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서, 학교는 좀 괜찮아?"
눈을 뜨자마자 입에 밥을 쑤셔넣는 나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김석진이 난데없이 질문을 한다. 그것도 아주 난감한 질문.
"............그냥 그렇지 뭐."
그 짧은 찰나에 이걸 말 해, 말아 고민하다 그냥 말 하지 않기로 했다. 망할 자식.....
"교무실에 선생님 누구 계시는데? 학생부장 선생님이야 너네 아버님 친구니까 잘 알거고."
"음. 이름을 아직 잘 몰라서요. 국어 D 영어 B 사회 A 역사 A 선생님 계시는건 확실해요."
이번엔 우리 학교 옆의 여고에서 상담사로 일하는 오빠의 여자친구가 방심한 타이밍에 공격을 한다. 아니 이 사람들 아침부터 왜 이래...
"모르겠다. 과목 구분은 매 년 바껴서... 아 맞다. 내 기억으로는 이번 년 여고로 넘어올때 1학년에 윤기 쌤 있었던 거 같은데."
"컥....케흡."
결국 잘만 넘어가던 밥풀이 목구멍에서 딱!하고 걸려버렸다. 그 이름 민윤기 석 자 때문에. 절대로 좋아서 그런게 아니라는 건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일거다. 아니, 아니지. 지금 내 앞에 있는 예비 신혼부부 커플은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들이지. 표정관리, 표정관리.
"야 괜찮냐? 그렇게 돼지처럼 먹으니까 목에 걸리지. 내가 아무리 오랜만에 왔다지만..."
돼지드립을 쳐대는 김석진을 한 번 째려주고는 언니가 내민 물잔을 받았다. 그게요, 옆 자리 선생님이세요. 겨우 진정을 하고 내뱉은 말에 갑자기 언니가 박장대소를 하기 시작한다. 옆에 앉은 김석진 의자가 흔들릴 정도로. 한참이나 배를 부여잡고 웃고 난 뒤에야 눈가를 훔치며 난데없이 하이파이브를 청해온다.
"이야, 어떡하냐. 김아미 이제 너.."
그 모습에 내 표정은 웃는것도 우는것도 아니게 일그러진다. 뭔가 이 엿같은 수학선생님에 대한 반감은 표현해야겠는데, 언니가 너무 좋아한다. 왜 좋아하는지 1도 모르겠지만. 오빠도 아는게 없는건지 웃기단 표정으로 언니를 쳐다본다.
"윤기 쌤 어때?"
엿같아요.
"어제도 조회 같이 들어가주고 나름 괜찮으신 분 같아요."
신부님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제가 이번주에 너무나도 큰 거짓말을....
"웃기고 앉아있네. 솔직히 말해. 지랄맞잖아."
"하........"
"내가 윤기쌤이랑 같은 학교에서 몇 년을 있었는데. 첫 만남에서 `나름 괜찮다'라는 평을 받을 만한 사람은 전~혀 아닌것 같은데. 오히려 싸가지가 바가지였으면 바가지였지."
"그 선생님이 누군데 그래? 아버지도 아시는 분이야?"
"아시겠지 뭐. 아빠 재작년에 은퇴하셨으니까 그때도 계시지 않았을까?스물 다섯은 넘어 보이던데."
"어떤데?"
".....그냥 말이 좀 거칠어."
"설마 욕하는 거냐? 선생들 욕하는게 제일 싫은데."
아니 그 인간은 욕 한마디 안하고도 사람 기분을 더럽게 만드는 아주 신기한 스킬을 가지고 있더라고, 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그랬다가는 당장 오빠가 교무실로 전화를 해서 민윤기 이 개ㅈ같은 새끼가 누구야!라던가 아빠한테 아버지 민윤기란 선생을 퇴치해주세요 이럴게 뻔했기에 그냥 입을 다물고 있었다.
"아이고~ 아버님."
아버님?
"어제 아미가 학교 처음 가서 저랑 석진이랑 아침에 밥 한끼 해주려고 왔어요."
"뭐야, 우리 아빠야?"
