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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교 세간살이가 녹록지 않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요즘 겪어보자면 할 말이 아주 많다.
첫째, 주말 부부가 많은 신축 타운 하우스에서는 금요일 저녁만 되면 주차장에서부터 남의 스킨십을 강제로 목격해야 한다. 뒤통수를 잡고 퍼붓는 진한 키스는 기본이고, 달아오른 응큼한 손이 제 남편과 아내의 엉덩이를 조물딱거리기도 한다. 욕망이 그들의 뇌를 지배한 터라 장을 보고 돌아오는 나의 순수한 퇴근길은 그야말로 고역일 수밖에 없는데, 집 앞 골목길에 두루두루 모인 아낙네 떼를 마주한다면 차라리 저 주차장에서 밤을 새우는 게 낫다는 생각이 든다.
프리지아 새댁, 그 소식 들었어?
다들 의식 과잉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지만 이곳 주민들은 은근 타인에게 관심이 많다. ‘은근’이라고 해서 가끔 있는 일이 아니라, 마주칠 때마다 ‘자주’ 또는 ‘매번’ 상황을 목격하게 된다. 내가 말하고 싶은 두 번째 이유가 여기에 있다. 어제 카페에서 마주친 벚나무 새댁의 시계가 독일 한정판 에르메스였다, 듣자 하니 그 집 남편이 독일 특파원인데 새벽 4시부터 줄을 서서 받아왔단다, 역시 배우자 중 한 명은 해외로 돌아야 쓸모가 있다는 등 모여있기만 하면 남 모가지와 팔모가지에 걸린 물건을 일일이 스캔하기에 바빴다. 문제는 그 노가리를 내 집 대문 앞에서 까고 있다는 거다. 그들의 호기심 어린 눈이 내 머리부터 발끝을 훑는다. 본격적인 타깃은 얼마 전 새로 이사 온 프리지아 새댁, 나였다.
어머, 그거 까르띠에 맞지? 저번에 본 반지랑 다르네? 남편이 건축가라더니 돈을 잘 버나 봐? 왜, 다들 몰라? 여기 안우재 지었을 때도 여기 새댁 남편이 대출 밤톨만큼 받고 시작했대잖아. 아버지가 대기업 움켜쥐고 있는데도 도움 하나 안 받고 재테크로 어마어마하게 불렸대. 그러니 사람 머리가 얼마나 좋겠어? 역시 성정보다 여기, 요 머리가 좋아야 돼. ……응? 프리지아 새댁 뭐라고? 아아, 그 반지는 새댁이 산 거야? 아무튼 새댁은 캐나다에서 왔다며? 아휴, 이 근방 소문은 금방금방 돌지. 캐나다에서 왔으면 홀푸드 유기농 마켓은 가봤겠네? 내츄럴 드레싱 코너만 한바닥이라면서? 치즈도 종류만 수십 가지라고 그러던데? 아유, 그러니까. 우리 애도 그런 걸 먹여야 하는데. 그나저나 남편은? 오늘 금요일인데 남편이랑은 같이 안 왔어?
― “예, 안녕하세요.”
셋째. 주민들은 내 남편에 대해 관심이 아주 많다. ‘아주’의 동의어로는 ‘굉장히’ 와 ‘무진장’이 있는데 이와 같은 상황에서는 ‘조온나’가 적절하겠다.
― “(인생의 시간은 한정적인데 굳이 남의 집 대문 앞에서 헛된 시간을 쏟고 있는 사람들이 정말 이해가 안 가지만) 오늘도 다들 평화롭게 모여 계시네요.”
내 장바구니를 든 그가 웃는다. 사실 그냥 웃고 있다기보다는 또 나를 잡고 안 놔주냐는 일종의 반항적인 미소였다. 오직 배우자만 알 수 있는 그 속내를 주민들은 알 턱이 없다. 그러니 이번엔 그를 잡고 놔주지 않는 거겠지.
지난번에 차 트렁크에 있던 아이스박스 있잖아요? 일부러 본 건 아니고 조깅 나가다가 우연히 봤는데 그거 어디 브랜드예요? 우리도 캠핑 좋아하거든. 사이즈도 딱 좋을 것 같아서 그러는데 제품명만 알려주면 안 돼요? 혹시 직구인가?
저번에는 그가 찬 시계 브랜드를 묻더니 오늘은 아이스박스 제품 이름을 묻는다. 무엇을 입고, 무엇을 사용하든 상대방이 갖고 싶게 만드는 유형이 있다면 바로 내 옆에서 사르르 녹는 눈웃음을 짓는 남자다. 그런 남자의 대표적인 특이점이 있다면 바로 이것.
― “저도 선물 받은 거라 확인하고 나중에 알려드릴게요. 여기 계속 서 있으면 와이프 감기 걸릴 것 같아서.”
누구에게나 반듯하지만 내 여자의 안녕과 안위가 최우선인 남자는 가벼운 목례 후 내 어깨를 둘러 집으로 향했다. 여심을 흔드는 눈웃음에 덩달아 따라 웃던 아낙네들이 뒤늦게 정신을 차린다. 뒤통수가 따가운 걸 보니 부러운 시선을 던지고 있을 텐데, 내 어깨를 감싸고 문턱을 넘는 남자는 그러거나 말거나 내 머리에 제 뺨을 갖다 댔다.
― “안 추워?”
― “오늘 야근이라면서?”
― “다들 마라탕 먹고 이상해서 집 갔어.”
집단 야식 속 쓰림을 간헐적으로 설명하는 그를 떼어내고 빤한 시선을 보냈다. 왜? 얼굴에 뭐 묻었나. 얄쌍한 턱을 만지며 어딘가에 붙어있을지도 모를 밥풀 떼기를 찾는다. 응, 잘생김이 덕지덕지 묻었어, 라고 말하고 싶은데 그것보다 더 묻고 싶은 게 있었지.
― “넌 왜 멀쩡해?”
― “질문이 뭐 그래.”
― “배 안 아파?”
― “난 안 먹었어.”
― “오늘 밥 안 먹었어? 아까 문자로 물어봤을 땐 먹었다며?”
― “……아, 먹었네. 나 먹었다.”
― “입만 열면 그짓말이 자동으로 나와.”
― “아냐. 진짜 먹었어.”
세상 건축 혼자 다 하는 이지훈 씨는 밥 먹는 시간도 아껴가면서 집을 지었다. 덕분에 그가 설립한 더블유젯 건축 사무소는 내후년 3분기까지 일복에 겨운 상태다. 최근 은퇴한 노부부 교수를 위한 안양 단독 주택을 짓고, 투자로 성공한 청년 사업가의 지붕을 올린 지훈은 말 그대로 고공행진 중이다. 일전에 K건설과 콜라보를 진행했던 뉴욕 ULA 모듈 사업팀은 새 프로젝트를 위해 지훈과 손을 잡았다. 순항 중인 배에 너도 나도 타고 싶은 대한민국 건축 사무소는 요즘 지훈의 사무실을 방문하는 일이 잦았다. 바꿔 말하면 그와 함께 하는 시간이 그만큼 줄어들었다는 뜻이기도 하다.
― “우리 곰국 먹자.”
― “손 많이 가.”
― “그러니까 사 먹자.”
― “여기서 배달시키면 장 봐온 건 무슨 의미야.”
― “왜? 너무 사치 같아?”
그린 에이지 코리아 다다음달 호를 마치고 이틀의 휴식기가 찾아온 10월의 가을. 소파에 앉아 배달 앱을 켜는 내 옆으로 작은 얼굴이 슬금슬금 다가왔다. 이미 냉장고에 장바구니를 째로 밀어 넣고서.
― “도가니도 따로 주문이 돼?”
주문 메뉴를 귀엽게 확인하는 것 치고는 너무 가까운 간격. 뒤에서 내 어깨에 턱을 괴고 으음- 작은 숨을 뱉는다. 곧 옆으로 고개를 틀더니 여린 입술로 내 목덜미를 살살 애태웠다. 묘한 아랫배 꼴림에 가만히 다리를 오므리자, 그는 허벅지 안쪽을 부드럽게 감싸며 엄지로 살결을 매만졌다.
― “뭐해, 주문해야지.”
터질 것 같은 내 귓바퀴를 깨물며 낮은 웃음을 흘려보낸다. 힘 빠진 손가락으로 휴대폰만 겨우 붙잡고 있는 내가 애처로워 보였을까. 그는 보란 듯이 귓불 주변에 입을 맞추며 결국은 완전히 제 쪽으로 기대게 했다. 가디건 속 가슴과 허리, 은밀한 허벅지와 종아리에 뭉근한 자극을 주며 신음을 참는 어린양을 바라보는 눈빛이 뜨겁다.
― “우리, 샤워할까.”
