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이별을 해요. 나는 사랑을 할 겁니다
02 이혼합시다. 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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겉으로만 화려했던 세기의 결혼은 겨우 신혼 생활 일 년 만에 끝이 났다.
이유는 남편의 외도.
재현이 다른 여자와 만나고 있다는 찌라시가 돌기 시작했고,
세기의 결혼식 이라며 부러워하고 축하 해주던 사람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등을 돌려 두 사람을 손가락질 하기 시작했다.
재벌집안과 정치인의 집안이 늘상 그럿듯이 사랑해서 한 결혼이 아니었다 했고,
사랑해서 한 결혼 이지만 쉽게 마음이 바뀌었다고 했다.
그 무성한 수군거림과 손가락질 사이에서도 한참을 재경그룹의 며느리로 지냈다.
우리의 이혼이 다음 패로 쓰일 때까지, 잘 가꾸어진 모습으로 사람들이 기대하는 모습만 보여주며 살아야 했다.
그래서 여전히 아무렇지 않은 듯, 정해진 일정을 따라야 했다.
아침은 본가로 와서 같이 먹자는 어머니의 말에, 새벽같이 일어나서 본가 어르신들 아침 준비를 했다.
사모님 오셨어요? 라고 일하시는 분들이 인사하는 소리에 준희도 나가서 어머니께 인사를 드린다.
"안녕하셨어요 어머니."
“인사는 치우자. 안녕하겠니?."
미처 인사를 다 하기도 전에, 안녕하지 못하니 인사는 치우자는 말에 준희는 또 다시 숨이 턱턱 막혀온다.
준희에게 시댁은 항상 살얼음판이었다. 정경유착의 빌미로 하게 된 결혼 이었고,
도움을 받는 쪽은 항상 준희의 아버지 였기에 어쩌면 시작부터 당연한 일이었다.
"왜 너 혼자니? 김비서님 재현이 어제 집에 안 들어 갔어요?"
"정대표님 어제 늦게까지 술자리가 있으셔서 오피스텔에서 주무셨습니다."
같은 집에 살고 있는 부부이지만, 재현이 어디서 잤는지, 집에 들어왔는지 준희에게는 묻지 않는 시어머니이다.
대신 옆에 있던 김비서에게 질문이 돌아갔고, 김비서는 어제도 신혼집에는 들어 가지 않았다는 말을 최대한 돌려서 말한다.
"아주 그냥 뒀더니, 막 나가는 구나. 준희 너는 재현이가 이 지경이 될 동안 뭘 하고 있었니.?"
"죄송합니다."
"됐다. 밥이나 먹자."
"네,, "
“오늘 정쉐프 수업 있지?”
“네”
“김 선생 샵에 들렀다가 준비해 둔 옷 입고가렴. 기사도 났으니 같이 레슨 받는 사람 모두 니 얼굴 기다릴 거 아니니. 남편이 바람이 나서 저 지경인데 니 꼴이 어떤가.”
“………….”
“이럴 때 일수록 흐트러짐 없이 다녀라. 더 웃고, 헤프지 않을 만큼”
“…네 어머니.”
"아들 왔습니다. 어머니"
고요하던 식사자리의 정적을 깨는 목소리였다.
어제 과음을 하고 오피스텔에서 잤다는 김비서님의 말이 무색하게, 재현은 풀세팅 되어 있지는 않지만 정갈하게 정리된 모습으로 나타났다.
"아침 운동이 길어져서 늦었어요."
"어제 과음했다며."
"그 소식이 벌써 어머니 귀에 들어갔어요?"
"보는 눈 많아. 재현이 너도 처신 똑바로 해라."
"저희 이번 달 내로 이혼 서류 정리 하겠습니다."
다시 또 이어진 정적을 깨고 재현이 이번 달 내로 이혼 절차를 정리하겠다고 한다.
그리고 준희를 바라본다.
“이혼합시다 우리. 부탁할게요.”
“…….”
