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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이란 무엇일까?

기원전 4000년, 사랑하는 연인의 모습이 동굴벽화에 흐릿하게 그려진 이래, 인간은 온갖 다양한 형태의 사랑을 나누며 살아왔음에도 불구하고 아직 사랑에 대한 정의는 확실치 않다.

사전에서는 '어떤 사람이나 존재를 몹시 아끼고 귀중히 여기는 마음. 또는 그런 일'이라 정의 하지만, 누군가 말했듯이 사랑은 말이나 글로는 표현이 불가능한 불립문자. 사랑이란 언어의 형식에 집착하지 않고 마음에서 마음으로 법을 전하고 깨닫는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랑이란 절대적인 정의가 있는 것이 아닌 상대적인 정의를 갖는 것이다. 

누군가는 '천국을 살짝 맛보는 것'이라고 정의 하기도 하고 누군가는 '그저 미친 짓'이라 정의하기도 하는 사랑. 이처럼 상대에 따라 극과 극의 정의를 갖는 사랑이란 과연 정재현과 조이에게 사랑이란 무엇일까?



Q. 조이씨, 사랑이란 뭐라고 생각하시나요?

A. 비눗방울이요.

Q. 왜죠?

A. 눈으로 보기만 하면 참 예뻐요. 알록달록하고, 두둥실- 하늘을 떠다니는 게 자유로워 보이기도 하고. 근데 손을 대는 순간 톡- 하고 터져버리잖아요. 사랑도 똑같아요, 겉으로 보기엔 그럴싸해 보이지만 쉽게 터져버리는 게 사랑이죠.


Q. 재현씨는 사랑이란 뭐라고 생각하세요?

A. 조이요.



그렇다고 한다.





















[정재현/정성찬] 내 남자친구를 소개합니다 | 인스티즈


내 남자친구를 소개합니다.


EP. 01



















인생은 대게 마음먹은 대로 흘러가지 않는다.


예를 들어 아침에 서늘하다길래 긴 옷을 껴입고 나왔다가 오후에 타 죽을 뻔한다던가, 컵라면에 찬물을 부어버린다던가, 하루 종일 햇살이 쨍쨍할 것이라는 일기예보를 보고 야외 테라스에 앉았다가 갑자기 쏟아지는 비에 흠뻑 젖는 것처럼.


조이는 비에 젖어 잔뜩 눅눅해진 수업 자료를 허망하게 쳐다보며 생각했다. 염병, 진짜 한 치 앞도 알 수 없는 인생이다. 


갑자기 쏟아져 내리는 비처럼, 조이에게 인생이란 정말 한 치 앞도 모를 것이었다. 조이의 현재 직업은 16~17세 센티넬들의 교육을 담당하는 일이었는데, 5살 무렵 센터에 버려질 때만 해도 누군가를 가르치는 일을 직업으로 삼게 될 줄은 상상도 못했었다. 아니, 간신히 죽음의 고비를 넘겼던 19살 때까지도 몰랐지. 기상청도 당장 오늘의 날씨조차 예상하지 못하는데, 조이라곤 알았을까. 


처음 이 일을 맡게 됐을 때, 조이는 정신이 어지러울 만큼 화가 났었다. 속된 말로 야먀가 돌았다고 하지.


조이로 말할 것 같으면 죽음의 산증인이었다. 이미 16살 때 36개국을 누비며 각종 테러 현장과 전쟁터에서 구르고 구른 몸이었다. 앞서 말한 것처럼 실제로 죽음의 문턱 앞을 서성였던 적도 있었고. 그로 인해 본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학생들을 교육하는 이 일을 맡게 된 것이다. 그렇게 조이는 죽음이란 무엇인지 너무나도 잘 알았다. 


하지만 실전 경험이 전무한 조이의 학생들은 죽음에 대해 안일하게 생각했다. 훈련에 진지하게 참여하지 않거나 농땡이를 피우는 아이들이 있었다. 그럴 때마다 조이가 호통을 치면 아이들은 툭 눈물을 터트렸다. 


