴을 조심스럽게 만지며 한참을 말했어. 이헌이는 수빈이를 닮은 건지 날 때부터 컸어. 그래서 단이가 출산을 할 때 정말 힘들었지. 그렇게 무럭무럭 크는 아이를 위해서라도 돈을 벌어와 뭐라도 입어 넣어줘야 할 텐데 갑자기 벌이가 예전 같지 않아졌어. 단이도 마찬가지였어. 아씨가 막은 탓이었지. 그래도 둘은 본인 입으로 들어가는 것 없이 전부 이헌이의 배를 채워줬어. 이제 부엌에서 일하게 된 단이가 남은 음식이 있으면 바리바리 싸 들고 와서 다행이었지. 이헌이가 단이의 손을 잡고 대감마님의 집을 넘나들기 시작할 무렵 이헌이에게 동생이 생겼어. 이헌이에 비해 수월하게 둘째를 품에 안은 단이가 본인의 옆에 앉은 수빈이와 이헌이의 얼굴을 번갈아 보고 곤히 잠든 아이의 얼굴을 바라보며 웃음을 터트렸어. 분명 내 배 아파 낳은 아인데 왜 나는 하나도 안 닮은 거야? 수빈이 단이의 품에서 본인의 품으로 아이를 옮겼어. 엄마의 품이 비자 그 자리를 이헌이가 차지했고. 나도 딸은 당신을 닮을 줄 알았는데. 어머니 섭섭하게 이서야. 이번에는 수빈이 행랑아범의 도움 없이 혼자 새끼를 꽜어. 새끼줄에는 숯하고 솔잎이 번갈아 끼워져 있었어.
입이 하나 더 늘자 단이는 전보다 굶는 날이 더 많아졌어. 아이를 업고 일을 하느라 늘 허리도 아팠고. 이헌이가 의젓하게 있어줘서 다행이었지. 이서도 순한 편이라 힘들게 하지도 않았고. 수빈은 그게 마음이 아파 늘 단이의 퉁퉁 부은 다리를 주물렀어. 이렇게 고생하는 게 안쓰러워서 더 열심히 일했어. 단이가 바느질거리를 얻어 집에 일찍 돌아오는 날이면 아이들을 데리고 부러 장을 찾아가기도 했고 산을 데려가기도 했어. 단이가 조금이라도 쉬었으면 싶어서. 산에 올라가면 수빈은 두 아이를 안아 산 밑을 같이 내려봤어. 이헌이는 그 모습을 보며 우아아 하며 감탄하는 게 귀여웠고 산을 오르느라 피곤해서 이미 단잠에 빠진 이서도 귀여웠어. 그렇게 느지막이 집에 돌아가면 단이가 밥을 준비하고 있었어. 이헌이도 기운이 쭉 빠져 수빈의 품에 안겨 새근새근 자고 있었어. 단이는 수빈과 아이들을 활짝 웃으며 맞았어. 자고 있는 아이들이 사랑스러워 그 흰 볼에 입을 맞추고 수빈을 안았어. 수빈은 그렇게 단이를 안으면 단이의 뒤에 있는 비녀가 그렇게 마음에 걸렸어. 내가 얼른 좋은 걸로 바꿔줘야 하는데.
대감마님이 부산에 급하게 가야 한다는 말과 함께 그 일행에 수빈도 포함되어 있었어. 꽤 긴 일정에 수빈은 남은 식구들이 걱정돼서 차마 발을 뗄 수가 없었어. 수빈은 이헌이의 팔을 잡고 말했어. 어머니랑 이서랑 씩씩하게 잘 지내야 해. 이헌이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 단이의 뒤에 서서 훌쩍이는 이서의 볼을 부드럽게 만졌어. 어머니 말씀 잘 들어야 한다 이서야. 단이의 입에 가볍게 입을 맞추고 끌어안았어. 조금만 기다리면 금방 올게. 수빈이 집을 나서다 뒤를 돌았어. 단이, 이헌이, 이서가 서서 계속 손을 흔들고 있었어. 이헌이가 단이의 손을 꼭 잡고 크게 소리쳤어. 빨리 오셔야 해요! 수빈도 손을 흔들며 대답했어. 당연하지 어머니랑 이서를 잘 부탁한다 이헌아
이헌이도 이제 컸다고 조금씩 일을 도왔어. 수빈이 가기 전에 한 말이 이헌이에게는 사명과도 비슷했나 봐. 아버지를 따라 하겠다고 단이의 다리를 고사리 손으로 주무르기도 하고 이서를 잘 데리고 있기도 했어. 한순간에 너무 의젓해진 거야. 아버지가 떠나신지 꽤 지났을 때 이헌이는 여느 때처럼 마당을 뛰어다니며 잔심부름을 했어. 그 모습을 아씨가 딱 본거지. 아씨가 창을 열어 이헌이를 불렀어.
