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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탄소년단/박지민] 불나비 16 | 인스티즈



김윤아 - 자각몽
반복재생 부탁드립니다.








불나비

16










 환상통이라는 이름으로 저희를 한 데 묶었다. 밤마다 저를 괴롭히던 그 온도, 감촉. 감히 잊히지 않는 타오르는 고통까지도. 모두 그곳에 있었기 때문에 느껴야만 했던 것이었다. 벗어날 수 없었다. 저는 그곳에 제가 가졌던 모든 것을 내버려 두고 나왔으니까. 숨을 고르고 할 수 있었던 것은 고작 도망치는 일뿐이었으니까. 철창에 갇힌 것처럼 그날에 갇혀 있었다. 버려두고 온 존재, 제 이름. 제가 유일하게 가진 것들을 버리고 도망쳐 나오면서 발치에 걸려드는 것을 주워들었다. 뜨겁지만, 모순적이게도 미지근해서 함부로 화상 입힐 수 없는 것들을. 제 손에 들린 수건처럼. 그 미적지근한 온도가 저를 살게 했다. 철창에 갇힌 것은 저뿐이 아니었다. 이제는 철창을 빠져나와야만 했다. 이제는 살기 위해서 불길에 뛰어들어야만 했다.


 “제가 여기서 상황전달 할게요.”


 운전석에 앉은 제이가 말했다. 조수석에 놓인 그의 노트북이 CCTV 화면을 비추고 있었다. 검은 슈트를 입은 연화와 지민이 이어마이크를 귀에 꽂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어느새 시간이 네 시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연화가 짧아진 제 머리카락을 억지로 쓸어올려 하나로 묶었다. 짧아진 터라 아무리 잘 묶으려고 해도 자꾸만 잔머리가 삐져나왔다. 그러나 연화는 한 손으로 한 번 쓸어올릴 뿐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실은 그런 것에 신경 쓸 새가 없는 거였다. 연화는 정말로 오랜만에 현장에 가는 거였다. 그때의 비 내리던 도로를 제외하면. 지민 역시 잠시 연화의 얼굴에 시선을 두었다. 연화가 쓸어올리다가 포기한 잔머리를 조심스럽게 제 손으로 연화의 귀에 꽂아 주었다. 연화의 볼에 지민의 미적지근한 온기가 스쳐 지나갔다. 지민은 숨을 꾹 참았다.


 “그런 일이 없었으면 좋겠지만, 제가 신호를 보내면. 그냥 보이는 건 다 처리하고 나와요. 창문이 있는 층은 4층뿐이에요.”
 “그래. 뛰어내리려면 4층. 못하면 처리하고.”


 제이는 말을 더 이으려다가 제 말이 끝나기도 전에 이어지는 연화의 말에 입을 다물곤 고개를 끄덕거렸다. 차분한 연화의 말에 지민이 작게 웃으며 짧은 숨을 터트렸다. 그 숨이 허공에서 푸스스 흩어졌다. 연화는 저의 손끝이 차갑게 굳어가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다. 제 손을 내려다보며 주먹을 쥐었다. 지민의 시선은 언제나 연화를 향하고 있었으므로 지민은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그래서 손을 뻗어 차갑게 변해가는 연화의 주먹 위로 손을 올렸다. 연화의 손이 가진 온도가 미적지근하게 변해갔다. 제이는 CCTV 화면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지민.”
 “어.”
 “오늘이 정말 마지막이 될 거야. 그동안 수고했어.”


 제이가 지민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그 검은 눈동자가 온전히 지민을 담아내고 있었다. 지민은 저와 똑같은 그 눈을 보며 묘한 안도감을 느낄 수 있었다. 제이가 팔을 뻗어 지민의 무릎 위로 저의 손을 올렸다. 진심이야. 제이가 말했다. 담담한 어투였다. 어쩌면 버석하게 건조한 그 말에 물기가 어린 것만 같은 착각이 들기도 했다. 지민이 그런 제이의 말에 무어라 답하려는 듯 입을 열었다가 이내 아무런 말도 꺼내지 못한 채로 입을 가만 다물었다. 그저 제이의 눈동자만을 바라보았다. 같은 수트에, 검게 눌러쓴 모자. 무엇도 다른 게 없었다. 어둑한 배경임에도 불구하고 안광이 빛났다. 그 눈동자에 지민의 얼굴이 비쳤다. 지민의 눈동자에도 제이가 담겼다. 다르지 않은 얼굴. 그러나 서로를 마주하지 않으면 볼 수 없는 얼굴이었다. 거울을 보는 것만으로는 절대 느낄 수 없는, 서로를 향한 감정. 지민이 뒤늦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어떤 말을 꺼내야 할까. 지민은 한참이나 머릿속에 부유하는 생각을 고르고 골랐다. 그래야만 한다는 예감이 지민을 둘러쌌기 때문이었다.


 “너도, 수고했어.”


 어쩌면 제이와 지민이 주고받은 대화는 자신을 향한 말인 것 같기도 했다. 지민과 제이는 감히 예감할 수 있었다. 서로가 같은 생각을 공유할 수 있는 능력이라도 있는 것처럼, 저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을 것이라고. 그들의 마지막 날일지도 몰랐다. 서로가 하나가 되어야 하는 운명. 그리고 그 운명을 달리하는 날. 어쩌면 정말 자유가 찾아올지도 몰랐다. 하나가 아닌 둘로 존재할 수 있을지도 모를. 그들은 할 말이 아직 남은 사람처럼 감히 시선을 돌리지 못했다. 그저 입안에서 맴돌고 있을 말들을 가까스로 씹어 삼키고 있을 뿐이었다. 먼저 시선을 돌린 것은 제이였다. 지민은 그런 제이의 옆모습을 바라보다가 다시 연화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차에 제이만을 남겨두고, 지민과 연화는 예양을 찾기 위해 걸음을 옮겼다. 건물 외벽과 맞닿아 자라있는 키 큰 나무 덕에 지민과 연화는 제 모습을 숨기기 수월했다. 인이어에서는 제이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먼저 옥상에서부터 내려와 있는 로프를 연화가 오른손으로 한 번 당겨보고는 단단히 고정되어 있는 것을 확인하곤 제 허리춤의 고리와 연결했다. 지민 역시 로프를 연결하곤 오른손의 권총을 단단히 잡았다.


 - 그대로 4층 진입해서 3층으로 이동해요. 4층 복도에 두 명.

 “알겠어.”


 제이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건물을 타고 올라갔다. 연화는 평소 쓰지 않는 근육이 자극되는 터라 진입이 고역이라는 생각을 했다. 선선하게 불어오는 바람에도 불구하고 이마에 맺힌 땀이 얼굴을 타고 흘러내렸다. 차라리 입구를 터트리고 들어오는 게 나았을지도 모르겠는데. 낮게 읊조린 말이 지민에게도 들렸는지 지민이 연화의 아래서 조용히 미소 지었다. 제가 먼저 나서서 상황을 정리한 후에 연화가 들어올 수 있도록 하는 게 덜 위험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연화가 창문 틈을 비집고 땅바닥에 발을 내딛었다. 이어 지민이 창문을 통해 들어왔다. 제이의 지시를 기다리며 허리의 고리를 풀었다. 연화가 뻐근한 어깨를 돌리며 총을 들었다. 지민이 그런 연화를 향해 시선을 던졌지만 연화는 으레 그랬던 것처럼 아무렇지 않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지민은 그게 연화의 연기인지, 진실인지 감히 분간해내지 않기로 했다. 연화는 제가 더 이상 그날의 기억에 사로잡혀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재생되는 것은 절망뿐이다. 연화는 재생될 수도 없을 뿐더러, 절망에 가까워지면 죽음뿐이라는 것을 알았다. 제가 총을 잡아야, 살 수 있었다.