"예, 뭐 어제 피곤해서 전화 다시 못했나봐요. 오늘 아침에 많이 힘들어 보이더라구요."
"원래 아침에 죽어도 못 일어나는데 무슨....아빤 어쩐 일로 얘한테 전활 다 하냐."
"또 얘기 들어보니까 민 선생님이 우리 아미 옆자리라네요. 아하하하하하하!"
그렇게 언니는 식탁 위에 나와 민 선생이라는 이름을 툭 던져놓고 고개까지 젖힐 정도로 웃으면서 전화기를 들고 밖으로 나가 버렸다. 쟤 왜저래? 나도 몰라. 언니가 사라진 식탁은 적막이 흘렀다. 하긴, 남매끼리 있는데 무슨 말을 할 리가 없지.
"아 맞다. 차 키."
"키는 있는데 차가 없어."
"뭔 개소리야."
"학교에 놔두고 왔걸랑. 어제 까먹음."
"미쳤냐?"
"내일 한 번 더 와서 밥도 하는 겸 받아가면 되지 뭐."
"아 나 오늘 출근해야 한다고!"
"언젠 안했다고. 걸어가~"
"이게 죽을라고 진짜."
"야, 야! 김석진 너는 나이가 몇인데 동생이랑 싸워. 밥 먹는데 건드리지 좀 마라."
그렇게 말하는 언니의 얼굴엔 웃음꽃이 만개했다. 갈수록 무섭게 왜 저러나?
"아빠랑 무슨 얘기 했어요?"
"뭐 별 얘기 안했어. 그냥 학교 얘기 조금?"
"별 얘기 안한사람 치고는 과한 행복이 만개한데. 제 얘기 했죠?"
"아 그~럼. 아버지랑 내가 니 얘기 아니면 무슨 얘기를 했겠어."
그 뒤로도 언니 차를 얻어 타고 김석진과 투닥대면서 학교로 가면서도 내 머릿속은 궁금증이 끊이질 않았다. 도대체 무슨 얘기를 했길래 아빠 웃음소리가 전화기 밖에까지 들린거지. 아무리 생각을 해도 윤기쌤과 연관되어 있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숨겨진 또다른 오빠..? 이건 너무 갔다. 소설에서 나오는 것처럼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어릴 적 동네 옆집 오빤가. 이상한 상상의 나래를 펼치다 보니 어느새 학교 앞이었다.
"야. 나는 어쩌라고."
"좀 걸어가라, 이 놈아. 경찰서가 코 앞인데."
"여자친구나 동생놈이나 다른게 하나 없어....처량한 내 팔자야."
좀 멍청해뵈도 김석진은 경찰이다. 자기의 태평양 같은 어깨로 민중의 헤드라이트같은 역할을 할 거라며 고등학교때부터 난리치더니 덜컥 경찰대에 붙어버렸다. 장난인 줄 알았는데 고3 내내 새벽 2시까지 공부만 해대는 모습에 사실 살짝 무서웠지. 신세한탄을 하며 터벅터벅 걸어가는 뒷통수에다 대고 소리를 질러줬다. 잘 갔다와!
"이젠...내가 갈 차롄가."
"왜. 가서 민선생 볼 생각하니 눈 앞이 캄캄해?"
"캄캄하기만 하겠어요? 아주 그냥....."
이렇게 된 이상 그냥 솔직히 까발리기로 했다. 발뺌한다고 달라질 것도 아니고.
"잠깐 서 있었는데 나오라고 면박 주고, 애들 앞에서 엄청 정색하고, 또 컴퓨터 못한다고 욕이나 하고...내가 진짜."
"......................"
"아 몰라요 몰라! 무섭다구요...."
"나 너한테 할 말 있는데."
"뭔데요?"
"너 뒤에 봐봐."
오, 설마. 제발 아니어라 하는 마음으로 천천히, 아주 천천히 뒤를 돌았다. 하느님 부처님 천지신명님, 제발 그것만은 아니길...
"쌔애애애애애애애애애앰!!!!!!!!!!!!!!!!!!!!!!!!!!!!!!!!!!!!!!!!!!!!!!!!!!!!!!"
