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을 지켜내는 건 간단하지만 어려운 일 이다.
어떤 상황이 와도 신뢰할 수 있어야 하며, 신뢰 할 수 있도록 행동해야 한다.
신뢰 없이 시작 된 관계 안에서 두 사람은 조심하고 조심했다. 금이 가지 않게, 깨지지 않게. 이 관계 안에서 서로가 다치지 않게.
운전대를 잡고 있는 재현의 손가락이 탁탁탁탁 핸들을 쳤다.
머릿속으로 준희가 대화내용을 어디서 부터 들었을지, 진경은 어떤 말을 했고 재현은 어떻게 받아쳤었는지 머리 속으로 다시 재생하고 또 재생했다.
진경은 한참 곤란한 질문을 쏟아내고 있었고, 문득 시선을 돌린 문 앞에는 준희가 서 있었다.
진경과 대학 떄 한참 붙어 다니던 사이였다. 5년 내내 붙어 다니면서 2년간은 연인이었고, 연인보다는 친구일 떄가 더 낫다면서 쿨하게 친구로 돌아온 사이였다.
오랜만에 한국에 왔고, 결혼하고는 처음 보는 거라 당연히 진경의 주 관심사는 재현의 결혼이었다.
“와 정재현 재벌2세 맞구나. 정략결혼 이런 거 영화에나 있는 줄 알았는데 실제로 하는 거 보니까 신기해.”
“방법이 없었어. 죽어도 경영은 하기 싫고, 영화사 계속 하면서 호적에서 안 파이려면 숙이고 들어가야지."
"정재현이 굽힐 줄도 알아?"
"영화사 자리 잡으려면 아직 이고, 하란 대로 안 하면 하루 아침에 이 회사 파산나게 만드실 거야.”
“근데,, 네 스타일 아니지 않아? 니가 여태 만나던 애들이랑 너무 다른데. 그새 또 취향이 바뀌었나?”
“나한테 관심 너무 가지지 마라. 나 유부남이야”
“같이 살면서 스킨쉽도 하면 없던 마음도 생기냐?”
“알고 싶은 것도 많다”
진경과의 대화에서 재현은 한때 연인이었던 이를 위한 예의를 차렸다.
집에서 정해준 결혼이 맞았고, 재경그룹의 지원 없이 회사 운영이 쉽지 않은 것도 사실이다.
한 가지 이야기 하지 않은 건, 정략결혼으로 시작한 결혼생활이 점점 설레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준희에게 느끼는 감정이 연애의 감정인지는 모르겠지만 준희가 신경쓰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한 때 연인 이었던 진경과의 대화에서 늘어놓을 필요는 없었다.
한 때 연인이었던 진경의 질문에 재현은 그저, 무덤덤한 척 진경이 원하는 대답을 피해갔다.
하지만 그 대화를 준희가 듣고 있었다면, 재현의 대답은 달랐을 것이다.
재현에게 진경은 지나간 인연일 뿐이었으니까.
진경과의 대화를 몇번 씩 머리속으로 되짚어 봐도, 준희가 어떤 포인트에서 기분이 나쁜지 어떤 사과를 해야 하는지 모르겠다.
그래서 집으로 가는 길 내내, 변명 아닌 변명만 늘어놓고 머리 속으로 어떻게 사과 해야 할지 후회 하는 중이었다.
집에 도착해서도 준희는 아무 말 없었고, 재현은 계속 준희의 눈치를 살피다가 각자의 방으로 들어갔다.
그날 밤은 유난히 날이 흐렸다. 준희에게 한 실수로 재현의 마음은 이미 침울한데 날씨까지 비바람에 천둥 번개까지 친다.
천둥소리가 더 심해지기 전에 잠에 들어야 하는데, 소리가 더 커지면 정말 호흡이 힘들어 질 텐데,, 잠을 자야 하는데 오늘은 머릿속 가득 준희 생각으로 잠이 오질 않는다.
준희에게 어떤 사과를 해야 했을까, 우리는 지금 어떤 관계일까 두 가지 질문이 끝도 없이 이어지는 질문들을 데려왔다.
이러면 오늘 잠 자기는 글렀다 생각하고 있는데 갑자기 방문이 열렸다.
"사과 해줘서 고마워요... 나는 내가 기분 나빠도 되는 상황인지 계속 고민 했어요"
" 기분 나빠도 되는 상황이죠. 우리 법적으로 부부잖아요."