 연화가 고개를 돌리다 발견한 것은 낯익은 그림이었다. 그럴 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는 것은 알고 있지만 순간적으로 실소가 터져 나왔다. 이경복의 절망. 제 갤러리를 거치고 지나간 작품이었다. 연화가 가장 아끼는 작품이기도 했다. 연화는 빨려 들어갈 것만 같은 그 그림에 실은 이 모든 것이 꿈이 아닐까 생각했다. 연화, 연화. 저를 부르는 여러 목소리가 스쳐 지나갔다. 그러다가 모든 목소리가 겹쳐 저를 불렀다. 아니, 실은 저를 부르고 있는 게 아닐지도 몰랐다. 확신할 수 없었다. 제가 연화였나? 이제는 그것마저도 미시감이 들었다. 눈을 뜨면 지민이 제 옆에서 웃고 있고, 예양과 옥경이 앉아 수다를 떨고 있을 것만 같았다. 이 모든 게 다 악몽 같았다. 예양이 시체처럼 늘어져 약을 주입받고 있던 것도, 옥경이 살갗이 일어난 얼굴로 눈물만 흘리고 있는 것도, 저희의 몸에 흉터가 늘어난 것도, 이 모든 상황이…. 결국 돌고 돌아 제자리를 찾을 것을, 언젠가 저를 맴돌았을 제 목소리가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 한 명 5층으로 올라갔어요. 지민, 문 열고 오른쪽, 벽에 붙어서 바로 사격해.


 인이어에서 흘러나오는 제이의 목소리에 연화는 그만 현실로 돌아올 수밖에는 없었다. 그 말을 들은 지민이 연화보다 앞장 서서 곧장 소리가 나지 않게 문을 열었다. 최대한 조용하게 처리해야 했다. 특히나 예양을 구하지 못한 시점에서는 그것이 가장 중요했다. 지민이 제이의 말대로 얼굴을 드러내지 않은 채로 팔만 뻗어 사격했다. 소음기 덕에 약간 줄어든 총소리와 함께 신체가 바닥을 향해 추락하는 둔탁한 소리가 들렸다. 방에서 빠져나온 뒤 계단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시체에서 쏟아져 나오는 피가 바닥을 적시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을 처리할 시간은 없었다. 조금 더 빨리 예양을 찾는 게 우선이었다.


 - 한 명 5층에서 4층 계단으로 내려오는 중. 연화가 사격하고 지민이 3층 복도 한 명 처리해요. 지민, 소리 없이 처리해.


 연화가 손에 쥔 총을 바라볼 틈도 없이 내려오던 계단을 숨죽여 뛰어올랐다. 위로 향하는 계단 틈새로 걸어 내려오는 남자가 보였다. 연화가 그 찰나를 놓치지 않고 틈새 너머의 남자를 겨냥했다. 지민은 내려가던 걸음을 멈추지 않고 걸어갔다. 벽에 붙어 가까워지는 발걸음 소리를 들었다. 다행히 상대가 벽과 가깝게 붙어 걸어오고 있는 터라 지민은 복도에서 그를 향해 달려들지 않아도 되었다. 지민은 저와 점점 가까워지는 발소리를 들으며 상대가 가까워지면 낚아챌 수 있도록 한 걸음씩 뒷걸음했다. 그 순간 연화가 쏜 탄에 맞고 쓰러진 남자가 둔탁한 소음을 만들어냈다. 상대가 그 소음을 들었는지 지민이 있는 곳을 향해 빠르게 걸어왔다. 기회였다. 상대가 몸을 돌려 지민을 마주보기도 전에 지민이 목을 낚아채 저를 향해 당겼다. 그가 입을 벌리기도 전에 지민이 그의 뒤를 차지해 입을 막은 채로 목을 꺾었다. 몸뚱이가 소리 없이 늘어졌다. 연화가 계단으로 내려오고 있었다. 지민이 늘어진 시체를 질질 끌어 최대한 복도에서 보이지 않게 계단에 눕혔다.


 - 비밀번호. 759344.


 문 너머로는 예양이 있을 것이었다. 제이의 말을 듣고 비밀번호를 누르는 지민의 뒤에 서서 주위를 살피고 있는 동안, 이상한 기시감이 피어오르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아무리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 공간이라고 할지라도 일이 쉽사리 풀리는 기분이었다. 그러나 구태여 연화는 그것을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아직 상황이 마무리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른 판단은 독이다. 잠금이 해제되고 문이 열리는 순간까지 지민과 연화는 긴장을 늦추지 않았다. 문을 열자 바로 보이는 것은 노란색 원피스를 입은 채로 침대 위에 시체처럼 누워있는 예양의 모습이었다. 지민은 열린 문을 지키고 섰고, 연화는 예양의 침대까지 성큼 걸어갔다. 예양의 손목과 발목이 침대의 모서리와 연결된 천으로 단단히 묶여 있었다. 바닥에 잔뜩 긁힌 흔적이 있는 수갑을 보니 수갑과 철제 침대가 부딪히는 소리가 시끄러워 천으로 바꾼 모양이었다. 어떤 이유에서든지 지금 상황에는 유리했다. 예양은 연화가 다가온 사실도 모른 채 가만 눈을 감고 있었다. 예양의 얼굴 위로 옥경이 울음을 참던 그 표정이 스쳐 지나갔다. 연화는 입을 꾹 다물곤 허벅지에 둘러진 칼집에서 칼을 꺼내 들었다. 세심하게 풀어줄 수 있으면 좋으련만, 그럴 시간은 미안하게도 없었다.

 연화가 다급한 손길로 예양의 손목에서부터 팽팽하게 이어진 천을 칼로 베어냈다. 묶였던 흔적이 예양의 손목 위 피멍으로 남아있었다. 투약을 위해서 원피스의 소매 부분을 칼로 찢어냈는지, 트인 옷감 사이로 투약의 흔적이 가득한 예양의 흰 팔이 보였다. 그제야 뒤늦게 예양이 느리게 눈을 떴다. 조직원일 것이라 지레 판단해 눈을 감고 있다 결박하고 있던 천을 끊어내니 눈을 뜬 모양이었다. 예양은 방금 잠에 깨서 정신이 없는 사람마냥 연화를 보고도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한 채로 눈만 깜빡거렸다.


 “꿈 아니야.”
 “…연화.”


