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컨택
w. 신예음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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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
저절로 침을 삼키게 하는 맛있는 카레냄새가 온 교실을 장악했다. 꽤나 매콤한지, 아이들은 모두 이마에 조그만 땀방울을 달고 열심히 수저를 놀리고 있었다.
그리 깔끔해보이지 않는 식판을 들어올린 종인은 식어버린 밥 위에 아무렇게나 부어지는 카레를 무심히 보고 있었다. 잘 익은듯한, 노란빛의 감자에는 김이 폴폴 나고 있었다.
종인은 천천히 뒤돌아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퉁명스럽게 급식판을 내려놓자, 아슬아슬했던 깍두기 국물이 넘쳐흘러 책상을 적시고 말았다.
아-. 깍두기 국물이 책상위에 지도를 그리는것을 멍하니 보던 종인은 닦을 것이 없나, 황급히 둘러보았다.
여기저기 뒤지던 중, 자신의 가방 안에 곱게 접힌 수건을 발견한 종인은 그것을 천천히 꺼내들었다. 보송보송한 느낌이 손 안에 가득 찼다.
언제 돌려줄까 계속 그것만 고민했는데, 벌써 점심시간이 15분이 훌쩍 지났는데도 녀석은 보이지 않았다.
체육시간에 수건을 준 이후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자꾸만 신경이 쓰인다. 혹시 햇빛 아래에 너무 오래있어서 그런가? 항상 체육시간에 농구골대 밑에
조용히 앉아있던 녀석이 자기때문에 움직여서 그런가. 종인은 숟가락을 들고선 애꿎은 당근만 쿡쿡 찔렀다.
그 바람에 김을 폴폴 내던 당근은 숟가락에 의해 형체가 으스러져 버렸다.
당근 부스러기가 카레 안에 완전히 스며드는 것을 보던 중, 복도가 요란스러워졌다. 누군가 사고라도 쳤나, 복도에선 아이들의 환호성 소리가 반, 알수없는 소리가 반이였다.
멀리서 유난스러운 발자국 소리가 빠르게 들려왔다. 정말 무슨 일이라도 일어났는지 아이들의 함성소리가 점점 커진다.또 뭔일이래.
종인은 쾅 하고 부서질듯이 열린 뒷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삽시간에 아이들의 시선은 노오란 카레가 담긴 급식판이 아닌, 열린 뒷문으로 가있었다.
얼마나 급하게 달려왔는지, 얼굴이 시뻘개진 한 녀석이 거칠게 숨을 쉬며 뒷문을 붙잡고 있었다. 처음 보는 녀석이다.
"야- 대박사건! 싸움났어!!!!"
그 말이 무슨 방아쇠라도 된것마냥, 모든 아이들이 총알처럼 자리에서 튀어나왔다. 무수히 쌓여있던 밥을 입에 우겨넣던 사내녀석들은 와- 소리를 지르며 당장에 달려나갔다.
그 바람에 여기저기 먼지가 날려 눈이 따가워졌지만 아이들은 너도나도 그 좁은 뒷문을 나가려고 애썼다.
일정한 패턴만이 반복되는 학교생활에서 '싸움'이란 좀처럼 맛보기 힘든 '꿀'같은 존재다. 물론 그 싸움의 주인공이 자신들이였다면 이야기가 달라졌겠지만,
지금은 그저 재미난 오락프로그램을 보는 한명의 관객이기 때문에 녀석들은 흥분상태였다.
지루한 일상을 잠깐이라도 날리기 위해 녀석들은 벗겨져 버린 슬리퍼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 종인도 급하게 일어섰다.
순간 눈에 들어오는건 점심시간 때부터 비여있던 자리들이다. 급식시간에만 항상 눈이 초롱초롱하던 종대녀석이 아까부터 없었다.
박찬열도 없었고,
변백현도 없다.
종인은 들고있던 숟가락을 황급히 팽겨치고선 걸어나왔다. 던진 숟가락이 땅바닥에 떨어져 땡그랑 소리를 냈지만 아이들의 이상한 괴성소리에 묻혀버리고 말았다.
머릿속에서 세훈의 말이 메아리처럼 들려왔다.
김종대는 박찬열이 변백현 좋아하는거 인정못한대.
그 말이 왜그렇게도 거슬리는지. 그 말이 왜이렇게도 머리에서 반복재생되는지. 서로의 멱살을 잡고 노려볼 찬열과 종대가 생각난다.
1학년때도 한번 그랬던 적이 있었다. 박찬열의 말실수로 인한 둘의 싸움. 1학년때부터 꽤나 유명세 날린 그들의 싸움은 그때도 이렇게나 큰 화제였다.
