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두 개의 귀걸이 」
# 1
찌뿌등한 몸을 스트레칭하며 근육을 이완시켰다.
간밤에 흘렸던 땀으로 끈적끈적한 피부가 조금 거슬렸다. 아직 제대로 떠지지 않는 눈에 힘을 주며 주위를 훑어 보았다.
하얀 실크벽지와 반투명한 레이스커튼이 달린 전면 창문, 고급스러운 탁자와 의자, 그와 세트처럼 보이는 장식장 위에 놓여 있는 커다란 TV.
항상 보던 익숙한 방안 풍경이 아니었다.
"호텔?"
흔히 드라마나 영화에서 나올 법한 고급스러운 호텔 객실이었다.
스위트룸같은 곳은 아니었지만 그냥 척 보기에도 고급스러운 자태가 얼마나 품격 높은 호텔인지 알 수 있었다.
한번도 이런 고급 호텔에서 숙박 해본 적이 없는터라 신기했다.
내가 왜 이런 곳에 있는 거지?
이런 곳에 있을 이유가 없는 나라서 지금 현재 상황은 어리둥절하게만 느껴졌다.
그러나 고민을 더하기 전에 끈적한 몸을 씻어내고 싶어서 몸에 덮힌 하얀 이불를 거둬냈다.
"아?"
거둬들인 이불 아래 깔린 침대 시트에는 간밤이 치루었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그제서야 서서히 기억이 되돌아왔다.
지금까지 겪어왔던 어느 섹스보다 황홀했던 지난 밤이 떠올랐다.
이제는 사라졌지만 섹스하는 내내 풍겼던 장미향기도. 뜨거웠던 밤을 모조리 기억해냈다.
다만 섹스했던 상대만 기억나지 않았다.
그저 얇은 허리와 탄력적인 몸매, 부드러운 피부, 흥분한 하체를 힘껏 조였던 느낌만 떠오를 뿐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몇번의 절정을 맞았는지 헤아릴 수도 없었지만 남겨진 흔적을 보면 대충 짐작이 갔다.
이미 분출한 정액은 말라버려서 시트가 굳어 있었지만 수많은 흔적이 말해주었다.
"피...?"
허연 정액과 뒤섞인 분홍색 형체가 보였다. 불그스름한 것이 피같았다.
밤새도록 섹스했던 상대가 처녀였나? 기억도 나지 않는 상대의 처녀성을 빼앗았다는 사실에 깜짝 놀랐다.
이렇게 저질스러울 수가. 아무것도 기억해내지 못하는 내가 바보 같았다.
이런 병신!
자책도 잠시 한켠에 놓인 탁상시계를 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침 7시를 갓 넘기고 있었다.
오늘은 평일이었고 학교로 등교해야할 학생이었다.
물론 의무교육을 받는 학생이 아닌 자유의 대학생이었지만 오늘 첫 강의는 전공과목이었기 때문에 땡땡이를 칠레야 칠 수 없었다.
거기다 출석을 백프로 하지 않으면 리포트를 아무리 잘해서 제출한다 하더라도 A이상을 받을 수 없는 과목이기도 했다.
몽롱한 머릿속에서 깐깐한 교수의 얼굴이 튀어나와 어서 오라고 재촉한다.
"저건 뭐지?"
침대에서 일어난 나의 시선 끝에 반짝반짝 빛나는 무언가가 들어왔다.
탁자에 가까이 다가가니 한쌍의 귀걸이였다. 아침 햇살에 반사되어 아름답게 반짝였다.
절묘하게 컷팅된 투명한 보석이었다.
"다이아몬드?"
0.5캐럿정도 되어 보이는 작은 크기여서 커다란 내손에는 무척 작았다. 잘못 만졌다가는 망가질 것 같다.
크기는 작아도 깨끗한 광채가 무척 비싸보였다. 불순물도 보이지 않는 투명함을 자랑했다.
이정도면 100만원은 호가할텐데 누가 여기에 버려두고 간거지?
아, 어제 그 사람인걸까? 깜빡하고 놓고 간 것일까?