다행이구나, 할 겨를도 없이 미친 듯한 속력으로 저 멀리서 뛰어오는 태형이가 보였다. 저 상태로 부딪히면 최소 중상인데. 이런 내 걱정을 알았는지 태형이는 내 바로 앞에서 브레이크를 걸었다.
"이제 오시는 거에요? 윤기 쌤은 왜 옆에 없어요?"
"야, 김태형. 너 반년 안봤다고 아는 척도 안한다?"
"아, 상담쌤 당연히 제가 언제나 마음에, 가슴에 이렇게 새겨놓고 있죠. 어떻게 잊겠습니까."
"요즘은 수학 점수가 몇이라고?"
"...........갈게요."
점수 얘기가 나오자 마자 우릴 휭 지나쳐 가는 태형이 뒤로 사투리 소년이 지나간다. 알고보니 우리 반이어서 어제 조금 당황했지.
"쌤! 제 이름은! 정!호!석! 이에요! 꼭 기억하셔유!"
아침부터 뭔가 큰 폭풍이 쓸고 지나간 기분이었다. 벌써부터 에너지가 딸리는 것 같아..... 갈림길에서 언니는 여고 쪽으로 틀고 난 남고 쪽으로 틀었다. 다음에 봐요, 라고 해봤자 내일 아침에 있을 것 같아서 그냥 잘 가요 라고 하고 말았다. 하도 오래 본 언니라서 이젠 친언니 같다. 29살인 김석진이 21살 때부터 만났으니까. 중3때 처음 만났나. 처음엔 어색했지만 갈 수록 찰떡궁합인 언니와 내 사이에 오죽하면 김석진이 질투를 했었다. 니네 둘이 연애하냐?
"어, 김 쌤!"
"아, 안녕하세요."
"어제 학교는 좀 괜찮았어요? 시간 되면 찾아가거나 석식 같이 먹자 하려 했는데. 선도 일때문에 어제 좀 바빴어요."
"긴장도 되고 좋기도 하고 그렇죠 뭐. 애들이랑 있으니깐요. 신경 써주셔서 감사해요."
"아니에요. 제가 인수인계 담당인데요 뭐. 유민아 어디가! 이름 적고 가! 넥타이! 명찰! 넌 2점이야!"
오늘도 역시나 바빠 보이시는 남준 쌤에게 먼저 올라간다고 하고 중앙현관으로 향했다. 선도 되게 재밌게 하신단 말이지. 아이들에게 민감할 수도 있는 부분인데 기분 나쁘지 않게 지도하시는 것도 능력이라고 생각한다. 나도 저렇게 아이들을 다룰 수 있는 날이 오겠지. 계단을 오르면서 커지던 내 포부는 갈색 미닫이 문이 날 맞이하자 마자 사그라들어 버렸다. 마치 헬게이트 같은 그대의 자태..
"안녕하세요."
문을 열자마자 보이는 윤기쌤에 자동반사적으로 허리를 숙여 인사를 했다. 그것도 90도로.
"예의 바르시네요."
비웃는 건지 뭔지 마시고 있던 종이컵을 쓰레기통에 던져 놓은 뒤 제 자리로 가 샤프로 풀던 문제를 마저 푼다. 오늘은 뒷통수도 재수 없어 보이는데.
"어.....저기 선생님."
"............?"
"이거 컴퓨터 어떻게 들어가요? 어젠 암호 안 걸려 있었는데."
잠겨있는 모니터에 침을 삼키고 삼켜 용기를 내 윤기쌤을 톡톡 쳤다. 내 기분탓인건지 왜 치고 지랄이야!라는 살벌한 표정으로 돌아봐 눈물이 찔끔 나올 뻔 했지만 꿋꿋이 도움을 요청했다. 또 어제처럼 모르면 물어보기나 하라고 면박을 받을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아무 말 없이 손을 뻗어 암호를 탁탁 쳐준다.
"1503김아미 영문으로."
