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계절의 우리
w.1억
오자마자 웬 진수성찬이냐? 혜선의 물음에 열린이는 뿌듯한 듯 표정을 하고서 입을 열었다.
"백숙 하나에 진수성찬이라고 해주시니 감사할 따름입니다요."
"당장 먹을래. 나 배고파서 죽을 것 같거든?"
"얼른 먹어."
혜선이 급하게 앉아서 젓가락을 들었고, 열린이의 표정이 좋지않자, 혜선이 열린이의 눈치를 보다 입을 열었다.
"표정이 왜 그래?"
"언니."
"어?"
"나 있지.. 한달동안만 다른 거 신경 하나도 안 쓰고 일하고 오려구."
"에? 갑자기? 그럼! 그 김선호 그 사람은 어쩌고! 잘 될 것 같았는데 왜!"
"그냥.. 갑자기 생각이 많아지고 그러네."
"뭐가. 도대체 뭐가 널 그렇게 생각이 많아지게 했어."
"남주혁 생각도 그만하고 싶고.. 선호씨 좋은데.. 솔직히 겁이 나. 9년 동안 한 사람만 만나다가.. 다른 사람 좋아하려니까 무섭기도 하고, 안 믿기고."
"……."
"그래서 잠깐만 도망치고 오려구."
"도망치면 도망치는 거지. 다시 오려고?"
"나 오지 마?"
"아니? 와야지."
"…치."
"난 너 안 말려. 그때도 그랬듯."
제 5화
이제는 다른 사람, 다른 사랑
한 달을 채우지는 않았다. 한 3주..? 그 정도 죽은 듯이 일만 하다가 돈 벌고 왔는데. 왜 세상이 달라진 것 같은 건지.. 유난이기는 한데. 그런 유난 떠는 내가 웃겨서 웃음이 나왔다. 이제 곧 있으면 또 겨울이네.. 어젯밤에 도착해서 언니랑 같이 술 마시고, 다음 날 아침에 오랜만에 아빠를 보러 가려고 나왔을까. 차 한 대가 내 옆에 섰고, 차에서 사람이 내리는데. 그게 하필 선호씨라서 나도 모르게 입을 꾹 닫았다. 화가..난 건가.. 인상을 쓰고 있는데.
"열린씨."
"…어, 그..안녕하세요.."
"어떻게 한 달 가까이 연락도 안 받고, 얼굴도 안 비추고."
"아, 그게..어.. 그러게요.. 거의 한 달이죠.. 너무 반갑다아..."
"……."
"미안해요. 말도 없이 잠수타서.. 그래도.. 선호씨 연락 딱 두 번.. 했는데."
"그건 열린씨가..!"
"……."
"…아니에요."
"……."
"어디 가요?"
"아, 저 아빠한테.."
"데려다줄게요."
"에? 아니에요! 전 버스가 더 편하기도 하고.. 그리고 선호씨는 출근 해야죠."
"제가 싫은 거예요, 진짜 버스가 타고 싶은 거예요?"
"네?"
"난.. 열린씨가 둘중에 뭐가됐든 그냥 탔으면 좋겠는데."
표정이 안 좋다가도, 나를 안심 시키려는 듯 작게 웃어주는데. 그의 이 표정이 너무 보고싶었나보다. 염치없지만, 나도 따라서 웃게 되었다. 차에 타서는 둘이 한참 말이 없었다. 할 말이 있는지 입술을 열었다 닫았다 반복하던 그가 겨우 입을 열었다.
"잘 지낸 거예요?"
"네에... 저 뭐하고 지냈는지 알아요?"
"뭐 하고 지냈는데요?"
"공장에서 일하고 왔어요. 아는 동생이랑 같이 가서 일만 하다가 왔어요. 아무 생각도 안 하고 일하고 싶어서 미친 짓 해봤는데. 다시는 안 하고 싶어요."
"저 싫어서 피한 거 아니죠?"
"에이.. 아니에요. 선호씨가 왜 싫어요..! 이유가 없는데. 그러는 선호씨는요? 겨우 두 번! 연락해놓고."
"아니 그건.. 혹시라도 막 문자 보내고, 전화하면.. 부담스러울까봐. 조심스러웠던 거죠."
"흐음.."
"마음 같아서는 진짜 하루에 100통씩 보내려다가. 어우."
"알겠어요오.."
"저 싫어서 피한 거 아니면 됐어요."
"그럼 될게요."
"에?"