종인은 황급히 달려와 싸움났다며 아이들에게 외치는 녀석의 멱살을 움켜잡았다. 아 썅, 뭐야. 갑작스럽게 목을 불편하게 조이는 느낌에
녀석이 인상을 쓴다. 하지만 자신의 멱살을 잡은 사람이 김종인 이라는 것을 알고 순간 당황한 기색이 얼굴에 역력했다. 하...하하. 왜그래. 녀석이
겁에 질린듯 천천히 종인의 손을 떼기 위해 작은 몸부림을 쳤다.
"어딘데?"
"어?"
"지금 어디서 싸움났냐고."
"뒤...뒷뜰."
"누군데"
"김..종대.."
그럴줄 알았어, 썅! 녀석을 거칠게 민 종인은 뒷문을 박차고 나왔다. 꽤나 많은 학생들이 시끄럽게 알려댔는지, 벌써 복도에 아이들이 쫘악 깔려있었다.
뒷뜰을 구경하기 위해 녀석들은 창문 밖을 쳐다보면서 달리고 있었다. 그 바람에 서로를 밀고 넘어뜨리고 난리도 아니었다.
싸움판의 주인공이 '김종대'이여서 그런지, 아이들은 더욱 흥분해 있었다.
대박, 재밌겠다. 눈치없는 한 녀석이 자신의 친구를 끌고가면서 계단을 내려간다. 시발, 병신같은 새끼들. 종인은 머릿속이 복잡했다.실실 거리며 짖궂은 농담만 해오던 종대가
싸움판이라니, 꽤나 열받은게 분명하다. 대체 박찬열 새끼랑 무슨 얘기를 했길래. 성큼성큼, 두계단씩 빠르게 내려간 종인은 어느새 1층바닥에 발을 디뎠다.
수많은 아이들이 괴성을 지르며 몰려있었다. 뒷뜰로 통하는 문은 이미 많은 아이들로 꽉 차, 도저히 발을 디딜 틈이 없었다.
선생들도 여럿이 나와 학생들을 뜯어내고 있었지만 이미 싸움판에 신경이 쏠려 모두들 제정신이 아니었다. 수많은 괴성소리와 함성소리, 알수없는 욕설이 난무한 이 곳이
종인은 너무 어지러웠다. 이리저리 치이는 느낌에, 슬슬 열이 얼굴에 몰리는것이 느껴졌다. 신경질적으로 앞에 있는 학생들을 떼어놓으려 하던 찰나,
그 수 많은 인파 옆에 홀로 덩그러니 놓인 녀석이 보였다. 마치 저 세계는 나와 다른 세계라는 듯이, 녀석은 홀로 양호실앞에 서있었다.
변백현. 종인은 천천히 그의 이름을 내뱉었다. 순식간에 세상이 조용해지는 느낌이다.
그 이유는 녀석이 울고 있었기 때문이다.
붉게 번진 눈가와 차오른 눈물로 울렁이는 눈이 너무나도 안쓰러웠다. 변백현. 종인의 목소리가 들릴리가 없는데,
마법처럼 서로의 눈이 마주쳤다. 백현아. 종인은 손에서 순간 보송거렸던 수건의 느낌이 스쳐지나갔다. 코 끝에선 레몬향이 맴돌았다. 왜 우니.
녀석은 종인을 보며 울고 있었다. 무엇 때문인지 단정했던 머리도 여기저기 흩트러져 있었고, 와이셔츠가 험하게 구겨진것이 한눈에 보였다.
하염없이 눈물을 쏟아 내는 녀석은 마치 투정을 부리듯, 종인을 똑바로 쳐다보고 있었다. 녀석의 예쁜 입술이 천천히 움직인다. 종인아.
그것을 한눈에 알아볼수 있었다. 말을 끝낸 입술이 일자로 꾸욱 닫혔다. 곧, 녀석의 입꼬리가 다시 무너져 내렸다. 백현아. 왜 울어.
엄청나게 먼 거리인데도 종인은 녀석에게 손을 뻗었다.
"야- 김종인!"
순간 어깨를 아프지 않게 쳐오는 느낌에 반사적으로 고개가 돌아갔다. 누구? 익숙한 얼굴이였지만 머릿속에서 빠르게 떠올려지지는 않았다.
명찰에 박힌 '도경수'라는 글자를 보고 종인은 그제서야 생각났다. 1학년때 같은 반, 반장 도경수.
녀석도 이 사태에 꽤 놀랬는지, 안그래도 동그랗던 눈이 아예 원을 이루고 있었다.
"종대 싸움난거 알어?"
