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주의 목에 걸쳐진 헤드셋에서 기분 좋은 멜로디가 흘러 나왔다. 무의식적으로 멜로디를 따라부르던 여주는 테이블 위에서 반짝거리며 메시지가 왔음을 알리는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발신인은 슈가. 여주는 그의 이름을 확인하자마자 인상을 찡그렸다. 여주의 미세한 표정 변화를 눈치챈 부스 밖의 라디오 스태프들이 프롬프터에 무언가를 작성하기 시작했다.
〔 무슨 일 있으세요? 〕
여주는 그들에게 아무 일도 아니라고 손사레를 친 후, 휴대폰에 시선을 고정시키고 답장을 작성하기 시작했다.
『 가사 확인 했는데, 제가 생각한 분위기는 아니네요. 자세한 피드백은 메일로 보내드리겠습니다. - PM 11:32 / 슈가 』
"저번에도 사랑과 관련된 내용은 최대한 배제해달라고 말씀 드렸던 것 같은데요."
"아니... 도대체 이 달달한 멜로디에 사랑 내용 빼면 어떤 내용을 담으라는 말씀이세요? 사회 비판이라도 할까요?"
"좋은 생각이네요. 그렇게 가능할까요?"
"장난하세요, 지금?"
"아뇨. 완전 진지한데, 지금."
라디오가 끝나자마자 여주는 윤기의 작업실을 찾았다. 작업 중이었던 컴퓨터를 등지고, 소파에 앉은 여주를 바라본 윤기는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제 턱을 만지작거리며 무심하게 대답했다. 어이없는 대답과 상반되는 진지한 표정에 여주는 잠시 할 말을 잃었다. 짧게 이어지던 침묵 속에서 다시 입을 뗀 여주.
"사랑 이야기가 왜 그렇게 싫으신 건데요?"
"그냥 유치하지 않습니까."
"사랑이 어떻게 유치해요? 그만큼 무궁무진한 이야기를 펼칠 수 있는 소재가 어디있다고."
"되게 유치하던데. 그리고, 어떻게 사람 생각이 다 똑같을 수 있겠습니까."
"..."
"제가 오늘 어떤 라디오를 들었는데, 이럴 때는 상대방의 입장을 헤아려보는 게 중요하다고 하더라고요."
"네?"
"그러니까 제 입장 좀 헤아려주세요, 김여주 작곡가님."
사자성어로는 역지사지라고 했나... 혼잣말인 듯, 아닌 듯한 윤기의 마지막 말에 여주는 생각에 빠졌다. 이 사람 나 엿 맥이나? 오늘 윤기의 작업실에 와서 웬만하면 좋게 해결하고 가려고 했는데, 다 그른 것 같다. 어느새 의자 방향을 돌려 여주를 등지고, 작업 중이던 컴퓨터로 시선을 둔 윤기가 무심하게 입을 떼었다.
"무슨 내용이든 성공할 곡이니까, 잘 써주세요."
"... 그럼요. 제가 작사한 곡인데 당연히 성공하죠."
작업 끝나면 연락 드리겠습니다. 듣기 드문 여주의 쌀쌀맞은 목소리가 윤기의 작업실에 울려 퍼지고, 곧이어 작업실의 문이 열렸다가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윤기는 여주의 마지막 말을 곱씹어보며 헛웃음을 지었다.
"무슨 자신감이야, 저건."
새벽 1시 41분. 의도치 않게 여주에게 시간을 빼앗겼다고 생각한 윤기는 금세 그녀의 생각을 지우고 작업에 몰두했다.
"그래서 가사를 다시 써야 한다고?"
"어... 진짜 미치겠어. 벌써 세 번째야."
"김여주가 가사로도 까이고. 별 일이네."
남준의 작업실에 오자마자 소파에 널브러진 여주는 곡 작업을 하고 있는 남준에게 윤기와 있었던 일을 쫑알거렸다. 남준은 익숙하게 여주의 이야기를 들어주며 맥주를 홀짝였다. 야, 그거 나도 좀 줘봐. 아무렇지 않게 남준의 맥주를 빼앗아 마시려던 여주의 행동은 남준에 의해 제지당했다. 여주가 차를 끌고 왔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여기서 자고 가면 되지."
"너 오늘 여기서 못 잘 걸."
"왜?"
"정국이 오거든. 녹음."
정국이라는 말에 여주는 누워있던 소파에서 몸을 벌떡 일으켰다. 그리고 넌 왜 그 사실을 이제 말하냐는 소리는 덤.
"너가 갑자기 왔는데 내가 어떻게 알려주냐."
"그건 그런데... 언제 오는데?"
"곧? 인사라도 하던가."
"내가 어떻게 그래. 부끄럽잖아..."
열불을 내며 윤기 이야기를 할 때는 언제고, 정국과 관련된 말이 나오자 수줍게 웃음을 보이는 여주의 모습에 남준은 헛웃음을 지었다. 저렇게 표정이 투명해서야.
"정국이가 이번 가사도 마음에 들어하더라."
"... 정말?"
"어, 정말. 도대체 누가 가사 쓴 거냐고 매일 물어봐."
