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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자."
여태 아무말도 안하다가 다짜고짜 가자고 하는 그의 말에 그녀는 적잖게 당황한듯 싶었다.
"어, 어딜요.."
그와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 고개를 푹 숙이곤 필사적으로 눈동자를 굴리는 그녀의 모습이 안쓰러웠다.
만난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그의 눈치를 보기 시작한 그녀였다.
"어디긴 어디야. 우리집이지."
어린신부.01
"시,싫어요. 전 제가 살던데로 갈거에요.."
"너 여기 왜 왔는지 몰라?"
여주의 말은 앞에서 걷고있던 윤기의 발걸음을 멈추게 하기에는 충분했다.
윤기는 여주의 말을 그냥 어린아이의 투정으로 받아줘야 하는건지 아니면 현실을 부정하고 싶은건지 구분이 가지 않았다.
말은 더듬어도 제 할말은 꼬박꼬박 다 하는 여주가 윤기의 눈에는 그저 작은 고양이의 발악처럼 보였다.
낯선 곳으로 떠나기 싫은, 작은 아기고양이.
"..정확히는 모르는데.. 그,그쪽이랑 결혼하러..?"
정확히 모르겠다는 답변을 뒤로 여주는 잠시 고민했다.
제가 왜 여기에 온 건지 이유를 알 수 없어서.
그녀의 대답은 자신을 이 건물로 데려왔던 남자들의 대화를 끼워맞춘 것이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애를 여기까지 데려온건가 싶어 윤기는 인상이 찌푸려졌다.
그의 옆에 서있던 검은 양복을 입은 남자들은 그의 표정을 관찰하다 그대로 굳어버린 것 같았다.
또 엄청 깨지겠구나, 라는 생각과 함께.
"니 말대로 너 나랑 결혼하러 와서, 이제 너네 집 못가."
윤기는 뒤를 돌아 허리를 숙여 여주와 눈을 마주치며 얘기했다.
둘의 만남 이후 윤기가 제일 길게 꺼낸 말이었다.
평소의 윤기는 무뚝뚝하고, 남에게 관심조차 없던 사람이었다.
그랬던 윤기가 하는 행동은 아무것도 모르고 끌려온 여주에게 베푸는 작은 친절이었다.
"왜요, 지금 당장 결혼하는 것도 아니잖아요."
말은 더듬지 않아도 그녀가 윤기의 눈치를 본다는 건 행동으로 충분히 드러났다.
윤기가 눈을 마주치려 허리를 숙여 내려왔음에도 그녀는 그와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애꿎은 그녀의 손가락만 괴롭혔다.
"진짜 모르고 왔나보네. 너 팔려온거야. 여기로."
"..네?"
여주는 제 귀를 의심했다. 정략결혼이라는 생각은 하지도 않았다.
여주의 집 형편은 정략결혼을 할만한 위치가 못되었으니까. 위치가 못된다기 보단,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는 게 맞는 표현일지도 모른다,
오히려 팔려왔다는 말이 현실성이 있었지만 그녀는 그의 말을 믿고싶지 않아보였다.
그녀는 금세 붉어진 눈시울로 고개를 들어 윤기와 눈을 마주쳤다.
"다시, 다시 한번만 말해주세요. 잘못 아신거겠죠, 그럴리 없어요."
그녀는 애써 눈물을 삼키며 고개를 저었다. 아닐거라고, 당신이 잘못 알고있는 거라고.
"너네 집에 잔뜩 쌓여있던 빚. 너랑 바꿔치기 한거라고."
윤기는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여주가 마치 일주일 전의 제 모습을 보는 것만 같았다.
여주에겐 집에 찾아와 돈을 내놓으라며 온 집안을 뒤집어놓던 그 남자들의 보스라는 사람과, 윤기에겐 돈을 받아내야 할 사람들의 딸과 결혼이라니.
두사람이 만나 결혼을 한다는 것 자체가 아이러니한 상황이였다.
아마 윤기는 제 아버지의 명령이 아니었다면 이미 이 결혼을 깨고도 남았을것이다.
하지만 그의 아버지는 그가 유일하게 존경하고 따르는 사람이였으며 하나밖에 없는 그의 의지처였다.
때문에 윤기는 이 말도 안되는 결혼을 거부 할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그대로 받아들이는 수 밖에 없었다.
"..누가 그래요, 나랑 바꿔치기 한 거라고."
여주의 눈은 믿을 수 없다는 듯 흔들렸다. 동공이 흔들리는게 눈에 보여 안쓰러워질 만큼.
하지만 윤기는 타인의 변화를 자세하게 관찰하고 알아챌 사람이 못 되었으며, 설령 알아챈다 해도 그걸 보듬어줄 성격이 되질 못했다.
말을 돌려서 할 줄도 몰랐다.
"서류에 그렇게 써 있던데. 보여줘?"
여주는 고개를 저으며 고개를 푹 숙였다. 그녀는 어쩌면 이미 짐작하고 있었을 수도 있다.