원치 않게 맡게 된 일, 툭하면 우는 어린아이들. 감당하기엔 조이 또한 너무 어렸다. 하지만 사람은 적응의 동물이라 하지 않나. 시간이 지나며 조이는 차근히 아이들의 미성숙함을 받아들이게 됐다. 눈물을 툭툭 떨구다가도 선생님, 선생님 불러가며 정을 붙이는 천진난만한 아이들. 직접 현장에서 구를 때는 몰랐는지만, 그런 아이들을 보며 깨달았다. 열여섯이라는 나이는 죽음을 이해하기엔 너무나도 어리다는 것을.


"아이고 조이 선생, 이게 무슨 일이야"


조이가 잔뜩 젖은 채로 사무실에 들어서자, 박 선생님이 사람 좋게 웃으며 물었다. 아주 비에 젖은 생쥐 꼴이구먼? 이 주임이 허허 웃으며 중얼거리자, 적막했던 사무실에 웃음소리가 잇따라 번진다. 


센티넬 교육이란 원래 현역에서 물러난 퇴역 센티넬들이 맡는 업무이기 때문에 종사자 연령층이 40~50대였다. 그중 28살의 젊은 조이는 나름 이 사무실의 귀염둥이다. 그런 귀염둥이 조이가 오늘처럼 멍청한 짓을 하고 오는 날은 이 적막한 사무실에 빅 이벤트인 셈이다.


"그러게 왜 멀쩡한 사무실 놔두고 밖에 나가 있었대?"


이 주임 선생님이 허허 웃으며 말했다. 선생님, 선생님이 자꾸 이상하게 하품하시잖아요. 그거 얼마나 거슬리는지 모르시죠? 할 말은 많았지만 원활한 사회생활을 위해 참았다.


"그냥요, 오늘 날씨 좋다길래"


이거 여우비야 여우비. 오늘따라 하늘이 이상할 정도로 맑은 게, 어쩐지 비가 내릴 거 같았어. 그렇죠 임 선생님? 이 주임 선생님이 허허 웃으며 말을 붙이자, 임 선생님이 똑같이 웃으며 맞장구쳤다. 맞아요 어쩐지 좀 습하더라. 아하, 밖에 나가 있는 저만 빼고 다들 알고 계셨던 거군요?


"아 참, 조이 선생님 오늘 수업 참관 있대요"


"네?"


"담당자가 정재현 부장이라 하던데"


"네? 그 새ㄲ…."


"그 새끼...?"


"아뇨, 아뇨. 그새요? 저번에도 나왔었잖아요"


"위에서 그런다는데, 내가 아는감? 이미 반에 도착했다네요"


[이런 식으로 나오면 나도 방법이 없어] 


어제 정재현한테 받았던 문자가 생각났다. 슬슬 정재현이 나타날 타이밍이긴 했다. 근데 이런 식이라고? 손톱을 까득 깨물며 생각했다. 정재현은 조이의 인생에서 가장 큰 변수다. 안 그래도 미친 또라이 새낀데, 전 남자친구로 레벨업한 정재현이 반에 들어가서 무슨 짓을 벌일지 정말 예상도 안 갔다. 저 그럼, 빨리 반으로 가볼게요. 대충 인사 때려 박고 교무실을 나왔다. 불안한 마음에 발걸음이 성급했다. 종종걸음으로 코너를 돌아 길쭉한 복도 끝에 다다르니 어느새 익숙한 액자가 보였다.


Memento mor.


메멘토 모리.


조이가 발령 2일 차에 건 액자였다. 수업에 들어오기 전에 항상 상기하라고 문 앞에 걸어놓은 것인데, 뜻은 항상 너의 죽음을 기억하라. 16세 교육반 치고 꽤나 살벌한 급훈이다. 후하후하시발. 심신 안정을 위해 복식 호흡법을 시도한 뒤 미닫이문을 쾅 열어젖히자 여느 때와 같이 시끌벅적 떠들고 있는 아이들이 보였다.


