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나이 스물 여섯. 예상치 못한 가정사로 서서히 흔들리던 집안을 먹여 살려야 한다는 집념 하나로 고등학생 때 열심히 공부 한 터라, 이름만 불러도 모두가 고개를 끄덕일 법한 대학을 들어가 평범하게 졸업하고, 내가 졸업한 과에 걸 맞는 회사에 취직해 다소 무난하고 안정적인 루트를 밟고 있는 대한민국의 청춘이라 할 수 있다. 사실, 그 청춘은 이미 지겨운 회사생활에 의해 무너져 버린지 오래였지만 말이다. 집안의 장녀로서, 회사에 취직해 일을하고 또 일을 한 대가로 빵빵한 월급을 받아, 내가 사고 싶은 거 입고 싶은 거 다 살 수 있다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참 좋은일이다. 하지만 그 대신 나는 전 보다 훨씬 더 공허하다. 이게 무슨 배부른 소리인지, 이해 못할 사람들이 훨씬 많을 거라 예상 되지만 나는 그렇다. 내가 겨우 하고싶었던게 고작 회사원뿐이었다는 것도 마음에 들지 않고, 매일 기계마냥 똑같은 책상에 앉아 똑같은 패턴으로 하루를 보내는 것 역시 마음에 안들어도 너무 마음에 안들었다. 다 때려치고 여행이나 떠나고 싶다는 생각을 언제나 다이어리에 끄적였지만, 그것은 현실이 되지 못할 막연한 상상으로 여겨졌다.
그런데….
" 빙산아 "
" 이빙산 어딨느냐 "
다 때려치고 여행이나 떠나고 싶은 건 분명 사실이었으나, 나는 아직도 이 상황이 믿겨지지 않는다. 아니, 이건 그냥 여행이 아니라 과거 여행이잖아요, 그것도 대체 몇백년 전이야? 어? 나는 평소와 똑같이 회사에 찌든 지친 몸을 겨우 이끌어 샤워를 대충하고 푹신한 침대에 누워 잠에 들었을 뿐이었다. 좀 깊게 잠에 빠졌나 싶었는데, 세상에 그게 시간여행이었을 줄은 누가 알았겠어요? 유독 밝은 빛에 아 벌써 아침인가 하고 눈을 떠 보았을 때, 나는 이미 사극 드라마에서나 겨우 볼 수 있었던 조선시대의 궁궐들 그 한 가운데에 덩그러니 누워있었다. 내가 즐겨 입는 잠옷을 그대로 입은 채ㄹ…. 아니 조선시대로 넘어 왔으면 옷이라도 바꿔주던가!
나는 사실 헛웃음이 먼저 나왔다. 너무 어이가 없어서. 내가 얼마나 피곤했으면 이런 말도 안되는 꿈을 꾸나 싶어, 꽤나 아프게 볼을 꼬집어 보았지만. 씨발. 아팠다. 그것도 존나 아팠다. 볼을 꼬집자 마자 흘러 나오는 아픈 신음을 듣고 나서야 드디어 나는 이것이 꿈이 아닌, 현실이라는 걸 자각하고 말았다. 한기가 느껴지는 새벽이라, 아직은 아무도 잠에 깨지 않았다는 것이 불행 중 다행이라 생각했다. 흔들리는 동공과 덜덜 떨리는 몸을 억지로 붙잡은 채, 누군가가 나타나기 전에 얼른 이 곳을 빠져나가는 것이 우선이라며 함께 딸려 온 베게를 손에 이끌고 급한 걸음을 옮기려던 찰나.
" …너는 누구냐 "
" …헉 "
순간 숨이 막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궁의 밖으로 도망치려던 나를 가로 세운것은 궁녀도, 내시도, 신하들도 아니였다. 모드 것을 집어 삼켜 버릴 듯한 깊은 아우라. 고운 때깔의 빨간 비단 옷. 이 나라를 다스리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듯 강인하고 깊음 있는 눈빛. 나는 많은 생각을 하지 않고서도, 이 사람이 바로 이 나라, 조선을 다스리는 왕이라는 걸 한 번에 알아차릴 수 있었다. 평소 사극 드라마를 그리 즐겨보지는 않았지만, 종종 엄마가 보던 사극 드라마를 보다 보면 궁의 사람들은 왕의 앞에서 항상 절대 고개를 들지 않는 다는 것이 생각났다. 그래서 나는 이 사람이 왕이라는 것을 인지 하자마자 바로 무릎을 꿇어 고개를 떨구었다. 일단 여기는 조선이니까…조선의 법을 따라야지, 암 그럼. 내가 누구냐고 묻는 왕의 물음에 감히 대답도 하지 않은 채 고개만 땅에 쳐 박으니, 왕의 호의무사로 보이던 사람이 칼을 뽑아 내게 겨누었지만 곧 왕이 그것을 저지시키는 듯 보였다. 솔직히 너무 무서워서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이런 경험이 처음인데, 나보고 어쩌라는거야.
