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이별을 해요. 나는 사랑을 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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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질병. 마음쓰이는 일에 늘 따라오는 병이 이다. 감기몸살에 근육통, 고민의 밤이 길어지면서 낮과밤은 바뀌었고 수면의 질은 낮아지고 당연하게 소화를 잘 못하게 되었다. 고민의 무게가 클수록 선택에 대한 책임이 클수록 몸도 더 많이 아파왔다. 순간의 기분은 어떻게든 지나간다. 다른 생각을 하고 밝은 노래를 들으면 잠시 다른 생각을 하기도 한다. 하지만 마음속에 들어찬 고민은 상처가 되고 덧이나고 흉터로 남기도 한다. 상처입는 일이 당연해 졌다 생각할때쯤, 갑작스레 날아드는 날카로운 말과 잔혹한 상황들 앞에서 준희는 또 무녀졌다. 생각이 한쪽으로 몰릴수록 이 모든 일의 원인은 저라는 생각에 준희의 마음은 조금씩 망가뜨려지고 있었다. 상처를 참아내는 법만 배워왔던 준희인데, 미처 낫지도 못한 상처위에 또 생채기가 난다. 이제는 정말 모든 걸 내려놓고 싶었다.
그렇게 고질병이 도지면서 준희의 체력은 또 한번 바닥을 쳤고, 기비서님의 재촉에 병원에 가서 급한대로 링거를 맞고 집에와서 수면제를 먹고 누웠다.
잠에드는 동안 이라도 아무생각 없이 있고 싶었다.
"거짓말"
"나 거짓말 아닌데, 진짜 정재현인데"
"언제왔어요?"
"얼마 안됐어요. 잠깐 얼굴만 보고 다시 나가봐야 해요."
"바쁜데 왜 왔어요. 나 괜찮아요."
"내가 안 괜찮아서 왔어요. 걱정돼서 일이 손에 안잡혀. 잠드는 것만 보고 갈게요."
잠드는 동안만이라도 아무 생각없이, 고민없이 있고 싶었는데 눈을 떴을 때 눈앞에는 재현이 앉아있었다. 여기 있으면 안되는데, 여기올 수 있는 스케줄도 아닐텐데라는 생각에 한껏 잠긴 목소리로 처음 한 말은 "거짓말"이었다. 얼마만에 보는 얼굴인지 조금 헬쓱해진 얼굴의 재현은 웃어보이며 "거짓말 아닌데, 진짜 정재현인데" 라고 하면서 준희의 손을 제 볼에 가져다 댄다.
겉으로 보기에는 아무렇지 않은 대화가 이어졌다. 그렇게 소란스럽던 마음이 한순간 잠잠해진다. 이 관계가 지속 될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지만 그 순간만큼은 그 사실을 무시하고 싶었다. 잠드는 것만 보고 간다는 말에, 눈을 감기 싫었지만 수면제의 영향인지 재현과 함께 있다는 안도감 때문인지 또 스르륵 눈이 감긴다. 눈을 떴을 때 재현이 가고 없을 까봐 망설여 졌지만 이렇게 손을 잡고 단잠에 드는것도 나쁘지 않았다.
"왜 깼어요."
"손이 따듯해서요. 왜 아직 안갔어요?"
"잠든거 보고 간다고 했잖아요."
"잠든거 봤잖아요."
"아직 덜 봤어요. 그러니까 더 자요."
"그렇게 보고 있는데 어떻게 자요."
"더 자요. 한동안 못봐서 많이 봐야 하니까 얼른 눈감아요."
눈앞에 재현이 없어도 괜찮다 마음을 다독였는데, 아직도 맞잡고 있는 손이 따듯했다. 창밖의 하늘은 노을이 지고 어두워졌는데 재현은 여전히 준희의 곁을 지키고 있었다. 왜 깼냐는 다정한 물음에 손이 따듯해서요 라고 하자 재현이 코를 찡긋하며 웃어보인다. 다시 깼을 때는 없을 줄 알았는데, 바쁜 스케줄을 마다하고 재현은 준희가 자는 내내 곁을 지켰다.
밖이 어둑해 질때까지 꼬박 몇시간이 지났는데 아직 덜 봤으니 더 자라고 얼른 눈을 감으라는 재현의 말에 준희는 웃음을 터뜨린다.
재현은 그런 사람이었다. 아무이유 없이 준희를 웃음짓게 하고, 기대하지 않았던 온기로 어느센가 마음을 녹여버리는 사람이었다.
사랑받지 못한 딸로 사는건, 이미 익숙해져 버린 일이기에 괜찮았다. 부모라는 사람들에게 더 이상 기대하지 않고 살면 된다 마음을 다독였다. 하지만 재현과의 관계는 달랐다. 두사람이 함께 하는 미래를 막연히 그려본적이 있었다. 먼미래를 약속하지 않아도 손을 잡고, 발맞추어 거리를 걷고, 분주한 일상을 나누는 일들을 그려보곤 했다. 모든걸 내려놓고 훌쩍 떠나버릴수 있지만 그 대가로 내려놓아야 하는 것들이 너무 컸다. 고작 마주보고 밥을 먹고, 나란히 서서 우산을 쓰고 걷는 그런 일들이 준희에게는 너무나도 컸다.