 터져 나오는 예양의 목소리가 수 갈래로 찢어져 있었다. 예양의 목소리가 옥구슬이 굴러가는 소리 같다고 말하던 옥경의 목소리가 이명처럼 울렸다. 연화는 예양의 얼굴로 시선을 던지고 싶었으나 정신을 차리고 천을 끊어내기에 집중했다. 예양이 자유로워진 제 오른손을 뻗어 연화의 뺨을 감쌌다. 서늘한 감촉에 연화는 흠칫 몸을 떨었다. 온기가 느껴지지 않았다. 그제야 다시 예양의 얼굴로 시선을 옮겼다. 창백한 피부 아래로 혈관이 비쳐 푸르스름했다. 예양이 끝내 입을 꾹 다물곤 눈물을 한 방울 흘려냈다. 관자놀이를 타고 눈물이 흘러내렸다. 지민과 제이는 아무 말이 없었다. 그럼에도 연화는 제가 여기서 많은 시간을 낭비하면 안 된다는 것을 알았다.


 “일어나. 돌아가야지.”
 “미안해요, 연화. 미안해요.”
 “제발, 어서.”


 연화가 스스로 몸을 일으키기도 힘들어하는 예양을 억지로 일으켜 세웠다. 그러나 예양은 연화의 어깨를 제 오른손으로 밀어내며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연화를 밀어내는 예양의 힘은 너무나 약해져 있었다. 제발, 제발. 너를 데리러 온 거야. 연화가 그렇게 말하며 예양의 손을 잡았다. 예양의 얼굴이 눈물로 젖어 들어갔다. 노란색 원피스 위로 떨어진 눈물이 짙은 흔적을 남겼다. 미안해요, 미안해요. 그렇게 말했다, 예양은. 연화는 무엇이 미안한지 알 수 없었다. 제가 두양애라는 것을 속인 것? 자신 모르게 마약 거래를 하다 들킨 것? 연화는 알 수 없었다. 그런데, 예양이 정말로 저 자신을 속이려고 했던 적은 없다는 것은 알았다.


 “연화도 지민도, 여기까지 와줘서 고마워요. 나 정말로 죽어서도…. 죽어서도… 잊지 않을게요. 그리고 미안해요.”
 “시간이 없어, 예양.”
 “나는 죽을 거예요, 연화. 나를 봐요. 내가 지금 어떤 상태인지. …알잖아요. 나는 짐만 될 거예요. 정말로 미안해요. 미안해요.”


 예양은 미안하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연화는 혈관이 비치는 예양의 창백한 피부를, 금방 피눈물을 흘릴 것처럼 붉게 충혈된 예양의 두 눈을, 힘이 들어가지 않는 예양의 몸을 보았다. 연화는 상황 파악에 능했다. 그래서 예양이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는 것도 알았다. 그렇지만 선택지에는 예양을 두고 가는 것은 없었다. 예양을 데리러 오는 지금까지 연화의 머릿속에선 여러 상황이 앞다퉈 재생되었다. 그리고 그 불운한 상황에는 이미 예양이 숨을 거둔 상황도 포함되어 있었다. 차라리 지금이 나은 상황이었다. 눈을 한 번 꾹 감았다가 뜬 연화는 초조한 듯 입술을 씹었다. 어떻게 해서든 예양을 데려가고 싶은데, 이렇게 되면 상황이 어려워질 게 뻔했다.


 “연화.”
 - 이제 나와야 해요. 4층에서 시체 발견했어요. 곧 3층으로 다 내려올 거예요. 4층, 5층에서 내려오는 사람들만 조심하면 돼요. 나머진 연구원 인력이라 숨어들 거라.


 이제 진짜로 시간이 없었다. 연화가 조용히 눈을 깜빡이며 예양의 팔목을 잡았다. 예양은 그런 연화를 밀어내면서도 연화의 품에 안기고 싶었다. 실은 너무나도 두려웠다. 제가 익숙해진 다정과 온기가 그리웠다. 무참히 찬 바닥을 나뒹굴며 피를 흘리던 그 어린 제가 여기 누워있었어도 이렇게나 괴롭고 절망스럽지는 않았을 것이었다. 그때의 저는 온기를 몰랐으니까. 그렇지만 예양은 쉽사리 연화를 따라나설 수 없었다. 그저 연화가 먼저 제게서 등을 돌려주기를 바랐다.


 “옥경. 옥경이 기다려.”


 연화의 한 마디에 연화를 밀어내던 예양의 손짓이 멈췄다. 잠시 정신을 잃은 사람처럼 멍하니 연화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뭐가 됐든, 옥경은 네 모습을 봐야 하지 않겠어? 예양이 그제야 먼저 손을 뻗어 연화의 손을 잡았다. 연화는 제 손으로 들어온 예양의 손을 꽉 잡았다. 놓치지 않을 것처럼. 비틀대고 선 예양이 침대 아래 바닥에서 굴러다니는 용액이 담긴 주사기를 주워들었다. 연화가 그런 예양을 품에 안듯 이끌었다. 지민이 연화의 얼굴을 보곤 고개를 끄덕거렸다. 연화와 예양이 먼저 앞장 섰고, 지민이 그 뒤를 따랐다.


 - 아래층 신경 쓰지 말고 내려와요. 거긴 아직 몰라요. 위에서 내려오는 놈들만 처리해, 지민.
 “그래.”


 계단으로 향할 때쯤 계단 위쪽부터 아래로 걸어 내려오는 소리 죽인 발걸음을 지민이 눈치챘다. 지민이 계단 아래를 향해 연화에게 고갯짓했다. 지민의 신호를 눈치챈 연화가 더욱 소리를 죽여 예양과 걸음을 옮겼다. 그 순간 지민을 겨냥했을 탄이 벽을 긁었다. 지민이 지체없이 팔을 들어 총을 쐈다. 더 조심할 필요가 없었다. 연화는 예양까지 보호해야 했으므로 지민이 다치지 않았다는 것을 확인하곤 더욱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지민에 대한 확신이 있었다. 걸음을 옮기다가도 연화는 제가 사격을 할 수 있는 각도에 상대가 보이면 주저없이 사격했다. 절망감에 사로잡힐 시간 따위는 없었다. 

 연화는 제가 쏜 탄에 몇 명이나 죽어 나갔는지 헤아릴 새도 없었다. 품에 안겨 있는 예양은 자꾸만 몸을 떨었다. 연화는 그런 예양의 등을 조급하지 않은 속도로 쓸어내렸다. 연화의 사격은 지난 공백이 어색할 만큼이나 자연스러웠다. 총을 쏘기 위해 태어난 사람마냥 굴었다. 연화는 그 사실이 못내 슬펐지만 이를 떠올릴 틈을 만들지 않았다. 그녀의 얼굴이, 연기 사이로 저를 향해 시선을 던지던 지민의 얼굴이, 연화를 스쳐 지나가도록 두지 않았다. 등에 닿는 온기에 연화가 고개를 돌렸다. 어느새 바짝 따라온 지민이 있었다.


 - 그대로 빠져 나와요.