기억나지 않는 섹스 상대자 말고는 이 한쌍의 귀걸이의 주인이 될 수 없을 것 같았다.
다른 사람 것이라면 객실을 청소하러 온 호텔 직원이 수거했을테니까.
우선 귀걸이를 탁자 위 그대로 두고 욕실로 들어갔다.
욕실에는 기본적으로 비치된 용품이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었다. 고급 호텔이라 그런지 비치된 용품도 고급스럽다.
간밤에 계속 맡았던 장미향기에는 못미쳤지만 나름 좋은 냄새가 났다.
깨끗이 샤워를 하고 마른 수건으로 몸을 닦고 나왔다.
의자에 걸쳐진 옷을 들어 하나씩 몸에 꿰었다. 분명 허물벗듯이 바닥에 떨어뜨려놓은 것 같았는데 이름 모를 상대가 의자에 올려놓은 것 같다.
아직 물기가 남아 있는 머리카락을 수건으로 한번 더 닦아내고 준비를 끝냈다.
마지막으로 탁자 위에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고 있는 귀걸이를 조심스럽게 들어올렸다.
"어디에 넣지?"
마땅히 이 멋진 귀금속을 담아갈 곳이 없었다. 이리저리 고민을 하다가 티슈를 뽑아 그 안에 싸서 넣었다.
어디 흘리지 않고 꼼꼼하게 싼 후에 바지주머니에 깊숙이 집어 넣었다.
난 기억이 도통 나지 않지만 이 귀걸이의 주인은 나를 알테니 귀걸이를 받고 싶으면 찾으러 오겠지.
조금 안일한 생각이었지만 다른 방법이 없었다.
가방까지 챙기고 호텔 객실 키를 집어들어 고급스런 객실에서 나왔다.
복도또한 붉은 카페트로 깔려 있었다. 왠지 모르게 마음껏 밟으면 큰일날 것 같은 마음이 들어서 살금살금 걸음소리를 죽이고 엘리베이터까지 걸어갔다.
버튼을 누르고 엘리베이터가 도착하기를 기다렸다.
"여기가...4층이었구나."
호텔 객실 키에 버젓이 409호라고 적혀 있었지만 제대로 보지 않아서 몰랐다.
도착한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며서도 범상치 않은 고급스러움에 서서히 겁까지 났다.
그리고 보니 여기는 숙박비가 얼마지? 돈이 별로 없는데...
갑자기 걱정이 되었다. 이렇게 좋은 호텔이라면 1박에 많이 비쌀 것이다.
타국에서 유학하는 것만으로도 이미 많은 비용을 쓰고 있는 나라서 이런 호텔비로 쓰기에는 돈이 아까웠다.
거기다 현재 지니고 있는 현금도 많이 없었다.
한숨이 저절로 흘러나왔다.
불안으로 심장이 쿵쿵대는 것과 달리 엘리베이터는 본인의 임무를 완수했고 부드럽게 문을 열었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리고 로비로 걸어나왔다.
높은 천장과 무늬가 아름다운 대리석 바닥과 기둥, 중앙에 달린 비싸보이는 상들리에는 더욱 불안감을 고조시켰다.
주변 곳곳에 배치된 조각상이나 장식장이 범상치 않았다.
"어떡하지..."
전전긍긍해봤자 아무런 해결방안이 없었고 될대로 되라는 심정으로 호텔 프론트로 다가갔다.
여직원에게 호텔 키를 건네주니 전산으로 확인한 후 직업상 배어버린 미소를 짓으며 친절하게 인사를 한다.
"안녕히 가십시오."
"어? 요금은..."
"네? 이미 처리되었습니다만."
"아, 네."
어떨덜한 인사를 하고 호텔 로비를 가로질러 밖으로 나왔다.
알 수 없는 그 사람이 비용까지 모조리 지불하고 간 모양이다.
감사했다. 아니면 돈이 없어서 창피를 당할 뻔했으니까.
그나저나 의문의 상대가 점점 궁금해졌다.