이런 여우짓은 어디서 배운 거야?
― “같이.”
짜릿해.
Oh My Rainbow
; The Finale
16. 그리고 또다시 우리는
1장. 이지훈과의 신혼이란?
가벽 액자 창 너머로 눈 부신 빛이 들어온다. 침대 위 얽혀있는 다리와 서로를 꼭 안고 있는 팔, 콧잔등이 닿을 듯한 가까운 거리와 이마에 닿는 촉촉한 입술에 속눈썹이 움찔거렸다. 지훈은 아까부터 내 얼굴을 보고 있었고 인제 와서 눈을 뜨기엔 너무도 부담스러웠다.
올챙이 눈곱이 껴있으면 어떡해? 실눈꼽 부스럼 때문에 나한테 정떨어지면 어떡하지? 이러한 악조건은 신혼 생활에 적절치가 않다. 잠꼬대인 척 슬그머니 정면을 보며 누웠다. 그가 팔을 감아 내 몸이 다시 제자리로 돌아오기까지 약 0.5초가 걸린 것 같지만.
젠장. 또 코 앞이다. 이쯤 되면 이지훈의 꿈은 현미경인가? 왜 자꾸 확대해서 모공까지 보려는 건지 도무지 이유를 알 수가 없다. 심장은 두근거리고 무척이나 긴장한 탓에 들뜬 속눈썹이 위로 움직였다. 콧구멍은 벌름거렸고 입술은 아예 쪼그라들었다. 그 순간, 내 콧잔등을 매만지던 지훈의 손가락이 멈췄다. 희미한 웃음이었다.
― “눈 뜨기 애매해?”
― “…….”
― “눈 감고 있어도 붕어 같아.”
두 눈이 번쩍 떠진다. 붕어라니. 눈곱이고 뭐고 내 기억력도 3초라고 말하는 것만 같은 농락에 주된 원인인 지훈의 입술을 엄지와 검지로 납작하게 눌렀다.
― “이제 너도 붕어야.”
― “(그럴 리가) 웅.”
― “근데 예쁜 붕어야.”
― “(또 시작이네) 웅.”
밑도 끝도 없는 화해를 마친 후 지훈의 품속으로 깊이 들어간다. 맨살에 닿는 야살스러운 촉감에 눈을 감고 얼굴을 비볐다. 그러자 내 어깻죽지를 타고 이불 속으로 들어간 그의 손이 엉덩이를 바싹 끌어당겼다. 전날 밤에는 곰국 대신 그에게 눈이 맞아 내가 먼저 덮쳤는데, 이렇듯 다음날 거대한 후사를 준비도 없이 된통 당하게 될 줄이야.
빈틈없이 붙은 몸과 꼴깍 넘어가는 침 소리. 일부러 내 허벅지 사이에 다리를 넣어 움직이는 묘한 자극에 전율이 돌았다. 다급하게 품을 밀어내지만 팔목을 휙 잡아채 다시금 안기게 만드는 집착까지.
눈을 감은 채 입술을 깨물었다. 끝내 더운 숨이 터져 나왔다. 참을 수 없는 자극에 본능적으로 허리를 움직인다. 그를 향해 턱을 들고서 내쉬는 안달 난 숨소리. 나 하고 싶어. 딱 미쳐버릴 것만 같은 얼굴.
그의 말캉한 혀가 입술 사이를 헤집는다. 이불 속으로 가슴을 지분거리며 손끝으로 정점을 스쳤다. 튕기듯 내 몸이 들뜨는 순간, 그가 내 팔목을 쥐고 위로 올라왔다.
밤낮 가리지 않고 시도 때도 없이 하는 것이 신혼이라지만 지훈의 체력은 상당했다. 요새 권순영과 헬스장을 다닌다더니 둘이서 체력전이라도 하는 건지 지훈의 지구력과 근력은 나날이 높아졌다. 어제처럼 내 컨디션이 좋아서 먼저 덤비는 날도 있지만 결국 아래에 눕혀지는 것 또한 나다.
조만간 반드시 안대를 사야겠다. 아침에 눈 뜨기 전에 씌워서 엎은 다음에 어? 막 묶, 어?
― “그런 눈빛 어디서 배웠어.”
내 딴엔 힘이 풀렸는데 상대방에겐 유혹의 징조다. 단박에 제 위로 끌어 앉히더니 내 골반과 등허리를 농염하게 쓸어내렸다. 한 손으로 그의 뒷머리를 움켜쥐고 목을 끌어안자 새빨간 신음이 흘러나온다. 하얀 침실. 실크 커텐. 그 사이로 희미하게 보이는 젖은 목덜미. 저항하지도 못한 채 옅게 흔들리는 머리카락. 나도 모르게 벌어진 입술과 혀는 말랑한 지훈의 입안으로 빨려 들어간다. 스팟을 빠르게 쳐올리며 정점에 다다르는 순간, 눈앞이 까마득하게 아득해진다.
힘없이 축 처진 나를 안고서 침대에 누운 그는 그때부터 뽀- 타임을 적극적으로 이용한다. 이마와 코, 뺨과 입술에 적극적인 흔적을 남기며 팔베개를 해주다가, 그렇게 시간이 지나고 나면 따뜻한 욕조에 십여 분 동안 몸을 담근 후 (이유는 모르겠지만 지훈은 이 타이밍을 ‘수분 보충의 시간’이라고 부른다) 커다란 수건으로 내 몸을 돌돌 말아 어깨에 메고 다시 침대로 돌아온다. 쌀 포대도 아닌데 번쩍번쩍 잘도 들었다.
― “근데 나도 공주님 안기 이런 거 좋아해 지훈아.”
― “뭘 안아?”
― “공주님 안기.”
― “공주가 어딨어.”
― “욕조에 담겨서 영원히 못 나온 적 있어?”
― “아, 여기 있다.”
― “그렇지?”
― “이야, 세상 참 좋아졌다. 요즘은 인형도 말을 하는구나.”
― “말투가 먹이는 것 같은데?”
― “우리 ‘공주’님 수분 보충할 시간인데 내가 이러고 있으면 안 되지.”
샤워 후 마실 것을 찾는 습관을 알고 있는 그가 주방과 침실을 바삐 오가며 가져온 것은 따뜻한 차와 미지근한 물이었다. ‘공주’가 어떤 걸 좋아할지 몰라 둘 다 준비해 봤단다. 평소처럼 내 허리와 종아리를 마사지하던 그가 두 눈을 질끈 감으며 어깨를 들썩였다. ‘공주’처럼 새끼손가락만 들고 차를 마시는 나를 보며 어지간히 정신을 못 차리는 이웃 나라 왕자님이었다.
― “왜? 나란 공주가 하찮아?”
― “너무 귀해. 소중해.”
― “이제 쌀 포대처럼 들지 않을 거지?”
― “너 하는 거 봐서.”
‘공주님 안기’는 저 멀리 떠나 버렸나 보다. 내 옆에 비스듬히 누워 허리를 포옥- 껴안고 배 위에 얼굴을 맞댄 걸 보면. 잠이 오는지 그의 눈꺼풀이 무겁다. 하지만 뜻대로 잠을 재울 순 없어.
― “어제 좋았어?”
― “뭐가 좋아.”
― “내가 밤에 해준 거.”
― “응.”
― “대답이 영 아니네. 내가 영상을 더 많이 볼게.”
― “……뭘 본다고?”
구체적인 품번을 읊는 내 입술을 막는 다급한 손바닥. 이게 큰일 날 소리 하네. 그런 거 안 봐도 돼. 넌 안 봐도 잘하…… 야, 노트북 어딨어. 비밀번호 ‘rnldyaakffkddlwlgns’ 를 뚫고 탐색창에 .avi 라든가 .mov 를 검색하며 하얗게 질린 얼굴을 보라. 요즘은 스트리밍으로 봐서 흔적이 안 남더라. 남자보다 빠삭한 정보에 지훈은 당황한 기색이 역력하다. 시무룩한 눈코입은 깨물어주고 싶어.
― “아니 여보야-.”
둘이 있을 때만 여보야- 하고 내 품에 얼굴을 부비며 말끝을 늘이는 신혼 6개월 차 이지훈 씨. 결혼 이후 새롭게 생긴 특기는 바로 이런 거다.
― “난 네 자체가 좋은 거야. 계속 얘기하잖아.”
― “훈, 애교 작전이야?”
― “이제 그런 거 안 봐도 돼.”
― “간접 경험으로 실력을 쌓아야 하지 않을까?”
― “아니…… 난 좋으면 확실히 좋다고 하잖아. 어제 좋았다고. 이제 그만 봐.”
― “뭐가 좋았어?”
― “다 좋았다니까.”
― “구체적으로.”
― “그러니까 어제 다…….”
