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컨택
By Re.Ong
* * * * * * *
08.
자리를 옮긴다.
여기저기 책상과 의자를 끌어당기는 소리가 난무하다. 중간중간 선생님의 말소리가 들렸지만 거칠게 끌어당기는 의자소리에 잘 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무슨 소리를 하는건지는 대충 감이 잡힌다. 아침에 반에 들어오자마자 교탁에 책자를 쾅하고 내려놓으신 선생은 요즘들어 너희들의 정신이 썪어빠졌다 니
수업태도도 좋지 않다 등등 우리들의 태도에 관해 불만을 털어놓으며 자리를 옮기라고 명령을 내렸다. 제비뽑기 같은 유치한 짓도 하지 않았다. 선생님은 미리 우리들의
이름을 무작위로 네모난 빈칸에 입력하고선, 그것을 출력해 우리에게 뿌려주었다. 종이를 받아든 종인은 자신의 이름이 쓰인 곳을 발견하고 한숨을 푹 쉬었다.
종인의 자리는 뒷문 바로 옆에 놓인 4분단 맨끝줄. 겨울엔 엄청 춥고, 여름엔 에어컨과 떨어져있어 시원한 바람이 하나도 들어오지 않는 지옥의 자리.
게다가 복도에서 떠드는 아이들때문에 집중도 되지 않고, 문을 열고 들락날락 거리는 아이들때문에 가끔씩 의자에 문이 부딪혀 신경이 날카로워지는 최악의 자리였다.
종인은 자신의 가방을 싸들어 책상위에 올렸다. 책상을 옮기기 위해 책상 끝을 잡아든 종인은 흘끗 옆을 보았다. 가만히 의자에 앉아 자리배정표만 뚫어지게 보는 백현은
미동도 않는다. 종인은 황급히 다시 종이를 내려다보았다. 변백현은 운좋게도 그대로였다.
그래서인지 백현은 싸놓았던 가방을 다시 내려두고 서랍안에 책을 넣어놓기 시작한다.
종인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변백현'이란 이름이 박혀있는 자리 옆으로 옮겨졌다.
빌어먹을.
하늘은 이번 해에 자신을 도와주지 않으리라고 마음먹은게 분명하다. 아니 오히려 괴롭힐려고 작정한것 같다. 종인은 저절로 너털웃음이 나왔다. 이게뭐야.
천천히 책상을 들어올린 종인은 백현을 지나쳐 뒷문쪽으로 다가갔다. 열려진 뒷문에선 예상대로 복도의 서늘한 기운이 흘러들어왔다.
곧 여름이 와 망정이었지, 겨울이었으면 은근히 괴로울것이 분명했다. 종인은 남겨진 의자를 질질 끌어 책상을 정리해나갔다. 어느새 완벽하게 정리된 깨끗한 책상위엔
구겨진 자리배정표만 덜렁 놓여있었다. 그것을 다시 들여다 보았다.
눈을 몇번이고 깜빡여도 '변백현'이라고 적혀진 옆에 놈의 이름은 지워지지 않는다.
박찬열.
정말 개같다. 종인은 1분단쪽으로 흘끗 눈을 돌렸다. 얼마전에 또 염색을 했는지 더 샛노랗게 변한 머리를 벅벅 긁은 찬열은 백현의 옆자리에 벌써 앉아있었다.
존나 개같네. 시발.
종인은 자신의 손아귀에 붙들린 자리배정표를 사정없이 구겼다. 저절로 한숨이 나온다. 진짜 되는게 하나도 없네. 썅.
"종인아, 안녕~"
여자아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드니, 익숙한 얼굴이 보인다. 유진.
그녀는 핑크색의 앙증맞은 손목시계를 차고선 종인에게 손을 흔들어보였다. 어색하게 입꼬리를 올린 종인이 고개를 끄덕이자, 유진은 털썩 종인의 옆에 앉았다.
온 사방에 레몬향이 진동한다. 갑자기 속이 뒤틀린다. 유진이 눈치채지 못하게 슬며시 코를 감쌌다. 이상하게도, 유진에게서 나오는 향이 달갑지 않았다.
