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들을 나를 특이취향이라고 불렀다. 다들 싫어하는 것을 좋아해서 그렇다고 했다.
일련의 예로 나는 과제가 쏟아지는 시기를 좋아했다. 과제만 하다 보면 다른 걸 생각하는 겨를이 없어서 그랬다.
남들은 다 죽어간다는 과제 시즌에 홀로 꼿꼿히 서있는 나무처럼 과제를 해나갔다.
내가 제일 사랑하는 시기는 장마철이였다.
남들은 다 눅눅하고 습해서 싫어한다는 장마철을 제일 좋아했다.
이런 나를 제일 싫어하는 건 이동혁이 아닐까?
“야 솔직히 장마철엔 우리 만나지 말자”
자취방 문을 열고 들어오면서 이동혁이 불만을 터트렸다.
“치킨 사준다는 말에 뛰어온 사람이 누구더라”
“솔직히 치킨은 못참지”
“그럼 얌전히 다물고 먹자, 이동땡아”
“오케이”
장마철에 친구랑 먹는 치킨을 제일 사랑했다.
눅눅한 느낌과 습한 냄새, 비소리 그리고 내랑 가장 친한 이동혁까지.
완벽한 조화를 이루던 것을 깬건 한 순간의 벨소리였다.
“야야, 전화온다”
창가에 앉아 멍하니 밖을 바라보던 나에게 이동혁이 전화를 갖다줬고,
“누구야? 이름이 안뜨는데?”
“배달원인가?”
의심없이 전화를 받았고, 눅눅한 날씨와 걸맞게 하늘을 찌르던 내 기분도 눅눅해졌다.
“이여주 핸드폰 맞나요?
“네 맞는데요? 누구세요?”
“.. 나 이제노”
잊고 있었던 그 이름.
추억 저 너머에 뭍어두었던
단 한번도 꺼내지 않아 먼지가 소복히 쌓인 듯한,
영화관의 상영기가 돌아가듯 스쳐 지나가게 하는 그 사람, 그 이름.
이제노가 돌아왔다.
나랑 이동혁은 산후조리원에서 만났다. 엄마들 끼리 산후조리원 동기라나 뭐라나?
어쩌다 보니 같은 동네, 어쩌다 보니 같은 조리원, 어쩌다 보니 같은 나이와 비슷한 생일.
위와 같은 이유로 나랑 이동혁은 서로 기저귀를 차던 시절부터 지금까지 계속 친구였다.
고등학교까지 같은 학교로 발령받던 날 나랑 이동혁은 기뻐하는게 아니라 지겨워 했고, 서로를 노려봤다.
“대체 우리는 언제까지 같이 다니냐?”
“말은 바로하자 여주야. 이 오빠가 너랑 같이 다녀주는거지”
“지랄났네. 동혁이”
지겹도록 붙어다니던 우리는 결국 같은 고등학교에 진학하기에 이르렀고, 다른 반이 됨으로써 겨우겨우 찢어질 수 있었다.
설렘을 안고 들어온 교실에는 이미 절반 이상의 아이들이 자리를 잡고 앉아 있었다.
“은수 오랜만”
“너무 차갑다 차가워. 우리 간만에 보는거 알아?”
"우리 이틀전에 봤어"
"그래도 그렇지, 난 여주 보고싶었다구"
같이 다니던 은수랑 혜은이랑 같은 반이라 다행이라고 생각할 때 쯤 교실 너머로 익숙한 머리통 하나가 보였다.
"친구야, 저기 여주 좀 불러주라"
분명 아침에 나랑 같이 등교하고 같은 버스 타고 내린 이동혁이 왜 나를 찾는 것인지
"아 왜"
"야야야야 여주야, 나 제발 한번만 살려주라"
"왜, 첫날부터 대체 뭔 사고를 쳤길래"
"나 제발 넥타이 한번만ㅜㅜㅜㅜㅜ 진짜 제발 여주야ㅜㅜ 나 한번만 살려주라"
"아침에 차고 왔잖아? 아니야?"
"그거 나재민이 빌려가서 튀었음ㅜㅜ 걔 지금 내 연락도 안 받아 빨리빨리, 조례만 끝나고 반납할게"
"그럼 나는?"
"우리 담임 학주란 말이야ㅜㅜ 넌 꼭 첫날부터 친구가 청소하는 모습을 봐야겠니?"
"이번주 주말 닭발"
"알겠다고ㅜㅜ"
아 나재민과 나랑 이동혁의 관계는 같은 아파트 동갑 친구라고 해두는게 편할 것 같다.
사차원 나재민과 천방지축 이동혁이 붙어 다니면 아마 이세상에 못 이길 게 없을 거였다.
같은 학교로 배정받고 아마 이동혁이랑 장난치면 넥타이를 빼간듯 했다.
할수없이 내 목에 걸려있는 넥타이를 빼서 넘겨주자 마자 이동혁은 꽁무니 빠지듯 자기 반으로 뛰어갔다.
한순간에 휑해진 교복 차림으로 자리로 돌아가자 쟤는 아직도 저러냐는 친구들의 타박소리가 들렸고, 그 뒤로 첫 수업을 알리는 종 소리가 울렸다.
종 소리와 함께 등장한 담임 선생님 뒤로 커다란 스포츠백으로 어깨에 둘러맨 남학생 하나가 졸졸 따라 들어왔다.
"얘들아 안녕, 난 이번에 2학년 4반 담임을 맡게 된 문태일이라고 하고 과목은 국어야. 앞으로 잘 부탁해."
"옆에 이 친구는 원래 체육 특기생 반으로 가야하는 친구인데 전학 절차가 조금 늦어져서 우리반으로 온 친구야. 다들 첫 만남이니까 잘 어울리길 바래."
"소개할까?"
어깨 가방끈을 만지작 거리던 친구는 앞을 보면서 천천히 입을 땠다.
"이제노라고 합니다. 종목은 야구고,,,,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아마 내가 평생 못 잊을 이제노와의 첫만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