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레발
그러니까 지금 말을 건넨 이 애가 김도영이라는 것...
X됐다.
-
사건의 전말은 이러했다. 하루가 멀다하고 눈만 뜨면 공부, 밥을 먹으면서도 손에서 수능 출제 문제집을 놓지 않는(약간의 과장이다.) 고 쓰리 수험생인 나는 오늘도 어김없이 야자가 끝난 후 독서실로 와서 지긋지긋한 탐구 영역에 정신을 빼앗기기 직전이었다. 희미한 정신을 붙잡고 다시금 펜을 우악스럽게 쥐고는 집중을 하려고 했건만... 이러한 노력을 비웃기라도 하듯 무거운 눈꺼풀은 가라앉기만 했다. 이리저리 휘청대는 내 머리는 목을 가누지 못하는 아이처럼 한시도 가만히 있지 못했고 결국
쿵-
"ㅆ..."
일을 저지르고 말았다. 그 조용했던 독서실 안에서 큰 소리가 나자 몇몇 사람들이 찾으면 죽이겠다는 눈빛을 쏘아댔다. 살기... 뭐 그런 거. 내가 낸 소리가 아닌 척 펜을 잡아들고 문제집을 뚫어져라 봤지만 이마에서는 식은땀이 나기 시작했다. 들키진 않을까 눈만 굴리고 있던 그때 가림막 틈 사이로 한 장의 종이가 수줍게 나와 있었다.
'졸리면 이거 하나 드세요 ㅋㅋ'
툭-
휴지 뭉텅이가 조심스럽게 떨어졌다. 궁금증 하면 또 성이름이지. 작게 뭉쳐 있는 휴지를 조심스럽게 풀어 보니 아이셔 하나가... 아이셔? 너무 뜬금없는 게 아닌가 싶으면서도 그런 생각을 한 것이 무색해질 만큼 내 손은 아이셔를 빠르게 입으로 집어넣고 있었다.
'감사합니당 ㅠㅠ 졸았는데 덕분에 잠이 다 깨네용 ㅎㅎ!'
글씨를 꾹꾹 눌러 쓴 종이를 조심스럽게 돌려보내자 가볍게 웃는 소리가 났다. 근데 저 웃음소리 들어본 거 같은데... 착각인가.
-
그렇게 몇 시간을 공부에 영혼을 갈아 넣던 중 음료수 하나 뽑아 먹을까라는 생각이 들어 독서실 복도로 나갔다. 그래, 이때 난 너무 멍청했다. 자판기 앞으로 다가가 음료를 고르던 중 옆으로 한 인영이 드리웠다. 무심하게 레쓰비 하나를 눌러 뽑아 가는데 얼핏 봐도 잘생긴... (사실 나는 지독한 얼빠다.) 하긴 회색 후드티 모자를 뒤집어쓰고 마스크, 안경까지 쓴 상태로 빠르게 다시 들어가는 저 인영만 보고 잘생겼다고 하기엔 웃기지 않은가. 나는 이내 시선을 거두고 마시려는 음료의 버튼을 눌렀다.
근데 내가 돈을 넣었던가?
-
새벽 1 시 집으로 갈 채비를 하고 독서실 밖으로 나와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어, 왜 전화함?"
"야, 나 집 가는 길인데 버스 정류장 갈 동안만 전화해 줘."
"나 지금 승급전인데 이따 하면 안 되냐?"
"너 일주일 전에 황인준이랑 만나기로 한 약속 취소하고 여자ㅊ..."
"아 하면 되잖아 하면!"
어릴 때부터 같이 자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내 불알친구 이동혁이다. 이 자식에게 전화를 걸고 싶었던 것은 절대. never. 아니었다. 시간도 시간인지라 민폐가 아닐까 싶어 그나마 만만한 이동혁에게 걸었던 전화가 이 사건의 발단이 되게 될 줄 나라고 알았겠는가.
"야. 나 오늘 독서실에서 끝장나게 잘생길 거 같은 사람 봄."
"나 오늘 독서실 안 갔는데?"
"넌 그냥 끝장난 거고. 새벽이라 정신머리가 나간 건가..."
"...아니면 아닌 거지 그렇게까지 말할 필요는 없지 않냐?"
"미안 ㅎ."
"그럼 이제 김도영에서 갈아타는 거?"
"김도영이 거기서 왜 나와? 그리고 김도영은 그 애보다 천 배 아니 만 배는 더 잘생겼을 건데? 네 입에서 김도영에 ㄱ자만 나와도 화가 들끓는 거 보면 갈아탈 일 절대 없을 거 같은데?"
"나 오늘 너한테 뭐 잘못했냐?"
"아니 그런 건 아닌데 ㅋㅋㅋㅋ 아 잠시만 나 편의점에서 스누피 커피 우유 좀 사야ㄱ..."
말이 끝나기도 전에 가방을 더듬거리던 손에서 지갑이 떨어졌다. 약간의 짜증을 내며 지갑을 줍기 위해 돌아섰을 땐 이미 누군가의 손에 의해 지갑은 들어 올려져 있었다. 뺨에 휴대폰을 붙인 어정쩡한 포즈로 고개를 숙인 후 짧게 감사를 표하고 고개를 드는데 보이는 사람이
"감사합..."
회색후드?
"...?"
...김도영?
"조심해. 잃어버리겠다."
...그러니까 내 지갑을 주워 주고 말을 건넨 저 아이가 내 지독한 열병의 주인공이자, 짝사랑의 대상인 김도영이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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