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사람이 갑자기 왜이래...?"
애타는 태형의 마음은 하나도 모르는 여주. 점심을 먹다가 갑작스러운 태형의 메시지에 모든 행동을 멈추고 만다. 어린이 날이라 조카를 보러 가야 한다는 것은 순도 100%의 거짓말이므로, 여주는 급하게 몸을 일으켜 캐리어를 찾기 시작했다. 태형이 여주의 집에 올 때 쯤, 떠나는 척이라도 하기 위함이었다. 퇴사를 하면 언젠가 여행을 떠날 것이라며 사두었던 캐리어를 이런 식으로 꺼낼 줄이야...
♪♬♩
김태형 작가님
태형에게 전화가 온 것은 여주가 캐리어를 감싸고 있는 비닐을 다 제거 했을 때 쯤이었다. 혹시 벌써... 집 앞은 아니겠지? 두려운 마음으로 전화를 받은 여주.
"ㅇ... 여보세요...?"
"지금 통화 돼요?"
"네, 네! 당연히 되죠."
"그쵸, 당연히 되겠죠. 여주 씨는 조카가 없으니까."
"그걸 작가님이 어떠케...!!"
"저번에 여주 씨가 말해줬잖아요. 아이를 좋아하는데 조카도 없어서 아쉽다고."
"네에... 혹시 몇 시 쯤 오실 예정이신지..."
"10시 쯤 괜찮아요? 너무 늦은 시각인가..."
"아뇨. 작가님 시간에 제가 맞춰야죠. 괜찮습니다."
(사실 안 괜찮음)
"네, 그럼 그때 봅시다."
"하씌... 거짓말 친 거 다 들켰겠네..."
-
"... 김태형 작가님?"
"... 저 아세요?"
그날 저녁 10시. 평소보다 작업을 일찍 끝내고, 생각정리 겸 아이스크림을 뇸뇸하며 여주의 집 앞에 도착한 태형. 여주에게 잠시 나오라고 연락을 하려던 찰나, 제게 아는 척을 해오는 남자에 행동을 멈추었다. 내 팬인가...? 태형은 한 번도 얼굴을 공개해본 적 없었기에, 의아함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태형에 호석이 입을 떼려던 그 순간...
"야, 정호석!!! 우리 헤어진지 반 년이 넘었는데 이제와서 연락하는 이유가 모..."
"..."
"..."
"몬데... 이 상황...?"
자신과 10년 사귀었던 구 남친과, 구여친이 10명인 현 짝남. 의도치 않은 삼자대면을 제 집 앞에서 하게 된 여주는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 상황에 눈만 굴려가며 부단히 상황 파악 중이었다.
"이 밤까지 일 때문에 여주도 찾아오시고."
"예전에 여주 마중 나갔을 때도 느꼈지만, 작가님 정말 열정 넘치시네요."
"야, 언제적 이야기를... 그리고 너 술 냄새 대박이야..."
"일어나서 후회하기 전에 빨리 ㄱ..."
"누가 그래요? 일하러 온 거라고."
"자... 작가님?"
"일하러 온 거 아니고, 사적인 사이로 온 건데."
"... 무슨 뜻입니까?"
"이 시간에, 남녀가, 사적으로 뭘 하겠습니까?"
"저기... 작가님? 도대체 무슨 말씀이신지..."
"그리고 정호석. 너도 무례하게 굴 거면 빨리 집에 가."
"여주는 작가님한테 별 생각 없어 보이는데."
"가라는 소리는 못 들었나 봅니다."
"저기..."
"이 시간에, 사적으로 만나는 남녀 치고는 한쪽만 유독 애타는 것 같아서."
"작가님은 본 적 없죠?"
"여주가 사랑에 빠진 눈빛."
"아, 사랑에 빠진 눈빛 자체를 본 적 없으려나."
"야... 정호석... 그만하라고..."
"구질구질하게 술 마시고 찾아온 옛 남친 치고는 오지랖이 넓은 발언이네요."
"둘 다 그만!!!!"
"작가님, 정말 죄송한데 제가 나중에 다시 연락 드릴게요."
"그리고 정호석 너는 나 따라 들어와."
"들으셨죠? 그럼 조심히 들어가세요, 작가님."
"..."
태형은 멀어져가는 여주와 호석의 모습을 뚫어져라 노려보았다. 여주에게 간간히 말로만 들었던 전 남자친구는 생각보다 강적이었다. 제 언변도 어디가서 꿀릴 정도는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호석의 말은 곱씹어볼수록 불쾌하고 짜증난다. 이런 감정이 드는 이유는...
"작가님은 본 적 없죠?"
"여주가 사랑에 빠진 눈빛."
"아, 사랑에 빠진 눈빛 자체를 본 적 없으려나."
호석의 말이 반박할 수 없을 정도로 정확했기 때문이다. 3주 내내 저를 피하던 여주를 어렵사리 만나러 왔는데, 그 기회를 빼앗겼다는 생각에 분한 태형이었다. 그것도 10년 사귄 그녀의 전 애인에게. 이글거리는 눈으로 여주의 집을 바라보고 있던 태형은 한참이나 그 앞을 떠날 수 없었다.