진경과 같이 있는 재현의 모습에 두 사람이 나누던 대화에 기분 나빠해도 되는 건지 고민하는 준희였고.
우리는 "법적"으로 부부 이니까 그래도 된다고 하는 재현이었다.
서로에게 마음을 보여주는 게 아직은 조심스럽지만 그래도 조금씩 가까워 지고 있는 두 사람 이었다.
간 밤에 서로에게 고백 아닌 고백을 하고, 설레이는 마음으로 시작한 하루 였는데, 그 설레임은 반나절도 가지 못했다.
서로가 서로에게 어떤 감정인지 채 알기도 전에, 왜 신경쓰이기 시작했고, 왜 서운했는지, 왜 미안했는지 채 알기도 전에 또 다른 기사가 터졌다.
[재경그룹 3세의 탄생]
[정재현 대표이사 부부 2세준비]
[차준희 임신]
[재경그룹의 정재현 대표부부가 함께 유아 용품을 쇼핑하는 모습이 포착되었습니다. 모자를 눌러 쓰고 있었지만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편안하게 쇼핑하는 모습인데요....]
지난번에 이모님 선물로 아기 배냇저고리 사러 유아용품 매장에 들렀던게 갑자기 기사화 되었다.
결혼 한 지 3달, 어젯밤에 처음으로 한 침대에서 잠들었고 그것도 세상 건전하게 손만 잡고 잤는데,
이 와중에 임신이라니... 오보 이지만 세상은 하루 종일 두 사람의 2세 소식으로 떠들 썩 했다.
하필이면 오늘 이런 기사가 났다.
재현과 함께 공식석상에 얼굴을 내비쳐야 하는 날인데,,,
저녁에 재현이 주최하는 영화인의 날 행사가 있어서, 함께 행사에 참석할 건데, 기자들이 두 사람이 서 있는 사진을 찍기 위해 몰려들게 뻔 했다.
아직 시어머님의 호출은 없었는데, 쓸데없는 기사나 났다고 하실 것 같은데,, 이따 얼굴도 뵈야 하는데 뭐라고 해야 하는지 잘못한 것도 없는데 걱정부터 하는 준희 였다.
중요한 일정이 있을 때는 메이크업이랑 헤어, 의상을 준비해서 오는 전담팀이 있다.
전담팀이 집으로 와서 한참 바쁘게 준비를 하고 있는데 준희에게 반갑지 않은 전화가 왔다.
정말 받지 않고 싶은 전화였다. 전화 하면 언성을 높일게 뻔하니까. 오늘은 또 무슨 소리를 하시려고 이러시나, 임신 소식이 오보인 걸 아시면 더 심기를 건드릴 뿐 일 텐데..
"잠깐 자리 좀 비워주실래요?"
어떤 대화가 오고 갈지 대충을 예상이 가서 메이크업을 해주시던 분께 잠깐만 혼자 있게 해달라고 자리를 비워 달라고 부탁 드렸다.
"네. 여보세요."
"너희 애 들어섰니? 왜 엄마한테 이야기 안 했어. 엄마가 이런 소식을 뉴스로 알아야겠어?"
"아니야 엄마. "
"안정기 접어들면 이야기 하는 게 맞는데, 너 이러면 엄마 서운해."
"엄마... 정말 아니야. 우리 각 방 써."
"그래?.. 아유 얌전한 차준희가 부뚜막에 먼저 오른 줄 알았더니. 그럼 그렇지."
"우리가 연애하고 결혼했어?, 정략결혼 고작 3개월만에 아이가 생기는 게 더 이상한 거 아니야?"
"너희 아버지 이제 곧 당의 원 달고 나면 차차 대선 준비 해야 해. 그 전에는 손주 소식 있어야 걱정 없이 대선 준비하시지 않겠어?"
"그만해요. 나 하나로 부족해?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내 아이도 아빠 정치를 위해 살아야 하는 거야? 아빠 선거 시즌 맞춰서 아이 낳고 갓난 쟁이 안고 사진이라고 찍고 싶어요 엄마?"
"아니 얘는 또 왜 말을 그렇게 해. 너는 꼭 엄마만 나쁜 사람 만들더라."
"나 하나로 만족해요. 내 인생 없이 엄마가 하라는 대로 살아줬잖아. 아빠 정치 시작하고 하품 한번 편하게 못하고 살다가 이 집에 팔려오고는 하품이 뭐야 숨도 크게 한번 못 쉬고 살아. 내가 얼마나 많은 걸 포기했는지 엄마가 알아?"
