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지마, 왜 울어."
나도 모르게 말을 하면서 울고 있던 모양이였다. 세훈이는 손을 뻗어 내 눈물을 닦아주었다. 너는 언제나 내 추억 속에서 빛났다. 어떤 말을 했어도, 어떤 행동을 했어도, 오세훈이라 용서가 되는 그런 사람이라는 걸 너는 알고 있을까. 너는 한참을 말 없이 내 얼굴을 어루만졌다. 눈물은 멈출 생각이 없는 듯 했고, 휴대폰은 수정이의 이름을 띄우며 화면을 반짝였다. 세훈이가 내 노트북으로 다운 받은 영화가 재생 되기 시작했고, 서서히 내 눈물도 말라갈 때, 세훈이가 드디어 입을 뗐다.
"너는 별 같아, 낮엔 안 보여서 보고 싶고 밤엔 예뻐서 더 보고 싶어."
난 이 말이 무슨 뜻인지 알고 있다. 세훈이에게 마지막으로 써 준 편지, 18살 겨울, 대회를 앞둔 세훈이에게 써 준 편지의 끝자락에 적은 문구이다. 세훈아, 너는 별 같아. 낮엔 안 보여서 보고 싶고, 밤엔 예뻐서 더 보고 싶어. 생생하게 기억이 난다. 멈췄던 눈물이 다시 흐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세훈이는 다시 내 눈물을 닦아주며, 말을 이었다.
"행복해, 항상 지금처럼만 우리 함께 하자. 결혼 해서 애기도 낳고, 행복하게 살자. 아빠랑 할머니한테 효도도 하면서."
"널 보고 있어도 보고 싶단 말이 계속 나와, 나 생각보다 널 많이 좋아하는 거 같아."
"사실 네가 고백했을 때, 뭐라고 대답할지 몰랐어. 그런데 확실한 건, 나도 예전부터 너를 좋아하고 있었다는 거야. 나도 많이 좋아해."
세훈이는 내가 했던 말, 써줬던 편지의 내용을 글자 하나 안 틀리고 정확히 기억하고 있었다. 다시 흐르기 시작한 눈물은 주체할 수 없이 쏟아졌고, 세훈이는 나를 꽉 안아줬다. 내가 소리를 내면서 울기 시작하자, 세훈이는 가만히 내 등을 쓸어주었다. 함께 했던 시간이 머리를 스쳐지나갔다. 사실 언젠가 우리가 다시 만날 거라고 나는 굳게 믿고 있었다. 내가 다른 남자를 만나고, 네가 다른 여자를 만나는 건 상상만으로도 너무 싫었다. 세훈이가 아무 대답이 없었지만, 불안하거나 겁이 나진 않았다. 내 마음을 털어놔서 그런지 오히려 더 속이 시원했다.
만약 여기서 세훈이가 나에게 그럴 수 없다고 대답을 해도, 난 좋다. 19살 가을부터 전해지지 못한 내 마음이 드디어 전해져서 난 너무 행복했다. 이제서야 내 마음이 제 주인을 찾은 거처럼 안심이 되는 순간이였다. 세훈이는 안고 있던 손을 풀더니 가만히 나를 쳐다봤다. 그 눈빛이 너무 따뜻해서, 행복하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그 때, 세훈이가 나에게 입을 맞추기 시작했고 나는 세훈이의 손을 꽉 잡았다. 세훈이는 여러번 내 입술에 짧게 입을 맞추더니, 나를 보며 웃었다.
"난 네가 계속 내 옆에만 있었으면 좋겠어, 딴 사람한테 가는 것도 싫고, 딴 사람 보는 것도 싫어. 그냥 우리 사귀면 안 돼?"
그렇게 우리는 다시 만나게 되었다. 전보다 훨씬 더 행복했고, 서로를 배려했다. 이해하고 맞추려고 노력했고, 더 사랑했다. 행복한 하루의 연속이였다. 세훈이는 계속 우리 집에서 지냈고, 나는 신혼부부 같은 느낌이 들어 좋았다. 그리고 우리는 다시 만나기 시작한 시점에서 오늘 처음으로 다퉜다. 할머니와 아빠를 보러 가는 길이였다. 물론 출발부터 서로 기분은 좋지 않았다. 나는 세훈이가 피곤할 거 같아서 기차를 타자고 했고, 세훈이는 직접 운전 해서 가겠다고 했다. 시작부터 삐걱거린 우리는 결국 세훈이의 차를 타고 출발했다.
"나 좀 자도 돼?"
"안 돼, 운전하는데 옆에서 자는 거 아니야."
"그러게 내가 기차 타자고 했지."