― “내 펠라가 어디가 그렇게 좋았어?”
― “……제발.”
얼굴만 새빨개져서 머리를 콩콩 박는다. 애초에 동영상은 보지도 않았지만 남편 놀리는 맛은 이만한 것이 없다. 결혼 생활에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는 성생활에 누가 적극적이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따위의 근엄한 표정으로 어떻게, 어디가 구체적으로 좋았는지 집요하게 캐묻자, 오히려 ‘여보야, 진심으로 그러지 말자’로 끊임없이 회유하며 ‘뽀-’ 만 해줘도 대한민국이 손안에 있는 것 같다고 말하는 새신랑 이지훈 씨.
무심하고 쿨한 것 같다가도 내 앞에서 당황하면 미친 듯이 귀여워져 버리는 속성은 아무래도 고양이 과인가? 자꾸만 품으로 파고드는 건 정말 부끄러워 어쩌지 못하겠다는 정확한 증거가 아니겠는가. 그럼 어쩔 수 없지. 내가 밤마다 스스로 실력을 키워 볼게. 한발 물러나는 척 매일 밤을 고대하는 아내에게 남편은 고개만 슬쩍 끄덕인다.
너는 진짜 사람 들었다 놨다 선수야. 심장 뛰는 것 봐. 너 때문에 튀어나올라 그래. 자신의 수명이 나로 하여금 어떻게 줄어들 수 있는지 구구절절 읊던 그가 때맞춰 울리는 알람을 순식간에 끄고는 이불 속으로 들어가 버린다. 덩달아 갇힌 내가 물었다.
― “훈, 지금 몇 시지?”
― “열한 시.”
― “점심 샌드위치? 아니면 밥?”
― “밥.”
― “다 되면 부른다?”
― “응.”
― “두 번은 없어.”
― “으응.”
개켜둔 옷을 입고 주방으로 나갔다. 어제 해둔 국과 반찬을 꺼내고 밥만 간단히 지은 후 서둘러 그를 불렀다. 빨리 일어나라는 내 외침에 여전히 침대 붙박이처럼 누워 있을 지훈은 아마 이렇게 대답하겠지.
― “……응, 일어났어. 앉아 있어 지금.”
뻥도 이런 개뻥이 없다. 침실에 들어가 잠에 취한 그를 어망에 잡은 물고기처럼 당겼다. 으어- 하면서 딸려오는 꾸요운 물꼬기. 잠이 많은 건 어릴 때부터 그랬으니 이젠 익숙하다. 그래도 우리 오늘 할 일이 있잖아?
― “갑자기 한복을 왜 입어. 뭐 어디 또 시집 가?”
― “한복 입고 경복궁 가면 입장료 무료래.”
― “그냥 돈을 내.”
― “훈.”
― “내 이름인데 왜 이렇게 무섭냐.”
― “너 그렇게 안 봤는데 자산을 얼레벌레 쓰는 타입이었어? 난 이제 누굴 믿고 살아가야 하지?”
― “정부도 정당하고 합당한 소비를 바랄 거야.”
― “한 번만 입자, 응? 죽기 전에 꼭 하고 싶은 유일한 내 소원이라고 저번에 말했을걸?”
― “잉어빵 다섯 개 한 번에 먹기가 유일한 버킷리스트라고 했잖아. 또 속았네. 난 맨날 속아. 나야말로 누굴 믿고 살아가야 하는 거지?”
― “지훈아.”
― “아니.”
― “남편.”
― “꼭 뭐만 하고 싶으면 훈, 남편이래.”
― “무의미한 결혼 생활은 삶의 활력소가 될 수 없고 유기체에 대한 실례라고 생각해. 이로 인해 매해 중력이 약해진다는 소식 못 들었어?”
― “멘탈은 또 어디 갔어.”
― “난 뭐든지 같이 하려고 결혼했단 말이야. 내가 그렇게 싫어?”
― “……이건 진짜 사기 결혼이야.”
― “그거 말고. 짚신 모자는 오늘 안 써도 되거든?”
― “밀짚모자.”
― “바지 입었어? 응, 그거. 아이, 예쁘다.”
안우재를 나서는 지훈의 벤츠에 노오란 잎이 떨어진다. 새신랑 새신부처럼 귀엽고 앙증맞은 한복을 입고 떠나는 가을 나들이라니.
― “오늘은 가을 미세 먼지가 콧구멍에 가득 껴도 좋을 것 같아.”
― “가득 끼면 병원 가서 세척 받아야 돼.”
― “훈, 저 귀여운 비둘기 좀 봐.”
― “어제 네 차에 볼일 보고 간 애랑 비슷하다.”
― “우리 가서 솜사탕 먹을까?”
― “배추 도사 무 도사 수염 같고 좋겠다.”
― “널 배추 도사 무 도사 키링으로 만들기 전에 저 파란 하늘을 봐봐.”
― “예쁘다. 꼭 너 같아.”
자신의 달달한 볼때기와 어울리는 분홍 한복을 입은 지훈은 경복궁 문 앞에서 한참을 망설였다. 뒷짐을 지고 주변을 살피는 눈짓은 누가 봐도 벚나무 이 대감댁 외아들인데 뭐가 그리 부끄러운지 귓바퀴가 눈에 띄게 붉었다.
지훈아, 지나가는 사람들 우리랑 똑같아. 다들 한복 입었잖아. 우린 원 오브 댐이야. 저들 중 한 명이라구. 괜찮아. 힘을 내. 벚나무 이 대감댁 외아들 화이팅!
(특수 상황에 실성 중.gif)
― “미칠 것 같아.”
― “왜? 너무 좋아?”
― “예?”
― “네?”
― “방금 잘못 들었는지 모르겠는데 제가 지금 좋아하고 있다고요?”
― “경복궁이 원래 네가 태어난 집 같으세요. 되게 잘 어울리는데 왜 그러세요?”
― “하늘이시여.”
― “무교잖아요?”
― “이제 어디로 가면 되죠?”
― “이 아름다운 여인네의 뒤를 밟으시옵소서.”
사뿐히 걸어가는 내 뒤를 따라올 줄 알았더니 보란 듯이 다른 여자의 뒤를 쫓아가는 망할 벚나무 대감댁 이 도령을 봐라. 날 쫓아오라니까? 여기서 영영 헤어질래? 경복궁 입장부터 쉽지 않아 보이던 이 도령은 마음을 굳게 먹은 듯 내 앞을 과감히 스쳐 지나갔다. 뒷짐 진 손을 까딱거리며 어여 오라는 신호를 보내기에 어쩔 수 없이 살포시 상의 끄트머리를 잡았다. 바람결을 따라 뒤를 도는 대감댁 자제에 자체 슬로우 모션이 걸린다. 고백하지 않을 수 없는 훤칠한 용모다.
― “어여쁜 그림자가 절 부르는 것만 같아 이리 염치없게도 잡게 되었습니다.”
― “어디서 본 듯한 얼굴입니다.”
― “혹 영민한 자제들만 깨우칠 수 있다는 윤정한 도령의 ‘웰컴투 한약재 클래스’에서 절 보셨던 건 아니신지요. 매월 닷새에 열리는 특별한 행사로 학교/직장 조퇴를 위해 올가닉 오가피나무로 열을 올리는 방법을…….”
― “약주를 열 번 원샷하면 한 잔을 무료로 준다는 부 서방네 ‘카스테라 주점’은 아닙니까.”
― “평소에도 어긋난 시선으로 오해하기를 즐기시는 편이신지요?”
― “언제나 옳은 시선으로 최대한의 이해를 주로 하는 편입니다.”
― “우리에게 과연 어떤 미래가 올바른 건지 관심 있어 보이시는 관상이기도 합니다만.”
― “그건 하늘이 답을 주지 않아서, 혹은 제가 멍청해서 알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 “어디에서 많이 들어본 지문 같군요.”
― “어떤 미래에 갔다 오셨나 봅니다.”
― “혹 당신의 미래에 제가 있을 것 같나요?”
― “곤란한 질문은 사양하겠습니다.”
― “뭐가 곤란하시죠?”
― “백주 벌건 대낮에 미혼인 저와 이리 서 계실 겁니까?”
― “누가 미혼입니까?”
― “저요.”
― “미치셨습니까 휴먼?”
― “시간과 눈빛을 보건대 당신의 당이 상당히 떨어졌을 걸로 보입니다. 잠시만 기다려주시길.”
― “어디 가세요? 저기요? 이지훈? 남편? 야!”
자칭 미혼 이 도령의 자취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치맛자락을 잡고 궁궐 사이를 훔쳐봐도 분홍색 옷감 하나 보이지 않는다. 가체에 쓴 너울 모자와 색색의 한복을 입은 단체 손님 때문에 시야가 더욱더 좁아지기 시작했을 때, 멀리서 초등학생 애들 두 명이 내게 달려왔다. 조그만 나무 상자에서 초콜릿 봉지를 꺼내는데, 그 둘의 대화는 대충 이러했다.
