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이별을 해요. 나는 사랑을 할 겁니다
04 다가가도 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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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벌가의 며느리로 맞게 된 일들 중 하나는
재경 그룹에서 후원 하고 있는 고아원에 가서 봉사 활동을 하고, 아이들이랑 시간을 보내는 일이었다.
집안 사람들이나 비서진들에 둘러싸여 지내던 준희가 유일하게 숨을 쉬는 시간이기도 했다.
대외적으로 '우리 기업은 이렇게 선행을 일상화 하는 선행 가득한 그룹입니다' 와 '갓 결혼한 신혼부부가 함께 아이들을 돌보는 바람직한 모습'
두 가지를 함께 연출 할 기회였고, 준희가 하게 된 고아원 벽화 봉사활동에 재현이까지 동원 되었다.
“아저씨는 왜 그림 못그려요?”
“아저씨 그림 못그려?”
“네, 아저씨 짱 못그려요.”
“하하하하하”
“아저씨랑 준희 누나랑 사겨요?”
“응? 아.. 아저씨랑 준희 누나랑 결혼 했어요.”
"거짓말"
"진짜야, 아저씨랑 준희누나랑 결혼했어."
“우와 아저씨 좋겠다.”
정해진 스케줄이라 따라 나선 재현은 아이들 사이에 자연스럽게 섞여서 색칠을 했다.
이미 몇 번 봉사활동을 다녀간 준희는 아이들에게 이미 익숙한 사람이 되었기에 아이들은 준희를 "준희누나"라고 부르며 잘 따랐고,
새로운 얼굴인 재현은 아이들 사리에 둘러 싸여서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
옆에서 쫑알 쫑알 대는 아이들 사이에서 재현은 그림을 못 그린다는 공격을 받고, 저 누나랑 결혼했다고 아이들에게 폭탄 고백도 했다.
돌아온 “우와 아저씨 좋겠다” 라는 말에 싱긋 웃으며 준희를 봤다.
"준희 누나는 그림 잘 그리는데, 아저씨는 왜 못 그려요?"
"준희 누나는 뭐든 척척 잘하는데, 아저씨는 아직 잘 못해."
"그럼 준희 누나한테 배워요."
"응 아저씨가 열심히 배울게."
재현 옆에서 그림을 못 그린다고 놀리던 아이들이 이번에는 준희에게 좀 배우라고 해결책을 제시해준다.
아저씨도 열심히 배우겠다고 하자 이번에는 아이들이 우르르 준희에게 몰려간다.
"준희누나", "준희 언니", "언니"
"응 왜?"
"저기 저 아저씨랑 진짜 결혼 했어요?"
"응 아저씨랑 결혼 했어요."
"근데 왜 아저씨는 그림을 못 그려요?"
"아저씨가 그림을 못 그려?"
"네 진짜 못 그려요. 그래서 우리가 누나한테 좀 배우라고 했어요."
"잘했네"
"근데요, 준희누나 진짜 저 아저씨랑 결혼했어요?"
"응 결혼 했어요."
"그럼 아저씨랑 사랑해요?"
"........어.."
"그럼요. 결혼했는데 당연히 사랑하죠. "
아저씨랑 결혼을 했냐고, 근데 왜 아저씨는 그림을 못 그리냐고, 그래서 누나한테 좀 배우라고 했다고,
아이들이 조마다 한마디씩 하는데, 울상인 아이가 정말 아저씨랑 결혼 했냐고 되물어 온다.
"응 아저씨랑 결혼 했어요"하고 대답 했더니, 이번에는 아저씨랑 사랑하냐고 물어온다.
아저씨를 사랑해요? 도 아니고,,, 아저씨랑 사랑을 하냐는 말 앞에서 뭐라고 대답할지 곤란해 하는 사이에 재현이 대답을 홀랑 가져가 버린다.
"그럼요 결혼했는데 당연히 사랑하죠 " 하고...
아무렇지 않게 "당연히"라는 말을 뱉아 버리면서 재현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으앙 ㅠㅠ 나중에 커서 준희누나랑 결혼 하려고 했는데, 아저씨 때문에 망했어.”
