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래는 늦잠으로 하루의 반을 보냈지만 오늘은 달랐다.
일찍 일어나 준비만 2시간이나 한 것 같다. 아직 더 남았으니 깔끔하게 3시간 채워야겠다. 대체 뭐가 깔끔한지 모르겠지만 겉모습은 깔끔해질 것이다.
"여주씨가 좋아할 만한 걸로 사왔어요. 점심 해주려고요."
"와 마트를 털어오셨구나.."
"마트째 가져오려는 거 간신히 참았어요."
"자제력이 참 대단해요 선호씨는. 저번에는 공장도 차린다면서요."
"그건 진행 중이에요."
"ㅋㅋㅋㅋㅋㅋㅋ뭔가 사기꾼 냄새가 나는데.."
"사기꾼??"
"내 마음 사기.. 꾼.."
"진짜 못 이기겠다. 말을 너무 예쁘게 해."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해서 순간 내가 개가 된 줄 알았다.
부드러운 그의 손길에 미소가 절로 지어지는데 뭔가 생각난 듯 손을 거두었다. 뭐야 돌려줘요.
"저희 뭐 먹을까요? 여주씨 뭐 좋아해요?"
"저 다 좋아해요. 가리는 거 없어요!"
"한식.. 양식! 중에서 어떤 거요?"
"왜 말에 악센트가 다르죠? 저는 한식이요!"
"한식? 그건 생각 못 했는데.."
"분명 보기가 2가지밖에 안 됐는데..?"
"한식이라.."
"그럼 양식..?"
"장난이에요. 한식으로 해줄게요."
골똘히 생각하는 그의 모습에 이마를 짚었다. 장난이 아니었나 본데? 너무 귀여워. 그 많은 한식 중에서 뭘 생각할지 심히 기대하는 중이다.
"저 믿어요?"
"제 자신보다 믿죠."
"좋아요 그럼 그걸로 갑시다."
분주하게 움직이는 그를 도와주려고 옆에 서는데 앉아있으라며 식탁의자에 날 앉혔다. 여기 우리 집인데..?
"도마가.."
그렇게 보조가 시작됐다. 재료로 유추를 해봤을 때 이건 백퍼 떡볶이다. 믿음직한 요리가 떡볶이인가? 믿냐고 물어보는 거 보면.
"다 됐다."
"와아아!!"
열심히 구운 차돌박이를 떡볶이 위에 올리자 명품요리가 완성됐다. 절대 가짜 리액션 아니고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리액션이다.
박수갈채까지 했건만 그는 믿지 못하는지 갸웃 거리며 날 보는 거다.
"너무 어색한데?"
"어떻게 이걸 올릴 생각을 했죠?"
"원래 차돌 파스타 하려고 했는데 이것도 괜찮죠?"
"네! 제 최애 음식으로 등극이에요."
"맛없을 수도 있어요. 맛볼래요?"
하나 찍어서 정성스럽게 호호 불어준다. 선호씨는 찐빵보다 따듯해..
와 이건 말이 안 된다. 미슐랭 3스타도 이걸 먹는다면 오열을 하며 휘파람까지 불어줄 것이다.
와 어떻게 이런 맛이..
"와 제가 먹어본 떡볶이 중에 제일 맛있어요."
"맛있어요? 다행이다."
"선호씨도 먹어봐요!"
포크로 찍어 나도 정성스럽게 불어서 줬다. 한 입 먹자마자 맛없진 않다고 말하는 뼛속까지 겸손한 선호씨다.
"많이 먹어요. 꼭꼭 씹어먹고."
집주인이 바뀐 건지 내 앞에 물 잔을 놓아주며 말하는 그에 웃음이 터졌다. 순간 자기도 놀랐는지 아니 목 막힐까 봐.. 라며 변명을 한다.
"잘 먹을게요! 선호씨도 많이 먹어요."
너무 전투적으로 먹었나? 맛있다 보니 막 퍼먹어서 머쓱해졌다. 정신 차리고 앞을 보는데 턱을 괴고 날 보는 거다.
왜 안 먹구 나만 봐요..?
"..."
"..다 먹었어요?"
"아, 죄송해요. 너무 부담스럽게 쳐다봤네.."