"ㅎㅎㅎㅎ."
"그럼.. 연락 해도 되죠?"
"네!"
"씹혀도 계속 보내도 되죠?"
"네! 안 씹을게요."
"그럼 됐습니다."
"그럼 될.."
"그거 하지 마요."
"왜요오.."
"되게 얄미워요."
"에?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스윗하게도 웃는 그에 심장이 떨려왔다. 거의 한 달만에 봐도 선호씨는 잘생겼고, 나를 떨리게하는구나.
"근데 진짜 저 데려다줘도 돼요? 시간이 아주 흘러넘치시나봐요."
"네. 아주 흘러넘쳐요."
"진짜요?"
"열린씨한테는요."
"헐.. 뭐야 진짜."
무슨 연애하는 사이인 것 같았다. 자꾸만 간질간질한 게. 그를 만날 떄마다 느낌이 너무 이상해서 죽을 것 같았다.
"어제 언니랑 같이 치맥했거든요. 그래서 얼굴이 엄처 부었어요.."
"치킨 좋아해요?"
"싫어하는 사람이 있어요?"
"그럼 나랑도 먹어요. 치맥."
"돈도 많으신분이 치맥도 먹어요?"
"저 돈 안 많아요. 자꾸 왜 그래요."
"ㅎㅎㅎ 그럼 치맥 먹어요!"
"시간 될 때 연락해요. 열린씨한테 시간 맞춰서 나올게요."
"진짜 한가한가봐.."
"열린씨가 심심하다고 해도 나올 거야."
"ㅋㅋㅋㅋㅋㅋㅋ."
별 것도 아닌 얘기인데 왜 이렇게 웃길까. 이런 사람이 나에게 필요했다. 내 진부한 얘기에도 웃어줄 수 있는 사람.
병원 주차장에 주차한 그는 나에게 다녀오라고 했고, 나는 고갤 끄덕이고선 차에서 내렸다. 아빠가 입원한 병실 앞에 도착해서는 차마 문을 열지도 못하고 망설였다. 언제부터 뒤에 있었는지 내 뒤에서 엄마 목소리가 들려왔다.
"잘하는 짓이다. 이년아. 한달만에 얼굴 비추는 년이 어딨어? 네 아빠가 말을 안 해서 그렇지 얼마나 너를 찾았는지나 알아?"
"바빠서 그랬어.. 미안해."
"주혁이는."
"걔는 왜."
"전화해도 안 받더라, 주혁이도."
"사위한테 전화하는 게 뭐 그렇게 이상한 거라고 화를 내? 싸웠어?"
"엄마 나 이제 남주혁 안 만나."
"뭐?"
"걔랑 헤어진지 두 달 됐어. 그러니까 이제 남주혁 좀 그만 찾아."
"야 이년아! 왜 헤어져, 헤어지긴! 둘이 몇년을 연애했는데! 어? 당장 가서 붙잡아! 당장!"
내 얘기는 들어보지도않고 무작정 나를 혼내는 엄마가 미웠다. 그리고 엄마의 반응도 예상했기에 그닥 서운하지도않았다. 나보다 남주혁을 더 좋아했으니까.
"아빠한테 뭐라하려고? 둘이 결혼하는 걸로 알고있는데. 어?"
"내가 알아서 잘 말할게."
"됐어. 지금 툭하고 건드리면 죽을 것 같은 양반한테 그런 소리하면 상태만 더 안 좋아지지."
"……."
"그리고 너 다시 한 번 생각해봐. 사람 만나는 게 장난이야? 세월이 얼마나 긴데 헤어져? "
"그만해."
"뭘 그만해?"
"그만해. 어련히 좋은 사람 만나서 잘 살겠지! 엄마.. 결혼은.. 서로 마음이 맞아야 결혼하는 거야. 걔가 나 싫다잖아. 결혼하기 싫대! 내가 여기서 더 뭘 해야 돼."
"결혼하기 싫대?"
"……."
"네가 싫대!?"
"몰라. 갈게."
"야! 아빠는 보고 가야지!!"
결국엔 엄마와 또 싸워버렸다. 이래서 오기 싫었던 거였다. 나는 충분히 스트레스 받고, 피곤해 죽겠는데. 엄마까지 날 이렇게 힘들게 하니까.
"어. 장비서."
- 대표님 어디세요?
"나 부천인데."
- 부천이요?
"급한 거면 직접 해결 좀 해줘."
- 회장님께서 찾으세요.