 CCTV를 보던 제이가 헛웃음을 지었다. 40분이 채 지나지 않았다. 아직 시간이 많이 남아있었다. 못하면 처리하고. 그렇게 말하던 연화의 목소리가 이명처럼 울렸다. 함부로 농담을 하지 않는 사람이라는 것은 알았지만, 그대로 해낼 줄은 몰랐다. 화면 속으로 보이는 연화와 지민이 제이의 목소리에 고개를 끄덕거렸다. 제이는 시간이 가까워질수록 자꾸만 심장이 거세게 뛰었다. 억지로 제 코와 입을 틀어막고 숨을 쉬는 것 같았다. 마른 목이 따가웠다. 침을 삼켜도 사포처럼 거친 무언가가 목을 거세게 긁고 내려갔다. 기침이라도 하면 피를 뱉어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제이는 가만히 화면을 바라보며 심호흡을 했다. 겨우 침을 삼켰다. 제가 뱉어낼 수 있는 것은 무엇도 없다. 어떤 진심이든, 거짓이든. 제가 뱉어낼 수 있는 것은 무엇도 없으니 저는 오롯이 삼켜내야만 했다. 제이가 한 다짐은, 그러한 것들뿐이었다.

 지민이 차 문을 열었다. 연화가 먼저 올라타고 이어 예양이 탔다. 예양은 룸미러로 제이와 눈을 마주치고 흠칫 몸을 떨었다. 그러곤 옆에 있던 지민을 다시 보더니 방금 잠에서 깨어난 사람처럼 미간을 찌푸리고는 눈을 비볐다. 그러나 아무도 설명하는 이는 없었다. 예양은 그래서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연화가 말하지 않는 데에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예양은 그렇게 생각했다. 예양은 저 자신보다 연화를 더 신뢰했다. 마지막으로 지민이 문을 닫자 차는 빠르게 출발했다. 예양이 계속해서 몸을 잘게 떨었다. 호흡이 가빴다. 연화는 그런 예양의 안색을 살폈다. 어둠이 가라앉은 배경, 그 위로 자리 잡은 예양을 어둠이 삼켰다. 예양은 그런 어둠에 저항없이 삼켜졌다.


 “예양, 조금만 참아. 옥경이 기다리고 있으니까.”
 “…그럼요, 연화.”


 지민은 들려오는 목소리를 들으며 창밖으로 시선을 던졌다. 아직 태양이 뜨기 전이라 짙은 어둠만이 가득했다. 영영 태양이 뜨지 않을 것처럼 보였다. 지민은 꾹 주먹을 쥐고 숨을 쉬었다. 억지로 창밖을 향해 시선을 던졌지만 자꾸만 시선이 다른 데에 이끌렸다. 지민은 그 자연스러운 이끌림을 뿌리치지 못하고 제이에게 시선을 던졌다. 제이.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지민은 더 이상 아무런 말도 꺼내지 않았다. 그저 운전하는 뒤통수만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지민은 제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무슨 일을 꾸미고 있던 것인지. 분명 아까 시선을 맞추었을 때만 하더라도 같은 생각을, 같은 목표를 가지고 있었음을 확신할 수 있었는데 고작 몇십 분이 지난 지금, 지민은 그로부터 아무런 것도 읽을 수 없었다. 지민은 제이가 으레 그랬던 것처럼 바라만 보다가 그 어떤 단어도 흘려 보내지 않고 다시 창으로 고개를 박았다.

 갤러리 앞에 도착해서야 차가 멈춰섰다. 유일하게 불이 켜져 있었다. 옥경만이 기다리고 있는 것이 아닐 게 분명했다. 해가 뜨기 전까지 모든 걸 끝내라고, 그녀가 말했었다. 해가 뜨기 전까지 얼마 남지 않았다. 그 어느 때보다 더 짙게 드리운 어둠이 이를 알렸다. 그녀가 연화를 위한 인력을 보낸 것이 분명했다. 지민과 연화가 예양을 부축했다. 예양은 슬며시 웃어 보였다. 근육이 미세하게 떨렸다. 제이는 그보다 두 발자국 더 뒤에서 걸었다. 귀에 꽂은 인이어를 자꾸만 만지작거렸다. 검은 모자를 더욱 깊게 눌러 썼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길게 늘어서서 연화를 기다리고 있는 이들이 있었다. 연화를 향해 허리를 숙였다. 연화는 그들을 보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무엇을 해야 하는지는 알죠. 적막한 갤러리에서 연화의 목소리가 울렸다. 네, 압니다. 그보다 조금 늦게 터져 나오는 목소리들이 내부를 떠돌아다녔다.


 “아무것도 남기지 말아요.”


 연화의 목소리를 끝으로 연화를 경호하기 위해 남은 여섯 명을 제외한 이들이 갤러리를 빠져나갔다. 제이는 여전히 연화의 뒤에 서 있을 뿐이었다. 제이는 고개를 들지 않았다. 지민과 한 공간에 있기 때문이었다. 연화가 예양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밝은 빛 아래서 본 피부가 더 희게 질려있었다. 연화가 옥경이 있을 곳을 향해 걸음을 했다. 제이가 연화를 따라나서는 지민을 잡아챘다.


 “넌 잠시만 여기서 기다려. 금방 올게.”


 그런 제이의 말에 지민은 가만 그 자리에 서서 멀어지는 연화의 뒷모습만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러다가도 제이의 뒷모습이 걸렸다. 제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야? 지민은 그 물음을 끝끝내 입에서 뱉어내지 않았다. 제이가 예양을 부축하겠다고 말했다. 그 편이 낫겠다고 생각한 것인지 연화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연화가 먼저 앞장서 걸었다. 제이가 금방이라도 부서져 버릴 것만 같은 예양을 부축했다.


 “예양.”


 지민이 아니라는 것을 눈치챈 모양인지 예양은 대답하기를 망설였다. 평소라면 네, 지민. 이라고 대답했을 터였다. 예양은 그를 지칭할 말을 찾지 못해 고개만 끄덕거렸다.


 “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진 않을 것 같은데. 여기는 아니야. 죽으려거든, 여길 나가서 죽어. 네가 여기서 죽으면 아무도 여기서 나가지 않을 테지.”
 “…….”
 “…근데. 이왕이면 살아.”


 그 말에 예양이 제이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동시에 앞을 가로막던 문이 열리고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예양이 홀리듯 제이에게 향했던 시선을 거두고 다시 정면을 바라보았다. 예양의 앞을 가로막고 있던 연화가 비켜섰다. 익숙한 실루엣이 예양의 눈앞에 아른거렸다.


 “예양, 예양, 예양….”
 “…옥경.”


 예양을 향해서 걸음한 옥경이 예양의 마른 몸을 껴안았다. 예양이 옥경의 허리를 끌어안고 어깨에 턱을 올렸다. 옥경이 예양의 이름을 되뇌며 등을 쓸어내렸다. 예양의 감은 두 눈 새로 눈물이 비집고 흘러나와 옥경의 옷자락을 적셨다. 예양이 가쁘게 숨을 쉬며 몸을 떨었다. 옥경이 다시는 놓지 않을 사람처럼 예양의 옷자락을 꾹 쥐었다. 강한 악력에 옥경의 손 틈새로 노란 옷자락이 잔뜩 주름져 울었다. 제이는 그런 모습을 뒤로한 채로 다시 지민이 있을 로비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제이는 지민의 등 뒤로 보이는 유리문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어둠이 사라지고 있었다. 곧 해가 뜰 것이었다. 해가 뜨기 시작하면, 막을 방도 없이 금방 밝아질 것이었다.


 “제이.”