준희 누나가 너무 좋아서 누나가 오는 날만 기다렸다면서, 아저씨 때문에 다 망했다는 아이를 준희가 한번 안아줬고,
재현은 지은죄가 없는데, 괜히 미안해 해야 하는 입장이 되어 버렸다.
한쪽 벽면을 다 완성하고, 반대쪽 면은 다음을 기약 하면서 아이들이랑 밥을 먹었다.
기자들과 촬영팀은 분량이 다 나왔으니 철수했고, 이제부터는 대외적으로 보여주기용이 아닌 정말 봉사활동이었다.
천천히 먹는 아이들 옆에서 밥을 떠 먹여주고, 반찬을 숟가락에 올려주다 보니 정작 준희는 밥을 먹지 못하고 있었다.
재현이 아이들 식판 뒷정리를 하고 아직 밥을 못 먹고 있는 준희 앞자리에 앉았다.
"내가 먹일게요. 준희 씨 밥 좀 먹어요."
"고마워요. 재현 씨는 좀 먹었어요?"
"나는 먹었어요."
"그럼 부탁 좀 할게요."
"이러고 있으니까 우리 제법 부부 같네요."
아직 숟가락질이 서툰 아이 옆에 앉아서 밥을 떠주고 "아 해보세요" 하는 재현의 모습은 지금 까지의 모습과 사뭇 달랐다.
"오구 맛있어. 꼭꼭 씹어서 먹어요."
아이가 다 먹을 때까지 기다렸다가 또 한입을 준비 해준다.
이렇게 무장해제 되는 모습도 있구나, 언젠가 아이가 생기면 좋은 아빠가 되어 줄 수 있겠다. 라는 생각을 하지만 입 밖으로 내지는 않는 준희였다.
좋은 아빠가 될 것 같은데, 우리가 아이를 가질 일은 없을 테니까. 그냥 다정한 구석이 있는 사람이구나. 하고 생각을 고쳤다.
아이들은 다시 나가서 뛰어 놀고, 준희가 자처한 설거지에 재현도 함께 고무장갑을 끼고 나란히 켜켜이 쌓인 그릇앞에 섰다.
기자들과 매거진에서 나온 취재진들이 모두 돌아갔고, 그 이후로는 보는 사람도 없는데, 나서서 일을 하려는 준희가 재현에게는 의외였다.
이미 사진을 다 찍혔고, 쉬엄쉬엄 해도 될텐데
아이들에게 둘러 쌓여서 종알 종알 물어오는 말에 하나하나 다정한 대답을 해주고,
어린 아기들 밥을 먹이느라 본인 밥도 안 먹고 있길래 다가가서 대신 밥을 먹여줬다.
하루종일 아이들과 있으면서 지칠법도 한데 준희는 여태까지 본 모습 중에 가장 밝고 활기차 보였다.
그렇게 잘 웃는 사람인지 몰랐다.
집안 사람들과 함께 할 때의 준희는 형식상의 미소밖에 보이지 않았었고, 저에게는 항상 벽 아닌 벽을 두고 내 왔었기에 그냥 원래 그런 사람이구나 생각했는데,
어쩌면 이렇게 예쁘게 잘 웃는 사람을 제 옆자리에 세워 두어서 마음 편하게 웃지도 못하게 만든 건 아닐까 생각 하는 재현이었다.
나란히 서서 설거지를 하다 보니 말을 거는 것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서로의 눈을 보고 이야기 하는 부담감 없이 편하게 재현이 말을 건다.
"여기서 준희씨 편해 보녀요."
"그래요?"
"그렇게 많이 웃는 거 오늘 처음봐요."
"음...비서진도 없고, 카메라도 없잖아요."
"보는 눈이 없어서 편안해 했구나."
"보는 눈도 없고, 아이들이랑 있으면 체면 걱정할 일도 없잖아요."
"준희씨 그림 그릴 때 눈이 반짝반짝 한 거 알아요? 하고 싶은 일 할 때 준희 씨 행복해 보여요. 요리할 때랑은 달라."
"아니 여기서 요리가 왜 나와요? 그 날은 진짜 긴장해서 그런거에요."