나직이 암호를 말해주고는 출석부를 챙겨 밖으로 나가버린다. 뭔가 의왼데? 주머니에서 느껴지는 진동에 핸드폰을 꺼냈다. 우리 딸 화이팅. 좋은 소식 기대할게~ 당최 뭘 기대한다는 건지. 뜬금없는 아빠의 문자에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는 가정통신문을 챙겨 우리반으로 향했다. 오늘도 화이팅 넘치게!
*
"마지막으로 패러데이 법칙. 수능 단골 문제지. 앙페르 법칙이랑 헷갈리지 않도록 조심하고. 자석이 코일을 지날 때 자기장의 방향과 연관이 있어요. 오늘 여기까지 할게요."
이제 막 수업을 마치는데 태형이가 손을 든다. 오, 질문이야?
"쌤. 상담쌤이랑 어떻게 아는 사이에요? 왜 같은 차에서 내려요?"
태형이의 질문에 반 전체가 술렁인다. 뭐야. 왜이래? 언니가 이렇게 유명한 사람이었어? 그래도 거의 같은 학교나 다름없는데서 일하는데 알려지면 곤란할까봐 대충 둘러댔다. 아, 선생님 대학 다닐때 친했던 언니야. 임용 준비도 도와주고.
"아, 난 또. 윤기 쌤이랑도 원래 아는 사인줄 알았네."
잠깐 멈춰봐. 바람 불잖아...비가 오잖아.... 내 마음에 휘몰아치는 혼란의 비바람이 점점 거세진다. 갈수록 두 사람, 아니 우리 아빠까지 합세해서 세 사람 사이에 연결고리가 있다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다. 도대체 무슨 수작인거야, 아빠는.
교무실로 돌아오니 다들 식사하러 가셨는지 텅텅 비어있었다. 아무 생각 없이 자리에 가서 앉는데 옆에서 바스락거리는 소리에 소스라치게 놀라 크게 움찔했다.
"아...아하....식사하러 안가세요?"
"예."
"그거 하나 드시면 배고플텐데. 오늘 점심....맛있던데....."
"제가 알아서 합니다."
단팥빵 하나를 입에 물고 연신 샤프를 돌리며 정석을 푸는 옆모습이 역시나 말 시키지 말라는 듯 쳐다보지도 않고 쏘아붙인다. 알았다, 이 자식아. 배에서 배고프다는 신호가 스멀스멀 올라오고 있었지만 뭔가 혼자가서 먹기에는 좀 그랬다. 혼자 못먹는건 아니었지만 다닌지 이틀된 학교에서 덩그러니 혼자 먹기엔 뭔가, 그냥 뭔가 마음에 걸렸다.
"어디 가세요?"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는 모습에 나도 모르게 반사적으로 물었다. 괜히 물어봤나. 또 잔뜩 쫄고 있는데 밥 먹으러 간다는 대답이 돌아온다.
"같이 가요!"
말하자마자 후회했다. 저 인간이랑 마주보고 밥 먹을바엔 혼자 먹고 말지. 하지만 이미 뱉은 말 주워담을 수가 없어 어쩔 수 없이 쫄래쫄래 따라갔다. 사실 내가 따라오다 어디론가 먼지처럼 사라져도 전-혀 개의치 않을 사람 같았지만.
"어, 쌤! 윤.기.쌤 이랑 밥 같이 드시네요! 헤헤."
"오오오오오올~"
그래, 난 어쩌면 이걸 걱정했는지도 모른다. 참 단합이 잘 되는건지 우리반은 한 줄에 모두 쭉 앉아서 다같이 밥을 먹고 있었다. 맨 앞에 앉은 태형이가 괜히 큰 소리로 저 멀리 있는 나에게 아는체 하자 나머지 아이들이 급식실이 떠나가라 함성을 질러대는 탓에 3학년 뿐만 아니라 2학년과 선생님들의 시선까지 이쪽으로 집중됐다. 급하게 뒤에서있는 윤기쌤을 올려다봤다. 어제처럼 혹시나 정색하면서 화내진 않을까.
"빨리 앞으로 가시죠. 저 가서 수업준비 해야 합니다."