사교성이 좋은 종대와는 친분을 꾸욱 유지해온 경수는 흔들리는 인파때문에 종인의 팔을 살며시 잡고선 물어왔다. 왜 모르겠니. 종인은 경수의 팔이 자신을 붙잡은 것을
신경쓰지 않았다. 저절로 고개가 돌아간다. 양호실 앞에 여전히 녀석이 서있었다. 저기로 가야되는데. 종인은 더욱 거세게 잡아오는 손길을 아프지 않게
슬며시 내려놓으려 했다.
그런데 그는 그럴수 없었다. 많은 학생들이 뒤에서 밀어오자, 종인의 몸도 자연스럽게 움직였다. 마치 파도에 휩쓸려가는 작은 공처럼, 종인은 무슨 말을 꺼내기도 전에
뒷뜰로 나와버렸다. 뒷뜰엔 수많은 아이들이 원을 이루고 있었다. 일정한 간격으로 원의 중심으로부터 서있는 아이들 중 몇명은 주먹을 흔들어 보였고,
몇명은 입을 막은 채 가만히 서있었다.
"상대방이 누군지도 알어?"
네가 좀 말려봐. 작달만한 경수가 수많은 학생들을 뚫고 나가며 물어왔다. 퍽- 퍽, 거친 소리가 많은 함성과 괴성소리를 뚫고 여기까지 들려왔다.
미친 김종대. 대체 뒷감당을 어떻게 하려는지.
종인의 고개는 들려오는 구타소리에도 저절로 뒤를 향했다. 자꾸 그 붉은 눈가가 거슬린다. 자신의 이름을 그린 입술이 생각나 미칠것같았다.
몸이 두개였으면 좋았을텐데. 대체 왜 울고 있었는지, 물어보고 싶다.
종인은 서서히 인파를 뚫어가는 경수의 뒤를 쫓았다. 미친듯이 환호성을 지르는 사내새끼들의 모습에 분이 떨렸다. 녀석들은 돼지처럼 꽥꽥 소리를 질렀다.
한눈에 봐도 날티나는 것들은 스마트폰으로 찍기도 했다. 도저히 말릴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앞에 서있던 몇명의 학생들이 종인을 보고선 슬쩍 길을 열어준다.
환하게 내리쬐는 태양빛이 더욱 거세졌다.
거세지는 함성소리와 태양빛에 머리가 아찔해졌다. 순간, 도경수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세훈이야."
동시에 종인의 눈에 싸움현장이 훤히 들어왔다. 항상 영화에서보면 주인공이 어떤 중요한 곳을 들어설때 환한빛이 들어왔다.
그러면 어둠에 익숙해져있던 수많은 관객들도 눈살을 찡그리기도 했다. 마치 지금의 종인처럼.
세훈? 오세훈? 머릿속을 천천히 정리하며 아직까지 미친듯이 주먹을 내려치는 종대의 머리통을 하염없이 쳐다봤다. 바닥에 쓰러져 있는 사람의 얼굴은 이미 피떡이 되있었다.
코가 터졌는지, 입술이 터졌는지, 출처 모를 피가 하얀 얼굴을 가득 덮고 있었다. 그래도 아직 정신은 있는건지, 힘없는 손이 무수히 쏟아지는 주먹을 막아내고 있었다.
주먹이 떨려온다. 허옇게 질린 주먹에 핏줄이 우둘우둘 솓아났다. 종인은 얼굴과 목까지 열이 올라오는 것을 느꼈다.
"이 개새끼야!!!!!"
퍽, 종대의 가슴을 정확히 꽂은 발에는 엄청난 힘이 실려있다. 가슴을 얻어맏은 종대는 꽥 소리도 못지른채 뒤로 나가떨어졌다.
엄청난 통증이 밀려왔는지, 가슴을 붙잡은 녀석이 몇번 호흡을 하다 고개를 들어올렸다. 부릅 뜬 눈은 이미 맛이갔는지, 핏발이 서있었다. 네가 정말 미쳤구나.
종인은 쓰러져 있는 세훈을 쳐다 볼 새도없이 종대에게 달려들었다.
녀석의 멱살을 잡아 들어올리자 힘없이 딸려온다. 죽어라 때리기만 한것도 힘이 들었는지, 벌겋게 달아오른 주먹은 공중에서 힘없이 흔들렸다.
세상의 모든 소음과 끊겼던 귀가 한순간에 뚫려버렸다.그 순간 더욱 거세진 아이들의 환호성 소리가 귀에 내리꽂아졌다.