네 아비가 누구니?/성은 최이시구 성함은 수자 빈자 쓰세요.
이헌이의 대답에 아씨는 기가 막혔어. 그때 그 애가 너구나 싶었던 거지. 그리고 수빈이랑 너무 똑같이 생겨서 기분이 이상했거든. 내가 만약 수빈이하고 아이를 낳았다면 이렇게 생겼을까 하는 생각이 든 거야. 아씨는 생각에 잠겨있다 앞에 세워둔 이헌이에 급히 정신을 차리고 급하게 유과 몇 개를 손에 쥐여주고 돌려보냈어. 그렇게 이헌이가 꾸벅 인사를 하고 돌아가려는데 아씨가 다시 이헌이를 불렀어.
너 가족이 어떻게 돼?/아부지랑 어무니 계시구 누이가 하나 있어요./그렇구나... 나중에 네 누이를 데리고 다시 한번 오련? 누이 몫까지 유과를 줄 테니.
신이 나서 뛰어가는 이헌이를 보며 아씨는 기분이 묘했어. 내가 지 아비를 부산으로 보냈다는 걸 알면 저 아이는 어떻게 변할까. 그리고 더한 것도 할 생각이라면 아마 날 많이 미워하겠지.
이헌이는 아씨에게서 받은 유과를 어머니에게 하나 드리고 이서에게 하나 주고 남은 걸 먹었어. 그리고 정말 이서를 데리고 다시 아씨를 찾아가 이번에는 옥춘당을 잔뜩 받아왔어. 그렇게 평안하게 하루하루가 지나가나 했는데 그럴 리가 없지. 대감마님이 자리를 비운 틈을 타 도련님이 이 집에서 제일 윗사람이 됐잖아. 그래서 어느 날은 집에 기생을 잔뜩 불러서 연회를 열었는데 아니 글쎄 갑자기 이 정도 기생은 부족하다는 거야. 일부러 술에 취한 적을 하며 음식을 바쁘게 나르고 있는 단이를 잡고 끌어왔어. 흥이 나질 않으니 너라도 그 자리를 채우라면서. 단이는 당연히 안된다면서 벗어나려고 했지. 근데 그게 먹히겠어? 도련님은 처음부터 이럴 작정으로 기생들을 불러온 건데. 도련님은 본인의 누이인 아씨가 찾아와 그렇게 하소연을 하고 간 뒤로 도대체 그 단이가 누구인지 살피고 다녔어. 그리고 그 단이가 아이들을 품에 안고 웃고 있는 걸 봤을 때 심장이 저릿했지. 단이가 이미 낳은 아이는 도련님에게 아무 문제가 되지 않았어. 내 아이를 다시 낳으면 되지 뭘. 아씨는 오라비인 도련님이 단이에게 마음이 기운 걸 알아챘어. 그걸 알고 단이가 더 미웠지. 네가 내게서 전부 다 뺏어가는구나. 하면서 한탄하기도 했어. 아씨는 도련님에게 이 모든 일을 시켰어. 도련님은 아씨의 계획에 군말 없이 따랐지.
