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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범생 정재현X날라리 너심 썰 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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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저씨, 혹시 이거 바로 고칠 수 있어요?"
내가 주섬주섬 주머니 안에서 시계를 꺼내 내밀자
티비를 보고 있던 아저씨는
옆에 놓여져 있는 안경을 쓰고 눈썹을 찡그렸다.
"....."
"....왜요? 오래 걸려요?"
이리저리 꽤나 오래 살펴보던 아저씨는
안경 위로 눈을 뜨며 나를 바라보고
빠른듯 느린듯 아는체를 하기 시작했다.
"그냥 가품인줄 알았더니 진짜인 것 같네."
"....뭐가요?"
"이거, 여기선 못 고쳐."
"...네?!"
뜻밖의 대답에 나는 이해하지 못하고 다시 되물어야했다.
아니, 그렇게 심하게 망가졌나.
"많이 망가졌어요? 그냥 콜라 조금 들어간건데."
"그게 아니라, 여기 브랜드에서 나온 시계는
여기 지점에서만 가야지 고칠 수 있다고.
우리나라에서는 한 군데밖에 없어."
며칠 전 일까지 생각이 난 나는 뭐라 대답해야할지,
아니 뭘 물어봐야할 지 횡설수설하자
아저씨는 답답하다는 듯 다시 설명했다.
"여기는 백프로 다~ 주문제작이야.
공장에서 하루에 몇만개씩 찍어내는 시계가 아니라
이런 조그만 시계방에서는 함부로 못 건드려.
가려면 직접 거기로 가야돼."
그러고는 들고있던 시계를 다시 나에게 내밀었다.
나는 엉겁결에 돌려받은 시계를
멍하니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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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아까 따로 A/S 맡겼어.'
고장난 시계 좀 잠깐 보자는 정재현의 말에
급히 생각해낸 망할 거짓말이 불현듯 떠오르자
도리어 내 눈을 피하던 정재현이 다시 생각났다.
뻔뻔한 내 모습을 차마 못 보겠어서 피한 거겠지.
"하."
스스로 내가 너무 어이가 없어서 코웃음을 쳤다.
정재현은 다 알고도
그냥 지켜만 보았다, 지금까지.
내가 무슨 짓을 한건지
집까지 걸어가는 내내
신발 코 끝만 바라보며 터벅터벅 발걸음을 뗐다.
집 앞 현관문에 서서 도어락에 손을 뻗다가
다시 휴대폰을 꺼내 익숙한 이름을 찾고는
전화를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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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해야하는데,
지금인데,
재현이도 기다리고 있을텐데,
예상하게도 그렇게 바라는 내 목소리는
한 음절도 나오지 않고
다물었다, 떨어졌다,
멍청이 같이 몇 분 째 반복하고만 있을 뿐이었다.
결국 쉽게 말을 꺼내지 못한 나는
놀고 있는 내 손을 뻗어 정재현 손을 살며시 잡았다.
여전히 창 밖을 멍하니 바라만 보던 정재현은
잠시 자신의 손을 내려다 보다
다시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보고는
애써 미소만 지었다.
"재현아, 그 시계 있잖,"
"아, 맞다. 선배."
"어, 어?"
"그 시계... 제가 아까 오후에 학교에서
체육시간에 잠시 빼놓았었는데
다시 와서 보니까 없어졌더라구요."
갑자기 조용하던 정재현은
내가 시계 얘기를 꺼내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시계를 잃어버렸다며
내 표정을 살폈다.
멍해진 나도 이게 무슨 말인가 싶어
급히 시선을 내려 정재현의 손목을 보았는데
정재현의 말대로
정말 정재현 손목엔 휑하니 아무것도 없었다.
"우리 첫 커플 아이템이었는데
선배는 고장나고 저는 잃어버렸네요.
미안해요, 선배."
"아, 아냐. 내가 더 미안하지.
너가 준비한 선물이었는데.."
아무 대답없이 정재현은
여전히 내가 잡고 있던 손을 슬쩍 빼고는
자신의 얼굴을 감싸다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어쩌다가 이렇게 된지 모르겠네요.
시계 정말 고심하고 또 고심해서 준비했던건데."
".... 그러게."
"타이밍이 이렇게 된 게 다행인건지, 뭔지."
"...... 그러게."
뜻밖의 상황에 다시 머릿속이 복잡해진 나는
앵무새처럼 그러게, 라는 말만 반복했다.
그런 나를 빤히 바라본 정재현은
시선을 다시 돌려 멍하니 창밖을 보다가
가방 속에서 휴대폰을 꺼내고는
시간을 확인했다.
"아, 선배. 제가 약속이 있어서
먼저 가봐야할 것 같아요."
"약속? 무슨 약속?"
"원래 오늘 선약이 있었는데
선배 얼굴 보려고 좀 미뤘었거든요."
나를 위해 약속까지 미뤄놓고선
되려 본인이 미안해하는 얼굴을 하고 있으니
나는 얼른 가라며 손짓을 했다.
"나 괜찮아, 진작 말해주지.
그럼 만나자고 안했을텐데..."
"아니에요. 내가 미안해요."
"아냐, 얼른 가봐. 이따가 연락해."
내가 연락하라며 귀 옆에 손을 갖다대자
정재현은 모를 표정으로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주섬주섬 가방 챙기고 먼저 나간 정재현을
나는 계속 바라보았다.
오늘도 결국 말 못한 건가...
스스로 답답함을 느끼는 나를 다시 애써 모른 척하려
창 밖으로 천천히 걸어가는 정재현을 바라보는데
무언가 스치듯이 나를 일깨웠다.
그러고선 천천히 되풀이했다.
말이 아닌 표정으로, 행동으로,
마지막까지 뭔가 이상했던 정재현이 떠오르자
나는 황급히 일어나 카페에서 벗어났다.
카페 안에서 봤을 땐 천천히 걸어가는 것 같았는데
쫓아가려니 왜 이렇게 빠른지
재현아, 재현아! 하고 외치는데
정재현은 안 들리는 듯 앞만 보고 계속 걸어갔다.
나는 다시 힘껏 달려 거의 다다를 때쯤
여전히 걷고 있는 정재현의 팔뚝을 붙잡고
빠르게 재현아, 하고 이름을 내뱉었다.
정재현은 그제서야 내 눈을 바라보고
나에게 잡히지 않은 다른 손으로
허리 굽혀 숨을 가쁘게 쉬는 나를 일으켰다.
"재현아, 나, 나 시계,
고장, 아니, 고장난 거, 아니,"
"선배, 우리 헤어져요."
순간 가쁘게 쉬는 것도 잊은 채
아무 표정 없는 정재현의 얼굴만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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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전히 반겨주신 분들 정말 감사드립니다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