'안녕'


그리고 그 어린애들 사이에 껴있는 28살 정재현. 정재현이 손가락을 까딱이며 작게 입만 뻥긋거렸다.


빠르게 정재현은 위아래로 스캔한다. 쫙 빼입은 양복에 파일철을 들고 서 있는 모습을 보니 정말로 단순히 참관을 온 것인지, 전 남친의 생쇼지 아리송했다. 문자가 의미심장하긴 했는데…. 저 새끼를 끌고 나갈까, 그냥 수업을 진행할까 고민하다가 그냥 무시하고 수업을 진행하기로 했다.


"선생님"


한결 편안해진 마음으로 화이트보드 앞에 서자 정재현이 조용히 손을 들며 조이를 불렀다.


"네?"


선생님은 무슨, 저렇게 부르고 지랄…. 온몸에 소름이 돋았지만 정재현을 철저히 모른 척하기 위해 조이 또한 존댓말로 응했다. 역겨웠다.


"첫사랑 얘기해주세요"


띠동갑 애들 사이에서 저러고 있네. 아이들은 잘생긴 윗대가리의 농담쯤으로 받아들였는지 하하하 웃음을 터트렸다. 창피함은 온전히 조이의 몫이었다.


"선생님 첫사랑 저잖아요"


하?하? 정재현의 핵폭탄 급 발언에 하하하 웃던 애들이 렉 걸렸다. 저 미친 또라이 새끼. 하하, 잠깐 저 좀 보실까요? 애들아 잠깐만. 삐걱거리는 애들에게 양해를 구하고 정재현을 차분하게 복도로 불러낸다. 사회적 명예를 위한 마지막 발악이었다. 미친, 정재현이랑 조이 쌤이 웅얼웅얼. 반을 나서는 등 뒤로 수군수군 거리는 소리가 났다. 이런 샤발….


"이 미친 또라이 새끼야"


조이가 정재현을 복도 창문에 쾅 밀치며 조용히 쌍욕을 퍼부었다. 오우, 우리 공주님 박력…. 분위기 파악도 못하고 정재현이 감탄한다.


"야, 쟤네 다 너 누군지 알거든?"


"알겠지, 내가 누군데"


"그니까 제발 쪽팔리게 굴지 마"


"나 걱정해 주는 거야?"


"그 뜻이 으니즈나, 내 극증 하는 그그든?"


조이가 이를 꽉 깨물고 말했다. 너는 내 사회적 명예 같은 건 생각도 안 하냐? 네 사회적 명예 진작 떠내려간 거 아니었어? 너 학생들 사이에서 별명이 지랄견이라며. 이런 시발, 그건 그거고 너 때문에 이젠 치정극 찍는 지랄견 되게 생겼어.


"여긴 왜 온 건데"


"밖에 비 와"


"그럼 우산만 놓고 꺼지든가"


"이렇게까지 안 하면 네가 날 안 봐주잖아"


조이와 정재현이 헤어진 지 일주일째 되는 날이었다. 재현과 조이가 싸우는 이유는 거의 조이의 일방적인 지랄이었는데, 대게 그 둘의 싸움은 조이가 '넌 날 사랑하지 않는 거야'를 시전하면 재현이 싹싹 빌고 화해하는 조이의 지랄로 시작해서 지랄로 끝나는 루트였다. 하지만 그날 정재현의 반응은 딱 한 마디였다.


 '너 그렇게 말하는 거 좀 고쳐, 내가 너 사랑하는 거 뻔히 다 알면서, 나 진짜 지친다'


그렇게 말하는 정재현의 표정은 정말로 지쳐 보였다. 금세 정신 차린 재현이 '진심 아닌 거 알잖아, 내가 잠깐 미쳤었어 조이야'라며 무릎까지 꿇고 싹싹 빌었지만 조이는 홧김에 그냥 집을 나와버렸고, 그렇게 집을 나온 지 일주일째가 되는 날이었다.