턱을 괴고 있던 걸 풀고 포크를 드는 걸 확인하고 이번엔 내가 쳐다봤다. 근데 그도 먹다 말고 나를 뚫어지게 보는 거다. 결국 내가 졌지, 뭐.
"왜 눈 피해?"
"..너무 잘생겼어요.."
"이제 보니까 습관인데?"
"선호씨 한정 습관인가 봐요.."
"저번에는 남자들한테 다 그런다고 했잖아요. "
"제가요?"
"와 아직도 기억 못 했어요? 그때 생각나게 시뮬레이션이라도 해줄까요?"
"...디저트 드실래요? 요즘 귤이 그렇게 맛있어요..!!"
얼마 전 엄마가 보내준 귤을 박스째 끌고 왔다. 내 노력에도 끄떡없는지 의자에 깊숙이 기대 팔짱을 끼고 날 보는 모습에 가져오던 것도 멈추고 다시 의자에 앉았다.
"..일단 기억난 게 하나 있긴 있는데요.."
"여기서 다른 얘기 나오지? 그럼 나 바로 집에 가요."
"제가 그네를 탄 건 기억이 나거든요?"
"그래요. 그걸 잊을 순 없을 거예요. 어찌나 신나게 타던지."
"철봉도 매달렸던 것 같은데.. 그리고.."
"그리고?"
"그 후부터 기억이 없어요."
"그래요. 차라리 잊는 게 낫지. 다 잊어요. 새로 시작하면 되지."
"그렇지만.. 선호씨와 함께한 시간을 잊을 수는 없는걸요..?"
"잊어놓고 말은 잘해."
그러게. 잊었네. 귤을 마저 끌고 와 하나를 슬그머니 건네니 그제야 웃는 그다. 그래 난 그가 웃는 걸 보기 위해 세상을 사는 느낌이야.
**
밥 먹고 귤도 먹고 그가 사 온 케이크도 먹고 이것저것 먹기만 했다.
내가 집데이트 로망이 뭐가 있었더라. 맞다, 같이 영화 보기.
"저희 영화 볼래요?"
"좋아요. 뭐 볼까요?"
난 다 계획이 있었다. 말은 영화라고 해놓고 휴대폰을 티비와 연결해 넷플릭스를 틀었다.
요즘 이 드라마가 그렇게 무섭대.
"이거요??"
"무서운 거 못 봐요?"
"ㅇ, 아예 못보는 건 아니구.."
거짓말 못하는구나. 뒤로 가기를 누르려는데 그가 내 팔을 잡고 막더니 화면을 꾹 눌렀다. 익숙한 로고와 함께 드라마가 시작됐다.
"오..!"
은근슬쩍 꼭 붙어 무서운 척 쿠션을 꼭 쥐며 난리를 치는데 문제는 그도 같이 난리다. 마치 드라마 속 주인공처럼 놀라서 웃음이 터졌다.
손으로 그의 눈을 가려주는데 급 진지하게 자기 진짜 잘 본다며 화면을 뚫어져라 보는 거다.
"...와! 저건 반칙이지..!!"
진짜 반칙이다. 놀라는 것도 귀여운 거 반칙.
갑자기 튀어나온 괴물에 펄쩍 뛰며 놀란 그는 민망했는지 연신 헛기침을 했다.
그래도 꾸역꾸역 잘 보네. 절대 눈을 가리거나, 감지 않고 놀라면서도 화면은 뚫어지게 응시했다.
[사장님 오늘 뭐해요?]
[할 일 없으면 저랑 만날래요?]
[답장 없으면 만나는 걸로 알게요]
야속하다, 야속해.
난 왜 휴대폰으로 연결했을까.. 왜 바보 같은 짓을 해버린 걸까. 그는 화면을 정지시켜놓고 나를 보았다.
"와 저희 사귀는 거 재욱이는 몰라요?"
"아니 그게.. 직접적으로 말하면 애가 상처받을 것 같아서."
"상처요? 왜요?"
".. 사귀자마자 바로 말했어야 했는데 뒤늦게 말하면 백퍼 삐져요..!!"
되지도 않는 변명을 해보았지만 그는 생각보다 단순한지 아-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이다.
"일단 얼른 답장해요."
"아, 네..!"
안 보는 척 슬금슬금 이쪽을 보는 그에게 가까이 붙어 답장을 보냈다. 오늘 바쁘다고 월요일에 보자는 말만 남기니 만족한 듯했다.