김종대,박찬열,오세훈과 친했지만 평소 아무런 사고도 치지 않은 전교1등 김종인의 등장만으로도 모든 아이들이 숨을 죽였는데, 다시 터지는 싸움에
녀석들은 미친듯이 소리를 질렀다. 때려라! 싸워라! 귀에 피어싱을 박은 날티나는 학생 몇 명이 소리를 지른다.
거친 숨소리만 내쉬던 종대는 핏줄 선 종인의 주먹을 붙잡았다. 녀석의 거친 숨소리가 온 얼굴을 덮었다. 이마에서 땀방울이 흘러져 내려온다.
"미쳤냐?"
"뭐?"
"미쳤냐? 할짓이 없어서 친구랑 쌈박질이나 하냐?"
"친구? 누가? 저 새끼가?"
"미친새끼. 쟤 왜 때렸어?"
종인의 말이 끝나자마자, 종대는 종인의 팔을 거세게 뿌리쳤다. 무섭도록 인상을 쓴 녀석이 몇번이고 거칠게 숨만 내뱉었다. 순간 뒤에서 선생들의 목소리가 멀리서 들려온다.
꽤나 많이 몰려왔는지, 아이들을 제지하는 소리가 더욱 커졌다. 무슨 약속이라도 한듯, 아무말 없이 숨만 내뱉던 둘 사이의 침묵을 깬 종대가 성큼성큼 걸어왔다.
녀석은 종인의 어깨를 잡고선 속삭였다.
"아주 시발, 여기는 호모새끼들밖에 없나봐?"
"....뭐?"
"박찬열 새끼도 겨우겨우 봐준거야. 호모새끼 뒤꽁무니만 쫓는 새끼 꼴보기 싫었는데 친구라고 참았어."
"........"
"근데 시발 이제 오세훈까지냐? "
"뭐?"
"너도 저 새끼 주둥아리에서 튀어나온 말 들으면 기절초풍을 할걸. 시발, 더러워서 친구도 못해먹겠네. 참다 참다 날린거야. 알어?"
종인의 어깨위에 올려져 있던 벌겋게 부은 손이 스르륵 내려간다. 숨만 내쉬던 종대는 종인을 노려보고선 뒤돌아섰다. 몰려있던 아이들은 다가오는 종대를 보고
움찔거렸다. 모세의 기적처럼 군중들이 반으로 갈라졌다. 종대의 뒷모습을 죽일듯이 쳐다본 종인은 꿀먹은 벙어리처럼 조용해진 학생들을 천천히 둘러보고선
세훈에게 다가갔다. 녀석의 팔을 붙잡아 천천히 끌어올렸다. 다행히 생각했던 것보단 상처는 심하진 않았다. 하지만 코와 찢겨진 입술에서 흘러나오는 무수한 피때문에
상처가 더욱 심해보였다. 종인은 녀석의 한쪽 팔을 잡아올려 부축했다. 끙 끙 앓던 녀석이 입을 연다. 김종인? 부들부들 떨리는 목소리가 바스라진 낙옆같았다.
양호실 가자. 녀석이 고개를 끄덕이는 것이 느껴졌다. 뒤에서 점점 선생들의 목소리가 크게 들려왔다. 힘없는 세훈의 몸을 부축한 종인은
일을 더 크게 만들고 싶지 않아서 귀신같이 그곳을 빠져나왔다. 아까와 똑같이 아이들은 말없이 길을 내주었다.
*
생수병을 기울이자 소량의 물이 조금씩 흘러나와 휴지를 적셔나갔다. 양호선생의 부재로 빈 양호실은 바깥과 달리 꽤 조용했다. 방금 한 명이 문을 열었지만
종인과 세훈이 앉아있는 것을 보고 화들짝 놀라 황급히 문을 닫았다. 하지만 그것에 신경이 쓰이지 않았다. 종인은 적셔진 휴지로 세훈의 얼굴을 조금씩, 조심스럽게
닦아내려갔다. 너네 어머니 보시면 난리 나겠다. 찢겨진 눈가 근처를 살살 닦았다. 녀석이 고개를 찡그리는게, 꽤나 아팠나 보다.
"왜 싸웠어."
말이 없다. 기대를 한 내가 병신이지. 투덜투덜 거리며 얼굴에 묻은 피를 닦아냈다. 겨우겨우 닦아내자, 녀석의 처참한 몰골이 눈에 띈다. 평소 밀가루라고
놀려댈만큼 하얀 얼굴에 가득한 붉은 생채기와 터진 자국들을 보자 쓰린 맛이 목구멍을 넘나든다. 김종대 그 시발놈. 애새끼를 이리도 패냐.