 지민의 목소리가 들리기 무섭게 제이가 지민을 향해 총을 겨눴다. 지민이 짧은 순간 미간을 찌푸렸다. 제이가 CCTV를 향해 시선을 한 번 던졌다. 이마를 타고 뜨거운 땀이 흘러내렸다. 지민은 제이의 이마를 타고 흘러내리는 땀을 보았다. 저를 향해 던지는 시선이 뜨겁다는 것도 알았다. 로비에 남은 것은 둘뿐이었다. 지민이 주먹을 꾹 쥐었다가 다시 힘을 풀었다. 제게 무어라도 알려주지 않은 제이에 대한 원망이 떠오를 새는 없었다. 그저, 저희 처지가 애석하게도 비참할 뿐이었다.


 “지민, 뭐하고 있어. 어서 총 들지 않고.”
 “지금 이게 무슨 짓이야.”
 “빨리 겨눠. 네가 나한테 알려준 거잖아.”


 제이의 말에 지민이 입술을 한 번 씹었다. 제이에게 총을 겨누는 것이 달갑지 않았다. 아니, 달갑지 않다는 말로는 설명이 되지 않았다. 딱, 제가 죽고 싶은 심정이었다. 제게 몇 번이나 총을 겨눈 제이도 같은 마음이었을까? 우리는 하나가 아니면 안 되는 운명이었을까? 지민이 눈을 감고 선택을 하던 어느 밤을 떠올렸다. 연화를 지킬 수만 있다면, 그럴 수만 있다면 저는 무엇이 되어도 좋았다. 연화만 무사할 수 있다면 저는 그만 죽어도 좋았다. 불길에서 마주친 그 얼굴, 제가 다시 남겨두고 나올 수는 없었다. 지민이 느리게 총을 겨누었다.


 “박지민. 처리하겠습니다.”


 제이가 그와 동시에 모자를 벗어들며 인이어를 빼냈다. 지민이 저를 향해 겨눈 팔이 자꾸만 바닥을 향해 떨어지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지민은 그제야, 제이가 무슨 짓을 벌일 생각인지 깨달았다. 지민은 제이가 하고싶은 대로 하도록 두고 싶지는 않았다.


 “날 쏴.”
 “다시 총 올려.”


 지민이 총을 내렸다. 제이가 지민의 말에 날카롭게 대꾸했다. 지민은 제이를 쏘고 싶지 않았다. 제이는 지민의 행동을 따라하는 사람처럼 총을 내렸다가 다시 자세를 바로 했다. 제이는 자꾸만 눈물이 차올랐다. 이마에서 흘러내린 땀이 눈으로 들어가 따가웠다. 그 어느 날 도로에서 맞던 차가운 비가 떠올랐다. 굉음과 함께 터지던 차, 막을 수도 없이 쏟아지던 피. 저를 향해 달려오던 연화. 죽음을 피할 수 없겠다고 감히 멋대로 단정 지었던 그 순간, 차에서 내리던 지민. 제이는 제 선택이 감히 최선이라고 믿는다.


 “예양이 빠져나오는 것도, 모두 내 계획이야. 정말로 그들이 몰랐을 거라고 생각하는 거. 아니지, 지민?”
 “그래. 그렇게 쉽게 해결될 거라고 생각한 적 없어. 네 계획이라면 다 이유가 있겠지. 말했지. 난 연화만 지킬 수 있으면 족하다고. 대신 네가 살아나가 연화를 지키겠다고, 한 마디만 해.”


 제이 역시도 지민이 원하는 답을 해줄 생각이 없었다. 제이는 그 짧은 순간, 연화의 얼굴을 떠올렸다. 더운 열기가 저 자신을 덮치고, 턱 근육이 아릴 정도로 달았던. 그 어느 여름날. 뒤이어 떠오르는 건 당연하게도 지민의 얼굴이다. 하나가 되어야 하는 운명, 그러나 끝끝내 하나가 될 수 없었다. 제이는 그 이유를 알고 있다. 제가 하나가 될 수 없는 이유.


 “난 못 지켜. 알잖아, 내가 누군가를 지킬 수 있는 사람이 못 된다는 걸.”
 “못 해도, 해.”
 “아니. 난 안 할 거야. 그런 건 박지민 네가 해. 총 올려, 박지민.”
 “…….”
 “내 계획이 잘못될 거라고 생각한 적 없어. 내 말 들어. 시간 없으니까.”


 지민은 제이의 뜻대로 총을 올렸다. 지민의 얼굴 근육이 미세하게 떨렸다. 제이를 향해 뜨고 있는 두 눈이 따가웠다. 제이의 모습을 눈에 담으려 눈을 감지 않아서인지, 이마에서 흘러내린 땀방울 때문인지, 자꾸만 차오르는 눈물 때문인지. 지민은 알 수 없었다. 지민이 입술을 씹었다. 지민은 제가 세울 수 있는 계획 따위 없음에 절망스러웠다. 제이처럼 모든 경우의 수를 따질 수 없었고, 빠른 판단을 내릴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연화를 지키는 것이 최우선이다. 그렇다고 제이를 포기할 수 없다.


 “CCTV 내가 넘겼어. 지금 여기서 내가 박지민으로 남고, 넌 연화를 데리고 가면 돼. 어디든 그냥 가. 두양애가 하루 아침에 사라질 수 있는 존재라고 생각해? 살아있다는 걸 알면 널 끝까지 추격할 거야.”
 “…너는.”
 “박지민. 나는 원래 너였어.”


 너를 복제한 게 나니까. 제이가 총을 내렸다. 지민은 총을 내리지 않았다. 곧 있으면, 두양애가 올 거야. 박지민. 내가 정말로 아무 계획 없이 이러는 것 같아? 빨리 쏴. 안 그럼 연화가 위험해질 거니까. 지민의 손끝에 땀이 맺히기 시작했다. 지민과 눈을 맞춘 제이가 미소 지었다. 지민이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어디서부터, 어디서부터 잘못됐을까? 제가 리안화에 들어갔을 때부터? 저와 제이가 두양애에서 첫 숨을 뱉었을 때부터? 제 형제에게 총을 겨누게 될 운명을 우린 알았을까? 제이는 알았을까? 이런 운명이 닥치리라는 걸 알았더라면 지민은 제이를 두양애에 두고 나오지 않았을 것이었다. 제가 모두를 죽여서라도 제이를 그곳에 두지 않았을 거였다. 지민은 저 자신이 원망스러웠다. 두양애에 제이를 두고 나온 지민, 불길 속에 연화를 두고 나온 박지민. 제 이름을 곱씹는 것만으로도 지민은 숨이 턱 막혀왔다. 뜨거운 숨이 벌벌 떨리며 허공에서 부서졌다.

 그 순간, 지민의 총이 격발됐다. 제이가 바닥을 향해 추락했다. 다시 지민의 탄이 CCTV를 명중했다. 갤러리 내부에서 큰 폭발음이 들렸다. 언뜻 총소리가 들린 것 같기도 했다. 지민은 그것이 환청이기를 간절히 바랐다. 환청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제이, 살아. 살아남아서 꼭 제이로 살아. 박지민이 아니라.”


 차가운 대리석 바닥에 누워있는 제이를 뒤로하고 지민은 달렸다. 연화를 향해서. 지민은 누구보다도 제이를 믿었다. 살아남으리라고, 믿었다.