― “누나 먹으래요.”
― “누나 아니라 이모 아니야?”
― “근데 예쁜데?”
― “예쁜 이모도 있을걸?”
― “아까 그 형은 엄청 젊었고, 이 누나 가리키면서 부인이라고 했으니까 이 누나도 엄청 젊은 누나 아니야?”
― “그런가?”
― “누나 몇 살이에요?”
애들과 마찬가지로 초콜릿 한 뭉텅이를 가지고 돌아온 그가 심각하게 나이를 묻는 아이들을 향해 말한다.
― “누나는 스무 살.”
― “와, 어쩐지. 거 봐, 누나 맞잖아. 형은요?”
― “나도 스무 살.”
― “우리 삼촌보다 스무 살이나 젊네요?”
― “그분도 마음만은 스무 살일 거야.”
― “엄마다! 안녕히 계세요!”
태연하게 스무 살 타령을 하고 난 지훈의 표정이 밝다. 앞으로 십 년은 더 우리끼리 스무 살로 살자. 조금은 녹아버린 공룡알 초콜릿을 하나씩 내 입안으로 넣어주며 웃음을 떼어내지 못하는 동안의 소유자. 그런데 내가 먹을 양 치고는 초콜릿이 너무 많은데?
― “얼마를 쓴 거야?”
― “날이 어우, 화창하네.”
― “관광지는 두 배야.”
― “여긴 솜사탕이 없더라.”
나보다 앞서 걸으며 이러콩 저러콩 궁궐을 탐색하던 그가 추궁 끝에 검지와 중지를 펼쳤다. 두 장. 두 장 썼어.
― “앞에서 애들 뽑기하고 있길래 좀 주고 나도 좀 사고.”
― “도박을 하고 오셨다는 말씀이세요?”
― “딱 이만 원 투자했어.”
― “너 그런 게 비트코인보다 더 무서운 거 알아 몰라?”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는 이 도령이 아- 하고 입을 벌린다. 똑같이 입을 벌리자 입안으로 공룡알이 쏟아졌다.
다 먹을 때까지 조용히 걷자. 하늘도 푸르고 전경도 트이고 얼마나 좋아. 이 대문은 진짜 전통식이다.
잔소리를 초콜릿으로 막은 그가 내 손을 잡고 궁을 거닐었다. 초콜릿이니까 어쩔 수 없이 봐준 거야. 사탕이었으면 가차 없었어. 진짜야. 그가 오물거리며 눈으로 말하는 나를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다.
누가 뭐라고 해도 내 앞에 있는 이지훈이 너무 좋다고? 그것참 큰일이다. 중증이야.
예, 전혀 이해하지 못한 게 확실합니다.
― “타 봐. 사진 찍어줄게.”
경복궁 한 바퀴를 돌고 나자 지훈은 사람이 몰려있는 곳을 가리켰다. 높이가 상당한 그네였는데 흡사 춘향전에 나오는 고전식 놀이었다.
차례가 되어 지훈의 도움을 받고 그네에 올랐다. 양 밧줄을 잡고 먼 산을 바라보며 여러 포즈를 취했다. 고개 조금만. 아니 조금만. 시선은 아래로. 아니 여기서 치마는 왜 올려? 여러 각도로 사진을 찍다가 갑자기 빡친 지훈은 일 자로 서서 옐로카드를 주듯 경고 제스쳐를 취했다.
― “발을 약간 재치 있게 굴러 봐.”
― “이렇게?”
― “좀 더 해도 될 것 같은데.”
― “이거 너무 흥분 돼.”
그때부터였을까요? 문득 먼 옛날 춘향이의 향기에 취해 점점 풀스윙으로 그네를 움직였던 게.
― “악!”
중력에 이기지 못해 떨어지는 한 마리의 유기체. 그 순간 휴대폰을 집어 던지고 달려온 지훈은 흙먼지 두른 내 머리부터 차분히 확인했다. 주변으로 모여든 사람들의 눈동자가 커진다. 막 태어난 아이들이 보는 어른들의 모습이 이랬을까. 너무 무서운데. 그나저나 눈앞이 계속 핑핑 돌고 있어. 내가 꼭 핑핑이가 된 것 같단 말이야.
응? 지훈아 뭐라구? 내가 뭐?
― “……야이 씨, 너 머리에서 피 나.”
동거와 결혼의 차이점은 딱 하나다.
― “보호자 되세요?”
이지훈 / 사고뭉치 와이프 때문에 눈물이 앞을 가리지만 필요한 말은 꼭 해야 하는 타입
― “예, 남편이요.”
머리에서 피가 좀 나면 뭐 어때.
나 이 결혼 무진장 잘한 것 같아.
이지훈 / 머리에 붕대 감고 돌아온 와이프를 걱정하면서도 파인애플 머리 때문에 귀여워 미치는 타입
― “괜찮아?”
……집에서도 이런 머리를 해볼까.
2장. 이지훈과 김여주의 혼인에 대해서
대한민국 혼인 신고서에는 증인이 필요하다. 반년 전 해당 구청에 어렵게 모신 증인 두 명은 길고 긴 타협 끝에 각자의 이름을 적었다. 이로써 이지훈과 김여주의 공식적인 혼인 절차가 마무리된 듯했으나 지금까지도 걸핏하면 자신들이 없었다면 서류조차 내지 못했을 거라고 모임만 갖게 되면 갈비나 횟값을 뜯어갔다. 김여주 측 부승관과 이지훈 측 윤정한은 현대판 로켓단이었다.
― “이 세계의 평화를 지키기 위해!”
― “우리가 왔지!”
― “아니죠 형. 사랑과 진실 어둠을 뿌리고 다니는 어쩌고 해야죠.”
― “알겠어. 다시.”
― “이 세계의 평화를 지키기 위해!”
― “정한이다!”
― “형.”
― “알았어. 이번엔 진짜로.”
― “이 세계의 평화를 지키기 위해!”
― “살치살이다! 이거 살치살이지?”
― “됐어. 안 해. 잡지 마. 다 필요 없어.”
……좀 많이 망가진 로켓단이다.
― “누누이 말하지만 인생은 혼자여. 혼자 왔다 혼자 가는 인생에 누굴 옆에 둘 필요가 없다니까? 지훈 씨, 그런 의미에서 결혼은 왜 하셨죠?”
승과니 지훈에게 달라붙는다. 그렇다고 그가 온전히 받아줄 성미는 아니었다.
― “집게 날리기 전에 떨어져.”
― “김여주랑 결혼하니까 마음이 어떠냐? 답답하고 깝깝하지 않냐?”
― “널 보니까 그런 마음이 든다 갑자기.”
― “쟤 보기보다 분리수거도 안 하고 음식도 골라 먹는다?”
― “알고 있어.”
― “헤엑, 알고 있어? 알고 있으면서 일생일대 돌이킬 수 없는 혼인을 했다고? 정한이 형, 깔끔 천재 귀염 뽀짝 이지훈이 김여주의 크나큰 하자를 묻어두고 결혼을 했다는데요?”
― “당연히 깔끔 천재 귀염 뽀작 지훈이니까. 의외로 분리수거도 좋아하고 가리는 음식도 없어서 깔끔 천재 귀염 뽀짝 우룰룰루 지훈이한테는 여주가 딱이야. 괜히 새삼스럽게 물어보지 말고 우리 승관이는 앞치마부터 매자.”
정한의 손길에도 승관의 고장 난 덤프트럭은 멈출 수가 없었다. 흡사 친누나와 결혼한 매형의 ‘자라나라 콩깍지 렌즈’를 벗기고 싶은 친동생의 애처로운 몸부림이랄까.
― “이제 와서 하는 말이지만 김여주 쟤는 생각보다 돈을 흥청망청 쓰는 타입이여. 내 경험상 잔고를 불려서 한 달 이상 흐뭇하게 바라본 적이 없거든? 이지훈 너 돈 많이 벌어야 돼 인마.”
― “저번에 월급 저축해서 4인 가족 식사권, 스파, 호텔까지 다 쟤가 냈어.”
― “4인 가족 식사? 이쥰 너희 부모님이랑 같이 갔냐?”
― “아버지 생신 맞물려서 같이.”
― “저 낯 가림쟁이가 심지어 시부모님이랑 같이 밥도 먹고 스파도 하고 다음 날 탱탱 부은 눈으로 조식도 둘러 먹었다고? 아니 월급을 백화점이 아니라 저축 통장에 넣었다고?”