오히려 반감만 든다. 얼마나 발랐는지 레몬향이 진동을 한다. 머리가 아파온다. 머리안쪽에서 안개가 차오르는 느낌이다. 살짝 인상이 구겨진 종인을 알아챈 유진이
종인에게 몸을 기울였다. 그 바람에 지독하게도 진한 레몬향이 종인의 온 세포를 콕콕 찔렀다.
"왜그래?"
"아..."
"어디 아퍼?"
아니. 종인이 입을 열려고 하는 찰나, 종이 쳤다. 쉬는 시간을 알리는 종. 종이 울리자 마자 선생님이 종인에게 다가왔다.
그녀는 종인에게 한번 웃어보이고선 잠시 따라나오라고 말했다. 대화가 끊겨져 버려 어색해진 유진은 입술을 꿍 다물고선 자신의 책을 꺼내들었다.
종인은 그런 그녀를 한번 넘겨보고선 선생님의 뒤를 따랐다. 서늘한 복도에는 여럿 사내놈들이 쿵쾅쿵쾅 거리면서 뛰어다녔다. 필시 매점에 가려는 게 분명하다.
낡아서 너덜너덜한 천원짜리 한장을 손에 꼭 쥐고선 뛰어가는 폼이 어린아이 같다. 그런 아이들을 흘겨본 선생님은 계단 쪽으로 종인을 끌고갔다.
"종인아. 요즘 열심히 하고 있지?"
".....네."
"모의고사 성적표 봤지? 언어영역이 좀 떨어졌더구나."
"실수를 좀 한것 같습니다."
"그래? 그러면 안돼. 알지? 실수도 실력인거. 선생님은 종인이 많이 믿고 있어. 우리반에서 믿을만한건 너밖에 없는거 알지?"
"..........네."
"선생님들도 다 기대하시더라. 근데 이번에 언어영역이 2등급이 나와서 언어영역 선생님도 놀래시더라.
혹시 무슨일이라도 있는거니?"
".....아니요."
"걱정거리라도 있니? 아니면 뭐 고민이라도 있거나, 설마 여자친구 생긴건 아니겠지? 호호호."
"아, 아닙니다. 그런 일은 없어요."
"그래. 대학가면 이쁜 여자들도 많아. 그때가서 사귀렴. 다른 애들은 벌써부터 손 잡고 다니더라구. 혹시 종인이도 그럴까봐 선생님이 마음을 많이 졸였어."
"아니에요. 별로 관심없어요."
"다행이구나. 종인이가 벌써 철이 들어서. 자리는 맘에 드니? 보니깐 맨 뒷자리던데, 혹시 수업에 지장이 있으면 바꿔줄까?"
"아니요. 저는 맨 뒤가 편해요. "
"그래... 뭐 걱정이라도 있으면 언제라도 상담하러 오렴. 선생님은 요즘에 걱정이 좀 많아."
"......"
"아시다시피 종대가그런 일이 있었잖아. 선생님은 처음에 너무 걱정했단다. 네가 1학년때부터 찬열이랑 종대랑 친하다는 거에 조금 걱정했었어.
그래도 요즘 보니깐 찬열이랑은...... 혹시 싸웠니?"
"아니요. 그냥 공부에 집중하려구요."
"그래. 참 종인이는 철이 너무 들어서 선생님이 든든하다. 어제 어머니께서 연락오셨는데, 들었니?"
"아니요..... 왜요?"
"음~ 아니. 성적에 관해서 조금 얘기를 하시더라구. 그래도 다행이야. 선생님은 너만 믿는다."
"..........네."
"그래, 그럼 1교시 준비하구. 수리시간 맞지? 집중하렴. 그래. 수리는 항상 안전한 1등급이니깐. 그래도 방심하면 안된다! 알았지?"
"..............네. 안녕히 가세요."
또각 또각 구두 소리를 내며 계단 밑으로 내려가는 담임선생님의 머리통이 사라졌다. 아, 시발.
아침부터 귀찮게 하네. 저절로 인상이 쓰여지자, 종인은 손을 들어 이마를 짚었다. 짜증나 죽어버릴것 같다.