언젠가 제 부모가 더이상 팔게 없어지면, 더이상 담보로 걸게 없어지면 저를 내놓겠지.
하지만 그녀가 마음의 준비를 할 시간 따위 주지않고, 작별인사를 하지도 않고 이렇게 보내버리는 건 그녀도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울음이 터져나오려는 것을 그녀는 간신히 참아냈다.
고개를 숙이고 있는 그녀가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윤기는 제 머리를 헝클이며 뒤돌아 걸었다.
"알아들었으면 조용히 하고 가자."
앞에서 걷는 윤기의 뒷모습을 보며 여주는 할 수 있는거라곤 그의 뒤를 얌전히 따라가는 수 밖에 없었다.
.
.
윤기의 회사와 비슷한 높이의 아파트에 들어서자 여주는 저도 모르게 몸을 움츠렸다.
윤기는 익숙하다는 듯 엘리베이터에 올라타 9층을 눌렀다.
그에 여주 역시 행여나 놓칠까 그가 올라탄 엘리베이터에 몸을 실었다.
"0309."
엘리베이터안의 정적을 깨고 윤기가 먼저 입을 열었다.
앞뒷말도 없이 다짜고짜 들려오는 네자리의 숫자에 생각에 잠겨있던 탄소는 화들짝 놀랐다.
"네?"
이런 상황에서도 다양한 표정을 짓는 여주에 비해 윤기는 표정이 단 두가지 뿐이였다.
정색이 아니면 인상을 찌푸리는 것, 그게 다였다.
여주가 다시 되물어오자 윤기는 인상을 찌푸렸다.
"집 비밀번호. 나 두 번 말하는 거 싫어하니까 한번에 알아서 들어."
인상을 찌푸리며 말하는 윤기였지만 여주는 신경쓰지 않는 듯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집에 들어서자마자 여주는 모든게 신기한듯 회사에 처음 도착했을 때와 같이 고개를 두리번거리기에 바빴다.
그런 모습을 두번째 보는 윤기는 원래 저런 아이 인가보다 싶어 그녀에게서 신경을 거두곤 제 집을 살폈다.
"야. 그만 고개 돌리고 이쪽으로 와."
윤기는 여주가 지낼 방을 알려주려는 듯 그녀를 불렀다.
그 말에 여주 역시 집안을 두리번거리던 것을 멈추고 그의 목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가자 그가 남색의 캐리어와 함께 연두빛의 방 문앞에 서있었다.
"이건 니 짐, 여기가 니 방. 내방은 저기, 갈색 문. 정리하고 나와. 줄 거 있어."
여주는 고개를 끄덕이곤 연두색 문으로 들어갔다. 그녀가 살던 집의 거실과 부엌을 합친 정도의 공간을 보곤 넋이 나갔다.
넋이 나간 상태로 멍하니 제 방을 훑어보기도 잠시, 그녀는 줄게 있다는 윤기의 말에 얼른 짐을 정리하고 나가려 한쪽에 자리를 잡고 앉아 캐리어를 열었다.
원래도 없었던 짐인데, 캐리어를 열자 고작 옷 몇 벌과 그동안 그녀가 모았던 편지들, 그녀의 방에 버리지못해 구석에 쌓아두었던 것들이 있었다.
하지만 그 마저도 캐리어를 가득 채우기엔 역부족이였는지 캐리어는 빈공간이 가득했다.
그녀는 더 비참한 느낌이 들기전에 서둘러 짐 정리를 했야겠다고 생각했다.
몇 벌 안되는 그녀의 낡은 옷은 값비싼 옷장에 걸려 이질감을 주기에 충분했으며, 버리지 못해 구석에 모아뒀던 잡동사니들이 책상 밑 수납공간에 들어가 처음에 그녀가 방에 들어갔을 때와는 다른 분위기를 주었다.
그녀가 대충 방 정리를 끝마치고 문을 열고 나서니 거실 소파에 앉아있는 그가 보였다.
윤기는 방 문이 열리는 소리에 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어찌할 줄 모르고 그대로 얼어버린 그녀가 서 있었고, 그는 제 쪽으로 오라며 그녀를 불렀다.
"오래도 걸리네. 여기로 와."
여주가 제 앞으로 오자 윤기는 제 옆에 있던 쇼핑백을 건넸다.
"열어봐"
갑자기 제 손에 쥐어지는 쇼핑백에 여주는 당황했다.
"이게 무슨..."
쇼핑백을 여니 지갑이 들어있었고, 그 지갑 안에는 카드 한 장이 들어있었다.
카드로 결제를 해주기만 했지 제 카드를 써본 적도 가져본 적도 없는 그녀는 들어있는 카드를 보고 놀랐고, 이어지는 그의 말에 한번 더 놀랐다.
"필요한거 사라고. 아, 카드내역 다 나한테 문자오니까 허튼 데 가서 쓸 생각 하지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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