누구길래 이런 비싼 호텔에 묵고 비싸보이는 귀걸이를 두고 갔는지 궁금했다.
거기다 나와 섹스를 하고 처녀성까지 버린 그 사람.
복잡한 머리를 혹시라도 털어질라 좌우로 흔들었다. 소용없는 짓이었다.
한숨을 쉬고 자취집으로 향했다. 호텔에서 좀 멀었지만 생각보다 택시 비용이 많이 들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잘못하면 러시아워에 낑겨 왕창 깨질 뻔했지만 운좋게도 피할 수 있었다.
집에 와서 서둘러 옷을 갈아입고 교재까지 챙긴 후 학교로 갔다.
"배고프다."
그러고보니 아침을 먹지 않았다. 학생식당이나 매점에 가서 사먹어야 될 것 같았다.
꼬르륵 거리는 배를 꼭 잡았다. 아무것도 먹지 않으면 강의시간에 이 격한 배곯은 소리로 창피를 당하게 생겼다.
"어이~ 쑨! 쑨양!"
"응?"
캠퍼스를 걷는데 뒤에서 나를 부르는 소리에 뒤돌아보았다.
학과 선배였다. 나보다는 작지만 190cm 육박하는 큰 키에 귀엽고 남자다운 얼굴로 여자들에게 인기 많은 선배였다.
"기선배."
"그래. 어제 잘 들어갔냐?"
"네?"
"어제 술 많이 마셨잖냐. 기억안나?"
성용 선배의 말에 잊고 있었던 어제를 떠올렸다.
학과 모임이 있었다. 명칭만 모임이지 술자리였다. 선후배할 것없이 모두 모여 술을 진탕 마셨더랬다.
또한 나중에는 다른 학과 학생들도 참여해서 시끌벅적하게 마셨다.
"아...기억나요. 엄청 마셨죠."
"그래. 말술이라 잘 취하지도 않는 놈이 어제는 많이 취했더라. 너도 취하긴 하는구나."
"저도 사람인데 그럴 수 있죠."
"웃기시네. 소맥 쓰리 원샷으로도 끄떡안하는 놈이."
"하하. 아, 안녕하세요."
난처한 웃음을 짓다가 성용 선배 옆에 얌전히 서 있는 다른 선배에게 인사를 했다.
경제학과에 재학중인 성용 선배와 달리 예술계열 미술학과에 재학중인 태환 선배였다.
활달한 성용 선배와 달리 조용하고 낯을 가리는 그가 어떻게 서로 친구과 되었는지 신기한 사람이었다.
어릴 때부터 친하게 지낸 사이라고는 하던데. 일명 소꿉친구라고 하던가.
미술학과 학생이지만 성용 선배덕분에 경제학과 모임(술자리)에도 곧잘 와서 친분이 있었다.
그리고 웃는게 참 예쁜 선배였다. 그가 웃을 때면 왠만한 여자보다 훨씬 예뻐서 넋을 놓고 본 적도 있었다.
"그래. 양. 어제 잘 들어갔니? 숙취는 없어?"
"네. 숙취는 다행히 없네요. 선배들은 잘 들어가셨어요?"
"당연하지. 난 2차까지 갔다. 크크. 아, 그러고 보니 재미 좀 봤냐?"
"네?"
느물거리는 웃음을 지으며 놀리는게 다분한 말투로 성용 선배가 물어온다.
무슨 말인지 이해가 안되서 받문했다. 어떤 재미?
"엥? 기억안나냐? 너 술 마시고 진탕되갖고 거의 필름을 끊어졌잖냐. 갑자기 니가 안보여서 찾으니까 어떤 여자랑 걸어가더라?"
"에???"
"머리카락이 찰랑찰랑해서는 허리까지 와서 예쁘던데...물론 뒷태만 봐서 앞모습은 모르겠다만. 환아, 너도 봤지?"
"응. 여자가 부축해서 가던데? 힘들어 보이더라."
"힘들긴 하지. 쟤 덩치나 키를 봐라. 그 여자도 좀 키가 있던데도 질질 끌려 안간게 다행이지."