 옥경은 예양의 허리춤을 붙잡고 울었다. 예양은 금방이라도 숨이 멎을 사람처럼 바닥에 누워 가녀린 숨을 뱉었다. 숨을 뱉을 때마다 색색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열도 없으면서, 그 어떤 온기도 없으면서, 열에 취해 아무것도 못하는 사람처럼 굴었다. 창백한 낯빛과는 다르게. 연화는 그만 고개를 돌렸다. 그런 예양을 볼 자신이 없었다.


 “연화, 연화.”


 그러나 예양은 연화를 불렀다. 연화가 자신에게서 고개를 돌린 것을 알아 그랬을까? 그러나 연화는 예양의 감긴 두 눈을 보고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옥경은 그런 예양의 얼굴을 내려다보며 눈물을 뚝뚝 흘릴 뿐이었다. 예양의 상한 얼굴 위로 옥경의 눈물이 떨어졌다. 옥경이 자꾸만 예양의 얼굴 위로 떨어지는 눈물을 제 손으로 닦아냈다. 예양은 눈물을 흘리지 않았다. 옥경이 예양의 몫만큼 흘리고 있어 그랬나.


 “연화. 옷 빌려줘서 고마워요. …먼지 하나 안 묻혀 오겠다고 했는데. 미안해요. 미안해요, 연화.”
 “괜찮으니까 눈 떠. 예양. 옷은 얼마든지 빌려줄 테니까.”
 “머리 자른 것도 보기 좋아요. 이렇게 보니까, 우리 많이 닮지 않았어요. 연화? 연화. 연화…. 나 이제 무슨 일인지 알았어요. 나 저들이 뭘 위해 열심인지 알았어요. 연화, 내가 할 수 있는 게 무엇인지 나 드디어 알았어요.”


 연화는 감히 저 붉게 터진 입에서 무슨 말이 터져나올지 몰라 두려웠다. 연화는 더 이상 예양이 아무런 말도 하지 않기를 바랐다. 연화는 예양을 향해 손을 뻗으려다가 다시 주먹을 꾹 쥐곤 팔을 내렸다.


 “연화. 내가 죽으면. 감히 누구인지 알아볼 수도 없게 만들어 주세요. 연화, 연화. 내가 연화가 될게요. 연화, 진짜 이름이 뭐예요?”
 “…몰라.”
 “……아쉽다. 한 번 불러보고 싶었는데. 연화. 내가 연화가 될 테니, 연화는 절망에 살지 말아요.”
 “예양. 이쯤 해. 네 말대로 해줄 생각 없으니까. 넌 살아서 치료부터 받을 거야. 옥경이랑, 원래 자리로 돌아갈 수 있도록.”


 연화가 그대로 문을 열고 옥경과 예양을 두고 나왔다. 연화는 문에 가만 기대 허공을 바라보았다. 눈꺼풀이 무거웠다. 금방이라도 눈물이 떨어질 것 같았다. 걸음을 옮겼다. 연화는 벽에 붙어 저를 바라보는 경호팀을 향해 시선을 옮겼다.


 “혹시라도 무슨 일이 생기면, 예양과 옥경부터 지켜요.”


 연화가 말했다. 연화는 감히 뒤를 돌아볼 수 없었다. 제가 가진 절망이 그들마저 집어 삼킬까봐.


 “옥경. 옥경.”
 “그래, 나 여기 있다. 여기 있어….”
 “나 사실 옥경한테 말하지 않은 게 있어요.”


 예양은 잘 떠지지 않는 눈을 억지로 떴다. 시야에 옥경의 얼굴이 들어찼다. 옥경이 끝없이 울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물에 젖은 솜처럼 몸이 무거웠다. 떨리는 손으로 옥경의 볼을 쓸었다. 단 한 번의 손짓만으로도 엄지가 축축하게 젖어갔다. 그 슬픔이 모두 전이되는 것 같았다. 울지 말라고 말하고 싶었다. 함께 고향으로 돌아가 살자던 그 약속, 못 지킬 것 같아 미안하다고 말하고 싶었다. 제가 하고 싶은 말은, 그뿐이었다. 저를 저보다 아낀 옥경을 속여왔다는 걸, 말하고 싶지는 않았다. 저는 단연코 옥경을 속이고 싶었던 적이 없었다. 언제나, 어느 밤에나 옥경에게 제 손을 놓지 말아 달라고 말하고 싶었다.


 “예양. 네가 말하고 싶지 않았던 거라면, 끝까지 하지 않아도 된다. 나는 예양과 함께 하는 것만으로도 과분하니까. 그러니까, 그러니까….”
 “……옥경. 고마워요. 마지막으로 부탁, 들어줄 수 있어요?”


 예양은 감히 그 비밀을, 말하지 않기로 마음 먹었다. 끝까지 옥경에게는 좋은 사람으로 남고 싶었다. 제 욕심이지만, 과분한 욕심이지만, 그러고 싶었다. 옥경만은 몰랐으면 했다. 제가 옥경을 속여왔다는 것을, 두양애라는 것을. 그러나 저 자신은 정말로 옥경을, 진심을 다해 사랑했노라고. 예양이 원피스 안쪽 옷감에서 챙겨온 주사기를 꺼내 들었다. 내가 언젠가 연화에게 말한 적이 있어요. 나는 약 때문에 죽을지도 모르겠다고. 그 말을 하지 말았어야 했나봐요. 옥경과 함께 살다가 행복에 겨워 눈을 감을지도 모르겠다고. 그렇게 말할 걸 그랬어요. 나는 정말로, 이렇게 되고 싶지는 않았어. 옥경, 나 당신을 몰랐더라면 이렇게 가슴 아프지는 않았을 거예요. 그래도, 그래도. 다정함을 알아서 좋았어요.


 “옥경이 내 마지막을 함께 해줬으면 좋겠어요. 옥경, 난. 이대로는 너무 고통스러워요. 옥경, 옥경. 정말로 미안해요…. 나 정말로 옥경을 사랑했어요.”


 옥경의 잔뜩 씹힌 입술 사이로 울음이 터져나왔다. 예양이 옥경의 손에 주사기를 쥐어 주었다. 옥경이 고개를 저었다. 옥경은, 옥경은, 옥경은 제 이름을 곱씹은 만큼이나 예양과의 추억을 회상했다. 하고 싶지 않았다. 우습게도 연화의 얼굴이 떠올랐다. 제가 예양을 애타게 부르다 무심코 지나쳐 버린 연화의 젖은 얼굴. 연화라면 기적처럼 이 모든 일을 돌릴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옥경은 제가 하는 생각이 얼토당토않은 소리라는 것을 알았다. 옥경은 어서 이 지독한 악몽에서 깨어나고 싶었다. 맑은 예양의 얼굴을 떠올렸다. 제 손을 처음 잡던 찬 손끝을, 옥경이라고 부르던 가녀린 목소리와 화사한 얼굴을, 저를 안던 그 품을….