자꾸만 '예비 서울대 의대생'이라는 타이틀로 자신을 압박해오는 수많은 선생님들때문에 미쳐버릴것 같다. 솔직하게 이렇게 말해주고 싶었다.
남은 1년 모르죠. 제 성적이 유지될지, 내려갈지.
하지만 말았다. 예전에 아버지에게 이렇게 말해서 골프채로 머리통 터질뻔한 적이 있었기 때문에, 종인은 성적에 관해선 입을 다물었다.
그저 묵묵히 열심히만 하면 모두들도 입을 다무니깐, 그저 열심히 문제를 풀면 된다. 그렇게 하면 간섭도 줄어든다.
종인은 기다란 복도 끝에 놓인 자신의 반으로 가려다, 멈추었다. 바로 옆 교실로 눈을 돌렸다.
2학년 5반.
조심스럽게 뒷문을 열자, 보이는 풍경은 뻔하다. 수업태도최악, 학생태도불량으로 선생님들 사이에서 찍힌 이 반은 자신들의 명성에 걸맞게 놀아나고 있었다.
몇명은 교탁옆에 놓인, 선생님용 컴퓨터로 스타를 하고 있었고 몇명은 피엠피를 가져와 무언가를 열심히 보고 있었다. 교실 뒷편에 몰린 또 다른 놈들은 말뚝박기를
하다 무엇을 부러뜨렸는지 서로에게 화풀이를 하다, 무슨 일 일어났느냐는 듯이 다시 말뚝박기를 한다. 종인은 서둘러 반 안을 스캔했다.
익숙한 뒷통수가 보인다. 1분단 맨 앞줄 자리에 앉아 멍하니 창문너머를 바라보는 녀석에게 다가갔다.
햇빛을 받은 머리색은 얼핏보면 황금색이다. 순간 녀석에게 지어줬던 별명이 생각난다.
레오.
사자를 닮아서 1학년때 붙여줬었는데, 종인은 그렇게 생각하며 녀석의 뒷통수에 손을 올렸다.
"오세훈."
"아- 깜짝아!"
"뭘 그렇게 놀래."
녀석을 턱끝으로 가리키고 옆에 앉았다. 따사로운 햇빛이 가득한 이 자리, 왠지 졸립다. 종인은 멍하니 자신을 보는 세훈에게 손을 흔들어보였다.
뭐해. 그러자 움찔한다. 입술을 우물우물 거리던 녀석이 눈을 몇번 깜빡이다, 입을 열었다.
"왜 왔어?"
"왜? 난 네 반에 못 오냐?"
"아니...2학년되고서 한번도 안 찾아왔었는데, 와서 놀랬어."
"그건 네가 항상 먼저 우리반에 왔었잖아."
"그렇지."
"우리 자리 바꿨어."
"정말?"
"근데 앉기 싫다."
"왜."
"몰라. 냄새나서."
"냄새? 옆에 최정경 앉았어? 그 새끼 냄새 졸라 나던데. 전에 내 팔잡고 얘기하는데 입냄새 죽이더라."
"아니, 걔 말고."
"그럼?"
"몰라. 쨋든 나중에 와보던가."
"알았어."
고개를 끄덕인 세훈은 종인의 머리가 헝크러진 것을 보고 손을 들어올렸다. 칠칠아. 중얼거리며 앞머리를 정리해주었다.
기다란 손가락이 자신의 앞머리를 정리해주는 부드러운 손길에 종인은 나른해지는 것을 느꼈다. 하얗고 마른 팔이 보인다. 시선을 조금 움직이니,
붉은 입술이 살짝 벌려져 있었다. 멍하게 자신의 머리에만 집중하는 세훈의 얼굴을 꼼꼼히 살폈다. 아무리 봐도 너무 깨끗해.
종인은 밀가루 바른것 처럼 하얗디 하얀 세훈의 얼굴에 조그맣게 감탄했다. 존나 하얗네.
어느새 머리정리는 다 끝났는지 마른 팔은 책상위에 얌전히 놓여있었다. 기분좋은 나른함이 달아나려고 하자, 종인은 아까운 마음에 눈을 감고 천천히 집중했다.