"아, 죄송해요."
날 서늘한 시선으로 내려다보며 얼른 앞으로 가라는 고갯짓에 황급히 시선을 거두고 앉을만한 자리를 찾아봤다. 한참 밥 먹을 시간이라 앉을 자리가 없었다.
"쌤!여기요 여기!"
"하............."
어느새 한 칸 씩 뒤로 물러나있는 우리 반 아이들을 보자 한숨밖에 안나왔다. 전혀 신경쓰지 않고 그 자리로 걸어가 앉는 선생님의 모습에 태형이와 호석이는 박수함성까지 질러댔다. 근무 이틀만에 찾아온 지상 최대의 수치플. 오죽했으면 구석에 앉아계시는 선생님들 마저도 여길 보며 웃고 계셨다. 아, 세상에. 결국 밥이 입으로 넘어가는건지 코로 넘어가는 건지도 모르게 먹었다. 한시라도 빨리 뜨고 싶어 요구르트와 빵은 들고 자리에서 일어나 교실로 올라가다 요구르트를 마시면서 계단을 올라가는 윤기쌤을 봤다. 다 큰 남자가 요만한 요구르트를 홀짝대는 모습이 꽤 귀여웠다. .....귀여웠다고? 내가 미쳤다보다. 고개를 탈탈 터는 내 모습을 이상하다는 듯 쳐다본 선생님이 먼저 교무실로 들어간다. 이러면 안돼. 이러면 안돼.....
"쌤. 근데 이게 이해가 안돼요. 자기력이 흐르는 방향이 이쪽인데 왜 전자 이동방향이 이쪽이에요? 답지 봐도 모르겠어요."
"엄청 쉬우면서도 중요한 걸 하나 까먹고 있잖아. 전자와 양성자의 운동 방향은 반대인거. 전류의 방향은 +전하가 흐르는 방향이다! 1학년 때 배웠지?"
"아~ 그렇구나. 난 또 뭔가했네."
"이제 더 없어? 열심히 하네."
부임 첫 날 부터 쉬는시간이나 식사시간마다 날 괴롭혀 마지않는 아이들 덕분에 오늘도 질문을 받아주고 있었다. 어쩐 일인지 아이들이 더 이상 찾아오지 않아 남은 10분이라도 쉬려고 등받이에 목을 기대고 눈을 감았다. 아이고, 힘들어라.
"자, 봐봐. 변곡점에서 극대값까지 거리가 교점이랑 극소까지의 거리를 삼분의 일로 나눈 거랑 똑같잖아. 그럼 이렇게 접선을 그려서 근을 구하고 풀면 되겠지."
"뭔 말인지 모르겠는데요."
"딱 한번만 풀어줄테니까 잘 봐라. 교점이랑 극소까지 거리가 5지. 그럼 변곡점에서 극대값까지 삼 분의 오일거아니야. y=mx+n에 대한 근의 합이 3이잖아. 왜 3인지도 모르지?"
"당연하죠."
"근과 계수의 관계잖아, 이 멍청아. 가서 다시 공부하고 와."
선생님들은 다 똑같은 건지 윤기쌤도 질문을 받아주는 듯 했다. 태형이 열심히 하네. 학생한테도 똑같이 쌀쌀맞게 구는 선생님의 모습에도 굴하지 않고 태형이는 끊임없이 말을 시켰다. 쌤, 저 껍데기 뭐에요? 저 놔두고 지금 뭐 드신거에요? 한참을 조잘대는 태형이의 목소리를 들으며 몽롱해지는 정신을 붙잡고 있다 보니 어느새 종이 쳤다. 오후 수업 시작이구나. 아, 집에 가고 싶다. 터덜터덜 7반 교실로 향했다.
"오. 물리쌤이다."
"오. 물리쌤이다."
"오. 물리쌤이다."
이 자식들은 또 무슨 수작인지 내가 들어가자 마자 똑같은 말을 연신 반복하는 모습에 깨달았다. 여기 윤기쌤네 반이구나......밀려오는 절망감에 교탁을 짚고 고개를 숙였다. 아. 피곤하다.