"그 잘난 재경 그룹의 사모님이 왜 숨도 못 쉬고 살아? 너 그 자리 탐 내는 정제계 자재들이 얼마나 많은 줄 알아? 쉽게 온 기회 아니야. 정신 차려."
"그만해요 이제. 더 이야기 해도 똑같을 것 같아. 끊을게요."
잠깐 꿈을 꾼 듯 했다. 엄마와의 전화 한 통은 이 결혼이 철저하게 아빠의 정치에 이용되는 거래 일 뿐이라고 상기시켜줬다. 아버지의 최종 목표는 청와대였다.
이제 당 의원을 달고 나면 차차 대선 준비를 해야 하는데, 그 전에는 재경 그룹의 며느리가 된 딸이 보란 듯이 손주를 낳아서 재경 그룹과 아버지의 관계를 더 돈독히 만들어야 선거 준비에 박차를 가 할 수 있다는 말 이었다.
전화를 끊고 나니 마음이 더 씁쓸해진다. 아버지의 정치 인생에 한낱 소품일 뿐인데, 그래서 팔려오듯 한 결혼인데 잠깐 잊고 있었다.
울고싶지만, 울면 안된다. 보고있는 눈들이 많다. 지금 울어버리면, 어딘가에서 또 말이 새어 나가겠지..
"기 비서님, 저 준비 끝났어요. 출발할까요?"
"어 ..? 정재표님이 같이 출발하신다고 하셨는데,,"
"재현씨가요?"
"네, 본가 같이 들리셨다가 행사장으로 오신다고 했는데, 일정이 바뀌셨나 봅니다. 지금 출발하겠습니다. 잠깐만 기다리세요."
"네. 알겠습니다."
준비를 마치고 본가에 검사를 받으러 가야 해서 기비서님꼐 지금 내려가면 되겠냐고 전화를 드렸는데, 돌아오는 대답이 뜻밖이었다.
재현이 준희를 데리고 본가에 들렸다가 같이 행사장으로 가기로 했단다. 기비서님 대신에 오기로 했다는데, 재현은 집에 들리지 않았다.
존인이 주최하는 행사이니까 그만큼 정신 없겠지,, 라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준희는 기비서의 차를 타고 재경 본가로 향했다.
늘 그렇듯 아래위로 훝어보고 이건 별로 다 저건 별로 다 지적을 하는 시어머님의 검사였다. 그래서 시어머니 앞에만 서면 준희는 움츠러들고 도망치고 싶은 마음이다.
처음 준희를 봤을 때 시어머니가 하신 말씀은
"곱상하니 예쁘게 생겼네"
였다.
처음부터 한 인격체가 아닌 물건취급 이었다.
아무리 정략결혼이라고 해도, 아들과 결혼 할 사람인데 그저 예쁘고 재경의 이미지를 바꿔 줄 수 있다면 그걸로 족했다.
명품관에서 가방 쇼핑하듯 이거 예쁘네, 이걸로 할게요 그렇게 준희는 재현의 짝으로 선택되었다.
그렇게 최소한의 기품이 있는 척하는 가식도 없이 항상 소모품 대하듯 준희를 대하는 시어머님 이었지만 좀처럼 익숙해지기 힘들었다.
준희와 재현의 결혼에서 준희의 아버지가 얻은 것은 수 억원대의 정치자금과 청와대로 가기까지 뒷 배가 되어줄 세력이었고,
재경그룹이 얻은 것은 소박하고 소탈한 정치인 가정에서 자란 며느리를 얻은 기업, 동화같이 살아가는 정재현 대표라는 이미지 메이킹 이었다.
돈을 주고도 살 수 없는 게 검소하고 친밀한 이미지 인데 재경그룹은 돈을 주고 잘 꾸며진 "차준희"를 사온 것이었다..
둘의 로맨스는 쉽게 이슈화 되었고, 자잘한 문제들을 덮을 떄 아주 유용했다.
"전체적인 의상은 괜찮은데, 백이 좀 투 머치 이구나. 너도 재경사람인데 품위 있게 입어야지."
"다음엔 신경써서 입겠습니다."
" 공식 석상이니 너무 헤프게 웃지 말아라. 지난번 기사에나온 사진은 너무 활짝 웃고 있어 헤퍼 보이더구나."
"네 어머님, 조심하겠습니다."
"요즘 정해주지도 않은 기사 거리에 오르내리더구나. 준희 너 네가 재경을 위해 할 일들이 뭔지는 잘 알고 있지? 재경을 위해 쓰일 이미지인데 오늘 같은 기사거리로 헤프게 쓰이면 되겠니, 행실 똑바로 해라"
"네 .........."