결혼하면 성향이 바뀌나? 승관의 눈이 커다래진다. 어릴 적 제주도 부모님 귤 농사 손을 도우러 갔을 때도 내가 온종일 말없이 귤만 대차게 따다 팔 연골이 나간 사건을 잊을 수가 없는 소꿉친구에게는 당최 믿을 수가 없는 얘기였다. 녀석에게 언제적 얘기냐며 눈을 부라리는데, 각각 얼굴을 맞대고 앉은 지훈과 정한이 고기를 나눠 먹으며 한 차례씩 거들었다.
― “원래 인사성 밝고 경제 관념도 있는 애야.”
― “여주가 착하고 예의 바르고 또 성실해. 세 가지를 동시에 하기 쉽지 않은데 정말 대단하지?”
― “딱 봐도 모자람이 없잖아. 쟨 어렸을 때부터 그랬어.”
― “나한테 지훈이만 한 아들이 있었으면 여주 우리 집으로 바로 데려왔을 텐데.”
― “그럴 일은 다음 생에도 없을 테니까 아쉬워하진 마.”
― “뭐야아? 다음 생에도 둘이 만날 거라는 세계 명작 동화 같은 이야기를 하는 거야? 우리 동생 너무 낭만적인걸? 낭만 뽀이야?”
― “형은 고기를 구웠으면 옆으로 좀 옮겨 놓든가. 다 타잖아.”
지훈은 듣지 못한 척 집게로 불판을 긁었다. 윤이형제의 김여주 칭찬 타임을 가자미 눈으로 듣고 있던 승관이 쯧쯧 혀를 차며 내게 말했다.
― “남편도 시아주버님도 콩깍지에 제대로 먹혔구만.”
― “승관아, 이게 현실이야. 현실을 받아들여.”
― “와, 승리자의 얼굴인가? 너무 싫은뎁쇼?”
― “보듬어 줄게, 이리와 동생.”
― “으악! 마귀야 물럿거라!”
이지훈과 김여주의 혼인에 대해서 반발심을 품은 것처럼 보이는 녀석이지만, 실은 혼인 신고서 증인을 설 때 눈물의 사인을 퍼붓던 내 가족이었다.
― 억울한 일 생기면 꼭 나한테 와라, 어? 현관문 붙잡고 울지 말고 우리 집으로 와. 180716 비밀번호. 네 떡볶이 몰래 처먹었다고 내 뒤통수 때린 날. 양심이 있으면 기억하지?
눈물과 콧물을 훌쩍거리면서 든든함을 주는 건지 미친놈이란 확신을 주는 건지 의구심이 들 때, 정한의 사인까지 들어간 혼인 신고서를 냅다 위로 올리며 녀석은 구청을 빙글빙글 돌았다.
― 야, 됐다. 드디어 이놈들이 혼인을 했어. 세상 사람들 만만세다. 어유 내가 진짜 이 꼴을 보려고 몇 년을 쌩고생을 했는지. 왜 자꾸 눈물이 코로 나오냐. 비염인가 어후.
아무튼 구청 직원들 앞에서 눈물을 쏟으며 당사자 대신 신고서를 제출한 기가 막힌 녀석이었다. 정한은 그때를 회상하며 질린 얼굴을 하고서 내 손길을 강력히 거부하는 승관을 향해 장난스레 말했다.
― “지훈이, 여주 아이 생기면 승관이가 업어 키울 거라고 했던 약속 나 아직도 기억한다?”
― “제가요? 그때 제가 술을 처먹진 않았습니까?”
― “맨정신이었는데?”
― “가끔 맨정신에 기절해서 말을 할 때도 있거든요?”
― “자주 그래서 신빙성이 있긴 하다.”
― “그렇다니까요? ……이지훈 네가 날 갈구냐?”
― “없는 말 지어낸 건 아니잖아.”
― “그러냐? 그럼 나도 김여주 없을 때 네가 태어나지도 않은 애 이름 지어본 거 얘기해도 되냐?”
― “미친놈인가.”
― “왜? 없는 말 지어낸 것도 아닌데?”
― “누가 널 노리고 있다는 생각은 안 해?”
― “감히 누가 나를…… 아악! 야! 이거 폭력이여!”
― “조용히 고기 먹을래, 내가 싸준 마늘 쌈만 먹을래.”
― “이쥰, 너 이런 식으로 잡혀 사냐?”
― “너처럼 맞을 짓은 안 해.”
― “정한이 형, 나 너무 억울해.”
― “억울하면 쏴야지. 오늘은 승관이가 쏜대.”
― “아, 그래?”
― “또 이렇게 나만 갈군다고?”
― “너 저번에 뭐 먹고 싶다고 그랬지?”
지훈이 메뉴판을 내게 밀었다. 뭐 먹고 싶긴? 당연히 제일 비싼 거! 불판 갈고 살치살 많이. 투쁠 한우로 다 주세요. 돈 많이 버는 내 친구 승관이 다 벗겨 먹게. 자포자기 승관은 테이블에 지갑을 툭 올려놓더니 소주를 깠다. 그래. 먹어라. 다 먹고 옘뱅할 천국에서 보자. 말은 그렇게 해도 계산서에 시원하게 사인할 녀석이다.
― “오야, 서쿠 왔냐?”
― “언제 시작했어? 끝났어?”
― “우리도 이제 시작이지. 스케줄은 잘 끝냈고?”
일본 팬 미팅을 마치고 돌아온 석민은 피곤한 눈가를 비비면서도 잔을 들었다. 석민을 위해 특별히 별실로 장소를 잡은 승관은 석민의 후드 모자를 벗기며 안심하라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 “우리의 오손도손 미래를 위하여!”
― “우리의 올망졸망한 현재를 위하여!”
― “우리의…… 아니 뭐라고 해야 돼.”
― “지훈이와 여주의 아기자기 오롤롤로 결혼 생활을 위하여!”
정한의 마무리에 네 사람의 웃음이 터진다. 이후로 고기를 알차게 굽는 승관과 쌈을 싸서 녀석에게 먹여주는 정한, 된장찌개에 밥을 뜨면서도 팬 미팅 후기를 조잘거리는 석민과 두 팔을 뒤로 비스듬히 뻗어 내가 기대는 걸 편하게 만들어주는 지훈까지. 정한의 두 번째 신혼 생활 이야기를 귀담아듣던 석민의 초롱초롱한 눈이 지훈과 내게로 향했다.
― “너희도 결혼해서 달라진 점이 있을까?”
― “같이 재산세 내는 것 빼고는 딱히 없는데.”
― “하긴, 결혼 전에도 같이 살았으니까 비슷하긴 하겠다.”
― “굳이 말하자면 법적 보호자 정도?”
― “뭐야. 설레.”
― “네가 왜 설레.”
― “나를 지켜주는 사람이 이지훈이라니.”
― “널 왜 지켜 내가.”
― “지훈, 무시해도 돼. 어제 승관 소개팅에서 또 차였대.”
― “차인 게 아니라 내가 찬 거라고 몇 번을 말하간?”
― “지훈, 결혼해서 좋은 점은 뭐야?”
― “결혼의 장점을 묻는 거야 아니면 ‘여주’와 결혼한 장점에 대해서 묻는 거야.”
― “아무래도 눈치가 있다면 후자가 좋을 것 같어.”
― “으음.”
― “왜 내 말은 아무도 신경을 안 쓰냐? 투명 인간이냐? 정한이 형, 저 보여요? 보입니까?”
― “아주 잘 보여. 앞치마에 쌈장 묻은 것도 다 보이니까 지훈이 말 좀 하게 조용히.”
일순간 정적이 찾아온다. 과도한 관심은 지훈의 볼을 발갛게 물들인다. 고개를 틀어 그를 바라보자 반대편으로 슬쩍 눈을 돌렸다. ‘나’와 결혼한 장점이 없는 거니? 그런 거야? 혼인 신고서 잉크도 안 말랐는데 영원히 끝나지 않는 싸움을 해볼래? 지훈의 종아리를 꾹 누르자 귀까지 빨개진 그가 마지못해 입을 뗀다. 대답이 길어질수록 모두의 입이 떡 벌어졌다.
― “솔직히 장점은 끝도 없지. 그래도 기본적으로 ‘김여주’ 자체가 장점이잖아. 정한 형 말대로 착하고 예의 바르고 성실하기까지 한 사람을 요즘 시대에 어디서 찾겠어. 나한테는 행운이지. 계속 보다 보면 또…… 되게 귀여워. 같이 있으면 삐지는 구간이 있는데 그게 막 기분 나쁘게 티 내는 것도 아니고 은근 귀엽게 구니까 계속 져주게 되더라고. 아니 내가 막 성격이 유순한 건 아니잖아. 근데 얘 앞에서만 그렇게 돼. 사람을 좀 동그랗게 만드는 재주가 있어. 훈, 이러고 부르면 마음이 좀 되게 여려지고 다 해주고 싶고…… 다들 표정 왜 그러는데.”