잠이 들기 전처럼 머릿속을 가득채우는 이 몽롱함이 좋다. 부드러운 비단이 몸을 감싼 듯한 기분좋은 나른함은 서서히 달아났다.
종인은 천천히 눈을 떴다. 자신과 눈이 마주친 세훈은 멍하게 눈만 깜빡이다, 화들짝 놀라 고개를 돌린다.
얼마전에 정리한 머리때문에 잘 보이는 녀석의 귀는 벌겋게 익어있었다. 순간 어젯밤의 일이 떠올려진다. 종인은 올라가려는 입꼬리를 가까스로 잡아두고,
세훈에게 속삭였다.
"야자시간 빼라."
"....왜?"
"담배 겸 쉴 겸."
"알았어. 양아치야."
"네가 더."
장난스럽게 주먹을 휘두르는 세훈의 뺨을 가볍게 두드린 종인은 곧 종이 칠것 같아 서둘러 반을 빠져나왔다.
서서히 가까워지는 자신의 반팻말이 보이자, 몸이 망설인다. 안 들어가고 싶어. 들어가면 기분만 더러워지니깐.
종인은 주저주저하는 발걸음을 순간 울리는 종소리때문에 투덜투덜거리며 옮겼다. 문을 열자마자 보이는 기분나쁜 풍경. 따사로운 햇살이 가득 내리는 한 가운데,
박찬열은 백현의 귀에 무어라고 속삭이고 있었다.
푸하하 작게 웃는 박찬열의 입가가 보인다. 찬열 쪽으로 조그맣게 돌아선 백현때문에 녀석의 얼굴이 보이지 않았지만 녀석의 고개가 조그맣게 움직이고 있었다.
그때문에 녀석의 목을 덮은 짧지도, 길지도 않은 머리칼들이 흔들렸다. 종인은 그 미세한 순간을 지나치고 자신의 자리에 앉았다.
유진은 어느새 잠들어 있었다. 책상에 엎드린 그녀는 정말 조신하게 엎드려 있었다. 어디서 사왔는지 빵빵한 키티배게를 배고선 달콤한 잠을 청하고 있었다.
조용히 오르락 내리락 하는 그녀의 등이 보였다. 이젠 별별 것에 그 녀석이랑 겹쳐 보인다. 종인은 와이셔츠 사이로 솟아난 등줄기가 오르락 내리락 하던 것이
생각났다. 그 녀석의 조그만 숨소리까지도. 종인은 서둘러 고개를 흔들었다. 미친새끼.
일부러 세훈을 생각했다. 어젯밤의 세훈. 어두운 밤 아래, 빈 옥상위의 우리들. 초콜렛 맛이날것 같았던 담배맛을 억지로 떠올렸다.
매캐함 사이에 숨겨진 달콤함을 기억해냈다. 머릿속에 분산된 악마같은 연기가 모든것을 뒤덮었다. 덕분에 자신의 머리를 괴롭혀왔던 것들은 잠시 보이지 않는다.
종인은 들려오는 종소리를 묵묵히 받아들이고 책을 꺼내들었다.
수리시간이다.
* * *
언제나 그랬듯이, 멍하게 몇번 필기를 끄적거리기만 하면 시간은 이렇게나 잘도 흘러갔다.
점심시간이 끝난지는 오래. 벌써 6교시가 끝났다. 이제 7교시만 넘기면 된다. 종인은 선생님의 경쾌한 분필소리가 뚝 끊기자 마자 들려오는 종소리에
기지개를 폈다. 하루종일 앉아서 공부만 해서 그런지, 몸 여기저기가 쑤셨다. 뭐라뭐라 외치던 선생이 나가자, 아이들은 기다렷다는 듯이 우루루 일어선다.
성장기 사내녀석들에겐 벌써 배가 고파오는 시간이다. 동전이나 지폐를 들고 나선 아이들은 너나할것 없이 반 밖으로 달려나갔다. 종인은 조금 허기가 지는
배를 만졌다. 어차피 한 교시만 참으면 되니깐, 종인은 마저풀던 문제집을 꺼내들어 문제를 읽어내려 갔다.
"김종인."
오랜만이다. 걸걸한 놈의 목소리를 듣는것이.