 연화가 로비 방향을 향해 걸음을 옮기려던 찰나 건물에서 큰 폭발음이 들렸다. 그와 동시에 몸이 휘청일 정도의 진동이 느껴졌다. 연화는 그 낯설지 않은 상황에 기민하게 반응했다. 예양과 옥경이 있을 곳으로 다시 몸을 돌렸다. 그 순간 날아온 탄이 연화의 왼쪽 어깨를 스치고 지나갔다. 연화는 고통에 신음할 틈 없이 저를 겨냥했을 계단 쪽을 향해 사격했다. 그와 동시에 둔탁한 소리가 들려왔다. 두양애다. 연화는 감히 확신했다. 제 앞을 막아선 경호팀을 향해 연화는 다시 소리쳤다.


 “예양, 옥경 데리고 나가서 치료부터 해요. 빨리!”


 연화는 벽에 기대어 권총을 장전했다. 예양과 옥경을 다치게 둘 수는 없었다. 절망과 싸우는 건 저로도 족했다. 제가 가진 절망이 모두를 삼키지 않기를 바랐다. 그럴 수만 있다면 저는 무엇도 후회하지 않을 수 있었다. 이름을 잃어버린 것조차도. 불릴 이름따위 없다는 사실조차도. 그 순간 다시 폭발음이 들렸다. 그들이 숨어 있었을 위층에서 터진 모양이었다. 폭발물은 대체 누가 설치한 걸까. 설마….


 “연화!”


 지민의 목소리가 들렸다. 연화가 고개만 돌려 지민의 위치를 확인했다. 지민이 달려오면서 연신 총을 발포했다. 계단을 따라 다시 폭발물이 터졌다. 연화의 앞에서 불길이 치솟았다. 연화는 어서 등을 돌려 뛰어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불길이 번지는 속도는 소름 끼치도록 빠르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런데 연화는 가만 그것을 바라만 보고 있었다. 환상통이 느껴지던 새벽과도 같았다. 사실은 이 모든 게 나의 환상이 아닐까. 그게 아니고서야 모든 일이 이렇게 될 리 없었다. 돌아가고 싶었다. 제가 가진 모든 절망을 오직 제가 떠안고 싶었다. 절망에 달려드는 건, 저로 족했으니까. 모두가 떠안을 필요는 없었다. 애초에 제가 그 불길에서 죽었더라면, 달라졌을까?


 “연화, 제발. 정신 차려.”


 그 상념을 깬 것은 지민의 목소리였다. 연화는 제가 숨을 참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불길 새로 비치는 맑은 지민의 얼굴. 그 얼굴이 겹쳐졌다. 연화는 그제야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러나 당장 나갈 수는 없었다. 예양과 옥경은 자리를 옮겼을까? 적어도 빠져나가기 수월하게 만들어야 했다. 아직 남아있을 적을 두고 나갈 수는 없었다. 연화는 불길을 향해 달렸다. 제가 아끼던 작품들은 모두 불에 탔을 것이다. 그딴 건 이제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연화가 제가 등을 돌려 나왔던 문 앞에 서서 숨을 고르다 문을 활짝 열었다. 예양과 옥경은 없었다. 연화의 뒤를 따라온 지민이 어느새 연화의 뒤까지 쫓아온 이의 목덜미를 챘다. 바로 앞에 연화가 있어 총을 쏘기 어려웠다. 주먹으로 얼굴을 가격했다. 지민이 복부를 발로 차 밀어내고, 상대와 지민과의 거리를 확인한 연화가 총을 쐈다. 피가 터졌다. 시체가 된 몸뚱이가 불길을 향해 넘어졌다.

 두양애가 잠복했을 공간에서 폭발물이 터졌다. 연화는 감히 제 공간에 허락도 없이 일을 저질렀을 이를 안다고 장담할 수 있었다. 그의 판단이 없었더라면 상황은 지독하게도 불리했으리라는 걸 알았다. 연화는 매캐한 연기에 숨이 턱 막혀옴을 느꼈다. 소매로 얼굴을 가렸다. 이글거리며 타오르는 소리가 아득하게 들렸다. 예양과 옥경이 위층으로 올라갔을 리는 없다. 다시 왔던 길을 빠져나오려고 했다. 연화가 등을 돌리지 않고 뒷걸음했다. 그런 연화에 등을 맞댄 지민이 앞을 향해 걸었다. 숨이 막혀옴을 느꼈다. 연화는 타오르는 시체 앞에서 함부로 눈을 감지 않았다. 불길을 가로질러 뛰어나오는 인영을 향해 주저없이 총을 쐈다.

 그녀를 지키기 위해 폐공장에서 총을 쐈던 제 모습이 잔상처럼 떠올랐다. 그리고 뜨거운 열기와는 상반되게 차게 식어가던 그녀의 체온 또한 떠올랐다.


 “연화, 이쪽이야.”


 지민이 연화의 팔을 이끌었다. 이미 자동 방화셔터가 내려와 있었다. 지민이 셔터의 출입문 쪽을 향해 거세게 몸을 부딪혔다. 불길이 코앞까지 닥쳤다. 꿈이라도 꾸는 듯 정신이 멍했다. 예양은, 옥경은, 제이는. 그들은 어디에 있을까? 지민이 이를 악물고 셔터를 향해 계속해 몸을 부닥쳤다. 문이 열리고 곧바로 연화의 팔을 이끌었다. 지민의 이마 위로 땀이 비오듯 쏟아졌다. 연화를 앞세웠다. 지민은 연화의 팔을 놓을 수 없었다.

 지민은 연화를 두고 나왔던 그 순간을 잊을 수 없었다. 눈을 감으면 제 현실보다도 더 생생하게 떠올랐다. 이름조차도 부를 수 없었던 그 순간. 할 수 있는 거라곤 고작 살아남았기를 간절히 기도하는 것밖에는 없었던. 지민은 그 악몽 같은 순간으로 다시는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그 안에서 불에 탄 것이 저의 몸이었더라도 제가 그곳을 혼자 빠져나와서는 안 됐다. 절망이 배를 불리도록 두면 안 됐다. 절망에 삼켜지도록 제물로 두어서는, 안 됐다. 지민은 생명줄처럼 연화의 손을 붙잡았다. 다시 놓지 않을 사람처럼 깍지 껴 잡았다. 총을 든 손을 내릴 수 없었으므로 간신히 어깨 근처 옷자락에 얼굴을 푹 박고 있을 뿐이었다. 제가 여기서 질식해 죽는다고 하더라도 연화만은 빠져나갈 수 있도록 해야 했다. 제가 살릴 것은. 연화, 연화, 연화. 목숨을 바쳐도 부족한 연화.

 방화셔터 밖에서도 이미 폭발물이 터진 것인지 불길이 가득했다. 지민은 눈을 꾹 감았다가 떴다. 포기할 수 없었다. 연화를 끌어당겨 제 품에 가두듯 안았다. 연화는 눈이 따가웠지만, 제 의지와는 상관없이 눈물이 흘러내렸지만 눈을 감을 수 없었다. 총을 쏘기 위해 올린 팔을 내릴 수 없었다. 예양과 옥경을 찾고 싶다가도, 이 절망을 빠져나가 절망 속에서 그들을 찾을 수 없었으면 했다. 연화는 검게 타오르는 그림에도 기민하게 반응했다. 타오르는 시체가 예양이 아니기를, 옥경이 아니기를, 제이가 아니기를 빌었다. 빌고 또 빌었다. 연화는 제가 할 수 있는 것이 간곡히 비는 것뿐이라는 사실에 좌절하고 싶었다.