한 마리의 실험체를 놓고 연구 중인 첩첩산중 박사 승관, 석민, 정한의 당황한 눈빛이 흐른다. 잠시 후 실험체 훈팡이를 향해 저마다 한마디씩 내놓기 시작하는데.
― “결혼이라는 극심한 스트레스로 다중인격이 발현된 건 아닐까요 윤박사님?”
― “그러기엔 저 눈빛은 십 년 동안 내가 봤던 것과 정확히 일치하네만.”
― “연애 중에는 숨기고 있다가 ‘법적으로 내사람’ 땅땅 받은 이후로 오히려 적극적으로 마음을 표현하는 리버스 현상 같은데요?”
― “국내에서는 이러한 불치병을 무엇이라 말하는가?”
― “팔불출입니다.”
― “그렇구만.”
― “훈팡이는 아주 입체적인 인물이라 세부 연구가 필요할 듯합니다. 국토대장정을 잇는 훈팡이 파헤치기 대장정은 어떠실까요?”
― “연구 주제는?”
― “훈팡이의 사랑의 유효기간은 어디까지인가?”
― “우리 세대에선 연구가 끝나지 않을 수도 있겠군요.”
― “힘 닿는 데까지 밀착 연구를 해봅시다. 다들 건강하시자구요.”
부석한의 손이 하나로 모인다. 아자아자 화이팅! 탈탈 손을 털고 사이좋게 나눠 먹는 첩첩산중 박사들. 반대편에 남은 지훈과 나는 역시 이 중에 정상은 제 역할을 해내고 있는 불판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 “윤 쌤이 저럴 줄은 몰랐어.”
― “원래 저래. 같이 살면 골 아픈 스타일이야.”
― “같이 사는 언니는 적응이 됐을까?”
― “성격은 정반대인데 둘이 똑같아.”
― “집들이는 가지 않는 게 좋겠지?”
― “이미 늦었어. 누나가 너 오래.”
― “지훈아.”
― “한국을 떠날까.”
진지한 지훈과 이마를 부여잡고 끅끅대는 나. 어디로 튈지 모르는 훈팡이를 위해 전자 여권은 늘 소지하고 다닌다는 세 박사들. 개중에는 지훈의 손등을 덮고 인자하게 말하는 이 박사가 있었다.
― “다음 세대가 연구하러 올 때까지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어. 나는 그거면 돼, 지훈.”
― “뭐여, 이석민 왜 갑자기 분위기 잡냐?”
― “장난친 만큼 덕담도 해줘야지. 삼색연분이 되었으니 백년해로하며 살아가길 바라는 내 마음이 전해졌으면 좋겠어.”
― “그렇다고 너무 똑똑해지진 마라.”
― “나 요즘 글공부하거든.”
― “글공…… 야이 미친놈아, 음악 하다 미쳐서 사이비로 전향했냐?”
― “베스트 셀러를 많이 읽는다는 뜻이야.”
― “아하, 난 또 뭐라고. 쏴리.”
― “얘들아, 미안한데 아까부터 내가 뒤에 걸린 앞치마 좀 달라고 했잖아?”
― “울 김여주는 앞치마도 알뜰하게 챙기세요.”
승관은 옷걸이에 걸린 앞치마를 테이블 아래로 보냈다. 백년가약 어쩌고 즙을 짜내던 석민이 ‘알뜰’에 반응하며 굽은 허리를 쭉 펴고 말했다.
― “승관, 요새 라디오 알뜰살뜰 주방 경품 코너는 잘 돼? 주부님들께 인기몰이 하고 있잖어. 정한 형도 들어보신 적 있죠?”
― “내 동생 라디오는 꼬박꼬박 챙겨 듣지.”
― “진심 나는 형밖에 없다.”
― “그럼. 모닝콜 대신 들을 때 너무 좋던데?”
― “……형, 제 라디오가 몇 시죠?”
― “내 마음에 불을 지피는 욕망의 시?”
― “윤정한, 피해.”
― “진짜 나 잡지 마.”
일 분 이상 식사에 집중 못 하는 것도 참 능력인데.
간식처럼 찾아오는 오후 10시! 부승관의 카스테라! 라디오만 햇수로 6주년이 넘었는데 왜 아직도 기억을 못 하니! 설렁탕을 사 왔는데 왜 먹지를 못하니!
승관의 표호를 목격한 직원이 문을 열다 순식간에 뒤로 물러났다. 괜찮아요. 사람은 안 물어요. 지훈은 문밖에 서 있는 직원에게 나긋하게 말했다. 삼천포 구렁텅이를 먼저 빠져나온 것도 지훈이었다.
― “형은 누나랑 잘 돼?”
― “으응, 밀당에서 계속 밀리는 중이야.”
― “잘 지내네.”
― “여기 아포.”
그제 밤 생일 이벤트로 용 탈을 쓰고 집으로 들어간 정한은 어떤 사이코가 감히 도적 떼 질을 하러 왔냐며 자신의 아내에게 공격을 당했다. 자신의 남편이라 생각조차 하지 못한 그녀는 합기도 4단의 정신으로 용 대가리를 발아래에 두고 불법 주거 침입죄의 법전 요약을 읊었단다.
― “누나도 한 성깔 한다.”
― “가만 보면 여주랑 닮았어.”
― “전혀 안 닮았어. 얜 착해.”
― “우리 공주도 착해.”
― “단어 선택 무슨 일이세요.”
― “승관, 우리 갈까?”
부석은 고민에 시달렸다. 그럼에도 윤이형제의 난은 끊이지 않았다.
― “닮은 데가 없는데 뭘 닮았대.”
― “우리 공주도 방송국 기자고 여주도 잡지사에서 기자 하잖아.”
― “우연히 겹친 것뿐이야.”
― “술도 잘 마시고, 요리는 조금 못하지만 배달 전화 주문은 수줍어하지 않고, 겨울에 아이스크림 한 통씩 먹고.”
― “얜 양을 조절해서 반 통만 먹어. 누난 배 아파도 눈치 없이 다 먹잖아.”
― “우리 공주 멍청하다고 돌려 까는 거야?”
― “대놓고 까는 데도 이해를 못 하네.”
― “아무튼 집들이 꼭 와.”
― “못 줘.”
― “동생아, 여주를 달라는 게 아니라 같이 밥 먹으러 오라는 말이야.”
―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까진 절대 안 돼.”
승관과 석민이 바로 모래 던지는 시늉을 한다. 지훈은 두 눈을 찡그리며 장난을 받아줬다.
― “승관이 석민이도 같이 와.”
― “진짜요?”
― “같이 송편 빚자.”
― “추석도 지났는데 웬 송편을 빚어요?”
― “원래 전통 음식은 먹고 싶을 때 먹어야 일이 더 잘 풀린대.”
― “구라의 냄새가 솔솔 나죠?”
― “진짜로.”
― “저 눈을 봐. 난 알면서도 속을 뻔했어.”
― “……거짓말이야?”
가운데에 낀 석민이 눈을 굴린다. 먹잇감을 얻은 정한이 석민의 어깨를 둘렀다. 정한은 무적의 ‘원래’라는 단어를 이용했다.
원래 송편을 월화수목금토일 일반식처럼 먹었다는 고조선만물왕조실록이 있어. 뭐어? 처음 들어봤다구? 고조선만물왕조실록 정말 몰라? 태조 왕쿤은 알아? 그분의 아버님이 직접 쓰신 건데 내용이 아주 기가 막혀. 예전에 한반도 픽할 때만 해도 일본과 중국이 ‘땅 내놔’ 빌런인 줄은 꿈에도 몰랐대. 요즘 말로 하면 부동산 사기당한 거지. 다음날 민무늬토기 만들면서 눈물의 가요를 불렀는데, 그 노래가 구전돼서 지금의 부석순 [거침없이] 가 탄생했다는데? 순영이 요즘도 안녕하지?
정한의 마지막 말이 아니었다면 석민은 교보문고 앱에서 당장이라도 고조선만물왕조실록을 찾아봤을지도 모른다.
― “형은 정말 말재주로 국회까지 가실 인물이에요.”
― “나머지는 집들이 때 들으러 와, 알겠지?”
― “얘들아, 오늘이 마지막일 줄은 꿈에도 몰랐는데 정말 즐거웠고 내 앞길을 너희 인생보다 응원해주길 바라.”
― “이석민 발 빼는 거 봐.”
― “똑똑한 거지.”
― “정한이 형, 내가 사랑해요.”
― “마무리도 깔끔해.”