"알겠어요 ㅎㅎ"
“재현씨가 저녁으로 컵라면만 먹는 거 알면 어머님 속상해 하실텐데”
"나 방금한 말실수로 이제 쭉 저녁은 라면 인 거에요?"
“질릴 수도 있으니까. 매운맛이랑 순한맛이랑 번갈아서 줄게요”
“사람이 은근 살벌한 구석이 있어”
“왜 그림 이었어요?”
“정치인 딸이 가질 수 있는 취미에는 한계가 있어요. 그림은 부모님이 보시기에 그럴 듯 한 취미였나 봐요. 아버지는 나중에 미술관 해도 되니 반대 하지는 않으셨고, 어머니는 우아하고 고고해 보인다고 좋아하셨거든요.”
“단순히 그게 이유에요?”
“진짜 이유는 따로 있었어요. 하고 싶은 말이 많은데, 누구에게도 할 수 없을 때 그림을 그렸었어요. 내가 뭘 써냈는지 사람들은 모를테니까.”
“돌파구 였구나, 준희씨 나름의?”
“그쵸. 돌파구”
“그림, 계속 하고 싶지 않아요? 준희씨도 숨 쉴 구멍 필요 하잖아요.”
"그러기엔 너무 늦었어요. 화가 차준희, 미술 선생님 차준희. 이렇게 직업이 내 이름 앞에 붙는 게 이상할 것 같아요. 그냥 차종현 의원 딸로 산지 꽤 오래됐고, 이제는 정재현 대표 와이프로 살고 있고 붓 내려놓은 지 한참이라 손도 굳었고."
"준희씨 손이 굳은 거면 내 손은 그냥 날 때부터 돌이에요."
"애기들이 그림 못 그린다고 한 거 마음에 걸렸구나?"
"준희누나한테 좀 배우라고 하더라구요."
"아기들이 원래 솔직해요."
"...............그러니까 해봐요. 나는 재벌 치고는 망나니처럼 하고 싶은 거 하면서 살아서, 꿈에 미련 두고 애틋해 본 적이 없어서 모르겠지만, 그냥 꿈으로만 두지마요. 반짝반짝 하던 눈으로 그 미련 값지게 한번 써봐요.”
"음, 어머님이 허락 하시면요?"
“물론 제약이 많겠지만, 할 수 있는 게 있을 거에요. 내가 준희씨 하고 싶은 일 할 수 있게 도와줄게요.”
"꽤 든든한 응원 인데요?"
보통 때처럼, 요리 수업을 마치고 나왔는데
오늘도 기 비서님 대신에 재현이 마중나와 있었다.
"서프라이즈"
"오랜만에 퇴근길을 함께하는 부부 컨셉인거에요?"
"기 비서님 오늘 감기기운 있으시다고 하셔서, 먼저 퇴근하셨어요."
"요즘 기 비서님 너무 피곤 하셨나봐요."
"오늘은 뭐 만들었어요?"
"오늘은 고구마 그라탕이요"
"맛있겠다."
"다음엔 재현씨 먹을만큼 조금 담아올까봐요."
"집에서 다시 하면 되잖아요?"
"다시하면 똑같은 맛이 아닐 수도 있으니까"
"뭐든 좋아요."
이제는 재현이 대신 데리러 와도 제법 어색하지 않게 대화를 이어 나가는 두 사람 이었고,
대화의 토픽이 요리 일 때면 항상 틈새를 놓치지 않고 준희를 놀리는 재현이었다.
"우리 나온 김에 이모님 선물 사서 들어가요. 그래도 한 집에서 가족처럼 사는데, 해 드린 게 없잖아요."
"그렇죠. 한 집에서 사는 가족 같은 사이죠."
"아무래도 아기 선물이 제일 무난 하겠죠? 손주도 보셨으니까?"
"그래야겠죠?"
"아까 이모님이 사진도 보내주셨어요. 이거봐요 너무 예쁘죠."
"준희씨랑 이모님이랑 많이 친해졌네요? 유학 끝내고 들어와서 혼자 살기 시작하면서부터 일 봐주셨는데 어떻게 된게 준희씨랑 더 친해요?"