단이가 비명을 지르면서 벗어나려 몸부림을 쳤어. 도련님은 단이를 점점 더 구석으로 밀어 넣었지. 도련님이 단이에게 험하게 달려들었어. 단이는 머리가 산발이 되고 얼굴은 눈물범벅을 한 채로 빌었지만 그것도 소용없었지. 제 어미가 그런 꼴을 하고 비는 걸 본 이헌이는 꼭 잡고 있던 이서의 손을 놓았어. 이서는 오라비가 갑자기 먼저 뛰어가자 빽빽 울었지만 이헌이는 멈추지 않았어. 이헌이가 단이 앞을 막아서 도련님을 막아려 애썼어. 도련님은 그런 이헌이를 흠씬 두들겨 패고 옆으로 던졌어. 단이가 도련님을 막아서 그 옷자락을 잡고 땅에 넙죽 엎드렸어. 이헌이가 힘겹게 눈을 떴어. 이헌이의 눈앞에 사금파리가 보였어. 이헌이는 손을 덜덜 떨면서 가장 큰 조각을 들고 제 어미를 마구 짓밟는 도련님의 다리를 찔렀어. 도련님은 얼마 깊게 박히지도 않은 사금파리에 실신했고 단이는 퉁퉁 부은 채로 이헌이를 끌어안았어.
수빈은 긴 행렬 중 가장 끄트머리에 섰어. 이제 드디어 한양으로 돌아가는 길. 얼마나 걷고 걸었는지 몰라. 단이와 아이들이 걱정되어서 잠을 못 이룬 날도 셀 수 없이 많았어. 산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이제 점점 사람이 사는 집들이 보이기 시작했어. 안으로 들어가자 장이 열려있었어. 수빈이 부산에서 받았던 돈으로 예쁜 비녀 하나하고 아이들이 좋아할 만한 단 간식을 샀어. 수빈이 자꾸 뒤처지자 수빈과 같이 부산 가는 길에 오른 막돌이가 수빈을 재촉했어.
아 형님 얼른 갑시다. 이제 하루면 도착한답니다./알겠어 알겠어. 금방 가./뭘 그렇게 산 거요?/아내한테 줄 선물이랑 아이들 거. 오늘이 아들 생일이거든
수빈의 말에 막돌이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어.
형님 때문에 내가 맨날 안사람한테 구박받는 거 아니요./그럼 너도 비녀 사./제가 굳이 안 사도 집에 한가득 있습니다! 내가 진짜 억울해서. 이미 차고 넘치는 걸 뭣하러 또 산데요?/그러니까 맨날 소박맞지./아이 형님! 무슨 말씀을 그렇게 섭섭하게 하십니까!
도련님이 쓰러지자 마님이 직접 나섰어. 너무 세게 많이 맞은 터라 제대로 설 수도 없는 단이는 이헌이를 끌어안고 마당 한복판에 주저앉아있었어. 마님과 아씨는 그 둘을 내려다봤어. 포졸들이 대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와 포승줄로 단이를 꽁꽁 묶었어. 그리고 이헌이 마저 그렇게 묶으려 하기에 단이가 온몸으로 막았어. 아이 죗값은 저가 다 받을 테니 아이만은 데려가지 말아 달라고. 포졸들이 마님에게 어찌할까 여쭈었고 아씨가 대신 그리하도록 허락했다. 단이는 아씨에게 감사하다는 인사를 하고 포졸들에게 질질 끌려 관아로 갔어. 이헌이와 이서만 대문 넘어 사라지는 단이를 보며 미친 듯이 울었지. 이헌이는 어머니를 따라가려 하다 행랑아범에게 붙잡혀 돌아와야 했어.