솔직히 오세훈이 종대를 이기는 일은 있을수는 없다. 단지 깡과 적절한 유머, 능구렁이 같은 말솜씨로 우리 옆에 있었던 세훈은 타고난 싸움꾼인 종대를 절대 이길수 없다.
중학교때부터 싸움으로 날렸던 종대에게 세훈은 그저 껌이다. 하지만 종대녀석이 그렇다고 매번 사고만 치는 놈이 아니다.
매번 싸움만 일으키는 놈도 아니다. 평소 조금 짖궂다 할정도의 가벼운 농담을 하는 녀석은 그래도 인정머리도 있었고 사교성도 좋았기 때문에
친구들도 많았다. 1학년때 찬열과의 싸움 이후로 한번도 사건을 저지르지 않았다. 그런데 그런 그가 자신이 가장 아끼던 친구, 세훈을 이렇게 일방적으로 패버리다니.
종인은 입에서 흘러나오는 한숨을 막을수가 없었다.
"박찬열 때문에 싸웠냐?"
"........"
"김종대한테 뭐라고 했는데?"
묵묵부답. 지금 시위하자는 거냐? 녀석의 찢겨진 눈가 근처에 데일밴드를 붙여줬다. 점점 파랗게 멍이 드는 광대에도 약을 발라주었다.
세훈은 얌전히 자신을 종인에게 내주었다. 지극히 다정한 손길에 점점 잠이 온다.
벌컥, 문 여는 소리가 들린다. 헐레벌떡 들어온 인물은 찬열이었다. 푸른 멍이 점점 진해지는 세훈의 광대에 약을 바르던 종인의 손길이 멈춘다.
야, 이 새꺄. 공중에 툭 내뱉어진 살기어린 종인의 말에 공기가 얼어붙었다. 숨을 몰아쉰 찬열은 차갑게 굳은 종인을 한번, 얼굴에 상처투성이인 세훈을
한번 쳐다봤다.
"야, 세훈아. 괜찮냐? 김종대가 그랬다며?"
"야, 박찬열."
찬열의 질문에 대답한건 세훈이 아니였다. 연고를 내려놓은 종인이 벌떡 일어섰다. 박찬열 이 개새끼야. 자신과 비슷한 키에 종인은 쉽게 찬열의 멱살을 움켜잡았다.
찬열의 눈썹도 살짝 꿈틀거렸다.
"너 어디서 뭘했길래 저 새끼들 말리지도 않았냐?"
"......"
"저 새끼들이 왜 싸운지 알어? 너 때문이야, 시발, 너는 뭘하고 오느..."
젠장.
정말 화가나는건, 시발. 변백현이 박찬열한테 벗어난줄 알았는데, 왜 둘은 그리도 똑같은 짓만 할까?
왜 자꾸 너만 보면 변백현이랑 겹쳐보이는거냐.
찬열의 눈가도 빨간색 파스텔을 바른것처럼 붉게 번져있었다. 부어오른 백현의 눈이 생각났다. 울먹이던 눈과 입술.
찬열의 벌려진 와이셔츠로 거친 손톱자국이 난 목이 보였다. 길게, 꽤 길게 손톱자국이 벌겋게 있었다. 순간 병신같게도 백현의 하얗고 가느다란 손가락이 머릿속에 그려진다.
무슨 짓했냐, 박찬열. 종인의 머리에 사이렌 소리가 울렸다. 가뜩이나 머리아파 뒈지겠는데, 시발.
양 쪽에서 난리네.
"뭔 짓했냐? 세훈이가 김종대한테 맞을 동안 뭔 짓했냐?"
"...말하면 가만히 들어줄거니?"
"아니, 씹쌔야."
퍼억-! 굵은 곡선을 그린 주먹이 정확히 찬열의 뺨에 꽂혔다. 그 충격에 비틀거린 찬열이 약이 진열된 선반에 쾅 부딪히고 말았다.
그 소음에 놀란 세훈이 벌떡 일어섰다. 종..종인아. 화가 난 종인의 모습을 처음으로 본 세훈은 조심스럽게 그의 어깨를 붙잡았다. 씩 씩 거리며 숨을 몰아쉰
종인은 자신을 쳐다보는 찬열의 눈길에 실소를 머금었다. 시발, 네가 뭔데 그런 눈으로 쳐다봐. 마치 자신도 피해자라는 듯.
찬열은 조금 일렁이는 눈으로 종인을 쳐다보다가, 부딪혀서 꽤나 아픈 어깨를 주물렀다.
"세훈아, 미안. 나 때문에 그런거야?"
"......아니야, 아니. 괜찮아. 다른 거야."