김종대 녀석이 오세훈을 죽일듯이 패버렸을 때, 그 때가 녀석과의 마지막 대화였다. 자연스럽게 끊겨진 사이와 대화는 어색하지 않을 만큼 너무나도 자연스러웠다.
그래서 그것이 더 어색했다. 샤프로 마악 7이란 숫자를 써내려가던 종인의 손이 멈추었다. 그 바람에 조금 길었던 샤프심이 뚝 부러져 문제집 위를 굴러간다.
종인이 고개를 들어올리자, 찬열의 얼굴이 보였다. 목에 난 손톱자국은 여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그것을 본 종인은 찬열이 뭐라하기도 전에
고개를 돌렸다.
"잠시 얘기좀 하자."
"나 이거 풀어야 해."
"잠시만."
".............."
아무말없이 종인이 일어서자, 찬열도 아무말없이 열려진 문으로 나갔다. 녀석이 가는 곳은 옥상이 보이는 계단.
반쯤 올라가자 비스듬히 열린 옥상에선 더운 바람이 불어오고 있었다. 찬열이 그 쯤에 멈춰서자, 종인은 녀석과 몇 계단이나 떨어진 곳에 우뚝 섰다.
자신을 내려다보는 찬열의 시선을 무심히 넘겨버리고 벽에 기대섰다. 서늘한 감촉이 좋다. 우둘우둘한 벽이 지끈거리던 몸을 저절로 지압해준다.
종인은 조금은 지루한 침묵에 눈을 감았다.
"세훈이는...괜찮대?"
"직접 보시던가."
"....."
저 계단 밑으로 사내놈들이 장난치는 소리가 들려온다. 우당탕 소리와 함께 욕설소리가 울려퍼진다. 그러고선 일제히 터지는 웃음소리.
그 소리가 계단에 시끄럽게 울리자, 종인은 눈을 떴다. 올려다보니 찬열은 어느새 계단 몇칸을 내려와, 종인의 근처로 와있었다. 그는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그 바람에 흐트러진 머리카락 사이로 녀석의 귀가 잘보였다. 검은색의 빛깔이 조금 섬뜩한, 못 모양의 피어싱이 박혀있다. 종인은 그것을 냅다 뽑아버리고 싶었지만
참았다. 이제보니 또 다른 피어싱이 있다. 우습게도 그건 강아지 모양. 섬뜩한 못 모양의 피어싱과 달리 해맑게 웃고 있는 강아지 모양의 피어싱은 아이러니하게도
잘 어울린다. 종인은 왠지 그 피어싱이 누군가와 닮은것 같아 혀끝이 텁텁해졌다.
"저번에 봤어. 얼굴 엉망이더라."
"잘 아네."
"....."
"....."
"너 김종대랑은 연락하냐?"
"아니."
"......그래."
말이 없다. 대체 무슨 말을 하고싶은 건지. 종인은 스물스물 기어올라오는 답답함이 점점 커져가는 것이 느껴졌다.
가슴 안을 꽈악 채운 것이 풍선같다. 냅다 터뜨리고 싶은데, 혹여 저 자신이 다칠까 가만히 냅두었다. 터질듯 부풀어진 것은 이제 얌전하다.
"무슨 말이 하고 싶은건데?"
"..."
"할 말 없으면 난 간다."
"너... 그거 아냐?"
계단을 내려가던 발걸음이 우뚝 멈춰섰다. 종인은 기다란 계단 끝에 놓여진 복도가 보였다. 간간히 슬리퍼를 직직 끌어가는 아이들의 다리가 보였다가 사라진다.
종인은 찬열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녀석은 어느새 종인의 바로 앞에 서있었다.
"너랑 나랑 1학년때 초부터 친햇잖아."
"그래. 그랬었지."
"난 그때 정말 너 멋있는 놈이라고 생각했어."
"....."
"그래서 사실 너 많이 봤어. 따라할려고 했지. 공부도 잘하고 운동도 잘하고 검도도 잘하고."
"......."
"근데 공부는 도저히 안되겠더라고. 머리가 안따라주더라. 그래서.."
"......."
