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그대에게
하마터면 큰 일이 날 뻔했다. 남자끼리 뭐 어떴냐며, 운동도 끝났으니 시원하게 샤워나 같이 하자는 룸메이트의 강제적인 제안에 깜짝놀라, 별 답지도 않은 핑계를 늘어 놓으며 밖으로 허겁지겁 뛰어 나왔더니, 목이 말라왔다. 얼마나 뛰었다고. 저를 마치 변태 취급 하는 것 마냥 격하게 거부하는 날 바라보던, 룸메이트의 얼굴이 눈 앞에 선명히 그려졌다. 엄청 무안했겠지. 이따가 다시 들어가서 꼭 아까는 미안했다며, 사과를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미안 친구야. 어쩔 수 없었어.
“ 아주 그냥 이 학교에서 퇴학을 당할 뻔 했다 이거에요. 시발. ”
땀에 젖은 머리를 손으로 살살 털며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내가 만약, 룸메이트의 부탁을 거부 하지 못하고 같이 샤워를 했더라면…. 으. 상상조차도 하기 싫은 순간이 머리속에 그려지자, 거칠게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꽤나 실력있는 높이뛰기 선수였건만, 큰 부상으로 인해 학교를 다니지 못하게 된 쌍둥이 동생의 부탁아닌 부탁으로 인해 대한민국 최고의 체육고등학교라 불리우는 이 학교의 그저 졸업장 하나만을 바라보며 생활을 시작한지 벌써 6개월 째. 대신 학교 좀 다녀 달라며 자기 멋대로 날 이 체육고등학교에 보내 버린 엄마를 앞에 두곤, 질질 짜며 못간다고 소리쳤던게 엊그제 같은데…. 이빙산 많이 발전 했어. 시발, 단발이라고는 할 수 도 없이 매우 짧디 짧은 머리와 가슴 언저리에 느껴지는 딱딱한 붕대들이 이젠 점차 익숙해 지고 지경까지에 이르고 말았다. 존나 인간의 적응력은 위대해.
아니, 그보다 더 웃긴건. 다들 내가 여자인걸 몰라. …좋아 할 일인가, 슬퍼해야 할 일인가. 끝없이 고민하게 되는 의문이였다.
“ …축구 잘하네 새끼들 ”
덥지도 않은건지, 따가운 햇살을 맞아가며 열심히 최선을 다해 축구를 하는 1학년 아이들을 보며 미간을 좁혔다. 아, 내가 다 찝찝하네. 조금있다가 교실에 땀냄새 존나 진동하다 못해 온 벽지를 물들인다에 내 손목을 걸겠습니다. 운동장 주변에 자리를 잡고는 살포시 앉아, 내일 시행 될 육상 수행평가를 준비하느라 찌릿찌릿 전기가 통하는 것 처럼 아파오는 다리를 제 손으로 주무르며 한숨을 푹푹 쉬었다. 여자 다리에 알이 웬말이냐고요. 한껏 울상을 지으며, 열정을 다해 다리를 주므르고 있었을까…. 갑자기 내 앞으로 드리워 지는 검은 그늘에 깜짝놀라, 다리에서 손을 떼고는 위를 올려다 보았는데.
“ 넌 가만 보면, 항상 혼자 있더라 ”
“ 선배가 뭘 모르시네요, 제가 얼마나 친구가 많은데? ”
“ 그니까. 니 말대로 니가 친구가 없는 것도 아닌데 말이야-, ”
그 그늘의 주인공은 다름아닌, 이 학교의 전교회장 2학년 이진기 선배였다. 얼굴 자체가 워낙 반반하고 훈훈할 뿐 만아니라, 그 외모에 걸 맞게 성격 또한 서글서글하고 다정다정한 편이라, 학생들은 물론이고 선생님들의 큰 관심과 사랑 또한 한 몸에 받고 있는 그런 선배였다. 맞아, 생각 해보니까 이 선배 운동도 잘함. 솔직히, 내가 만난 일반인들 중에 가장 사기캐에 적합한 사람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때로는 짖궂은 장난을 걸 때도 많지만, 평소에 보여지는, 확실히 선배다운 행실과 언행이 가끔 내 마음을 선덕선덕하게 만들 때가 여러 있었다. 그때마다, 사랑한다고 고백하고 싶었지만…, 난 아직 남자이고, 20살 까지는 쭉 남자일 예정이였다. ssibal.
아. 이건, 나만의 김칫국 드링킹 일 수도 있는데, 이 선배가 다른 후배들보다 나를 좀 더 잘 챙겨주고 신경써 주는 부분이 확실히 있는 것 같다는 느낌을 최근들어 받는 중 이였다. 오, 시발? 김칫국 원샷 성공이라고요? 아니 근데, 이태민도 나한테 그랬단 말이다. 이진기 선배가 유독 너한테 더 말을 많이 거는 것 같다고….
