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준희야 나 오늘 너희 집에서 쫓겨났다.
장모님이라고 부르지도 말라고 하셨는데, 장모님이라고 불렀다가 오늘 등짝 맞았어."
"이제는 막 등짝도 때리셔. 예전에는 백년손님이라고 막 그러셨잖아. 어머님 변하셨어 정말"
자기 전에 침대에 누워서 아무도 대답하지 않을 걸 알면서도 주저리 주저리 너에게 마음을 털어 놓는다.
길지 않은 시간 이었지만, 너와 함께하는 시간 동안 길들여져 버린 습관이다.
퇴근을 하고, 씻고 잠옷으로 갈아입고 안방에 들어서면서 부터 하루 동안 너에게 해줘야지 하고 모아뒀던 이야기를 하곤 했다.
하루 산 이야기, 남이 보기엔 중요하지 않은 이야기 이지만 너는 항상 응, 그랬어 하면서 내 이야기를 들어주곤 했는데,,
설, 추석 빼놓지 않고 정장 빼 입고 과일 바구니 사 들고 나는 너의 집을 찾았었다.
처음 인사 드리던 때처럼, 가득 담긴 밥을 두 세 공기를 세상 맛있게 비워 내고, 이런 일이 있었다 저런 일이 있었다 이야기도 하고,
"준희가 저번에," "준희가 지난번에," 이제는 다 과거가 되어버린 네 이야기도 실컷 하고, 여전히 예쁨 받는 사위가 되고 싶어서 애쓰고 있다.
이 관계마저 싹둑 잘라버리면, 네가 내 곁에 있었다는 걸 잊게 될까 봐 붙잡고 있다.
늘 "정서방" 하고 불러주시던 장모님이 이제 너랑 연애 때 나를 부르시던 것처럼 "재현아" 하고 부르신다. 그래서 내 명칭도 장모님에서 다시 어머님이 되었다.
“재현이 너도 새 출발해, 요즘 세상에 결혼 한번 했던 거 흠도 아니야.”
“에이, 어머님 왜그러세요.”
“왜 너 좋다는 아가씨 없어?”
“네 없어요.”
생선 살을 발라주시면서 너무 편하게 이제 나에게 새 출발을 하라고 하시는 어머님이다.
좋다는 아가씨 없다면서 허허실실 웃어 넘겨 버렸는데, 집을 나서는 길에 손에 반찬 통을 쥐어 주시면서 이제는 더 이상 올 것 없다고 하신다.
“재현아, 너 좋아하는 반찬들 담았어.”
“감사합니다 어머님”
“반찬통 가져다 주러 올 필요 없어. 이제 이렇게 매년 안 들러도 돼.”
“에이, 또 왜 그러세요.”
“그동안 참 고마웠어. 내 새끼 행복하면 그걸로 됐다 싶어서, 너희 결혼도 굳이 안 말렸어.
“……….”
“준희 보낸지가 벌써 3년이야. 이 만큼이면 충분해. 고마웠어. 여기까지만 해.”
“………….”
“앞날 창창한데, 우리 준희한테 매달려 있지 말고, 좋은 짝 찾아가.”
“……..”
“또 정신 빼놓고 운전하지 말고, 어서 가.”
"진짜 미련한 거 아는데, 나 조금만 더 붙잡고 있으면 안될까?"
운동을 하고, 열심히 일 하고, 주말에는 영화도 한편씩 꼬박꼬박 챙겨봤다.
일주일에 한번 장을 보고, 여유롭다 싶을 때는 서점에 들려서 낯선 세상 속에 빠져있기도 했다.
그렇게 숙제하듯 하나하나 꼭 해야 하는 일처럼 치열하게 살았다.
너무 힘들어하지 않기로 했으니까, 네가 없어도 무너지지 않기로 약속했으니까.
그렇게 하루하루 버텨내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하루씩만 버텨내면 괜찮다고 생각했는데, 가끔 이런 날이 있다.
디자인 팀으로 일하고 있어서, 같이 일했던 외주 업체랑 다시 일하게 되는 경우가 종종 있다.
3년 전 쯤에 한번 같이 일했던 업체가 있는데, 오랜만에 다시 손을 맞추게 됐다.
"오랜만이네요. 그동안 지내셨죠?"
"네, 정팀장님도 잘지내셨죠?"
"거의 3년만에 뵙네요."
"그렇게 됐네요 벌써. 신입으로 들어왔을 때 처음 맡은 케이스가 정팀장님이랑 진행했던 건인데, 첫시작을 잘해서 저 벌써 승진도 했어요."
"말씀만으로도 감사하네요."
"말만 아니고 진심인데, 얼핏 듣기로 2세소식 있다고 들어서 작은 선물 하나 준비했어요."
"네?......아 네, 감사합니다."
"2살이면 애기 이제 많이 커서 막 뛰어 다니겠다 그죠? "
"하하.. 뭐 그렇죠.."
"정팀장님 닮았으면, 인물도 훤하겠네, 그 연락하던 막내팀원이 아들인지 딸인지를 안알려줘서 장난감으로 샀어요 그냥."
"... 감사합니다.....회의 먼저 하시죠. 저희 오늘 결정 해야할게 많아서."
뒤에 이어진 회의 내용에는 전혀 집중하지 못했다.
회의를 마치고, 다시 사무실로 들어갔는데. 팀원이 누가봐도 미안한 얼굴을 하고 어쩔줄 몰라하고있다.
"나 잠깐 볼까요?"
"네? 네. 그게요, 팀장님"
"방에서 이야기 하죠."
"나 혼내려고 부른 아닌데"
"그게요, 팀장님.. 협업 기회 주신 거 너무 감사하다고, 팀장님한테 선물 준비하고 싶다고 하셔서, 제가 팀장님은 사적인 선물 안 받으실거라고 했거든요. 그런데.."
"그런데?"
"아이가 몇살이냐고, 계속 물어보셔서, 제가 이제 3살 다 됐을거라고..."
"아들인지 딸인지는 모른다고 그랬구나?"
"네.. 죄송합니다. 제가 말씀을 잘 드렸어야 하는데"
"아니에요, 사과할 거 없어요. "
"그래도, 죄송합니다..."
"......... 아들이에요, 우리 쑥쑥이. 아들이었어요."
".............."
"혼내려고 부른 거 아니고, 자초지종 다 들었으니까, 이제 일합시다 우리."
준희를 보내기 전에, 우리는 쑥쑥이를 떠나 보냈다.
"쑥쑥아" 하고 한번 불러 보지도 못하고, 모질게 굴기만 하다 그렇게 떠나 보냈다.
"준희야 오늘, 거래처 직원분이 쑥쑥이 선물 주셨어. 내일은 쑥쑥이 잘 있는지 한번 들려야겠다."
.
.
.
"갔는데, 아빠가 너무 무심했어서, 안 반겨주면 어떡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