녹음 약속을 위해 석민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송편 빚으러 꼭 갈게요! 만물실록은 얘기는 정.말. 괜찮아요! 정한은 의사가 분명한 석민을 향해 손을 흔들며 윙크를 남발했다.
석민은 앨범 준비, 런칭, 사인회, 팬 미팅 등 정신없는 일정 중에도 제 사람들을 곧 잘 챙겼다. 승관의 카스테라 6주년 특별 게스트 참여, 세브란스 병원 환우를 위한 콘서트 티켓, 지훈의 생일날에 맞춰 보낸 안우재를 본뜬 케이크까지. 아디다스 신상품 광고를 찍게 된 석민은 아디다스 러버 승관의 주소로 직접 상품을 보내 줄 정도였으니, 온정이 많고 심성이 깊은 석민은 변함없는 우리의 마스코트였다.
― “나도 그날 녹화 끝나면 연락할 테니까 제발 나 빼지 말고 술 먹지 마라, 엉? 특히 김여주?”
― “놀라운 월요일 고정 게스트 2주년 축하해.”
― “야, 지난주에 내 활약 봤냐? 아마 깜짝 놀랄 거다.”
― “왜? 거기서 내 욕했어?”
― “과연 욕만 했을 것 같냐?”
식사 자리가 파한 후 승관은 저녁 스케줄을 위해 밴에 올랐다.
지난주 방송 꼭 봐야 돼. 나 진짜 너무 잘했어. 근거 있는 자신감이라고나 할까? 웃어?
케이블을 넘어 공중파도 아싸리 잡아먹은 승관은 노래, 춤, 예능을 넘나들며 연예계의 블루칩으로 활약했다.
(지난주 승관 픽 놀라운 월요일 하이라이트.mp4)
아주 강력한 활약 꾸러기다.
승관을 태운 밴이 멀어지자 잠시 후 정한이 부른 콜택시가 도착했다.
― “운전하기 귀찮아서 택시 부르는 값만 해도 건물 하나를 더 사겠다.”
― “공주가 물어보면 나 걸어갔다고 해.”
― “한 시간 거리를 윤정한이 걸어갔다고?”
― “EBS 〈장수의 비밀> 보는 맛에 꽂혀서 이해해줄걸?”
― “누나는 형 머리 꼭대기에 있어.”
― “어쩐지 든든하더라.”
휴식의 행복회로를 돌릴 새도 없이 병원 콜은 받은 정한은 시무룩한 얼굴로 행선지를 바꿨다. 지훈은 차창 밖으로 불쑥 나온 정한의 머리칼을 대충 쓰다듬었다. 위로의 터치를 해주지 않으면 영영 가지 않을 기세였기에.
― “그래, 고생해.”
― “지훈아, 다음 생에는 꼭 건물주로 태어나 형을 보살피렴.”
― “그게 형으로써 동생한테 할 소리냐고.”
― “너만 믿는다? 응?”
택시가 멀어질 때까지 불교 윤회 정신을 읊는 정한의 고운 목소리가 서울 한복판에 울려 퍼졌다. 어느덧 늦은 오후였다.
― “우리도 가자.”
터질 것 같은 배를 두드리며 지상 주차장으로 들어가는데, 어김없이 일찍 시작한 붕어빵 포장마차가 보였다. 늘 복주머니처럼 차고 다니는 동전 지갑에서 천 원짜리를 몇 장을 꺼내 손가락으로 포장마차를 가리켰다. 5분 뒤 지훈의 품에는 팥붕 슈붕 반반 섞인 세 봉지가.
― “혹시 그 붕어들을 키울 거야?”
― “왜?”
― “뭘 그렇게 많이 샀어?”
― “어차피 집 도착하기 전에 다 먹잖아.”
― “저녁 먹고도 그게 또 들어가? 성장기야?”
― “아니, 너.”
― “모른 척 떠넘기면 받아줄 순 있잖아?”
― “그러니까 뭘 먼저 먹고 싶어?”
― “제일 큰 거.”
바삭한 붕어를 노나 먹고, 정체기 도로에서 커플 셀카를 찍고, 운전 중인 지훈의 오른쪽 작은 콧구멍에 손가락도 넣어보고, 익숙한 듯 가만히 앉아있는 훈팡이의 옆모습을 근접 촬영하다가, 멀리 우뚝 솟은 남산N타워에 홀려 케이블카를 타고, 방울 한다는 자물쇠를 걸고, 돌아오는 길에 테이크 아웃한 밀크티를 홀짝거리다, 안우재 대문을 열고, 현관 도어락 비밀번호를 누르고, 문을 당기고, 그러다가 눈이 맞으면 부드럽다가 거칠게 변하는 키스를 하고.
― “이러려고 소파 넓은 거 산 거지?”
― “응.”
위로 니트를 벗은 그가 망가진 머리를 가볍게 넘겼다. 연한 크림색 상의에 감춘 잔 근육과 팔의 힘줄은 그가 움직일 때마다 눈앞을 어지럽게 돌아다녔다. 육체의 별천지가 바로 여기? 난 지금 눈을 감아도 절대 안 돼! 더 즐겨야 해!
― “혼자 또 이상한 생각하지.”
― “난 맨날 해 자기야.”
목선을 따라 입을 맞추던 그가 픽 웃음을 흘렸다. 내 셔츠 단추를 풀어 내린 손이 내 등을 더듬거렸다. 후크를 찾는 듯했지만 이리저리 잘도 피하는 내 덕에 오늘도 쉽지가 않다. 지훈의 미간이 살짝 구겨지는가 싶더니 양팔로 나를 들어 올리고서 안방으로 휙휙 걸어갔다. ‘공주님 안기’는 생각해 본다더니 너무 자연스럽잖아.
― “오늘은 무슨 컨셉이야?”
― “말만 해.”
― “다정하게?”
― “다정하고 야하게.”
인티 주민들에게 알립니다.
오늘 밤은 다정하고 야하게.
― “묶고 싶어.”
다시 한번 알려 드립니다.
무족권 다정하고 야하게.
3장. 이지훈 리틀 주니어 이름 붙이기와 휘몰아치는 깜짝 소식
아니 그러니까 애 이름을 지금 정해 보자니까? 막상 태어나면 육아 지옥 태산인데 언제 이름을 짓고 앉아있냐?
지금부터 후보에 오른 이름들은 SF에 한 획을 그은 대작 승리 호가 쳐들어와도 사지 못할 거라고 승관은 너스레를 떨었다. 정한의 집들이에서 열린 작명의 대가 ‘부승관 철학관’은 탐탁지 않은 지훈의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다들 술이 들어간 터라 정한과 아내는 태어나지도 않은 내 딸과 아들의 이름을 따로 심각하게 고민 중이었고, 석민은 거실에 있는 기타를 매고는 점성술사 OST를 깔고 있었다. 그중 가운데에서 마법 구술을 돌리듯 좌우로 두 손을 왔다 갔다 뺀질거리는 승관과 삐뚠 시선의 지훈이 단연 주인공이었으니.
― “어서 오시게. 날렵한 콧대와 얇꼬롬한 입술이 예쁜 이지훈 그대여.”
― “지랄을 해요.”
― “언행이 올바르고 매사 반듯함을 유지하는 그대에게도 고민거리가 보이는군요.”
― “제가요?”
― “오호, 자녀의 이름이라.”
맨정신의 지훈은 불구 죽죽 한 승관의 뺨을 손바닥으로 밀었다. 녀석은 전혀 굴하지 않았다.
― “이지훈의 명성에 맞게 이지 어떠십니까? Easy.”
― “이지하게 쳐맞고 싶냐.”
― “로버트의 아들 이름이 ‘로버트 주니어’인 것처럼 앞은 똑같이 가되 주니어를 붙이는 건 어떠한가요? 예를 들어 이지훈발놈?”
― “주니어 붙인다더니 훈발놈 같은 소리 한다.”
― “지훈, 손에 힘 풀어.”
― “드디어 영험한 기운으로 알아냈습니다.”
― “네가 병풍 뒤에 있을 날?”
― “이, 게포카면시세반포자이…… 아아악!!!! 내 머리이이익!!!!”
승관은 아린 뒤통수를 붙잡으며 내게 말했다. 애는 성깔 체크 꼭 해라, 엉? 아휴 너도 근데 문젠데 어쩌냐? 승관과 지훈을 제외한 그들이 웃음을 참지 못한다. 나도 그중 하나였다. 소파에 비스듬히 누운 정한은 승관을 향해 턱짓했다.
― “그럼 승관이도 애가 있으면 부부젤라 이런 걸로 지으면 되겠다.”
― “아니 형은 무슨 말을 그렇게 심하게 하세요?”
― “승관, 불과 일 분 전을 기억하지 못하는 불치병에 걸린 건 아니겠지?”
― “전 정당합니다.”