성용 선배와 태환 선배의 대화에 패닉이 찾아왔다. 전혀 이해가 되지 않는 이야기였다.
아니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이 아니라 그대로 받아들일 수 없을 뿐이었다.
그 비싸보이는 호텔에서 섹스했던 그 사람이 선배들이 본 여자인가? 그 여자는 누구지?
"누군지 알아요?"
"엉? 우리가 어떻게 아냐. 뒷태만 봤다니까. 몸매는 좋던데. 그리고 알면 니가 알겠지."
"아뇨...모르는데."
"뭐? 그럼 부축해주던 그 아가씨는 널 버려두고 간거냐? 쯧쯧."
좀 안됐다는 표정으로 불쌍하다는 눈빛으로 쳐다보는 성용 선배였지만 불쾌감을 느끼지도 못했다.
불현듯이 생각이 떠올라 머릿속을 헤집었다. 그 여자는 진짜 뭐지?
무슨 생각으로 날 호텔로 데려갔으며 함께 밤을 보내고 내가 잠든 사이에 떠난걸까.
아직도 몸은 기억했다. 황홀했던 섹스를.
몇몇 사귀었던 여자들과 잠자리를 가져봤지만 그토록 환상적인 섹스는 처음이었다.
한국으로 유학오면서 교제 관계를 청산하고 온터라 지금 현재는 사귀고 있는 사람은 없었다.
덕분에 섹스따위 안한지 꽤 되었다. 그래서 그런걸까?
오랜만에 관계를 가져서 그렇게 오르가즘을 느낀 것일까? 아, 미치겠다.
상대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생각 안나고 그냥 뜨거웠던 어젯밤만 생각났다.
꼬르르륵.
복잡한 상념과는 다르게 몸은 정직했다. 배곯은 소리가 바깥까지 적나라게 들렸다.
"양아, 배고파? 아침 안먹었니?"
"아, 네. 어쩌다보니...매점에라도 가서 사먹어야겠어요."
걱정스러운 어투로 다정하게 말하는 태환 선배에게 지금 가서 사먹고 수업들으면 된다고 대답했다.
내 대답에 가방을 열어 부스럭부스럭 찾더니 무언가를 꺼내 내앞에 내민다.
"뭐에요?"
"도시락. 배고프다며. 매점가서 사먹지말고 이거 먹어."
"야! 박태환! 내가 달라고 할 때는 안주면서 이놈한테는 주는 저의는 뭐야."
"넌 아침에 먹었잖아. 거기서 더 먹으려고?"
'"그래도 니껀 맛있는데...그리고 네 점심이잖아. 점심때 뭐 먹으려고."
"먹을 거 있어. 그러니까 주는거야. 양. 부담갖지말고 먹어."
"선배...그래도 어떻게."
"다 먹고 빈통은 성용에게 주면 돼."
"엉? 내가 왜."
"싫어? 이제 요리 안해준다?"
"그건 안돼지! 쑨양아, 어서 먹고 나에게 빈통을 가져다 주라."
조용히 웃는 태환 선배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그의 손에 들린 도시락을 받았다.
직접 만든 도시락이다. 유학 온 이후로 누군가 만든 음식은 처음이라 조금 눈물이 났다.
가슴이 따뜻해졌다.
"선배. 고마워요."
"그래. 맛있게 먹어."
"네."
손에 든 도시락을 꼭 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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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와 달리 글을 길게 썼습니다.
만족스러우신가요?
과연 한쌍의 귀걸이의 주인공은 누굴까요~
쑨과 함께 간 여자의 정체는?ㅋㅋㅋ 두구두구!
<7일동안>은 밤이나 새벽에 올라갈 듯합니다☞_☜♥
【암호닉】
ㅌ/흰구름/꽃게/유스포프후작/우구리/마린페어리/박쑨양/촹렐루야/잼/초코퍼지/쌀떡이/꾸워엉/탱귤탱귤/응가/햄돌이/토야
★ 오타지적 환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