"대충 둘러대줘."
-네? 아, 네.
선호가 전화를 끊고선 저 멀리서 걸어오는 열린을 보고 웃었다. 입술이 왜 저렇게 나왔지, 안 좋은 일 있었나? 조수석에 탄 열린이 웃으면서도 한숨을 내쉬자, 선호가 열린을 보며 나지막히 물었다.
"뭐이리 빨리 다녀와요? 얼굴만 잠깐 보고 온 건가."
"아니요. 얼굴도 못 봤어요."
"왜요?"
"엄마가 저만보면 잔소리하기 바쁘거든요. 그래서.. 또 싸우고왔죠.."
"속상하겠네. 아버지 얼굴도 못 보고.."
"이젠 뭐.. 익숙은한데. 그래도.. 마음에 걸리긴하죠."
"으음... 아침 먹었어요?"
"아뇨오.. 선호씨는요?"
"나랑 밥 먹을래요?"
"네에?? 그럼 선호씨.. 출근은.."
"밥을 먹고 힘내야 출근을 하죠. 열린씨 얼굴보면서 먹으면 2배로 힘낼 수 있으니까. 더 이득인데."
"우웩."
"어. 너무 싫어하는데?"
"으."
"아니, 열린씨?"
웃으며 선호가 열린을 힐끔 보았다. 그러다 눈이 마주치면, 얼굴이 붉어져서 앞을 본다.
"그럼 열린씨는 뭐 좋아해요?"
"배에 들어가면 다!"
"어이 우비서 첫날부터 대표는 어디가고 혼자야?"
"볼일 있다고 잠깐 부천 가셨어요."
"그 자식이 볼일이 뭐가 있다는 건지."
"그 자식 아니고 대표님입니다."
"어쭈.. 기어오르네? 경호원 하다가 겨우 비서로 넘어 온 주제에."
"……."
"두고본다. 너네."
"이야.. 이거 되게 맛있던데. 오올~이것도 사왔넹?"
"이거 마셔봐. 뜨거우니까 천천히 마시고."
"잘 먹을게. 역시 남주혁이야."
성경이 고맙다며 주혁을 안아주었고, 주혁은 그런 성경이 마냥 예쁜지 웃어보였다. 성경이 뽀뽀해달라며 볼을 가리키면, 주혁이 '뭐래..'하면서도 바로 볼에 입을 맞췄다. 둘은 연애를 시작한지 벌써 3주 정도가 되었다.
"나는 정말 너 만나기 전에는 연하 엄청 어리게봤거든? 근데 너 만나니까 생각이 바뀐 것 같아. 너무 어른같고.. 듬직하고.. 너랑 결혼해도 괜찮겠다 싶기도 하더라고."
"내가?"
"너 엄청 괜찮은 사람이야. 갑자기 내가 결혼하자고 들이댈 수도 있으니까. 두고봐라?"
"어이구 무서워라."
혜선은 혼자 백화점에 와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 대표라는 사람 우연히 좀 보고싶네. 어떻게 생겼는지 참.. 굽 높은 하이힐을 신은 혜선은 발목이 아픈지 아무 의자에 앉아서 쉬고 있었다. 물건들을 정리하던 직원 두명이서 혜선의 뒤에 있던 진열대를 실수로 쳤고, 진열대에 있던 지갑들이 혜선에게 쏟아진다. 혜선이 놀란 듯 일어났고, 직원들은 사과를 하기 바쁘다.
"괜찮아요. 다친곳도 없는데요 뭐.. 괜찮습니다."
혜선이 대표란 사람도 안 보이고 그냥 가야겠다 생각하고선 백화점에서 나오려고 했을까, 누군가 혜선을 부른다.
"저기요."
"아, 남자친구 있어요."
"좋으시겠네."
"에?"
"잠깐 멈춰주시죠."
"남자친구 있다니까요 글쎄."
"그래서요."
"네?"
혜선이 어이없다는 듯 도환을 보았고, 도환이 혜선의 가방 안에서 아까 진열대에서 떨어진 지갑을 꺼낸다.
"이거만 가져가면 돼요."
도환이 아무 표정도 없이 지갑을 챙기고선 뒤돌자, 혜선이 쪽팔린지 얼굴이 붉어졌다. 이런 미친..
"아씨.. 개쪽팔리게 뭐야.. 지갑은 왜 또.. 어우.."
"와 누나 내가 다 민망한데? 풓,ㅂ...푸흡. 신혜선 자존심 바사삭.."