"너 잠은 어디서 자는 거야"


"니 카드 내역 보면 알잖아"


물론 다 알면서 물어본 거다. 하루가 멀다 하고 70만원이 넘는 호텔 영수증이 문자로 날아오는데 모를 수가. 집 나간 조이는 생존신고를 카드값으로 대신했다. 가출한 주제에 좋은 호텔만 골라 다니더라, 너? 찌질한 물음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으나 재현은 마음속으로 사랑 애(愛) 자를 세 번 새기며 집어삼켰다. 기껏 카드 쥐여주고 꼬박꼬박 카드 명세나 확인하는 쪼잔한 남자가 되고 싶진 않았다. 


"집으로 다시 들어와, 네가 집 없이 전전하는 꼴은 못 봐"


"..."


"네가 남자친구를 사귀던 뭘 하던 신경도 안 쓸 게"


"그럼, 그럴까?"


조이는 재현을 미친 또라이라 부르지만, 진짜 미친 또라이는 조이였다. 예상은 했다만 저렇게 덥석 받을 줄이야. 할 말은 많았지만 하지 않기로 했다.


"수업 끝날 때까지 기다릴게"


그래, 더 사랑하는 쪽이 지는 거지.









오전에는 비가 내리더니 비가 그친 오후는 햇빛이 쨍하니 빛났다. 덥다, 더워. 이제야 겨우 4월인데, 날씨만 보면 벌써 여름의 초입이었다. 이젠 사계절이 뚜렷하며… 따위 대한민국 장점에 기재할 수 없는 건가? 이런 쓰잘데기 없는 생각을 하며 걸으니 어느새 정재현이 기다리기로 한 카페 앞에 도착했다. 센터랑 거리가 가깝기 때문에 평소 조이가 애용하는 카페였다. 


"뭐야, 그새 어디 갔나?"


너무나도 선명한 햇살에 두 눈을 찌푸려가며 재현을 찾아 두리번거리는데, 통유리로 된 카페 안엔 재현의 모습이 보이질 않았다.


"수업 끝나는 시간 알 텐데…."


평소 재현은 조이를 기다리게 하지 않았다. 항상 조이가 말한 예상 시간보다 먼저 도착해 조이를 기다렸다. '거의 다 왔으니까 나와 있어' 같은 융통성 따위 조이 앞에서 발휘하지 못했다. 전화라도 해볼까? 조이는 주머니에 있는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며 고민하다, 그냥 다시 주머니에 핸드폰을 집어넣었다. 뭐, 금방 오겠지.


"봄은 봄이구나"


카페 옆에 위치한 꽃집 앞엔 이름 모를 형형색색의 꽃들이 싱그럽게 피어있었다. 그중에는 평소 식물에 관심이 없던 조이의 마음을 사로잡은 식물이 있었는데, 바로 노란색 장미였다. 앙증맞게 핀 장미는 조이가 좋아하는 노란색일 뿐만 아니라 화분의 모양까지 독특해서 제법 마음에 들었었는데, 오늘은 그 화분의 자리가 비어있었다. 역시 제 눈에만 이뻐 보인 건 아닌지 벌써 누가 데려간 듯했다. 좀 아쉽네…. 굳이 돈 주고 살 생각은 없었으나 막상 화분이 보이질 않으니 좀 섭섭했다. 


"공주야"


아쉬움에 입맛을 쩝 다시고 있을 때, 재현의 목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드니 꽃집에서 나오는 재현이 보였다. 방금 전까지 조이를 섭섭하게 만들었던 화분을 품에 안은 채.


"헐, 화분 너가 산 거야?"


"어, 네가 좋아할 거 같아서"


퍽 로맨틱한 멘트였지만 조이의 크롬 하트를 쉽게 움직일 순 없었다. 조이는 무덤덤한 표정으로 핸드폰 인터넷 창을 켜 토도독- 노란 장미에 대해 검색했다.  


"오, 꽃말이 변치 않는 우정이래. 그래, 우리 평생 우정이나 할까?" 