“ 다리는 왜. 아파? ”
“ 아, 육상 수행평가 준비하느라 힘 좀 썼더니 아파 죽겠어요 ”
“ …야, 근데 넌 ”
“ 에? ”
내 옆에 자리를 잡고 앉던 선배가, 다리를 주므르고 있는 날 바라보며 걱정스럽다는 표정으로 물어왔다. 이거 봐? 날 아낀다니까? 존나 좋은 거 아니겠습니까? 이래도 김칫국 입니까? 예? 당장이라도 그 태평양같이 넓은 선배의 품에 와락하고 안기고 싶은 심정이였지만, 그런 마음을 꾹 누르고는 괜찮다며,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그런 나를 보며 따라 웃던 선배가, 갑자기 내 다리로 시선을 옮겼다. 한참 동안 내 다리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는 선배의 행동에 괜히 낯 부끄러워져 살짝 다리를 오므렸다. 아, 시발 존나 여자인거 광고하냐!!!!!! 그러다 곧, 내 얼굴을 말없이 바라보던 선배가 한 쪽 입꼬리를 올리며 웃었다.
“ 다리가 뭐 이렇게 예뻐 ”
“ …아니, 무슨 선배는 그런 농담을 ”
“ … ”
“ … ”
“ 아, 뭐냐 이 기분. 괜히 덥네 ”
직접적으로 들키지도 않았는데, 뭔가 제 정체가 완전히 들통 난 것만 같아 선배의 눈을 바라보지 못한 채 고개를 푹 숙이고 말았다. 그런 내 모습에, 살짝 웃던 선배가 갑자기 더워진다며 티셔를 팔랑팔랑 거렸다. 나는 알고 있었다. 선배가 더위를 잘 안탄 다는 걸.
“ 야, 후배. 어쩔거야. 니가 책임 져 ”
“ 뭘요 ”
“ 왜 너는, 눈도 예쁘고 ”
“ … ”
“ 피부도 뽀얗고 ”
“ …선배 ”
선배의 시선이, 내 눈부터 시작해 천천히 내려오고 있었다.
“ …왜 입술도, 그렇게 예쁜건지 ”
“ ㅇ, 아니 무슨 소ㄹ ”
“ 설명해봐. 당장. ”
새삼 처음 들어 보는, 선배의 낮고 진지한 음성에 설레이고 있는 나를 속으로 원망하며 괴성을 질렀다. 지금 선배가, 내 정체를 알고 저러는 거 일 지도 모른다는 꽤 위험한 상황 속에서도 멍청하게 설레이고만 있다니…! 단 한 번도 시선을 옮기지 않은 채, 내 눈만 오롯이 바라보고 있는 선배의 마음이 대체 무엇인지 알고싶었다. …혹시.
“ 제가 여자도 아니고, 대체 어디가 예쁘다는거에요 ”
“ …그러니까. 니가 여자도 아닌데, 왜 예뻐 보이냐 이거지 ”
“ …여기가 남고라서? ”
“ 그거 말고도 ”
침을 한번 꿀꺽 삼켰다.
“ 니가 진짜 여자 일 수도 있잖아 ”
“ …아, 아닌데요 ”
아, 미친. 너무 당황한거 티냈어. 말을 더듬으며 식은땀을 흘리는 날 뚫어져라 쳐다보던 선배가, 한참동안 말이 없다가 이내 크게 소리 내며 웃었다. 아, 뭐지 이 분위기. 나 들킨 건가? 일단, 나도 어떻게든 이 묘하고 이상야릇한 상황을 벗어나기 위해 선배를 따라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아 존나 바보같다.
“ 왜이렇게 당황해, 너 당연히 여자 아니겠지 ”
“ 그럼요! ㅈ, 저 여자 아, 아니에요! ”
“ 니 말대로, 넌 여자가 아닌데 ”
“ … ”
“ 내 스스로가 자꾸, 네가 여자로 느껴지는게 문제인거지 ”
오. 지져스. 잘 나가다가 또 이게 무슨 소리람? 선배 오늘 왜이래요 진짜.
“ 나 요즘 너 때문에 정체성에 혼란 오고, 그래. ”
“ …미, 미안합니다 ”
“ 이것 봐, 존나 귀엽잖아 ”
정말 꿀이 떨어지는 것 마냥, 다정한 눈빛으로 날 바라보며 큭큭 웃던 선배가 평소처럼 자연스럽게, 내게 어깨동무를 걸어오려다 순간 멈칫 하는 바람에 나도 그런 선배를 의문에 가득 찬 눈빛으로 올려 다 보았다. 왜, 왜요? 왜 멈칫해요? 설마, 내 몸에서 막 이상한 냄새 나고 그러나? 아, 아까 샤워 하고 올걸.
“ 나, 그래서 너한테 평소처럼 스킨쉽하고 이런거 못하겠어 ”
“ 아, 왜이래요 진짜 선배 ”
“ 진짠데 ”
“ … ”
“ 그리고 그렇게 올려다 보지마 ”
“ 왜, 왜요? ”
“ … ”
“ …선배? ”
“ …몰라, 너 그럴 때 마다 기분 존나 이상해 ”
아니, 내가 당연히 선배보다 키가 작으니까 올려 다 볼 수 밖에 없죠! 올려다 보는 것도 뭐라하면 어쩌라는 거냐면서, 혼자서 조용히 중얼 중얼거리니, 옆에서 날 빤히 보던 선배가 그 중얼중얼 거리는 것도 하지 말라며 또 고나리 질을 하였다. 아 왜요! …그것도 좀, 존나 귀여워. …시발?
“ 너도 내가 이상하지? ”
“ …좀? ”
“ 그러니깐 ”
“ 예? ”
“ 너 그냥, 여자 해주면 안되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