단이는 관아로 끌려가 알 수도 없는 죄목을 받고 포대에 덮여 매질을 당했어. 얼마나 매질을 당했을까. 의식이 겨우겨우 남아 축 늘어진 단이를 포졸들이 다시 대감마님의 집으로 던져놨어. 아씨는 단이가 마당에 던져지는 것부터 다른 노비들에 의해 안으로 옮겨지는 걸 빠짐없이 지켜봤어. 이헌이는 마당에 던져진 어머니의 모습에 충격을 받은 건지 이서의 손을 꼭 잡은 채로 한 걸음도 움직이지 못했어. 그 모습을 본 이서가 옥춘당을 들고 밖으로 나갔어. 아씨가 내려오자 이헌이가 아씨를 있는 힘을 다해 노려봤어. 어린 이서를 제 작은 등 뒤로 숨겼어. 아씨가 무릎을 접어 이헌이와 눈을 마주쳤어. 그러곤 들고 왔던 옥춘당을 내밀었지. 용서해 주겠니? 이헌이가 아씨에게 옥춘당을 빼앗듯 가져가 던졌어. 이헌이는 아직도 아씨가 허락한다고 말했던 그 장면이 생생한지 온몸이 부들거리며 떨렸어. 숨이 가빠지고 이헌이의 눈에서는 다시 눈물이 흘렀어. 아씨 나빠요!!! 이 한 마디를 하고 이헌이는 이서를 데리고 단이가 있는 곳으로 데려갔어. 이헌이의 악에 받친 소리에 아씨는 꿈쩍도 할 수가 없었어. 눈만 끔뻑거리다 실소를 흘렸지. 입김이 나왔어. 날이 이리도 추운데 추운 줄도 모르고 있었구나. 아씨가 무릎을 펴면서 일어섰어. 그래. 이리 될 줄 알았다. 용서는 무슨. 아씨는 환한 달을 바라보면서 방으로 올랐어. 제 소원을 잔인하게 들어주시는 겁니까 아니면 제 소원이 잔인했던 것입니까. 저는 아직도 모르겠습니다.
단이와 유독 연이 깊었던 아주머니들이 단이의 주변을 에워싸고 간호에 힘썼어. 이헌이와 이서는 단이의 옆에서 잠들었어. 단이는 밭은 숨만 내쉬며 그 추운 겨울밤을 버텼어. 아주머니들은 단이의 열을 내려주기 위해 수건으로 단이의 몸을 닦고 또 닦았어. 그리고 아침해가 막 떴을 때 단이가 이헌이와 이서의 볼을 다 쓰다듬지도 못하고 마지막 가쁜 숨은 내뱉었어.
수빈은 집에 도착했어. 인기척도 없는 집에 방 안을 구석구석 살펴봤는데도 보이지 않았어. 저기서 울려 퍼지는 곡소리에 수빈이 불안한 생각이 스쳐 급히 대감마님의 집으로 달렸어. 수빈이 안으로 들어가자 곡소리가 점점 더 커졌어. 그 소리를 따라가자 이헌이와 이서가 아주머니들 품에 안겨 악을 쓰며 울고 있었어. 수빈을 본 아주머니들이 결국 울음을 터뜨렸어. 왜 이렇게 늦은거여... 아주머니들은 수빈이를 잡아 얼른 안으로 들여보냈어. 수빈은 천천히 곤히 자고 있는 단이에게 다가갔어. 수빈은 아무 말도 못 하고 단이의 차가운 손을 잡았어. 이러 저리 긁히고 맞아 퉁퉁 부은 손. 수빈이 단이의 얼굴을 만졌어. 얼마나 험한 꼴을 당했으면 얼굴이 이 지경이 됐을까. 수빈이 단이의 손을 꼭 잡고 눈물만 뚝뚝 흘렸어. 아직 비녀 예쁜 비녀로 바꿔주지도 못했는데.
수빈은 단이를 아이들과 자주 가던 산에 묻었어. 그리고 제삿날은 행랑아범이 수빈의 일을 빼주었어. 수빈은 감사 인사를 드리고 아이들의 손을 잡고 산을 올라 둥근 봉분 앞에 섰어. 이헌이와 이서는 그 주변을 신나게 뛰어다녔고 수빈은 잡초를 뽑아냈어. 오늘이 제삿날인데 음식이 아무것도 없었어. 단이가 없으니 아이들도 제 끼니를 챙겨 먹는 게 힘든 일이 됐거든. 수빈이 봉분에 마주 앉고 누군가와 얘기하듯 말을 꺼냈어. 제사 음식이 하나도 없어서 미안. 살아서도 그렇게 널 굶겼는데 죽어서도 이렇게 굶기네. 수빈은 한참 동안 그 봉분 앞에 앉아있었어. 해가 질 때 아이들의 손을 잡고 산을 내려왔어.
...마! 엄마! 아빠 왔어!