"사소한 습관까지 따라할려고 했었어."
".....뜬금없이 고백하냐?"
"근데 말야. 너 그런 습관있더라고."
"....."
"네가 관심있는거, 좋아하는거 뚫어지게 보는거말야."
".........."
"은근슬쩍 항상 그렇게 보더라고. 뚫어지게."
"................."
"너 몰랐지?"
"....................."
"그래서 나도 그걸 배웠어. 따라할려다가, 몸에 뱄어."
"............................."
"근데 말야."
찬열이 성큼, 한걸음더 계단에 내려왔다. 이젠 종인의 옆에 서있었다. 종인은 순간 정확히 마주치는 녀석의 눈높이에 저도 모르게 찬열의 키를 생각햇다.
1년전만 해도 녀석을 보기위해선 조금 고개를 올렸어야 했는데 이제는 정확히 맞다. 그새 키가 자란걸까? 순간 이런 엉뚱한 생각이 들었다.
종인은 아무말없이 자신을 쳐다보는 찬열의 눈빛에, 왠지 모르게 기분이 나빠졌다. 조용히 침묵이 땅바닥에 닿을쯔음,
찬열이 입을 열었다.
"내가 변백현을 항상 보게 되었거든."
"....."
"어느 순간에 말야. 네 습관이 몸에 배여서."
"........"
"그런데 말야."
".............."
"항상 백현이 보면, 네가 옆에 있더라고."
"............"
"네가 걔를 뚫어지게 보더라고."
"..!"
"무슨 뜻일까."
"야."
"난 머리가 나빠서 도저히 모르겠네."
싱긋, 입꼬리를 경쾌하게 올린 찬열은 종인에게 더욱 더 바짝 다가섰다. 알잖아, 나 반에서 37등했던거. 녀석이 중얼거림이 귀에 고스란히 박힌다.
그 순간 종이 울렸지만, 그 누구도 움직이지 않았다. 찬열은 돌처럼 딱딱하게 굳어진 종인에게 계속 웃어보엿다. 얼핏 보면 재미난 이야기를 하나, 라고
생각할수도 있겠지만, 그 웃음속에서 느껴지는 섬뜩함에 종인은 저도 모르게 말문이 막혔다. 이 새끼. 저절로 몸이 떨린다.
계단 저 밑으로 아이들의 뜀박질 소리가 울렸다. 어서-어서! 다급한 외침속에 흘러나오는 웃음소리가 계단을 빙빙 맴돌다가, 쾅 닫히는 문소리와 함께
끊겨져버렸다. 그리고 침묵만이 감도는 학교 안이, 너무도 서렸다.
"한마디만 할게."
"야."
"변백현 노리지마."
"...."
"쳐다도 보지마."
"야."
"걘 내꺼야. "
"..."
"안 그래도 요즘 자꾸 잡힐듯 말듯 해서 짜증나 죽겠는데, 옆에서 방해하지마."
"야, 박찬열."
"공부나 해."
"...."
"남자한테 관심없잖아?"
".......
"전교1등님."
퍼억- 어깨를 일부러 세게 쳐낸 찬열은 뒤도 안보고 계단을 성큼성큼내려간다. 우락부락하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가녀리지도 않은 단단한 찬열의 체구때문에
어깨가 아려온다. 벌거벗긴 기분이다. 열려진 창문사이로 축축한 검은 손이 온 몸을 샅샅이 훑는것 같았다. 뒷통수를 세게 걷어차인 느낌이다.
그래, 박찬열은 저런 놈이다. 좋은 놈한텐 좋게 해주지만, 자기꺼 넘보면 물불 안가리는 새끼.
종인은 천천히 난간에 기대섰다. 그 바람에 덜컹 흔들린 난간은 덜덜덜 소리를 내다, 잦아든다. 굴욕적이다. 아니, 굴욕이다. 생애 최고의 굴욕적인 날.
박찬열을 죽이고 싶다. 지깟게 뭐라고, 저렇게 잘난척하는지. 공부도 못하고 양아치 같은 새끼가, 뭐가 잘났다고.