-
"이렇게 다짜고짜 찾아오면 어떡해. 작가님이랑 약속 있었단 말이야."
"너 원래 밖에서는 같이 일하는 사람 안 만나잖아."
"어? 어... 그거야 니가 싫어했었으니까..."
"근데 지금은 서로 간섭할 사이 아니잖아."
"... 그렇지."
"그러니까 앞으로 이런 식으로 찾아오지마. 서로 곤란해지니까."
"곤란해지는 건 내가 아니라, 너랑 그 작가인 것 같은데."
"... 내가 미안. 취해서 보이는 게 없었나보다."
"앞으로 찾아오는 일 없을 거야."
"..."
(괜히 마음 약해지는 여주)
"잘 지내."
너도. 여주의 대답이 끝나기 전에 여주의 집을 나선 호석. 여주는 텅 비어버린 자리를 보고 있자, 가슴이 먹먹해짐을 느꼈다. 사랑이라는 감정에서 흘러나오는 느낌은 아니었다. 그저 10년 간 함께 해오던 호석과 완전한 종지부를 찍은 듯해서...
"따쉬... 여보세요...?"
"작가님... 혹시 괜찮으시면 술 한 잔 할래요...?"
태형을 불러 술을 마시기로 했다.
-
"..."
"..."
이렇게 어색할 줄 알았었다면 여주는 태형을 부르지 않았을 것이다. 그저 몇 달 전에 함께 가졌던 술자리 분위기가 나름 즐거웠기에 불렀던 것인데 태형은 이전 같지 않았다. 더불어, 이제는 제 마음도 그때와 같지 않으니 이 자리가 불편한 것은 당연하다. 손님은 왜이리도 없는 것인지. 여주는 소주를 한 입에 털어넣고, 용기를 내어 입을 떼었다.
"아까 상황은 진짜 미안해요. 기분 나빴죠."
"원래 그렇게 예의 없는 애가 아닌데 술을 많이 마셔서..."
"... 화났어요?"
구구절절 사과와 해명을 하는 여주를 바라보던 태형은 속이 타는 것이 느껴져 소주로 목을 축였다. 평소, 쓰다는 이유로 술을 좋아하지 않는 그였지만 오늘따라 왠지 달게만 느껴졌다. 호석과 여주가 집에 들어간 지 한 시간도 되지 않아 이렇게 저와 마주보고 있다는 사실은 좋았으나, 제 앞에서 자꾸 호석을 감싸는 말을 뱉는 여주의 입술은 너무도 미웠다. 호석을 만난 뒤부터 가슴께가 일렁이고 속이 답답한 게 왠지 질투가 나는 것 같기도... 잠깐, 질투?
"여주 씨."
"네... 왜요?"
"귀여워 보이고, 연락을 기다리게 되고, 다른 사람과 함께 있는 걸 보면 질투 나는 거. 이거 사랑 맞죠?"
"다른 건 아니고, 작품 때문에."
(화난 거 아니었나? 이와중에 작품 생각이라니, 작가는 작가네.)
"ㄱ... 그쵸. 사랑까지는 몰라도 좋아한다는 건 확실하죠."
"... 그렇구나."
지금껏 10명의 여자친구가 있었지만, 단 한 번도 제가 좋아해서 사귀었던 적이 없었던 태형은 몇 주 전부터 이상하던 제 행동이 그제야 이해됐다. 내가 사랑에 빠진 거구나.
태형이 여주에 대한 자신의 감정을 깨닫자, 방금까지만 해도 답답하던 술자리의 분위기가 금방 풀어졌다. 평소에도 제 감정을 숨기는데 쥐약이었던 태형이 제 마음을 인정하자마자 여주에게서 느껴지는 사랑스러움에 웃음을 숨길 수 없었기 때문이다.
(갑자기 뭐지. 왜 웃는 거지.)
(뭔지 모르겠지만 같이 웃자.)
태형의 감정 변화를 눈치 챌 리 없는 여주. 그저 태형의 기분에 맞춰주기 위해 미소를 유지할 뿐이었다.
-
술자리 이후, 여주와 태형에게 공통적인 큰 변화가 생겼다. 바로 각자의 마음을 인정하고 짝사랑을 시작하게 된 것.
"음... 작가님."
"왜 불러요."
"혹시 최근에 심경 변화가 있었나요? 묘하게 스토리가 좀..."
"스토리가 왜요?"
(뭐야... 왜이렇게 얼굴 들이대. 심장 터질 것 같네.)
"크흠... 아니, 음..."
"요즘따라 스토리가 되게 달달한게..."
"ㅎ...혹시 여자친구라도 생기셨어요?!"
"ㅋㅋㅋㅋ 뭔 소리예요. ㅋㅋㅋㅋ"
"뭐... 아님 다행이고요."
"아, 다행이 아니라 아님 말고요..."
(ㅎㅎ 귀엽다 ㅎㅎ)
물론, 서로에게 쉽게 다가서지는 못하는 두 사람이었다.
-
上, 下로 찾아 뵌다고 했으나, 쓰다보니 분량 조절을 실패해서
上, 中, 下로 찾아뵙게 되었습니다!
너무 길어지다 보니 답답하시진 않을까 조금 걱정이 되네요...
여러모로 부족한 글 봐주시는 분들 정말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