시댁 식구가 다 모여있는 식사 자리에서 재현은 준희에게 아주 덤덤하게 이혼을 부탁한다.
언젠가 들어야 하는 소리였다.
끝이 온다는 걸 알면서도 그 목소리로 듣는 이별의 말은 잔인했다.
몇 일 만에 얼굴을 보는데, 이렇다 저렇다 하는 변명도 설명도 없이 첫 마디로 재현은 이혼을 부탁해 온다.
“사랑하는 사람이 생겼어요. 처음부터 사랑해서 한 결혼은 아니었으니까 어려울 거 없잖아요.”
“.. 알겠어요.”
금방이라도 흘러내릴 것 같은 눈물에, 대답을 하지 못하고 있는 준희에게 재현은 한번 더 못을 박는다.
처음부터 사랑해서 한 결혼이 아니지 않았냐고, 그러니 어려울 것 없이 헤어져 달라고.
"피차 얼굴 보는 거 불편할텐데, 내가 나가서 지낼게요. 정리되는 대로 나가줘요."
끝이 있을거라 생각하고 시작한 결혼은 아니었지만, 아주 쉽게 끝이 왔다.
영원까진 아니더라도 꽤 오래 지속 될거라 생각했는데, 허무한 끝이다.
준희가 나갈 때 까지 집에 들어오지 않겠다는 재현의 말은 진심 이었는지, 일주일이라는 시간이 지나는 동안 재현은 얼굴을 보이지 않았다.
집에 있는 짐이 다 정리 되었다는 소식은 빠르게 시어머니에게 보고 되었고, 정리해야 할 서류들이 있으니 본가로 들리라는 말에 또 시어머니와 마주 앉았다.
[협의이혼 계약서]
제 1조 1항 부 정재현을 갑이라고 하고 처 차준희를 을로 칭한다.
2항 (갑), (을) 은 2020년 3월 7일 부로 협의이혼을 하기로 합의하여 민법 제 83조 (이혼의 성립과 신고방식) 절차를 행함에 있어서 다음과 같이 계약한다.
제 2조1항 갑 정재현은 을 차준희에게 위자료로 재경그룹 '채움' 미술관을 양도한다.
2항 갑 정재현은 을 차준희에게 위자료로 재경그룸 산하의 후원 고아원의 후견인 권리를 양도 한다.
3항 을 차준희는 (1항), (2항) 이외의 위자료를 요구하지 않는다.
“변함 없는거지?”
“네”
“희대의 결혼을 하고 이혼을 하는데, 그 위자료로 다 죽어 가는 미술관 하나랑 고아원 후견인 자리를 갖겠다. 반갑기는 한데, 왜 알미울까?
당신 집에 두 번 다시 연 닿을 것 없다는 선포 같아서.”
“ 이 집에 발들이는 순간부터 협의 이혼 계약서 에서 까지 제가 을로 기입되어 있는데 그런 선포가 무슨 힘이 있겠어요. 오해십니다.”
“그렇다면 고맙고. 철 모르고 널 뛸 생각 하지 마라 준희야. 이혼했다고 두 집안 관계가 정리된다고 착각하지 말고. 네가 더 잘 알고 있잖니 너희 아버지 그 자리까지 어떻게 왔는지.”
“네.”
“너는 죽어서도 재경그룹 사람이야. 그러니 이혼 후 나가서도 품위 유지하며 살아라.”
협의 이혼 계약서, 이미 싸인 되어 있는 재현의 싸인 밑에 '차준희' 세 글자를 적는다.
그리고 결혼을 한 이후로, 한순간도 빼어 놓지 않았던 반지를 빼서 탁상 위에 올려둔다.
함께한 일년의 결혼생활의 끝이 겨우 계약서 한 장과와 이 반지 하나 뿐 이라니
허탈해져 온다.
'내가 한 게 정략결혼이 맞았구나. 이게 내 결혼의 결말이구나.. 좀 더 나은 결말을 바랬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