내 말에 세훈이는 나를 쳐다봤고, 나는 그 시선을 피하고 잠을 청했다. 내가 잠들었음에도 세훈이는 나를 깨우지 않았고, 나는 휴게소에 도착해서야 잠에서 깼다. 기지개를 펴면서 일어나자, 세훈이는 미워 죽겠어 하면서 나를 째려봤다. 나도 자존심을 내세우면서 사과 하지 않았고, 세훈이 역시도 마찬가지였다. 세훈이와 다툰 것도 그렇고 지갑을 까먹고 안 챙기는 바람에 호두과자를 못 사먹어서 나는 굉장히 예민했다. 그 때 세훈이가 차에서 내리더니 어디론가 걸어갔다. 어디 갈 거면 간다고 말을 하던가. 궁시렁 궁시렁 거리면서 세훈이를 기다리다가 수정이에게 전화를 걸었다. 수정이에게 투덜거리고 있는데, 세훈이가 문을 열고 다시 차에 탔다.
"응, 나 세훈이랑 싸웠어! 그래서 몹시 기분이 좋지 않아!"
내 말과 동시에 나를 쳐다본 세훈이가 내 무릎에 호두과자를 내려놓았다. 놀라서 세훈이를 쳐다보자, 맨날 먹잖아 하고는 차를 출발시켰다. 수정이와의 전화를 끊고, 호두과자를 하나씩 입에 넣다 보니까 기분이 좋아져서 손을 뻗어 세훈이의 손을 잡았다. 피식 웃는 소리가 들리더니 세훈이가 다시 내 손을 깍지 껴서 잡았다. 다시 기분 좋게 도착한 부산에서 오랜만에 보는 할머니와 아빠를 만났다. 이것 저것 음식부터 챙겨주시는 모습에 괜히 옛날 생각이 났다. 할머니께선 둘 다 부산에 있을 땐 보기 쉬웠는데 서울에 가더니 보기가 도통 힘들다며 투정하셨다. 나는 웃으며 자주 올게요, 아니면 할머니 올라가서 우리랑 같이 살까? 하고 애교를 부렸고, 아빠는 옆에서 나중에 결혼하면 둘 다 부산 내려와서 살아 라며 웃으셨다. 당황해서 세훈이를 쳐다보자 입모양으로 내가 얘기 했어 란다.
오랜만에 외식이나 하자는 아빠의 말에 할머니가 좋아하시는 스시집을 찾았다. 옛날에 있었던 일부터 요즘 근황까지 브리핑을 마친 우리는 드디어 밥을 먹나 했는데, 할머니께서 진지하게 우리 둘을 부르셨다. 할미, 죽기 전엔 결혼 할 거지? 할머니의 질문에 우리 둘은 잠시 멈칫했다. 에이, 할머니 무슨 그런 말을 해. 죽긴 왜 죽어 할머니가! 내가 능청스럽게 얘기 하자, 할머니는 웃으시며 그래도 너네 결혼은 해야될 거 아니냐고 물으셨다.
"할게요, 일단 에리한테 멋있게 프로포즈부터 하고."
말을 마친 세훈이가 나를 보며 환하게 웃었다. 나도 그런 세훈이를 보며 웃었고, 아빠는 그런 우리 둘을 보며 웃으셨다. 밥을 다 먹고 세훈이 차를 타고 집에 돌아가는 길에, 할머니가 길을 좀 걷고 싶다고 하셔서 차를 세우고 바다를 따라 걷기 시작했다. 할머니는 예전 일을 회상하시며 아빠와 걸으셨고, 나와 세훈이는 그 뒤를 따라 걷고 있었다. 세훈이는 잠시 고개를 두리번 거리더니 내 볼에 입을 맞췄다. 야, 보면 어쩌려고! 내 당황스러운 목소리에도 세훈이는 해맑게 웃었다. 못말려, 진짜.
"아빠, 그만 들어 가자. 날씨 추워!"
내 말에 모두 차를 타고 집으로 향했다. 오랜만이다! 제일 먼저 뛰쳐들어간 집에는 내가 알던 그 모습 그대로 모든 게 남아있었다. 벽 한 쪽에 붙어있는 세훈이와 내 사진을 보고 달려가 앞에서 한참을 쳐다보자, 할머니께서 방에 들어가시다가 웃으셨다. 똑같아, 둘 다. 그 때나 지금이나. 할머니의 말에 내가 웃으면서 세훈이를 쳐다보자, 세훈이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확실히 넌 계속 예뻐지고 있어. 아빠가 세훈이의 말을 들었는지, 세훈이 작업이 많이 늘었다 하시며 웃으셨다.
"얘 완전 능글맞아, 아주 능구렁이야."
"그래서 넘어갔어?"
"아, 아빠!!!!"
아빠는 웃으시더니 할머니 방으로 들어가셨고, 우리는 거실에 앉아 한참을 멍하니 있었다. 나랑 결혼 할 거야? 내 질문에 세훈이는 고개를 끄덕였고, 나는 살짝 웃었다. 그 때, 준면이 오빠에게 전화가 왔다. 통화 내용을 옆에서 듣고 있자니, 정국이가 발목을 삐는 부상을 당한 모양이였다. 세훈이는 올라가야겠다며 짐을 챙겼고, 나는 방문을 열고 사정이 생겨서 올라가야겠다고, 다음 달 내로 한 번 다시 오겠다고 말한 뒤, 세훈이를 따라 집을 나왔다.