따지고 보면 둘은 친구로 지낸 세월이 더 길었다. 조이랑 재현이 알고 지낸 세월은 벌써 20년 정도 됐는데, 그중 연인으로 지낸 기간은 9년이었다. 그 9년이라는 세월 또한, 헤어졌다 사귀었다를 수백 번씩이나 반복한 나날들이었으니, 제대로 치자면 훨씬 더 짧을 것이고.


"그래, 원래 우정이 바탕이 되지 않는 모든 사랑은, 모래 위에 지은 집이랑 같다고 하지"


그딴 말은 또 어떻게 알고 있대? 내가 원래 좀 박학다식하잖아. 제법 뻔뻔하게 잘 받아 쳐냈지만 재현은 노란 장미의 다른 꽃말을 알았다. 친절하신 꽃집 사장님께서 화분에 물을 주는 방법부터 노란 장미의 꽃말까지 일일이 설명해 주신 덕이었는데, 재현이 들은 꽃말은 변치 않는 사랑이었다. 











"집이당~"


신발장에 흐트러져 있는 신발들을 꽤나 보니 반가웠다. 조이는 자기도 모르게 콧노래를 흥얼거렸고, 정재현은 그런 조이를 보며 살짝 웃었다. 잠시 나갔다 들어오면 멀끔히 정리되어 있는 호텔은 편하긴 하다만, 왠지 모르게 찝찝한 느낌이 들곤 했었는데. 역시 살짝 흐트러져 있어도 내 손길이 묻어있는 집이 최고였다. 


"왔냐?"


"아, 씨 깜짝아"


현관 복도를 지나 거실로 들어서니 제법 어둑어둑해진 거실에 우두커니 앉아 있는 김도영이 보였다. 미친, 너 왜 거기 있어? 불도 안 켜고. 언제 올지 몰라서 잠이나 자려고 했다. 설마 정재현, 너 혼자 집에 내버려 두고 온 거였냐?


"엉, 비 오는 거 보더니 너 데리러 가야 된다고 미친놈처럼 뛰쳐나가더라"


"진짜 근본부터 미친놈이네…."


조이가 재현의 근본에 감탄하며 장미를 둘 위치를 각 재고 있을 때, 띵-문자가 울렸다.


[조이 선생님, 빨리 센터로 와주셔야겠어요]


임 선생님의 문자였다. 선생님, 저 방금 퇴근했는데…. 못 본척할까 하다가 제법 급한 일 같아 알겠다고 답장했다. 정재현에게 태워다 달라고 말할까 잠시 고민했으나, 오늘 2시간 동안이나 저를 기다렸던 게 마음에 걸렸다. 김도영이 또 혼자 집에 남는 게 그렇기도 하고. 


"나 잠깐 나갔다 온다"


"어디 가는데"


"남자친구 만나러"


"그새 생겼냐?"


"불만 있어?


"... 너무 늦게 들어오진 마"


쾅-


세기말 사랑이다 참. 조이가 이미 나가고 없어진 현관을 정재현은 아련한 눈빛으로 쭉 바라봤다. 무슨 일나간 주인 기다리는 강아지도 아니고…. 


"그냥 다른 사랑이나 알아보지 그래?"


너랑 조이는 영 아닌 거 같다. 도영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말했다. 당연한 얘기지만 정재현은 인기가 많았다. 탄탄한 피지컬과 귀티 나는 외모야 뭐 말할 필요도 없고, 참 대단한 집안 자식이었다. 정재현의 조부는 센티넬과 가이드의 매칭률을 발견해 대한민국 최초로 노벨상을 수상 받은 사람이었고, 부친은 센티넬 연구센터 센터장이었다. 그 대단한 핏줄은 이어받은 정재현은 현재 최연소 중앙 센티넬 국 부장이고. 


그로 인해 센터 내에서 현대판 디즈니 왕자님으로 통하는 재현이었으나, 현실은 조이의 시다바리 노릇을 자처하고 있는 호구였다.