이헌이가 단이의 몸을 흔들어 깨웠어. 이서는 이미 아빠를 반겨주러 현관문까지 뛰어갔어. 수빈이 집에 들어오자마자 이서가 소리를 지르면서 난리가 났어. 수빈이 급하게 신발을 벗고 손을 씻고 나와서 이서를 안았어. 이헌이가 비몽사몽 한 단이의 손을 끌고 아빠한테 힘겹게 갔어. 이헌이가 단이의 손을 놓고 수빈에게 팔을 뻗었어. 수빈이 조금은 힘겹게 이헌이도 안아 올렸어.
엄마 말 잘 듣고 있었어?/응!/당연하지!
수빈의 말에 아이들이 힘찬 대답과 함께 고개를 끄덕였어. 이제 정신을 차린 단이가 그런 아이들을 보고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어. 와 너네 거짓말하지 마~ 최이헌 최이서 어제 아이스크림 먹고 싶다고 마트에서 드러누웠잖아. 단이의 말에 수빈이 아이들을 번갈아 봤어. 엄마 말이 진짜야? 눈치를 보는 아이들에 수빈이 이헌이와 이서를 차례차례 내려놨어. 아빠가 오늘 이헌이 생일이라고 맛있는 거 사 왔는데~ 수빈이 케이크를 꺼냈어. 이헌이가 손을 쭉 뻗었지만 케이크는 단이에게 넘어갔어. 엄마 말 잘 들어야지 아빠가 준다고 했는데? 이헌이와 이서가 잔뜩 울상이 돼서 부엌으로 가는 수빈이만 졸졸 따라갔어. 수빈이 아이들을 자리에 앉혔어. 축 처진 아이들에 단이가 웃음을 참으며 말했어.
아니야~ 이헌아 오늘 이헌이가 유치원에서 받아온 거 아빠 보여드려/맞다!
이헌이가 방으로 뭔갈 가지러 간 사이 이서가 몸이 배배 꼬면서 애교를 부렸어. 수빈이 이서를 보면서 결국 웃음을 터트렸어. 그때 이헌이가 자랑스럽게 상장을 보였어. 최고 어린이상-최이헌. 나 케이크 자격 있어! 이헌의 말에 수빈이 이헌이의 엉덩이를 두드렸어. 잘했어 잘했어. 장하다. 단이가 식탁에 케이크를 상자에서 꺼냈어.
우와~ 이거 진짜 장난 아니다. 어디 거야?/부산에서 유명하다길래 한 번 사봤어./아빠 부산 갔어?
이헌이의 말에 초를 꽂던 수빈이 어이가 없어 바람 빠진 웃음을 흘렸다.
아빠 부산 출장 갔다 왔잖아 이헌아/헐! 나 몰랐어!
그러거나 말거나 단이는 촛불에 불을 붙였어. 자 빨리빨리! 노래 부르자! 하나~ 둘~
생일 축하합니다 생일 축하합니다 사랑하는 최이헌 생일 축하합니다
이헌이가 촛불을 끄자 단이, 수빈이, 이서까지 손뼉을 쳤어.
생일 축하해!
수빈이 단이의 옆에 누웠어. 아이들은 수빈이가 사 온 케이크를 실컷 먹고 잠에 들었어. 단이가 눈을 감고 얘기했어. 나 아까 되게 이상한 꿈 꿨다? 수빈이 이불을 덮었어. 무슨 꿈인데? 단이가 수빈을 향해 몸을 돌렸어. 내가 죽는 꿈. 단이의 말에 수빈의 표정이 어두워졌어. 그런 얘기는 하지도 말고 듣지도 말자. 수빈의 반응에 단이가 수빈의 품을 파고 들었어. 알았어. 그냥 개꿈이다~ 하고 넘길게. 수빈이 단이를 끌어 당겼어. 그래 그렇게 넘기자.
한 번 사극을 쓰니까 멈출 수가 없네요...
도깨비의 계절이라
진짜 미쳐서 봤었는데 도깨비
아 그리고 수빈이를 굳이굳이 노비로 만든 이유는
마님이 도대체 왜 돌쇠한테 쌀밥을 줬을까?
에 대한 답을 생각해보다보니
전 아무래도 고고한 선비보다는 노비가 취향인가 싶어서
수빈이가 노비에 당첨됐어요ㅋㅋㅋㅋ
마님, 현명한 사람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