다시 드라마나 보자..
[난 진짜 회생도 안되는 쓰레기야. 그를 못 본 지 며칠째.. 연락하기엔 내가 너무 트레쉬라고..]
[내가 그러고도 인간이냐? 난 살아갈 가치도 없어 난 밥도 먹으면 안 돼 물도 마시면 안 돼]
[거 죽기 딱 좋은 날씨네]
이거 완벽한 타인이야? 친구의 톡을 보며 당장이라도 창문 열고 뛰어내리고 싶었다.
다 읽기도 전에 넘어가서 그런지 그걸 본 표정은 경악 그 자체였다. 그도 그럴 것이 난 진짜 회생도 안되는 쓰레기야, 내가 그러고도 인간이냐, 화룡점정으로 거 죽기 딱 좋은 날씨네까지.
친구한테 가봐야 하는 거 아니냐며 하도 걱정 어린 눈으로 보기에 괜찮다는 듯 말해줬다.
"심각해 보여도 별거 아니에요. 워낙 말투가 세요."
"네? 엄청 심각해 보이는데..?"
"안되겠다! 저희 이제 뭐 할까요? 드라마 볼 맛이 다 떨어져 버렸어요..!"
티비를 끄고 다음 집데이트 로망을 떠올려봤다.
하 밖에서 뛰어놀아야 하는데 이게 뭐냐고. 첫 데이트인데 집데이트라니 너무 정적이잖아.
"제가 뭐 사 왔는지 알면 깜짝 놀랄걸요?"
"뭘까..? 저 깜짝 놀랄 준비됐어요!!"
"짠."
내 눈앞에 나타난 1000피스 퍼즐은 누가 봐도 놀랄만했다. 멋진 집데이트를 즐기려나 본데?
찐으로 놀란 내 반응을 보며 뿌듯하게 비늘을 뜯는 그다. 너무 즐거워 보여서 나까지 즐거워져.
"이거 다 하려면 며칠 동안 밤 새워야겠는데요?"
"그래서 사 왔어요."
"..잠시만요. 저 1000피스 더 사 올게요."
이번 주말은 그와 오붓하게 퍼즐이나 하며 보내야겠네.
**
"숨 막혀요.."
"아직 이거밖에 못 했어요 우리..?"
"모양이 왜 이렇게 기괴할까요? 뭔가 잘못됐나?"
"처음부터 다시 할까요?"
벌써 해는 넘어갔고 저녁시간을 훌쩍 넘겨버렸다.
퍼즐에 눈 돌아가서 누가 먼저 저녁 얘기를 하나 내기라도 할 참이었다.
"밥 먹고 할까요? 이 정도면 야식인데?"
"저 때문에 못 먹은 치킨 시켜 먹을까요? 그거 딱 기억났어요 지금."
"먹을 거 때문에 생각난 거죠?"
"아니요. 그날의 기억이 떠올라서 치킨이 생각난 거예요. 진짜로요."
"알았어요. 여주씨가 하고 싶은 거 다 해요, 우리."
"우리..?"
"잊었나 본데 저희 사귀어요. 알죠?"
"실감이 안 나요.."
실감이라도 시켜주듯 내 손을 잡고 깍지를 꼈다. 난 별거 아니라는 듯 연기를 시전한다. 약해. 약해.
하지만 내 심장 죽어, 죽어.
"왜 그런 표정이 나오지?"
"퍼즐이나 합시다."
"와 지금 해보자는 거지?"
아무래도 말만 잘하는 스타일인 것 같다. 손깍지에서 진도가 안 나가요.
분명 말은 그렇게 해놓고 어..? 어!? 지금 어!? 하며 언성만 높이다 결국 퍼즐로 시선을 옮겼다.
"퍼즐한테 지금 해보자는 거였어요?"
"아, 아니 이게 되게 어렵네. 여주씨 얼굴만 보면 아무 것도 못 하겠어요."
"왜요? 왜 그러는데요?"
심장 터질 것 같은 걸 간신히 참으며 다가가는데 그는 멀리 날아가기라도 하려는 건지 점점 멀어졌다.
그래 퍼즐이나 하자. 아니다, 치킨이나 시키자.