"내가 조이를 두고 누굴 사랑하냐"


이제서야 현관 쪽을 쳐다보던 시선을 거둔 정재현이 덤덤하게 말했다. 퍽 사랑꾼 다운 대답이었다. 도영은 이런 재현의 사랑을 종종 바다에 비유하곤 했다. 비티아스 해연이라고 했던가? 같은 팀인 쟈니에게 주워들은 잡지식에 의하면, 지구 어딘가엔 에베레스트를 담그고도 남을 정도로 수심이 깊은 바다가 존재한다고 했다. 이름은 잘 기억나지 않지만, 재현의 사랑을 비유하기엔 더위할 나위 없이 적절했다.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깊은, 아무리 극심한 가뭄이 온다 해도 쉽게 메마르지 않을 바다 같다고.


"야 너 그러다 조이가 너 버리고 딴 사람한테 홀랑 빠져버리면 어떡할래?"


"조이는 나 못 버려"


또한 깊고 깊은 바다의 속내는 아주 음습하다는 것까지도 말이다.


"조이한텐 나밖에 없거든"


재현이 보조개가 쏙 페일 정도로 해사하게 웃으며 말했다. 덕분에 김도영의 말문은 턱 막힌다. 말려 올라가 있는 입꼬리와 달리 눈동자는 탁하게 침전돼 있었다. 바닷물에 잔뜩 쩔은 꿉꿉한 집착이었다. 쟤 저러는 거 조이도 알까? 찜찜한 의문을 속으로 조용히 삼키며 시선을 돌렸다. 어딜 쳐다보던 사방이 노란색이다.


"진짜 취향하고는…."


재현은 조이를 위해 자신의 취향 따위 버릴 줄 아는 남자였다. 조이와 재현의 취향을 비유하자면 대한민국과 우루과이 정도라고 할 수 있겠다. 정반대 편에 위치한단 뜻이다. 


우선 재현의 취향은 본인의 얼굴처럼 고고했다. 주로 블랙이나 화이트 같은 정갈한 계열의 옷을 입었고, 달달한 음료보단 원두로 내린 블랙커피를 커피를 선호했으며, 깔끔하고 심플했다.


 반면 조이는 블랙이나 화이트 같은 따분한 색깔보다는 노란색이나, 하늘색 같은 통통 튀는 색을 좋아했고, 쓰디쓴 블랙커피보다는 달달한 코코아를 선호했으며, 작고 앙증맞은 것에 환장했다. 


그래서 조이와 재현, 둘이 사는 이 집의 벽지는 노란색이었다. 부엌 찬장에는 항상 코코아가 떨어지지 않게 구비되어 있었으며, 싱크대 앞에 나 있는 작은 창문에는 미니 커튼이 앙증맞게 바람에 팔랑이고 있었다. 조이 취향을 그대로 형상화한 집이었다.


도영은 처음 집들이 왔을 때의 충격을 아직도 생생히 기억한다. 대리석이 깔린 바닥은 하얗게 빛나는데 벽은 노란 것이, 꼭 커다란 계란 안에 들어와 있는 것 같았다. 같이 집들이 왔던 멤버들의 반응은 딱 두 가지로 나뉘었었는데, 지랄도 참 가지가지로 한다고 혀를 끌끌 차던 유형과 너무 말도 안 되는 인테리어에 충격받아 말을 잊지 못하는 유형이었다. 도영의 경우 후자였다. '원래 돈이 많아야 지랄도 가지가지 할 수 있는 거다'라고 조용히 속으로 생각했다. 처음 한강이 보이는 아파트를 구했다는 것을 들었을 때에 든 막연한 부러움은 평생 살집도 아닌 주제에 원래 붙어 있던 대리석을 뜯어내고 저 촌스러운 노란색 벽지를 바를 수 있는 재력에 대한 구체적인 부러움으로 바뀌었었다. '조이 방만 노란색으로 하면 안 됐던 거야?'라는 멤버들의 나무람은 '조이 방은 하늘색이야'라고 은은한 미소한 띄며 말하는 재현에 의해 종결됐었지. 저런 게 사랑이면 도영은 하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부랴부랴 택시 타고 도착한 사무실은 북적북적했다. 가뜩이나 좁은 사무실에 양복을 차려입은 정장들이 여럿 서 있었기 때문이다. 기다란 회의용 탁상에 앉아 이마를 맞대고 토론하고 있는 선생님들의 얼굴은 모두 지쳐 보였다.