여주는 남준의 말에 기쁨을 주체할 수 없어 입꼬리를 씰룩거렸다. 우리나라 작사가 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여주가 무명 가수 정국에게 매번 익명으로 가사를 선물하기 시작한 건 지금으로부터 약 5년 전, 봄부터였다. 그때는 유명한 작사가가 아니었기에 제 이름을 숨기고 가사를 선물했던 것이었는데, 지금은 본인이 너무 유명해진 탓에 쉽게 밝히지 못하고 있는 여주였다. 남준에게 전해들은 정국의 성격은 매우 신중하고, 또 두려움이 많은 아이라고 들었기에. 유명한 작사가에게 아무 조건 없이 가사를 받았다는 것에 혹여나 부담감을 가질까봐 선뜻 밝히지 못했다.
"형! 나 왔... 어, 손님 계셨네?"
"... 그, 그럼 난 이만."
남준에게 인사를 건네며 작업실 문을 열었던 여주는 갑작스러운 정국의 등장에 놀라 말을 다 잇지 못하고 고개를 푹 숙였다. 이렇게 가까이서 본 건 5년 전 봄에 정국을 봤던 그 날 이후로 처음이었기에, 여주는 귀를 붉히며 정국을 지나쳐 작업실을 벗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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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 방금 나간 분 누구셔?"
"친구."
"아, 여자친구?"
"넌 쟤 볼 때마다 그 소리냐.”
"내가 저 분이랑 만난 적 있어?"
“그런 게 있다. 아무튼 쟤 여자 친구 아냐.”
남준의 말에 고개를 갸웃거리던 정국은 언젠가 본 적이 있나보다, 라는 안일한 생각을 했다. 제게 5년 간 꾸준히 가사를 기부해준 사람인지도 모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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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주니 혀엉!"
"어, 정국이?"
"여긴 어쩐 일이에요! 옆엔... 여자친구분?"
토끼 같이 귀여운 외모에 알코올 때문에 얼굴을 붉게 물들인 남자 아이가 신입생이라는 것쯤은 곧바로 알아챌 수 있었다. 다른 술집 가자고 해야지. 정국에게 큰 관심이 없었던 여주는 남준과 정국의 대화가 빠르게 끝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냐, 임마. 재밌게 놀다 가라."
"네, 형! 항상 감사해요!"
"오냐."
정국이 본래 제가 있던 테이블로 돌아가고 나서야 남준과 여주는 시끄러운 술집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 비교적 조용한 술집으로 자리를 옮긴 두 사람은 정국의 생각은 잊고, 술잔을 기울이며 꽤나 진지한 이야기를 몇 번 주고 받았다.
이야기의 주된 내용은 작사를 포기하고 싶다는 여주의 고민이었다. 여주의 이야기를 묵묵히 들어주던 남준은 생각에 잠긴 듯한 표정을 짓다가 느닷없이 제 후드 주머니에서 이어폰을 꺼내 들었다. 그리고는 그 이어폰의 한 쪽은 여주 귀에, 또 다른 한 쪽은 자신의 귀에 꽂았다.
이어폰 속으로 흘러 나오는 잔잔한 멜로디. 그리고 이어지는 어느 남자의 허밍 소리. 여주는 조용히 그 목소리를 듣고 있었다. 가사 하나 없는 허밍 소리였지만, 곱고 아름다운 음색이라는 것 쯤은 바로 알 수 있었다. 따뜻한 스웨터 같은 느낌. 여주는 노래를 듣는 내내 남자의 목소리를 그렇게 느꼈다. 분명 가사가 없는 노래였지만, 왠지 위로 받는 듯한 느낌을 받은 여주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남준이 말을 꺼낸 건, 노래가 거의 끝나갈 때 쯤이었다.
"아까 술집에서 봤던 걔 노랜데, 어때?"
"... 좋네."
"그치. 얘가 노래는 진짜 잘해. 오죽했으면 내가 공짜로 곡까지 줬겠어."
"그러게."
"그런데, 얘 목소리에 어울리는 가사를 영 못 쓰겠더라고."
너가 좀 써주라, 여주야. 남준의 부탁에 여주는 벌개진 눈으로 제 앞에 앉은 남준을 바라봤다. 가사는 남준이도 잘 쓰는데... 여주가 작사를 포기하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에서 비롯된 남준의 부탁이었다. 그 사실을 모를 리 없는 여주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작사를 포기하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술을 마시고 집으로 가자마자 여주는 남준이 준 노래 파일을 들으며, 노트에 필기를 시작했다. 잠도 자지 않고 밤을 꼬박 새운 여주는, 그 다음 날 아침에 바로 남준의 메일로 밤새 쓴 가사를 보냈다. 따뜻한 정국의 목소리를 통해 가사가 뱉어질 것을 상상하며, 여주는 오랜만에 기분 좋은 잠을 잘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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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사가 아닌, 문장으로 인물들의 이야기를 풀어간다는 건 참 어려운 일인 것 같아요...ㅠ_ㅜ
우리나라 탑급 프로듀서 윤기와 무명 가수 정국이,
그리고 우리나라 탑급 작사가 여주의 이야기 기대해주세요!
과연 남주는 누구일지! 같이 찾으면서 글을 즐겨주시는 것도 좋을 것 같네요.
오늘도 보잘 것 없는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