"네가 얼마나 값비싸게 팔려왔는지 알고 있지? 그러니 제 값을 해야지 아가."
"네...어머니"
의상 지적에 이어서 너무 헤프게 웃지 말라는 잔소리, 그리고 왜 언급하지 않으시나 했던 오늘의 빅뉴스에 대해서도 한마디 하신다.
철저히 재경그룹을 위해서만 소모되어야 할 준희의 이미지다.
작은 비리들을 덮기 위해서, 이목을 집중 시키기 위해서 쓰여져야 하는데 오늘 같은 일이 없게 행실을 바로 하라는 말씀을 하신다.
소모품이기에 아껴 쓰겠다는 말이다. 언젠가 쓰임새가 다하면 버릴 수도 있다는 말을 함포하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얼마나 비싼 값에 팔려 왔는지 알면 제 값을 하라는 말고 함께 얼굴을 쓰다듬으시는데 온 몸에 소름이 돋았다.
이쯤 되면 준희가 안 쓰러지고 버티는 게 대견 할 정도다.
하지만 제 감정에 따라 일정을 취소 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티 나게 기분을 내 보일 수 없는 위치에 있는 준희는
늘 그렇듯 잘 꾸며진 모습, 누가 봐도 부러워 할 모습으로 행사장에 등장해야 했다.
행사장에 들어가기 직전에 재현이 타 있는 차에 함께 탔다.
같은 차에서 내리지 않은 걸로도 기사거리가 될 수 있으니까..
어젯밤에 손을 잡고 잠들었던 사이인데, 그 설레임을 마음껏 느끼기도 전에 준희는 여기저기 시달릴 만큼 시달리다가 와서 녹초가 되어있었다.
꽤 규모가 큰 행사라서 재현이 아침 일찍 집을 나서서 아침에는 얼굴도 못 봤었다. 그래서 얼굴을 보면 잘 잤냐고 물으려고 했는데,,
"제 값을 해야 한다"는 소리를 듣고 한껏 꾸미고 제 값을 하기 위해 재현의 옆에 있으니 우리는 애초에 그런 걸 묻고 답할 사이도 되지 못한다는 걸 느끼는 준희이다.
나는 이 사람 옆에서 반짝거리는 한낱 장식품이구나 내가 내 처지를 잊고 있었네..
"기자들이 꽤 몰릴 거예요. 오늘 났던 기사 때문에.."
"... 재현씨....우리 이 연극 꽤 잘해내고 있나봐요. 사람들은 우리가 정말로 사랑한다고 믿네요."
"................................동화책 보듯 하는 거죠. 왕자와 공주는 오래오래 행복했답니다. 그걸 우리한테 대입해서 보는 것 같아요"
"왕자랑 공주가 결혼했으니 이제 딸 아들 낳고 행복하게 살았답니다를 기대하나 보네요."
재현의 잘못은 없는데, 하루종일 행사 준비로 바빴을 건데, 기자들이 많이 몰릴거라는 말에 대답으로 준희는 재현에게 선을 긋는다.
"우리 이 연극 꽤 잘해내고 있나봐요" 하고.. 우리가 다정하게 구는 건 다 허구이지 않냐고,
사람들은 우리가 운명적인 사람을 하고, 결혼을 하고 아이를 가진 줄 알겠지만 사실 준희는 오늘 자신의 처지가 어떤지 뼈 져리게 깨닫고 오는 길이었다.
그래서 꽤 다정했던 재현의 말에 차가운 대답을 내어 놓았다.
서로가 서로에게 어떤 관계인지 조금은 궁금해져 가고 있었는데, 티나게 선을 그어 버리는 준희 앞에서 재현도 다시 자신이 그어놨던 선 뒤로 한발 물러선다.
"................................동화책 보듯 하는 거죠. 왕자와 공주는 오래오래 행복했답니다. 그걸 우리한테 대입해서 보는 것 같아요"
"왕자랑 공주가 결혼했으니 이제 딸 아들 낳고 행복하게 살았답니다를 기대하나 보네요."
손 잡고 잠들었던 어젯밤은 없던 일 인 것처럼, 두 사람은 서로의 감정은 숨기고 서로를 정략결혼 상대로만 대한다..
손 닿을 거리인데, 각자가 그어 놓은 선을 넘지 못해서 서로에게 멀기만 한 두 사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