 유리창은 연속적으로 터져나갔다. 지민은 그 파편으로부터 연화를 감싸 안아 보호했다. 연화는 출구를 찾아 걸어나가며 제 판단을 곱씹었다. 제가 해결할 수 있다고 믿었던 건, 오만이었을까?


 “지민아. 나 때문이었을까?”
 “연화 덕분인 거야.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무엇도 바뀌지 않아.”
 “그래도. 내가 이 절망에 너무 많은 사람을 끌어들인 게 아닐까? 지민아, 나는 내 선택이 모두 실수였을까 두려워.”


 뜨거운 열기와 상반되게 선선한 공기와 가까워졌다. 피부에 닿아오는 기온이 불길과 멀어지고 있음을 여실히 증명했다. 마침내 갤러리를 빠져나온 지민이 연화를 이끌고 주차된 차를 향해 뛰었다. 그제야 코와 입을 가리고 있던 소매를 떼어낼 수 있었다. 연화는 무언가를 두고 온 사람처럼 자꾸만 뒤를 돌았다. 그러나 지민은 다신 뒤를 돌아보지 않을 사람처럼 앞만 보고 뛰었다. 연화를 이끌었다. 지민은 그러지 않으면 안 되었다. 설령 제가 정말로 두고 온 것이 있더라도 제 손에 쥐고 있는 것이 연화의 손이라면 뒤를 돌아보면 안 되었다.


 “연화가 하지 않았더라면. 진즉 죽었을 운명들이야. 연화가 바꾼 거야. 우리가 그 안에서 죽지 않도록, 정도 모르고 죽지 않도록.”


 지민이 말했다. 조수석 문을 열었다. 연화가 앉는 것을 확인하고는 문을 닫았다. 운전석에 올라 탄 지민이 급하게 시동을 걸어 액셀을 밟았다. 지민은 그제야 백미러를 향해 시선을 던졌다. 큰 폭발음과 함께 건물 전체가 타오르기 시작했다. 지민이 무언가를 참는 듯 목울대가 울렁였다. 지민은 그 모든 감정을 다시 삼켜냈다. 체한 것처럼 감정들이 속에서 울렁거렸다. 지민은 핸들을 거세게 잡을 뿐이었다.

 연화는 타오르는 건물을 가만 바라보았다. 저를 두고 왔을 지민은 어떻게 버텼나. 저는 그들이 빠져 나갔으리라 믿을지라도 이렇게나 시선이 떨어지지 않는데. 숨이 쉬어지지 않는데. 그 나날을 어떻게 버텼나. 저를 눈치 챘으리라 생각도 못한 채로 멀어져 가면서 무슨 생각을 했나. 연화가 지민을 향해 시선을 옮겼다. 얼굴이 군데군데 검게 물들어 있었다. 핸들을 쥐고 있는 팔을 응시했다. 제가 사랑해 마지않던 그 나비. 한 마리를 가로지른 흉터까지. 연화는 손을 뻗어 지민의 손을 잡았다. 지민은 한 손만을 핸들에 올린 채로 연화의 손을 꽉 잡았다. 놓치지 않아 다행이었다. 그 안에 두고 오지 않아 다행이었다. 그 시선이 맞물려서 다행이었다. 연화의 손을 잡을 수 있어서, 연화의 시선을 받아낼 수 있어서, 연화의 온기를 느낄 수 있어서. 연화의 곁에 남을 수 있어서. 지민은 그것이 기적이라고 믿었다.


 “옥경과 예양은.”
 “먼저 빠져나갔을 거야. 분명히.”
 “그래. 그랬을 거야. 지민이 네 말을 믿으니까. 그랬을 거니까. …제이는.”


 연화가 숨을 몰아 쉬었다. 뒤늦게 제가 살아있다는 것이 실감이 났다. 저든, 지민이든 저 안에서 죽을 상황이었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기 위해 그들이 숨어 들었다는 것도. 예양을 데려오는 게 쉬웠다는 것도. 연화는 지민의 말을 믿었다. 제 선택이 잘못된 것이 아니길 바라면서. 제이를 알아챈 것도, 예양을 구해온 것도, 예양과 옥경을 만나게 한 것도. 잘못된 선택이 아니었으리라고. 연화의 물음에 지민은 한참이나 대답이 없었다. 차는 멈추지 않았다. 계속해서 직진했다. 정해진 목적지를 가는 것처럼 지민은 그렇게 차를 몰았다. 함부로 멈춰 서지 않을 것처럼. 지민은 잡힌 손의 온기를 느끼며 거친 숨을 쉬었다. 날이 선 감정이 지민의 가슴께를 모두 긁고 내려갔다. 잠시 연화를 보았다. 그 검은 눈동자를 보았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살아남을 거야. 그 애는 예측하지 못하는 게 없으니까.”


 지민은 제 간절한 바람을 입 밖으로 꺼냈다. 지민은 제이를 믿었다. 저를 바라보던 그 표정을 잊지 않았다. 수고했다고 말하는 목소리를 잊지 않았다. 잊지 않을 것이었다. 지민은 제이가 살아남으리라고 믿었다. 어쩌면 다시는 만날 수 없다고 하더라도 살아만 있다면 그걸로 되었다고 생각했다. 그 애는 정말로 대단한 애니까. 죽지 않으리라고 믿으니까.


 “…제이도 분명 살아있을 거야.” 
 “…….”
 “그런데 지민. 우리 지금 어디로 가는 거야?”
 “…우리가 함께 있을 곳. 다시는 절망 같은 건 하지 않을 곳. 연화, 아니. 이제는 연화가 아니지. 우리 처음으로 돌아가자. 가장 처음으로 돌아가자.”


 지민이 말했다. 연화는 아니, 그녀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래, 그러자. 우리는 절망을 벗어나서 살자. 연화고, 리안화고 돌아보지 말고 우리 절망을 떠나자. 절망의 먹이가 되지 말자. 우리는 우리가 되자. 

 태양이 붉게 떠올랐다. 타오르는 불구덩이에 놓인 것 같았다. 그 불구덩이를 향해 달렸다. 타오르는 불구덩이는 더는 절망이 아니었다. 타오르던 그곳에 다시 한 번 이름을 버리고 달렸다. 이번에는 빼앗긴 것도, 잃어버린 것도 아니었다. 버리고 온 것이었다. 목적지는 갈망하던 자유였다. 무엇도 더는 족쇄처럼 우리를 묶어둘 수 없었다. 타오르는 불길에서 또 한 번 살아남은 우리는 이제 자유를 향해 뛰었다. 올가미에 걸린 것처럼 엮이던 시선의 주인공과 함께였다. 그들을 태운 차가 불구덩이처럼 붉게 타오르는 태양을 가로질렀다.


2021.0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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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1
오랜만입니다 작가님!
작가님 글은 언제나 좋아요.. 글잡 잘 안들어온지 꽤 됐는데 작가님 알림 온 거 보고 바로 들어왔네요.
오늘도 잘 읽고 갑니다.

3년 전
소슬
오늘도 찾아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좋은 밤 되세요. :)
3년 전
비회원도 댓글을 달 수 있어요 (You can write a comm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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