" 누구냐 물었다 "
" … "
" 고개를 들거라 "
왕이 내 눈높이를 맞추고자 허리를 굽힌 것인지, 더욱 아까보다 왕의 음성이 가까이 다가와 흠칫 놀랐다. 사실, 이 상황이 너무 무서우면서도, 내심 왕의 얼굴이 너무나도 궁금해 고개를 그냥 빨리 들고 싶다는 마음이 있었다. 그렇지만 상대는 조선의 왕. 함부로 고개를 들수도, 그렇다고 계속 이렇게 땅만 쳐다볼수도 없는 난처한 상황에 나는 절로 미간이 좁혀졌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며 그저 몸만 덜덜 떨고 있는 내가 안쓰러웠던건지, 아님 답답했던건지 한번 작게 한숨을 내쉬던 왕이 이내 그 단단한 손으로 나의 턱을 잡아 올려 세웠다.
그리하여 마주친 왕의 용안은 정말이지….
" …고개를 들라고 "
" … "
" 했잖아 "
잘생기다 못해, 빛이 나는 것 같았다.
그 날 이후로, 왕은 내게 너는 원래 궁에 있던 사람인 척을 해야 한다며 엄하게 으름장을 놓았다. 나는 쫄리는 마음에 알았다고 답했고, 왕의 신하들이 나를 어디론가 데려가 나에게 너무나도 큰 초록색의 옷을 입혔다. 보아하니 이것은 내관의 옷인데…? 그렇게 하루 아침에 대한민국의 평범한 쳥년에서, 왕의 전용 내관으로 확 바뀐것이 너무나도 다이나믹해 나는 내 자신에게 박수를 쳐 주고 싶었다. 조선시대의 옷을 입고 왕의 곁에서 시간을 보낸지도 벌써 한달. 곁에서 지켜본 왕의 모습은, 내가 처음 왕을 보았던 그 날의 느낌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었다. 다정하고, 웃음이 많으며, 자신의 아랫사람들과 이 나라 백성들의 생활을 걱정하는 넓은 마음씨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그와 더불어, 왕은 정말 한심할정도로…까불거린다.
" 빙산아 "
" 무슨 일이십니까 전하 "
" 나와는 언제 혼을 올릴 예정이지? "
" … 예? 전하 누가 들으면 어쩌시려고…! "
" 누가 들으면, 남색이라 소문이 나는 것 아니겠느냐 "
이 궁에서 내가 여자라는 것을 아는 건, 왕과 왕의 호의무사 그 둘 뿐이었다. 그래서 더더욱 내게 저런 식의 농담은 삼가하시는 것이 맞는데…. 왕은 개의치 않고 언제나 턱을 괴어 나를 쳐다보고는 저런 능글거리는 농담들을 하시곤 했다. 솔직히 왕만 아니었으면 한 대 때리고도 남았는데, 나는 여기서 쉽게 죽고싶지 않으니 그저 주먹을 꽉 쥐어 어색하게 웃을 뿐이었다. 하하, 왕이라는 사람이 저렇게 능구렁이 같아도 된단 말입니까?
" 그럼 저도 감히 전하게 농 하나 던져 보아도 되겠습니까? "
괜한 오기심이 생겼나. 나만 이렇게 당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든 나머지, 왕에게 농 하나 던져보겠다는 말을 하니 왕은 흥미롭다는 표정을 지으며 흔쾌히 허락을 해주셨다. 사실 말만 저렇게 던져 본 것이지 이렇다 할 제대로 된 농담을 생각해 내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무슨 근자감으로 그런 소리를 한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정말 누구도 절대 믿지 못할 기막힌 농을 뱉어 냈다. 사실, 이것은 완전한 팩트지만 말이다.
" 저는 몇 백년을 거슬러 이곳에 왔습니다. "
" … "
내 말을 듣자마자 왕의 표정이 미묘하게 바뀐 것을 빠르게 발견했다. 아. 난 죽었다. 화기애애하던 아까와 전혀 다른 묵직한 공기가 나와 왕 옆을 지나갔다. 나는 살고 싶으면 어서 이 분위기를 바꿔야 한다고 생각해, 어색하게 소리내어 웃으며 제 농이 지나쳤다며 왕의 눈치를 살폈다. 그리 밝지도 그리 어둡지도 않은 묘한 표정을 짓고 있던 왕이 나의 두 눈을 뚫어져라 쳐다보다, 이내 내 어색한 웃음에 따라 공기 빠진 웃음을 지으며 답했다.
" 그것이 농이 아니라는 걸, 나는 안다 "
" … 예? "
" 왜냐하면 "
" … "
" 몇 백년을 거슬러 올라온 너가 "
" … "
" 내 잠을 설치게했던 "
" … 전하 "
" 꿈의 여인이니까 "
" 이것을 운명이라 하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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