종인은 손이 떨려오는것이 느껴졌다. 시발, 쪽팔려. 이깟게 뭐라고, 젠장. 덜덜 떨리는 손을 움켜잡았다. 입안을 깨물었다. 그 바람에 가득 물린 입안에서
피가 새어나온다. 비릿한 철맛이 입 안 구석구석에 전해졌다.
선전포고다. 저건 선전포고.
종인은 눈을 감았다. 어떻게 해보기도 전에, 끝나버렸다. 다가가려고 했는데, 다리가 끊겨져 버렸다.
혼자 병신같이 쇼만 하다가 끝나버렸다. 혼자 자리만 빙빙 돌다가, 뻥 뚫린 하수구에 풍덩 빠져버렸다.
종인은 아까부터 느껴졌던 두통이 점점 심해지는것을 느꼈다.
한숨 자고 싶다.
그래서 일어섰다. 이 계단에서 빨리 벗어나고 싶다.
당장이라도 누군가가 뒤에서 팔을 끌어당길것 같아서 서둘러 계단을 내려왔다.
* * *
양호실 특유의 냄새가 온 몸을 감싸자 이상하리만큼 평온해졌다.
비어진 선생의 자리를 보고, 종인은 선생의 책상 위에 펼쳐진 공책에 아무말없이 이름을 써내려갔다.
2학년 8반 김종인. 두통.
약이라도 먹을까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그 쓴맛이 싫었기에 이내 그만두었다. 조그만 문을 열고 들어섰다. 여기저기 커텐이 널찍하게 쳐져있는
침대들이 보였다. 그 중 하나를 차지한 종인은 천천히 누웠다. 얇지도 굵지도 않은 이불에는 편안한 향이 맡아졌다. 킁킁 거리며 맡은 종인은 목까지 이불을 끌어올렸다.
편안하다. 하지만 마음은 아니다.
들켜버렸다. 변백현을 계속 보아왔던것을. 그런데 내가 그렇게 심하게 쳐다봤나?
종인은 곰곰히 생각했다. 왠지 그런것 같기도 했다. 일부러 체육시간에 농구골대 옆을 서성거리기도 했고, 수업시간엔 엎드려 자는 백현의 얼굴을
뚫어지게 보기도 했다. 그래, 그때 들켰구나. 종인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아나 시발. 풍선처럼 부풀어올랐던 답답함을 박찬열이 먼저
터뜨려버렸다. 그 바람에 자신의 가슴속까지 따가워졌다. 너덜너덜 걸레짝이 된 풍선의 잔재들은 여전히 가슴속에 남아있다. 떼어내려해도 안 떼어내진다.
아 시발 생각하지말자.
종인은 자꾸만 귓가에 울리는 찬열의 목소리를 무시하고 몸을 옆으로 돌렸다. 머릿속에는 김종인 이라는 이름을 부르다 아무말없이 체크할
선생님이 떠올려진다. 자리에 없다는 걸 알겠지. 시발, 모르겠다.
푹신푹신한 베개에 고개를 부비작 거리다 눈을 떴다. 그리 가깝지 않은 거리에 놓인 또다른 침대에 커텐이 반쯤 걷혀있었다.
익숙한 얼굴이 보인다.
"오세훈."
쩍쩍 갈라지는 목소리에 세훈이 눈을 번쩍 뜬다. 김종인? 녀석이 중얼거리며 일어선다. 대체 언제부터 잤던건지 ,녀석의 머리는 여기저기 삐죽삐죽 솟아나와 있었고
눈은 반쯤 감겨있었다. 세훈은 느릿느릿 이불을 걷어내고 무거워진 두 다리를 꺼내 슬리퍼를 신었다. 주섬주섬 신은 슬리퍼를 직직 끌어온 세훈은
종인의 앞에 섰다. 천천히 커텐을 완전히 치자 그곳엔 둘뿐이었다. 종인이 미간을 찡그리자, 세훈이 이마에 손을 갖다댄다.
"어디 아파?"
속닥 거리는 소리가 귀에 깃털처럼 내려 앉았다. 역시나 세훈과 있으면 편안해진다. 종인은 걱정스럽게 자신을 쳐다보며 이마를 어루만지는
세훈의 눈을 쳐다봤다. 어느새 잠이 깼는지 조금씩 빛이 돌기 시작했다. 종인은 자신의 이마를 짚은 세훈의 손을 움켜잡았다. 그 바람에 세훈이 어깨를 움찔거렸다.