"닌 뭔데 웃어."
"아니 웃긴데 어떡해?"
"진짜 넌 극혐이야."
"아니 왜! 나 완전 잘하고있는데? 열린이랑! 주혁이 사이에서 입도 뻥끗 안 하고 잘 있잖어..."
"누가 그거 때문에 그래?"
"그럼."
"나 예뻐, 안 예뻐? 진짜 솔직하게 말해봐. 내 얼굴 보면.."
"어?"
"됐다. 이거나 먹어라."
혜선이 오징어다리를 동연에게 던졌고, 동연이 아까운 걸 왜 던지냐며 바닥에 떨어진 오징어다리를 먹는다. 씻고나온 열린이 그런 둘을 보고 웃는다. 탁자 위에 올려져있던 열린이의 핸드폰이 시끄럽게 소리를 내자, 혜선이 화면을 보고 말한다.
"야 너 김선호한테 전화 오는데!?"
"김선호가 누군데??"
"니가 알아서 뭐하게."
"아니! 나 왜 왕따시켜!?"
"넌 남주혁 친구잖아."
"와! 난 누나랑 열린이 친구이기도 하잖아!! 누나.. 말 진짜 서운하게 한다?????????????"
"닥쳐. 얼른 받아봐."
혜선이 동연의 입을 틀어막고선 고갤 끄덕였고, 열린이 긴장한 듯 한참 서있다가 전화를 받는다. 여보세요? 하고 열린이의 목소리가 떨려왔다.
- 열린씨 어디예요?
"집이에요..!"
- 술 마실래요?
"술?"
- 맥주 한 잔?
"좋죠..!"
- 준비 되면 전화 줄래요? 준비 해야 되죠?
"네! 금방 준비할게요..!"
- 천천히해도 돼요. 널린 게 시간이라.
대충 옷을 걸쳐입고선 집에서 나오자마자 후회가 됐다. 내가 너무 대충 입었나.. 츄리닝은 좀..그렇지 아무래도.. 선호씨 만나는데.. 여태 이런 여자 만나본적도 없을 건데. 다시 옷 갈아입고 나오려고 전화를 하려했을까.
"워!"
"어우우우!!!"
"아싸 성공."
선호씨가 대문 옆에 숨어있다가 날 놀래켰다. 심장부근에 손을 댄 채로 선호씨를 바라보니, 마구 웃기 시작한다.
"뭐예요 진짜.. 벌로 잠깐만 더 서있어주세요! 나 옷 좀 갈아입고 올게요."
"에? 왜요."
"츄리닝 입고 나온 게 조금.. 걸려서..ㅎㅎ."
"아닌데? 진짜 너무 예쁜데요?? 츄리닝이라고 말하기 전까진 츄리닝 입은 줄도 몰랐어요. 열린씨가 입으니까 드레스야."
"참나.."
"그래요. 옷 갈아입고 나와요. 내복 같은 거 없어요? 아니다.. 내복 입어도 예쁠 것 같아."
"저기요 ㅡㅡ."
"ㅎㅎㅎㅎㅎ."
그는 나의 자존감을 뿜뿜하게 만들어주었다. 하지 말라고 해도 절대 할 거라는 그를 보면 또 웃음이 나왔다. 같이 동네를 걷다가, 그가 나를 힐끔 보다가 말했다.
"술은 뭐 좋아해요? 맥주?"
"음... 와인! 와인 마셔보고싶어요."
"오.. 저희집에 와인 엄청 많은데."
"어? 그럼 오늘 와인!? 선호씨 집에서!?"
"집이요?"
"네!"
"집..? 제..집?"
"네!"
"…그러니까."
"……."
"저희 집에서..? 와인..?"
"네!"
너무 당돌하게 네! 했나.. 솔직히 당황하는 게 귀여워서 오바한 것도 있는데. 멋쩍은 듯 뒷머릴 긁으며 '그래도 되구요..'하는 그가 너무 귀여워서 죽을 것 같았다. 지금 보니까.. 선호씨가 수트 말고 다른 거 입는 거 처음보는데. 이것도 되게 멋있네. 부끄러워하는 그와 같이 그의 집으로 향하는데 갑자기 카톡오는 소리가 마구 들리기에 보면 인상이 절로 써졌다.
[다들 이번 동창회 참석!!! 할!! 거!! 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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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짜안. 나 살짝 졸면서 써서 오타 있을 수도 헤헤헤헤덷헫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