벌겋게 달아오른 어깨를 천천히 주무르던 찬열은 세훈을 걱정스럽게 들여다보았다. 미안. 4명의 소년들 사이에 끊을 위태롭게 끊을 듯 말듯, 가위질을 한 자신을
자책했다. 이미 한 줄은 끊어져 나가버렸지만. 찬열은 침묵의 공기가 점차 가라앉는 것을 느끼고선 어색하게 입술을 깨물었다.
종인아, 나랑 나중에 이야기나 좀 하자. 서글프게 말을 한 찬열은 세훈에게 다시 한번 사과를 하고선 양호실 밖을 빠져나갔다. 본인이 서있을 자리가 아닌것을 알기에
쉽게 걸음을 돌린것이다.
종인은 찬열이 매우 거슬렸다. 모든게 다 저새끼 때문이다. 저 새끼가 시작만 하지 않았더라면.
평소대로 흘러갔을텐데.
"찬열이 때문에 싸운게 아니야. 오해하지마, 김종인."
"아니야. 박찬열 때문이야, 다."
"아니야."
아니야. 힘있게 말하는 세훈의 눈이 살짝 부어올라있었다. 그곳에도 멍이 들려고 하는지 푸른 색 스프레가 뿌려진듯, 세훈의 눈가에 조그만 자국이 났다.
녀석의 코피도 멈췄는지 더 이상의 피는 흘러나오지 않았다. 다만 심하게 터져버린 입술이 걱정이다. 종인은 자신의 입술이 아파오는것만 같은 느낌에 저절로 눈썹이
찡그러졌다. 하얀 녀석의 얼굴에 군데군데 푸르고 벌건 색색의 상처들이 박혀있다.
"나, 사실 말할게 있어."
떨고있다. 세훈은 떨고 있다. 종인은 느낄수 있었다. 녀석은 겁에 질려있었다. 종대녀석에게 맞을때도 아무렇지 않았던 눈이 지금은 이상하게 겁에 질려있다.
점점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세훈의 눈에 차오르고 있었다. 그 검은 눈이 조그맣게 일렁이는 것이 보이자, 종인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돌렸다.
뭔가 일이 잘못되도 한참은 잘못된것 같다. 변백현을 좋아하는 박찬열이나, 오세훈을 죽일듯이 때린 김종대나,
울어버린 변백현이나 지금의 나나.
입술을 꽉 깨물었다. 아직 고2인데, 뭐 이렇게 많은 일이 벌어지는지. 이게 다 박찬열 때문이다.
시작하지도 말지, 왜 이렇게 지랄맞는건지. 자꾸만 손에서 잊을수 없는 보송보송한 감촉이 되살아난다. 그 이유를 모르겠다.
세훈의 하얀 피부때문에? 자꾸만 녀석이 생각난다. 오세훈 처럼 하얀 그 녀석의 피부가.
"나, 사실.."
안돼, 말하지마. 점점 초조해진다. 저 입술 사이로 흘러나오는 말이 너무 무섭다.
알것 같다. 항상 문제만 읽어도 어렴풋이 머릿속에서 두각을 드러내는 답. 종인은 새삼 그게 지금 가장 무서워졌다.
녀석의 입술이 움찔거린다. 내 눈을 살피는 표정이 여실히 보여지자, 문제의 답을 둘러싼 천들이 하나둘씩 벗겨졌다. 제발 말하지마.
"사실.."
친구를 잃기 싫다. 말이 꽤 잘통하고 그나마 얌전한 오세훈을 잃고 싶지 않았다. 사내녀석들끼리 무슨 말이냐 하겠지만, 정말 난 녀석을 친구로써 잃고 싶지 않았다.
자꾸만 녀석이 초조하게 눈을 돌린다. 말하지마.
그 순간 적막감만이 가득했던 양호실 안에 아주 짧은 소리가 들어왔다. 복도에서 울려퍼지는 아이들의 목소리가 아주 조금, 짧게 들려왔다.
복도와 서늘한 바람과 함께.
그곳으로 시선을 돌리니 두개의 눈이 보인다. 여전히 축축히 젖은 두 눈. 분홍빛 입술.
넌 남자인데도, 왜 이렇게 끌릴까. 아무이유없이.
천천히 열리는 세훈의 입술을 막고싶었지만, 그럴수가 없었다. 시선이 빼앗겨버려서.
"사실 나 너 좋아해, 김종인."
러블리한 로맨스가 판을 치는 인터넷 소설따위에서나 볼 법한 말. 하지만 장르가 다르다. 여기는 남자 두명밖에 없다. 정확히는 세명.
종인은 스르륵 닫히는 문을 허망하게 지켜봤다. 달래주고 싶었는데, 이미 다리는 끊겨져 버렸다.