"괜찮겠지?"
"심각한 거 아냐."
말은 그렇게 했지만, 세훈이는 굉장히 불안한 거 같았다. 손을 뻗어 세훈이의 손을 꽉 잡았다. 운전을 하기엔 무리가 아닐까 생각했지만, 급하게 기차표를 구할 수 있는 것도 아니라서 차를 타는 방법 뿐이였다. 나도 걱정되는 마음에 아까와 달리 잠도 오지 않았고, 자꾸 시계만 쳐다봤다. 준면이 오빠가 와달라고 부탁한 정도면 큰 부상이 아닐까 하는 걱정도 되고, 큰 부상이 아니길 기도 하면서 서울에 도착했다. 너무 늦은 시간이라 병원엔 사람이 적었고, 나는 세훈이 손을 잡고 정국이가 있다는 병실로 향했다. 1인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에이전시 팀 사이에 앉아있는 정국이가 보였다. 세훈이는 바로 정국이 앞으로 성큼 걸어가 너 장난해? 하고 소리쳤고, 정국이는 고개를 숙이며 죄송해요 하고 사과했다.
말리고 싶었지만 내가 낄 수 없는 무언가가 느껴져서 가만히 있다가 세훈이가 화를 내려고 하기에 뒤에서 옷깃을 살짝 잡았다. 세훈이는 한숨을 쉬더니, 너 나랑 얘기 좀 해 하고 정국이를 밖으로 데리고 나갔다. 나는 세훈이에게 제일 놀란 건 정국이야, 많이 화내지마 하고 일렀고, 세훈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둘이 병실을 나가자, 여기저기서 한숨 소리가 들렸다. 내가 준면이 오빠한테 많이 심한 거야? 하고 물었고, 준면이 오빠는 고개를 저었다.
"대회 얼마 안 남았거든, 그래서 세훈이가 저렇게 화내는 거야."
준면이 오빠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다가 소파에 다리를 펴고 앉았다. 레이 씨는 대회 측과 연락을 하는 중인지 통화를 하느라 바빴고, 종대 씨는 다이어리를 손에 든 채 무언가를 열심히 적고 있었다. 민석이 오빠는 휴대폰 화면을 뚫어져라 보고 있었고, 준면이 오빠는 스트레칭을 하고 있었다. 그나마 덜 바빠 보이는 준면이 오빠를 손짓해서 불러 옆에 앉으라고 했다. 준면이 오빠는 옆에 앉아서 부상에 대해서 설명을 해줬고,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 말을 듣고 있었다. 얼마 안 지나 정국이가 목발을 짚고 병실로 들어왔고, 그 뒤로 초코우유를 든 세훈이가 따라 들어왔다. 초코우유를 정국이에게 건낸 세훈이는 몸을 돌려 나에게 딸기우류를 쥐어줬다.
"어이구, 챙길 사람만 챙긴다 이거지?"
준면이 오빠는 서운한 목소리로 투덜거렸고, 세훈이는 정국이를 쳐다보며 조심해 하고 당부했다. 준면이 오빠는 맨날 혼내고 초코우유 사주면 단 줄 안다고 궁시렁 거리더니, 자기도 초코우유 좋아한다며 민석이 오빠 옆으로 자리를 옮겼다. 민석이 오빠는 준면이 오빠를 보며 철 좀 들어라 하고 한마디 했고, 준면이 오빠는 괜히 발장난을 쳤다. 그리고 세훈이가 폭탄발언을 했다.
"나 2년 안에 결혼해요, 에리랑."
"뭐?! 에리야, 진짜야?"
"에리는 몰라, 아직 에리한테 프로포즈를 못 해서."
아니, 잠깐만. 너네 다시 만나? 준면이 오빠가 호들갑을 떨자, 민석이 오빠는 다시 만나니까 결혼 얘기 하겠지 하면서 준면이 오빠를 보며 혀를 찼다. 준면이 오빠는 뭐야? 나만 몰랐어? 하고 다시 소리쳤고, 통화를 끝낸 레이 씨는 준면! 제발 조용히 좀 해! 정국이 환자야 하고 나무랐다. 왜 다들 나만 갖고 그래 하고 오빠가 시무룩한 표정을 짓자, 종대 씨가 오빠의 어깨를 두드리며 힘을 내라고 응원했다. 시간이 늦었다고 자기가 있을테니 다 가보라는 민석이 오빠 말에 모두 병실을 나와 집으로 향했다. 집으로 가는 차 안에서 세훈이를 뿌듯한 눈으로 쳐다보자, 왜 그렇게 봐 하면서 귀가 빨개지는 세훈이다.
"이게 누구야, 나랑 결혼하신다던 오세훈 씨 아니야?"
"그만해."
"오세훈 선수, 결혼 하신다면서요? 신부는 어떤 사람인가요?"
"세상에서 제일 예쁜 사람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