도대체 내가 언제부터 민윤기의 `수학 민윤기의 잠재적 여자'가 된건지는 몰라도 여간히 신경 쓰이는게 아니었다. 가만히 있어도 장난을 걸어대는 남자애들 탓에 온 학교에 일파만파 소문이 퍼진 것 같았고 그게 끝이 아니었는지 옆의 여고에도 알려진 것 같았다. 결제 받을 게 있어 여고에 교무실이 있는 이사장님께 가는 길에 여자아이들의 따가운 시선이 느껴졌으니까. 이놈의 민윤기는 왜 이렇게 유명해서는 내 인생을 괴롭게 하는지. 여고에서는 다른 쪽으로 유명한 듯 보였다. 물론, 선망의 대상으로.
`메세지가 도착했습니다.'
쉴 틈 없는 하루에 털썩 몸을 의자에 묻은 채로 공강 시간을 빈둥빈둥 때우고 있는데 남준 쌤에게서 쪽지가 왔다. 오늘 석식 같이 먹을래요? 학교 구경도 시켜줄 겸. 나쁠 건 없어 알겠다고 답장을 보냈다. 얼마 지나지 않아 6시에 3층 교무실로 데리러 가겠다며 기다리라는 답이 왔다. 20분 남짓 남은 시간에 수업 준비나 해야지, 책을 펼쳤다.
"밥 먹으러 가요. 일찍 가야 애들 안 밀려요."
10분이나 지났을까, 어딜 갔다 온건지 헐레벌떡 문을 박차고 들어오는 남준쌤이 어서 가자며 손짓을 했다. 윤기쌤도 공강이었던건지 이번엔 수능특강을 붙잡고 열심히 풀어대고 있었다. 남색 가디건을 걷어올린 채로 슥슥 풀어나가던 선생님은 샤프심이 부러지자 씨..하는 소리가 입에서 새어나왔다. 엄마, 무서워라.
"민 선생님 식사 안하세요? 이제 석식인데."
그거 괜히 물어보는 걸걸요. 그냥 조용히 계시지..
"생각 없습니다. 앞으로도 생각 없을 거고요."
그럼 그렇지. 저 싸가지가 조용히 대답할 리가 없다. 우리 둘은 어깨를 한 번 으쓱하고는 급식실로 내려갔다. 급식실을 꽉 채운 맛있는 냄새가 내 배를 자극한다. 오후에 열심히 이것저것 한 탓인지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나고 있었다.
"아쉽네요. 맨날 밥 같이 먹자해도 절대로 안 먹어줘.....좀 친해질까 했더만."
자리에 앉은 남준쌤은 아쉽다는 표정으로 젓가락을 들었다. 아니 도대체 저 싸가지랑 왜 친해지고 싶은 건지.
"왜 친해지고 싶어요?"
나도 모르게 말끝이 살짝 날이 섰다. 당황한 표정으로 손사래를 치며 흘린 물을 주워 담으려고 애를 썼다. 그게 아니라.
"아하하, 이해해요. 워낙 쌀쌀 맞으셔서. 왜 친해지고 싶냐면 작년에 퇴직하신 수학 선생님 한 분이랑 제가 되게 친하기도 했고 존경하는 분이셨는데 그 분이 민선생님 칭찬을 그렇게 하시더라구요. 교생때부터 봐왔는데 사람이 참 괜찮다고. 말도 잘 안하는 사람이라 어떻게 아신 건지는 모르겠는데 기회가 있으면 꼭 친해지라고 하셔서요. 뭐 제가 사람 좋아하기도 하고. 딱 보면 나쁜 사람은 아니에요."
작년에 퇴직하신 수학 선생님이면 우리 아빠일거다. 뭔가 언니와 아빠 사이의 모종의 연결고리가 눈에 보이는 듯 했다. 그래봤자 8H연필로 스케치북에 형체를 그리다 만 듯한 느낌이었지만.
"그렇구나. 여자 애들한테 인기 많던데요. 여고 갔다가 깜짝 놀랐네."