차라리 몸이 두개였으면 좋겠는데.
오세훈의 친구 김종인과 변백현의 김종인.
한숨만 나온다. 어떻게 해야되나. 친구 두놈이 호모라니. 게다가 지금 자신도 그렇게 될 판인데, 어떻게 해야하나.
평소같으면 장난스럽게 주먹을 날리고선, 지랄하지마 라고 날렸을텐데. 상황은 벌써 여기까지 와버렸다. 정말 어떡해해야되지.
똑똑한 오세훈이였기에, 말을 잘 알아들을줄 알았는데. 내가 너를 너무 과대평가한걸까.
"무슨 말을 해줘야 되는지 도저히 모르겠다."
"..."
"좋은 대답을 바라진 마. 난 네가 친구인게 좋아."
여기까지야. 내 대답은.
그 말에 세훈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좋은걸 바란건 아니야. 축축해진 목소리에 괜시리 죄책감이 든다. 그 상황에서도 변백현이 떠올려진다.
더 이상 머리가 아픈건 싫다.
이게 다 박찬열때문이다. 종인은 그렇게 믿고 싶었다.
"상처 다 치료했으니깐, 양호실에서 좀 쉬어."
"고맙다."
"친구잖아."
지금의 너에게 이 말이 잔인하게 들릴까? 어떨까? 내가 이 말을 백현에게 들으면 어떨까.
종인은 침대로 다가가는 힘빠진 뒷모습을 쳐다봤다. 정말 이 상황이 아이러니하다.
분명 아침까지만 해도 즐거웠는데 말야, 굉장히 설렜었는데.
왜 이런 일이 난걸까.
언젠간 세훈이 자신에게 해주었던 이야기가 생각난다. 아마 그때가 고1때였을것이다. 영화를 보던중, 세훈의 말이 귓가에 생생하게 전해져왔던 그날.
'세상이 너무 넓어서 무서워.'
'왜'
'생각해봐. 네가 지금 만약 정말 슬픈데 다른 사람들은 행복할수도 있고, 네가 정말 아픈데 다른 사람은 웃을수도 있잖아.
네가 정말 미치도록 우울한데 세상사람들은 그저 평소대로 행복하게 지내겠지.
그만큼 세상은 넓고 우리와 상관없이 도는거지.'
'븅신아. 갑자기 개소리야.'
'난 무서워. 난 내가 정말 슬퍼죽겠는데, 세상 사람들은 행복하게 웃고 있을수도 있잖아. '
근데 세훈아, 그 말이 완전히 틀린건 아닌것같다.
*
폰이 우우웅 진동을 하며 운다. 손가락으로 화면에 띈 빨간 박스를 밀어버렸다. 노란색 배경이 순식간에 차오르고, 메시지가 열렸다.
-지금 체육창고로
박찬열이다. 녀석의 이름이 달갑지가 않다. 닫힌 양호실 문을 뒤로하고 천천히 운동장으로 걸어나왔다. 한차례 소동이 벌어진뒤는 너무나도 고요했다.
바람때문에 모래만이 운동장을 뛰어다녔다. 종인은 기다란 다리로 휘적휘적 운동장을 가로질러갔다. 굳게 닫힌 체육창고문에 점점 가까워졌다.
차가운 금속 손잡이를 손으로 꾸욱 잡았지만 바로 열진 않았다. 몇번의 심호흡을 끝으로, 조금 묵중한 체육창고문을 열어젖혔다.
별로 사용하지 않아서 녹이 슨 문은 끼에엑 괴상한 소리를 내며 다시 닫혔다. 깨진 창문으로만 들어오는 햇빛안에는 빛나는 먼지들만이 둥둥 날라다녔다.
어느새 매캐한 냄새가 맡아졌다. 어둡지만 굉장히 많이 와서, 익숙한 곳으로 발을 돌렸다. 역시나 먼지에 쩔은 매트위에 걸터앉은 찬열은
항상 자신이 피는 담배를 입에 물고 있었다. 개폼잡네. 종인은 평소같으면 찬열의 옆에 털썩 앉았겠지만, 그렇지 않았다. 매트에서 조금 멀리떨어진 낮은 높이의 뜀틀에
걸터앉았다. 손으로 날렵하게 라이터를 쥐고 흔들며 놀던 찬열은 종인이 자리를 잡자 그것을 매트 아래로 집어넣었다.
"김종인. 너는."
"...."
"너는 남자가 너 좋다면 어떡할거냐?"