"저, 선생님"


조이가 다가가 말을 걸자, 버들처럼 축 처져 있던 이주임 선생님의 얼굴에 반가운 기색이 돌았다.


"어, 조이 선생 왔어?"


"네, 무슨 일이에요?"


"그게, 학생이 한 명 들어왔는데 말이야…."


능력도 정신 계열인데다, 등급도 아직 컨트롤이 안 돼서 그렇지 A급 이상일 거라네. 정신 계열이면 꽤나 희귀한 능력이었다. 오, 정신 계열이요? 게다가 능력도 꽤 높네요? 그럼 좋은 거 아니에요? 근데 왜 분위기가 초상집이죠? 조이가 순수한 표정으로 질문들을 와다다 내뱉으니, 임 선생님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한숨을 푹 내셨다.


"그게 좀 골치가 아파, 우리야 그런 사람이 나와주면 좋기야, 좋지"


"그런데요?"


"그것도 잘 따라줘야 좋은 거지, 근데 그 학생 지금 그딴 거 안 하겠다고 지금 난리도 아니야"


"능력도 귀하고 등급도 높으면, 연봉도 어마 무시할 텐데? 근데도 안 하겠데요?"


어차피 센티넬들이야, 능력 오용의 위험이 있어 발현되면 무조건 국가 소속으로 넘어가긴 하지만 좋은 게 좋은 거 아닌가.


"물론, 다 설명했지. 근데 그게…."


"J 그룹 막내 아들내미라네요, 자기는 돈 같은 거 필요 없다고 난리에요"


이주임 선생님이 곤란한 듯 뜸을 들이자, 사무실 한 편에서 커피를 타던 임 선생님께서 말씀 하셨다. 아, 금수저였군요…. J 그룹이라면 조이도 잘 아는 회사였다. 미디어, 식품, 바이오, 유통 등 특정 분야에만 전념하지 않고 여러 분야에 진출하여 많은 기업들을 거느리고 있는 J 그룹은,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모를 수 없는 기업이다. 어딜 가든 뭘 하든 심심치 않게 J 그룹 로고를 접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얼굴은 멀끔허니 참 잘생겼는데, 부잣집 아들내미라 그런지 아주 천상천하 유아독존이야. 우리랑은 통 말이 안 통하네" 


그래서 말인데…. 


조이 선생이 한 번 얘기 좀 잘 해줘 봐. 조이 선생이 애들 길들이는 거 잘 하잖아? 허허. 이주임이 사람 좋게 웃으며 말했다. 아하, 그러니까 한 마디로 저한테 폭탄을 떠넘기신다는 거군요?


"학생 이름이 뭔데요?"


[정재현/정성찬] 내 남자친구를 소개합니다 | 인스티즈


"정성찬"





































종강하고 처음 올리는 글이네요. 도비는 이제 자유랍니다~ 들뜬 기분으로 쓴 글이라 살짝 유치하고 재미없을 수도 있는데, 그래도 재밌게 봐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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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븐틴 [세븐틴/홍일점] <세때홍클 2> | 18 네 말에 마침표만 붙이면 되겠다12 넉점반 03.27 2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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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븐틴 [세븐틴/홍일점] <세때홍클 2> | 17 jealousy or envy25 넉점반 03.25 22: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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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븐틴 [세븐틴/홍일점] <세때홍클 2> | 16 모래성을 만든다고 비가 안내리진 않아서19 넉점반 03.25 0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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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븐틴 [세븐틴/홍일점] <세때홍클 2> | 15 연필을 깊게 눌러 쓰면 아무리 지워도 흉이 남는..13 넉점반 03.23 2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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