"저는 같이 보내는 시간이 많으니까요. 재현 씨는 항상 늦고, 기다리면서 할 일도 없...고......"
" .............아.. 나를 기다렸구나. 흠흠." 헛기침을 하는 재현이다.
한집에서 가족처럼 사는데 라는 준희의 말에 한 집에 살면 가족 같은건가. 그럼 우리는 뭘까? 우리는 가족일까?
이미 법적으로 혼인신고는 했지만 아직도 어떤 관계인지 정의가 어렵다 생각하는 재현이었다.
재현이 유학을 끝내고 나서 독립하면서 부터 쭉 집안일을 봐주셨으니 재현과 본 세월이 더 긴데,
준희가 이모님한테 아이 사진을 받았다면서 보여주길래. "어떻게 된 게 준희씨랑 더 친해요?" 라고 물었더니 준희가 핸드폰으로 아이 사진을 넘겨 가면서 무심결에 "재현씨는 항상 늦고, 기다리면서 할 일도 업고" 라고 말한다. 말하면서 제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깨달은 것 같았다.
그리고는 얼굴이 빨개져서 창밖만 보길래, 재현이 "아,, 나를 기다렸구나" 하고 대답하고 같이 민망해져서 헛기침을 한다.
준희는 모르고 있는 것 같다. 불쑥불쑥 아무렇지 않게 내 비추는 진심이 재현을 얼마나 설레게 하는지.
부끄러워 빨개진 두 귀로 두 사람은 갓난 아이 배냇저고리와 신생아용 우주복 몇 개를 집어 들었다.
"이거 어때요? 이게 더 예쁘다 그쵸?" 하고 물어오는 준희에게
재현은 그냥 "네," 하고 단답으로 일관했다. 아이 옷이고 신반이고 다 모르겠고
준희가 차에서 한 말만 재현의 머리속을 맴돌았다.
"기 비서님! 오늘은 에그타르트"
"맛있겠는데요?"
"넉넉하게 만들었어요. 여기 비서님꺼"
"감사합니다."
"따뜻할 떄 드셔야 맛있는데,"
"지금 먹겠습니다. ㅎㅎ"
"맛있어요?? 맛있죠?"
"우와 진짜 많이 발전 하셨네요."
"칭찬으로 들을게요 비서님."
"정말 맛있네요."
"....저어.. 재현씨 제작사로 데려다 주실래요? 거기서 같이 퇴근할게요."
"네, 알겠습니다."
요리 수업에서 에그 타르트 만드는 수업을 하고 한판을 더 구워서 기비서님 드릴 여분이랑 재현이를 위한 타르트를 따로 담아왔다.
기 비서님이 맛있게 먹는 모습을 보니 자연스레 재현이 생각나는 준희이다.
따뜻할 때 먹어야 하는데, 지금 바로 재현에게도 가면 맛일을떄 먹일 수 있는데,, 잠시 고민하다가
따뜻할 때 한입 먹이고 싶어서 재현의 제작사에 들려다가 같이 가겠다고 했다.
좋아했으면 좋겠다, 이제 요리못한다고 못 놀리겠지 하는 들뜬 마음에 대표실 문을 열려고하는데
재현의 사무실에서 다른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와 정재현 재벌2세 맞구나. 정략결혼 이런 거 영화에나 있는 줄 알았는데 실제로 하는 거 보니까 신기해.”
“방법이 없었어. 죽어도 경영은 하기 싫고, 영화사 계속 하면서 호적에서 안 파이려면 숙이고 들어가야지."
"정재현이 굽힐 줄도 알아?"
"영화사 자리잡으려면 아직이고, 하란대로 안하면 아루아침에 이 회사 파산나게 만드실거야.”
“근데,, 네 스타일 아니지 않아? 니가 여태 만나던 애들이랑 너무 다른데. 그새 또 취향이 바뀌었나?”
“나한테 관심 너무 가지지마라. 나 유부남이야”
“같이 살면서 스킨쉽도 하면 없던 마음도 생기냐?”