너만 보면 참 편해져. 아기가 투정부리듯, 종인이 손을 잡고 웅얼거리자, 세훈은 푸흐 웃어버렸다. 왜 그래. 자신의 손을 꼬무작 거리며 만지는 종인의 얼굴 근처로
상체를 숙였다. 아파? 그러자 종인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피곤해."
"좀 자."
"요새 힘드네."
몇 놈들때문에 힘들어 죽겠어, 난 이제 18살인데. 종인이 중얼중얼 거리는 것을 들은 세훈은 잡히지 않은 다른 손으로 종인의 이마를 어루만져주었다.
키스해줘. 종인의 중얼거림에 세훈의 두 눈이 크게 뜨였다. 잘못 들은걸까. 세훈이 종인에게 시선을 맞춰왔다.
아무말없이 세훈의 시선을 맞춘 종인의 입이 열렸다.
"키스해줘."
세훈이 무어라 말하기도 전에, 종인이 손을 뻗어 세훈의 뒷통수를 잡았다. 부슬부슬한 머리카락이 꽤 얇다.
잡아당기자, 입술이 맞닿았다. 너무나도 편안하고, 썩은 쓰레깃더미에서 자라나는 새싹처럼, 기분좋게 심장이 뛴다. 종인은 두 손으로 세훈의 작은
머리통을 감싸안았다. 동그랗게 떠진 세훈의 눈도 점점 감겼다. 음. 기분이 좋은지 세훈의 목에서 귀여운 소리가 울렸다.
허리가 불편하게 접힌 세훈은 슬리퍼를 조심조심 벗어던졌다. 어차피 아무도 안본다. 세훈은 생각하며 종인의 위로 올라탔다.
조금 육중한 무게에 종인의 눈이 반쯤 떠졌지만 이내 다시 감겻다. 종인의 배에 걸터앉은 세훈은 고개를 숙여 종인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
혀를 부드럽게 감싸오는 느낌이 좋다. 어젯밤의 키스가 꿈이 아니라는 것이 증명된다. 세훈은 종인의 귀를 부드럽게 만져주었다.
그게 꽤 좋은지, 종인의 입꼬리가 올라가는 것이 입술로 느껴졌다. 몇번이고 서로의 혀를 부드럽게 빨아들이던 입술이 떼어졌다.
입술 사이로 이어진 기다란 침선이 민망했는지, 세훈은 그것을 손가락으로 툭 끊었다. 그러자 종인이 낮게 웃었다.
"편안해. 너랑 있으면."
"......"
그 익숙한 얼굴이 너라서 다행이야. 종인은 아무말없이 세훈을 바라보았다.
세훈은 종인의 머리카락을 쓰담아주었다. 울지마, 바보야. 세훈이 중얼거리자 종인이 녀석을 감싸안았다. 뭐가 뭔지 하나도 모르겠어.
귓가에 울리는 종인의 목소리가 자꾸만 갈라진다. 세훈은 다시 고개를 들어 종인의 입에 조금 길게 입술도장을 찍었다.
"난 네가 어른인줄 알았는데."
"나 어른 아냐."
"알았어. 울지마, 새꺄."
세훈이 다시 종인의 이마, 코, 뺨, 마지막으로 입술에 입을 맞춰왔다. 왜 그런건지 이유는 안 물을게. 세훈이 조용히 속삭이자 종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해.
그러자 종인이 또 고개를 끄덕였다. 고맙다.
천천히 손을 들어올려 세훈의 볼을 감싸안았다. 부드럽다. 입술을 만지니 입술도 부드럽다.
자꾸 봄향기가 흘러들어오는것 같아 가슴이 아리다. 자꾸만 세훈이랑 겹쳐진다.
백현아.
세훈을 바라보고, 속으로 중얼거렸다.
심장이 뛸까?
뛴다.
"세훈아."
세훈의 눈이 다시 한번더 맞춰온다.
심장이 과연 뛸까.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