"어후.. 민 선샘님 처음 이 학교에 왔을때 여고에 2년 있었는데 오죽하면 이사장님이 그 뒤로는 남고에만 붙여 놓으시겠어요. 농담이 아니라 진짜로 민선생님 퇴직할 때까지 남고에만 계실걸요. 그쪽도 그걸 바라는 것 같고."
"여자애들 분명히 되게 치근댈텐데. 엄청 딱딱하게 굴지 않아요?"
"딱딱한 수준이 아니라 그냥 돌이에요. 저도 여고에 3년 있었는데, 전설의 사건이 있죠. 빼빼로 데이의 비극."
"뭔데요?"
"왜, 여자애들 그런거 엄청 챙기잖아요. 발렌타인 데이니 뭐니. 빼빼로 데이날에 민선생님 책상에 이만큼 쌓였죠 뭐. 진짜 한 달 내내 저것만 입에 달고 살아야 할 만큼."
"다 똑같네요. 저 학교 다닐때도 남자 쌤들한테 그랬는데."
"중요한건 이제부터죠. 보나마나 그걸 먹었을 리는 없고. 그 빼빼로는 단 한 박스도 개봉되지 않은 채 유통기한이 지나 학년이 바뀌고 교무실 청소하는 애들이 싹 다 버렸다. 라는 사실. 그리고 그의 표정엔 미동조차 없었다-라는게 그 때 청소하던 애들의 증언이죠, 뭐."
"....대단하다."
"5년 동안 같이 일하면서 진짜 단 한번도 퇴근하고 다른 데 가는 걸 본 적이 없어요. 집 갈때 같은 방향이라 아는데 주말에도 언제나 주차장에 차가 세워져 있어요. 워커홀릭이라니깐요."
그럴 것 같았다. 맨날 볼때마다 소매를 걷어올리고 열나게 수학을 풀어대는 모습이었으니. 그러니까 그렇게 하얗지. 스트레스에 눈이 멀어 곱게 보일리가 없었지만 사실 피부 하나는 부러웠다. 내가 저 피부였다면 얼마나 좋을까.
"다 드셨어요? 커피 한 잔 하실래요?"
식후 커피나 한 잔 하자는 남준 선생님의 말에 건너편 카페로 향했다. 저녁을 먹기엔 살짝 이른 시간이라 사람이 많지는 않았다.
"제가 살게요. 뭐 드실래요?"
"아, 그럼 다음엔 제가 살게요. 전 아메리카노. 진하게."
"아메리카노 진한거 한 잔이랑 홍자몽 아이요떼 하나 주세요."
주문을 하고 멍하니 선생님과 둘이서 서 있는데 선생님이 내 팔을 툭툭 친다. 어, 저기 민쌤 아니에요? 바로 앞에 마카롱 카페에 선생님 말대로 윤기쌤이 창가에 앉아있었다. 그것도 뭔가 어울리지 않는 마카롱을 손에 든 채로. 사방이 트인 카페 안에는 여자로 보이는 뒷모습과 선생님 둘만 앉아있었다.
"맞는 것 같은데요? 앞에 여자분은 어머니신가."
저 얼굴에서 안면근육이 저렇게 될 수도 있구나, 싶을 정도로 무표정이 지금은 눈이 접히게 웃으면서 앞에 앉아계신 어머님께 자기 잔을 내밀면서 먹어보라고 하고 있었다. 의외였다. 가족한테도 무뚝뚝한 사람일 것 같았는데. 누군가에게 저렇게 웃어줄 수 있는 사람이었나. 한껏 올라간 입꼬리는 내려올 줄을 몰랐다. 테이블 위에 올려진 어머니 손 위로 자기 손가락을 두드리면서 장난을 치는 모습도 생소했다. 저런 사람도 어머니 앞에서는 따뜻하구나. 울리는 진동벨을 들고 커피를 받아 밖으로 나왔다.
"음. 그거 되게 김선생님이랑 잘 어울려요."
"아이요떼요?"
"네. 뭔가 쌤은 커피보단 그런게 더 잘 어울린달까."