이 녀석이 들었나-. 종인은 양호실 안에서의 일이 떠올려졌다. 하지만 그 전에 이미 가버린 찬열을 알았기에, 종인은 서서히 고개를 저었다.
모르겠어. 퉁명스러운 말이 체육창고 안의 먼지와 함께 가라앉았다. 정말 모르겠어. 그런데 싫어. 종인은 덧붙이고선 자신의 슬리퍼를 내려다보았다.
끊어질듯 위태로운 선이 보였다. 종인이 그것을 발로 흔들자, 땅바닥으로 툭하고 떨어졌다.
"난 네가 부럽다."
"개소리."
"전교 1등에다가, 담배도 안피우고, 넌 멋있는 놈이야."
"머리에 총 맞았냐."
"네가 제일 부러워."
엄지손가락을 들어보이는 녀석을 무시했다. 지금 네 농담에 맞춰줄 기분이 아니야. 종인은 땅바닥에 떨어진 슬리퍼에 다시 자신의 발을 끼워맞췄다.
꼼질꼼질, 양말에 감춰진 발가락이 움직이는게 보인다. 새 슬리퍼 하나 사야지. 종인은 꼬질꼬질 때가 탄 슬리퍼를 다시 흔들었다.
그리고 그것은 다시 추락했다.
"정말... 손에 안 들어오니깐, 나도 모르게 나쁜놈 되더라."
"...."
"눈 앞에 있는데, 전혀 들어오질 않아. "
"......"
"피곤해."
"미친새끼. 쳐 자."
종인의 말에 슬쩍 웃어 보인 찬열은 멍하게 종인의 슬리퍼를 들여다보았다. 땅바닥 위에 아무렇게나 떨어진 슬리퍼.
마치 나같다.
찬열은 점점 타서 없어져 가는 담뱃를 바닥에 지져버렸다. 그 바람에 검은 탄자국이 나고, 거기에선 기다란 흰연기가 미세한 선을 그렸다.
"종대 녀석도 말 이제 안붙이더라. 몰랐지?"
"응."
"그새끼가 호모포비아인줄 몰랐지. 나는."
"나는 네가 호모라는것도 몰랐어."
"하긴.. 충격받았냐?"
"별로."
"왜?"
"그냥. 그딴걸로 충격받으면 세상 어떻게 사냐."
하긴. 찬열은 고개를 끄떡였다. 이딴 일로 놀라면 안되지, 김종인. 찬열은 아직도 흰연기가 선을 이루는 땅바닥의 탄 자국을 하릴없이 보고 있었다.
네가 정말 부럽다. 의미심장한 말이 계속해서 흘러나오자 종인은 천천히 눈을 감았다. 아마 지금쯤 종대는 선생에게 불려갔겠지.
진짜 미친놈. 종인은 나른해지는 정신을 붙잡으려고 하기는 커녕, 내버려두었다. 휴식이 필요했다. 생각할 휴식.
너무나도 많은 일이 벌어지는것 같았다. 종인은 자신을 뚫어지게 보는 찬열에게 가운데 손가락을 들어보였다. 뭐해.
"내가 봐도 잘생겼네. 김종인."
"미친.."
"부럽다, 부러워 죽겠다!"
"..."
"참, 너 그거아냐."
"뭐."
"접때, 이동수업시간 있었잖아. 그때 네가 잠들어 있었거든."
"응."
"그때 백현이가 너 계속 쳐다보더라."
"..........."
멈칫.
그런 말을 왜 니가해. 종인은 아무말없이 찬열을 쳐다봤다. 녀석의 시선은 여전히 종인에게로 가있었다.
"10분동안 내내."
"......."
"백현이 말야. 니 짝. 이름은 외웠냐?"
"그 정도는 알고 있어."
"정말 하염없이 보더라."
"...."
"신기할정도로."
녀석이 일어섰다. 담배가 배어있을 와이셔츠를 걱정스럽게 내려다보는 폼이 아이러니해서 더 웃긴다. 종인은 창고안을 가로지르는 녀석에게 묻고 싶었다.
넌 왜 백현을 울렸니.
하지만 이 말은 입에서 튀어나오지 않았다. 입에서 백현 이라는 소리가 나오면 모든것을 들킬것만 같은 기분에 억지로 삼켰다.
그런데, 정말, 왜 울렸냐.
벌겋게 부어오른 눈가가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는다. 서럽게 울던 입꼬리가 지워지질 않는다.
종인은 느릿느릿 체육창고 손잡이에 손을 올리는 찬열을 올려다봤다.
"왜 그런말 하냐."
"그냥....네가 부럽다. 김종인."
부러워 죽겠다. 말을 남기고 녀석이 사라진다.
부럽긴 개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