재경그룹의 리조트 오픈식 일정때문에 재현이 2주가량 해외 일정이 잡혔고, 준희는 그 기간에 한국에서의 생활을 정리했다.
미술관을 정리하고, 후원하던 보육원에 새로운 후견인을 알아봐주고 짐을 정리해서 먼저 영국으로 부쳤다. 영국행을 선택한 준희를 재경 회장님은 반겼고, 재경 사람들의 도움으로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이제 정리해야 하는 건 재현과의 관계 하나 뿐이었다.
2주만에 마주한 두사람은 가깝게 마주앉아 있었지만 아주 멀었다. 준희가 한국 생활을 정리하는 동안 재현은 계속 해외일정을 소화했고, 재현이 한국에 돌아왔을 때 준희는 이미 떠날 준비를 다 마친 후 였다.
어머니로 부터 어떤 거래 들이 오갔는지 듣고나서 머리끝까지 차오르는 분노를 누를 수 없었다. 준희가 내린 결정에 이유가 있지 않겠냐며, 등떠밀어 보낸적 없다고 준희가 내린 결정이라는 말에 재현은 무너졌다.
어떻게 이런 결정을 혼자서 할 수 있는지, 왜 자신에게는 일언반구 말 한마디 하지 않았는지, 힘든데도 그저 누르고 참는 준희를 이해할 수 없었다. 애초에 이 모든걸 겪지 않아도 되는 사람인데, 얼마나 귀한 사람인데 이런 상황에서 이런 고민을 하고 결정을 하게 만든게 다 제 탓인것 같아 미안한 감정과 떠나기로 결정을 내린 준희에 대한 원망이 섞여 혼란스러웠다.
그렇게 마주한 두사람 이었다.
"이 그림은 꼭 재현씨한테 선물하고 싶었어요."
"......"
"붓 다시 잡고 나서 첫그림 이었어요. 다시는 안그리려고 했는데.. 재현씨 덕분에 다시 시작했으니까... 재현씨가 응원해줬잖아요. 하고싶은거 하고 살았으면 좋겠다고. 그게 뭐라고 난 그 한마디에 용기가 났어요."
"왜 말 안했어요?"
재현의 응원 덕에 그림을 다시 시작했고, 이혼할때 위자료로 미술관을 달라고 한것도 그이유 였다. 커져가는 눈덩이 처럼 덩치를 불린 감정이었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어떤 말을 해야할지 몰라 준희답지 않게 횡설수설했다. 감정을 억누르며 그림을 선물하고 싶다는 준희 앞에서 재현은 굳은 얼굴로 왜 말을 하지 않았냐고 되 묻는다. 그림을 주면서 이제 공부를 더 하고 싶어졌다고 그래서 영국으로 떠나게 됐다고 믿지않을 거짓말 이라도 해보려고 했는데, 재현의 말 앞에서 준희는 더 이상 이리저리 말을 돌리지 않고 그동안 묵혀놨던 말들을 뱉기 시작한다.
"오래 고민했어요. 내가 떠나는게 맞는것 같아요. 그게 좋을 것 같아요..."
"그게 좋은일이라니.. 그게 누구를 위한 일인데요. 갑자기 이러는 법이 어디있어요."
"나는 오랫동안 그냥 누군가가 시키는 대로 살았어요. 좋은 딸이고 싶었고, 도움되는 사람이고 싶었어요. 그러다보니 나를 점점 잃어버리는것 같았는데, 재현씨 옆에 있으면서 내가 어떤 사람인지.. 다시 생각하게 됐어요. 그림도 재현씨 덕분에 다시 시작했고, 요리도 재현씨 때문에 배워봤고, 또.. 내가 누군가에게 사랑받을 가치가 있다는 것도 알았어요. 그런데,, 여기까지가 맞는 것 같아요."
"이해해요. 준희씨가 얼마나 힘든지... 많은 일들이 있었고 앞으로도 순탄하지 않을 거에요. 그래도 이렇게 떠나는 건 아니에요."
"재현씨랑 지내는 동안 나 충분히 행복했어요... 도와줘요 나.. 재현씨랑 추억으로 살아갈 수 있게."
"왜 추억으로 살아요. 같이 추억을 만들면서 살아야지. 우리 너무 돌고 돌아서 어렵게 시작했잖아. 내가 더 잘할게요. 제발 이러지 마요."
".....재현씨 잘못도 아니고, 우리사랑이 모자라서 그런 것도 아니에요...... 어떤사랑은 여기까지가 애틋한 사랑도 있어요. "
".........."
".....나 많이 아낀다고 했죠? 나도... 재현씨 많이 아껴요. 그래서 여기서 그만하려는 거예요.."
끝내 준희가 눈물을 흘린다.
재현도 이미 알고 있었다. 세상사람들이 다 아는 결혼을 하고 또 이혼을 한 두사람이 꿈꿀 수 있는 미래는 한계가 있었다. 사람들의 시선 속에서 던져진 삶이 얼마나 고단한지 그 시선들을 준희가 얼마나 불편해 하는지도 이미 잘안다. 상식밖의 일들이 당연시되고 반복되는 제 세상에 준희를 계속 묶어 두는 일이 준희를 위한 일이 아니라는 것도 알고있다. 다 알고 있으면서도 애써 미뤄 왔었다, 생각해보면 준희를 제 옆자리에 붙잡아 두는 건 순전히 제 욕심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