“알고싶은 것도 많다”
문을 열고 들어가기에 너무 불편한 대화였다. 문을 열려다가 그대로 굳어서 둘의 대화를 들었다.
"차준희" 라고 부르지는 않았지만 둘의 대화는 준희에 관한 이야기 였다.
재현이 친구와 나누는 짧은 대화에서 우리 사이의 선은 더 정확히 느껴졌다.
순전히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집안으로부터 방해를 피하기 위해서 한 결혼이다.
에그타르트를 만드는 법을 배워서, 갓 나온 타르트 먹이고 싶어서 온 건데,
"따뜻할 때 먹어보라고 곧장 왔어요." 뭐라고 말해야 덜 어색할지 연습도 했는데,
뜻하지 않게 대화를 엿듣고 나니. 이렇게 찾아온 자신이 바보 같다고 느끼는 준희였다.
그대로 서있는데, 반투명 문 앞에 누구낙 서있는걸 본 재현이 걸어와서 문을 열어준다.
"준희씨."
미리 이야기 하고 일정이 잡혀야 방문 할 수 있는 사이인 듯 대하는 재현이 오늘도 차갑게만 느껴진다.
조금은 가까워 졌다고 믿었는데, 가까워 진 듯 하면 또 멀어진다.
"안에 손님이 와계셔서,"
"아, 인사해요. 여기는 필름스쿨 같이 다녔던 김진경 감독. 여기는.. 차준희씨."
"반가워요. 준희씨. 이야기 많이 들었어요 뭐 이런 멘트라도 해야 하는건가"
"네 안녕하세요."
친구와 준희를 소개시켜 주는데, 여기는 필름 스쿨 같이 다녔던 김진경 감독 하고 진경을 설명하고 나서 준희를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망설이는 재현이었다.
차종현 의원 딸 이라는 호칭은 항상 부담이니 싫어 할 것 같고, 내 와이프 라고 말하기는 망설여졌다.
그래서 아무런 말도 더하지 않고 "여기는 .... 차준희씨" 라고 소개해줬다.
어디서부터 이야기를 들었는지 모르기에 재현의 친구는 머쓱 해 했고, 준희가 먼저 말을 뗐다.
"손님이 와계신줄 몰랐어요. 마저 이야기 해요"
"아니에요. 나 이제 퇴근 할 건데, 같이 들어가요."
바로 차키와 코트를 챙겨드는 재현이었고, 그 어색함이 감도는 사무실에서 나와서 차에 탔다.
"유학할 때 필름스쿨 같이 다닌 친구예요."
"그래요?"
"영화 감독하는데, 이번에 스페인에서 작품 하나 하고 오랜만에 한국 들어와서 잠깐 얼굴보러 들린거에요."
"네에.."
"밖에 와있는 줄 몰랐어요. 알았으면 그렇게 세워 두지 않았을 건데, 미안해요."
"괜찮아요. 갑자기 찾아간 건 나잖아요."
밖에 그렇게 세워 두어서 미안하다는 사과를 하는 재현이었지만 끝까지 준희가 듣고 싶은 말은 해주지 않았다.
친구와 아무렇지 않게 당신 이야기를 해서 미안하다. 그런 사과가 듣고 싶었는데,
그저, 와있는 줄 몰랐다 기다리게 해서 미안하다 하는 말뿐인 사과를 하는 재현에 준희는 너무 가까이 다가가려 했던 제 탓이라 생각했다.
너무 기대해서, 실망하나 보다. 이 사람은 항상 적정선을 지키는데, 내가 너무 들떠 있었구나...
가라앉은 기분은 좀처럼 풀리지 않았고, 준희의 기분 처럼 날은 흐렸다.
잠을 자야하는데, 계속 재현과 진경의 대화가 머리속에 멤돌고, 혼자서 들떠서 가까이 다가가려고 했던 자신이 후회됐다.
몇 시간을 뒤척이다가 딱 물 한잔 마시고 이제는 자야겠다는 마음으로 부엌에 물을 마시러 나갔다.
창밖으로는 비가 하늘에 구멍이라도 뚤린 것처엄 내리더니 천둥도 치고 있었다.