치킨을 시키고 다시 퍼즐을 맞추었다. 같은 피스를 주워 손이 잡혔는데 우리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오바하며 손을 놓아버렸다. 그래 나도 어쩔 수 없는 약한 심장이야..
사귀는 사이에 손 스친 거 하나로 이러는 게 말이 되냐고. 지금이 조선시대도 아니고.
"와 요즘 심장이 많이 약해졌나 봐요.."
"저는 하나도 안 놀랐어요. 진짜예요."
"엄청 놀란 것 같은데요? 눈동자에 초점이 없는데?"
"퍼즐 때문에 그래요. 집중해서."
변명하는 거 너무 귀 여 워
딩동♪
다시 말하지만 여긴 우리 집이다. 그가 벌떡 일어나 치킨을 받아왔고 난 우리가 동거를 하고 있나 착각이 들 정도였다.
이렇게 그냥 결혼해버릴까. 너무 좋은데?
"와 선호씨랑 두 끼를 함께하다니 너무 좋네요.."
"저희 세끼 먹어야 돼요. 내일 아침까지."
"약속 지켜요."
"맞다 주말 내내 있으려면 6끼 먹어야겠다."
"가면 가만 안 둬."
"보통 몇 시에 자요?"
"그 틈을 타 도망가려고요?"
"들켰네."
그렇게 마주 앉아 치킨 뜯기가 시작됐다. 서로 닭다리 양보하겠다고 싸우는 통에 결국 사이좋게 하나씩 나눠먹었다. 또 날개로 싸우다가 마찬가지로 하나씩 먹은 게 레전드.
치킨에 다리와 날개가 2개씩 있는 이유는 양보하다가 사이좋게 하나씩 먹으라고 있는 걸 거야. 절대 닭의 다리와 날개가 2개씩 있어서 그런 게 아니야.
"칠칠맞게 다 묻히고 먹네."
양념 누가 시켰냐. 잘했어. 휴지를 들어 내 입 주위를 조심스럽게 닦아준 그에 민망해져 바닥만 바라봤다.
이 고요한 곳에서 가까이 붙어있으니까 되게 묘하네..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다 닦았다며 휴지를 내려놓은 그였다.
이렇게 다정한 남자 어디 없어. 있어도 안 궁금해. 선호씨가 유일해.
"저도 묻었어요?"
"너무 깔끔하네요? 좀 묻히고 먹지.."
"어이쿠 양념이 묻어버렸네. 이걸 어쩌나."
입술을 내민 그에 의해 벽에 머리라도 박을 뻔했다.
진짜 여우가 따로 없다.
"휴지가 없네."
"많은데?"
"역시 재미없어 선호씨는.."
"왜요? 뭔데? 나 뭐 잘못했어요?"
"입술로 닦아주려고 했는데..!"
그의 뒤로 숨겨진 휴지에 땅을 치면서 웃었다. 웃던 걸 멈추고 손에 들고 있던 치킨을 마저 뜯는데 날 빤히 본다.
또 나 먹는 거 구경하나..?
"오, 왜요?"
"휴지 숨겨줬는데 왜 먹기만 해요."
"진심이었어요..?"
"설마 농담이에요?"
"..아 잠시만요."
농담이라기보단 내가 해낼 수 있을지 모르겠다. 선호씨 한정 약한 심장인 나는 입술 박치기조차 용기가 필요했다.
"됐어, 됐어. 엎어."
여기가 도박장이야? 엎긴 뭘 엎어? 그렇지만 선호씨.. 나 정말 용기가 안 나.. 지금 한 4km를 달리기 한 것보다 더 심장이 뛰어..
"선호씨도 못하면서."
"못 해? 뭘 못해? 나 할 수 있지."
"해봐요 그럼."
드디어 그와의 첫 키스냐고..!!
*암호닉*
츄피카님♥
여러분 저 암호닉 받으려구요!! 댓글로 신청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당
이렇게 끊다가 독자륌들에게 돌 맞는 건 아니겠지..? 그치만 끊을 타이밍을 못찾겠다구욧..!
맞다 요즘 정주행 많이 하시던데 정말 사랑합니다..
바로 본편 보시는 분들도 사랑하구요.. 댓글도 사랑이구.. 독자륌들도 사랑이구.. 모두가 사랑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