"어떻게 아셨어요? 저 커피 잘 안마셔요."
"그냥요. 비주얼이 커피 비주얼은 아니어서요."
커피 비주얼은 뭐에요, 하고 웃으면서 마카롱 카페 앞을 지나쳤다. 순간 환하게 웃고 있는 얼굴과 눈이 마주쳤다. 삼 초 남짓. 얼마 지나지 않아 고개를 돌려 제 어머니를 바라본다. 괜시리 저렇게 웃는 얼굴로 날 바라본것만 같아 얼굴이 화끈거렸다. 뭔데 당황스럽지. 항상 무표정인 모습만 보다 본 적 없고 볼 수 없을거라 생각했던 웃음이 만개한 모습을 마주하니 생소했다.
"차 와요. 조심!"
남준 쌤이 차도 안쪽으로 확 끌어당겨 묘한 기분은 거기서 깨졌다. 천천히 카페를 지나갔다. 기분 탓인가. 어쩐지 윤기 쌤이 날 다시 쳐다본 것 같기도 하다. 교문으로 다시 들어서는데 막 카페로 가시려는지 여자 선생님들이 우르르 우리 앞으로 왔다. 이번에 나미 쌤 대신 오신 물리 선생님이에요. 다른 학년 선생님들께 영어 선생님께서 날 소개하셨다.
"아, 안녕하세요. 김 아미입니다. 잘 부탁드려요."
"앞으로 자주 만날텐데 잘 해봐요. 내년에 만날지 누가 알아요?"
여섯 명 남짓 되는 선생님들께 일일이 인사를 나누다 보니 시간이 꽤 흘렀다. 이제 막 야자 시간이라 아이들이 교실로 향하고 있었다. 2층에 계시는 남준쌤과 인사를 하고 교무실로 들어왔다. 언제 돌아온건지 서류를 보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옆자리 수학 선생님. 손으로 종이를 한장한장 넘기며 타자를 잇달아 치는 모습을 넋 놓고 바라봤다. 바보같이 홍자몽 아이요떼를 쪽쪽 빨면서.
"할 일 없으신가 봅니다. 어제도 그냥 가셨으면서."
퍼뜩 정신이 돌아왔다. 상대는 민윤기야. 정신 차리자.
"아, 네네. 일 해야죠. 일."
의식의 흐름대로 살짝 선생님쪽으로 돌아가있던 의자를 책상 앞으로 바짝 끌어와 큼큼 헛기침을 하고 암호를 쳤다. 설마하는 생각에 어제 공인인증서도 선생님이 해줬나, 싶었지만 그것까진 좀 아니다 싶어서 말았다. 어후, 정신 차려야지. 또 이상하게 생각할까봐 힐끗 옆을 쳐다봤다.
이것도 착각인가. 왠지 저 밀랍인형같은 안면근육이 조금 풀어진 것 같기도 하고.
+)
네 여러분. 절대로 돌아올 일 없다던 레드라이트... 스쿨 럽 어페어로 돌아왔습니다. 제목은 딱 소재를 생각하자 마자 떠올랐어요. 학교에서 일어나는 사랑이야기. 제목을 의미심장하게 해봤자 어차피 사랑 이야긴거 다 아시잖아요...? 조금 특별한 사랑이야기일 뿐...
포인트 아깝네요...도로 받아가여....흙흙 자갈자갈
언제나 고맙습니다♡
쿠야쿠야/센빠이/콜라/태형오빠/취향저격/넌나의첫번째/새벽하늘/방치킨/윤기모찌/태태/치명/노른자/눈부신/님워더/이부/슙슈/태태뿡뿡/하이린/마시마로/춘심이/투기/웬디/민슈가/오구리/흥탄♥/설탕형/시나브로/슙꽃/반짝반짝/룰렛/은하수/민군주님/국산비누/매직핸드/1시55분/아지랑이/민우지/민피디/꾸꾸야/제인/닭키우는순영/탱탱/0418/태태/에오스/연이/망개떡/미니슈/새별/들레/큄/뿌얌/감자링/S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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