밉기만 한데, 속상함의 대상이 재현이었는데,
지나가듯 재현이 했던 말이 기억난다.
“내가 전쟁 영화랑 액션 영화를 못 봐요. 예전에 눈앞에서 폭죽 터지는 걸 본적이 있는데, 그때 너무 가까이에 있어서 트라우마로 남았어요..”
“실제가 아니라도 힘들어요?”
“폭죽소리, 총소리, 가끔은 천둥소리에도 이명이 들리고 숨이 안 쉬어 져요. .”
작은 소리에서 예민하게 구는데 천둥소리는 힘들어 할게 뻔해서 괜찮은지 걱정 됐다.
그래도 오늘은 아니야. 걱정도 안 해줄거야 라고 마음을 다잡으면서 물을 마시고 준희는 다시 방으로 들어갔다.
-"천둥소리가 꽤 커서,,괜찮은지, 확인하려고 왔어요.”
“…. 괜찮을 것 같아요."
“그래요 그럼. 내가 괜한 오지랖을 부렸네요.”
부들부들 떨면서 식은땀을 흘리고 있었으면서 재현은 준희에게 괜찮을 것 같다고 한다.
아무리 친한 친구지만, 준희에게 큰 실수를 했다. 아직 제대로 사과도 못했는데 와서 잠시만 옆에 있어 달라 할 수가 없었다.
재현의 거절 앞에서 준희는 정말 마음을 굳혀야 겠다 생각한다.
한걸음 다가와 좋고 왜 준희가 다가가려고만 하면 뒤로 두발짝 물러나는지. "천둥번개야 더 크게 쳐라" 하면서 방으로 돌아갔다.
한참을 더 뒤척이다 잠이 들려고 하는데, 정말 "쾅!!!" 하는 소리와 함꼐 번쩍 세상이 밝아졌다가 어두워 진다.
나도 천둥소리에 이렇게 놀라는데 재현은 어쩌고 있을까 하는 생각에 더 이상 잠이 오지 않는 준희였다.
다시 재현의 방문을 열고 들어갔더니 악몽을 꾸는 듯 끙끙 거리고 있는 재현이 보였다.
침대에 걸터 앉아서 재현의 손을 토닥토닥 다독여 줬다.
"이렇게 힘들어 할거면서..... 내가 진짜 착해서 한번만 도와준다."
잠들어 있는 재현을 토닥이면서 준희가 작게 말한다.
인상을 쓰고 있다가 준희의 토닥거림에 조금은 안정을 찾는 재현이었다.
다시 쿠쿵 하고 치는 천둥소리에 재현이 토닥이던 준희의 손을 잡아온다.
천둥소리가 젖어 들고 재현도 잠이 든 것 같아서 이제 괜찮겠다 하고 나가려고 잡고 있던 손을 빼려고 하는데
재현이 손에 힘을 줘서 잡아온다.
"가지마요. 나랑있어요."
완벽하기만 했던 모습 뒤에 한없이 약한 모습을 내보인다.
강하기만 하던 사람이, 다가가려고 하면 뒤로 물러나던 칼 같던 사람이 손을 잡아오면서 가지말라 한다.
"잠든 줄 알았어요."
"계속 깨 있었어요. 이렇게 천둥치는 날은 못자요."
"처음부터 같이 있어 달라고 하지 그랬어요"
"낑낑대는 모습 보여주기 싫어서.. 준희씨한테 그런 부탁할 염치도 없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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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고 있는 줄 알았더니 이런 날은 잠을 아예 못 잔다고 하는 재현이다.
눈을 감고 이야기 하던 재현이 결심 한듯 준희를 보면서 말한다.
"아까 사무실에서 그런 소리 듣게 해서 미안해요. 어떻게 사과할지, 집에 오는 길 내내 그 고민만 했어요."
천둥소리를 무서워 한다는 핑계로 손을 잡고, 방이 어두워서 얼굴을 보지 않아도 된다는 핑계로 평소에는 못할 말들을 해본다.
미안했다고, 사실은 나도 마음을 많이 쓰고 있다고.
내 마음이 이제는 당신에게 진심인것 같아서 당신이 받은 상처가 신경쓰이기 시작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