― “부레옥잠도 나름 나쁘진 않아.”
― “부레옥잠으로 처맞을 사람?”
― “부-야호.”
― “제발.”
― “부야호 뭐야. 윤정한 몇 살인데.”
정한의 옆에서 심각하게 고민하던 그의 아내가 조심히 손을 들었다.
― “부, 패한정권과싸우는정의로운빛?”
― “누나 그거 직업병이야.”
― “부, 강한나라와맞서싸우는절대적인희망?”
― “형수님, 미래의 제 아이는 꼭 전쟁의 신으로 키우겠습니다.”
― “제가 도움이 되었나요?”
― “연금술사보다 뛰어나세요.”
― “전. 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는 뜻이죠.”
정반대의 성격조차 조화로워지는 정한의 집들이에서 빈 병들이 늘어간다. 솥에 찐 송편 냄새가 거실에 흘러들어올 때, 정한과 아내는 서둘러 주방에 들어갔다. 승관은 석민과 연거푸 맥주를 마시며 상상의 나래를 펼쳤다.
― “나중에 이지훈 거푸집처럼 빼다박은 애기가 나오면 얼마나 귀여울까? 반달 눈물점도 닮고, 코코볼 같은 코도 닮고, 웃을 때 개귀여우면 그걸 어떻게 안 깨물고 참지? 미친! 너무 떨려!”
― “여주 닮을 거니까 걱정 마.”
― “근데 진짜로 반반이면 하리보 젤리 같겠다.”
― “비유치고는 상당한데? 너 인마 소질 있는데?”
― “그런 말 많이 들어.”
― “둘 다 접근 금지야.”
― “삼촌 소리를 들을 날이 올까?”
― “완전 크리스탈 당근이지!”
― “난리 났네.”
때 지난 송편을 나눠 먹으며 하리보 젤리에 꽂힌 그들의 상상이 날로 더해진다.
때론 상상이 조금은 이른 현실이 될 수도 있지만.
― “우리 와이프는 내과 간다더니 어딜 또 그렇게 가시는 걸까.”
일주일 뒤, 엘리베이터 밖으로 나온 지훈은 세브란스 병원 4층 입구에서 내 손목을 잡고 물었다.
― “소화가 안 된다며.”
― “응.”
― “잘 먹지도 못하고.”
― “그러니까.”
― “생리도 갑자기…….”
지훈의 눈이 서서히 커진다. 그제서야 4층 팻말과 내 얼굴을 번갈아 보며 그가 살짝 입을 벌렸다. 차마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했던 부부의 걱정을 푼 듯한 만감이 교차한 눈빛이었다.
착상이 어려운 신체적 조건이라는 진단을 받게 된 지도 4개월.
꿈처럼 다가온 깜짝 소식에 지훈은 그 자리에서 꽉 끌어안았다.
― “너무 소중해.”
나도 네가 너무 소중해.
4장. 사랑꾼 이지훈
희끄무리한 초음파 사진을 하루종일 들여다보던 지훈은 각 잡힌 자세로 전화를 걸었다. 아버지, 어머니, 부승관, 윤정한, 이석민, 설계 팀장님, 동문 전원우, 권순영……. 진지한 표정으로 ‘아빠 됐다’ 선언하는 동글동글한 뒤통수에 긴장이 느껴진다. 제 말대로 아빠가 됐으니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데스크탑 앞에 앉은 그는 본격적으로 임신에 관한 정보를 끌어모은다. 초기, 중기, 직전으로 카테고리를 나눠 포인트와 주의점을 포스트잇에 적어놓고, 각 시기마다 좋은 음식과 운동을 종류 별로 나눠 암기하듯 되뇐다. 반수 하는 명문대생의 느낌이 팍팍 꽂히는 뒤태는 대문이 열리는 소리와 동시에 마당으로 달려 나간다. 지훈의 픽업 시간보다 일찍 도착한 피앙세가 두 팔을 벌렸다. 지훈의 잔소리는 덤이었다.
여섯 시에 끝난다더니 뭐 이렇게 빨리 왔어. 쉬는 날에는 내가 데리러 간다니까. 말도 안 듣고, 춥게 입고 다니고, 밥도 잘 먹었나 모르겠는데 표정 보니까 별로 먹지도 않았네. 쌀쌀한 날씨 탓에 지훈은 들고나온 외투를 내 어깨 위로 덮었다. 집에서 일하다 나왔는지 동그란 안경이 콧대에 걸려있다. 눈에 붉은 핏대까지 서 있는 걸로 보아 꽤 중요한 작업인 것 같다. 업무에 방해되지 않게 별실로 향하려 하자, 지훈은 안경을 벗더니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왜? 할 말 있어?”
“그…… 공주 주려고 유자차 끓여놨어.”
“……응? 뭐라고 지훈아?”
“우리 공주 마시라고 테이블에 놔뒀어. 샤워하고 나오면 침대로 갖다줄게.”
얼굴을 붉힌 채 서재로 사라진 지훈은 정말이지 한 시간 뒤 유자차와 나타났다. 영문도 모르고 공주가 된 내가 조심스럽게 묻는다. 혹시 나 잘못한 거 있어? 아니면 윤 쌤하고 내기해서 진 거야? 벌칙이 ‘공주’라고 부르기? 왜 말을 못해? 설렁탕을 사 왔는데 왜 먹지를 못해? 지훈은 농담에도 사뭇 진지하다. 식혔어, 공주가 마셔 봐. 손바닥 위로 든 유자차를 내 입술에 갖다 댄다. 어쨌거나 남편도 유자차도 달콤 그 자체이니 손해 볼 것은 없다만 ‘여보야’보다 강력한 ‘공주야’에 제정신은 힘들었다. 지훈은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바람이 부나 ‘공주’를 달고 살았고, 그 효과는 임신 4개월째에 접어들어서야 적절한 효과를 발휘했다.
혼자 있으면 눈물 나고 안겨있으면 서러웠다. 변덕스러운 감정은 나조차 이해할 수 없었다. 급격한 호르몬 변화로 산모에게 나타나는 증상은 그렇지 않아도 예민한 내게 정점을 찍었다. 퇴근하면 손발이 저리다 못해 붓고, 정자세로 눕지 못하고, 태동에 눈을 뜬 채 밤을 지새며 우는 일은 허다했다. 그럴 때마다 지훈은 팔다리를 주무르거나, 허리를 마사지하거나, 역시 뜬눈으로 나를 간호했다. 어쩔 때는 새벽에 귤이 먹고 싶어 대성통곡을 한 적이 있는데, 울음소리를 듣고 작업실에서 뛰쳐나온 그가 내 상태를 살피더니 서둘러 나갈 채비를 했다. 그로부터 약 한 시간 반 만에 돌아온 지훈은 숨을 몰아쉬며 방문을 열었다.
“연락 왜 안 받아! 걱정했잖아!”
“천혜향.”
“……진짜?”
그가 품에 안고 온 과일을 내 손에 하나씩 쥐여준다. 어깨에 진눈깨비가 내려앉았는데, 겉옷에 뭘 묻히고 다니는 걸 싫어하는데, 5km나 떨어진 24시 마트에서 준 영수증을 슬쩍 주머니에 넣는다고 내가 못 보는 것도 아닌데, 꽁꽁 언 손가락이 숨겨지는 것도 아닌데…….
“공주야.”
……
“말만 해. 다 줄게.”
롤러코스터처럼 심했던 감정 기복이 사그라든다. 언 손가락으로 천혜향 껍질을 까는 것이, 먹는 속도에 맞춰 과일 조각을 넣어주는 것이, 그렇게 맛있냐며 웃는 얼굴이, 무엇보다 ‘공주야’ 하고 소중하게 대하는 것이.
별것도 아닌 일에 우울하고 화를 내는 게 정상적인 일이 아닌데도 지훈은 별말 없다. 그는 요즘 e-book으로 임산부에 관한 책을 읽고 있다.
서적에 따르면 나만 그런 게 아니니 이상한 것도 아니고, 지극히 정상적인 호르몬의 변화 양상이라며 〈에스트로겐 수치가 감정에 미치는 영향>을 그래프로 나타낸 논문의 일부를 캡쳐해 전달했다. 지훈은 단단한 사람이었다. 내가 이유 없이 짜증 내도 말없이 토끼 머리띠를 쓰고 밥을 먹었고, 영화 러브레터를 보면서 심하게 찡찡거리면 안우재 대문 밖으로 ’오겡끼데스까’ 다섯 번을 외치고 유유히 화장실에 들어갔다. 실패 없는 웃음 버튼은 내 옆에서 오래 산 남편, 이지훈이었다.
초음파 검사와 당뇨 검사가 있는 날이면 그는 내 손을 잡고 의사를 보러 갔다. 현재 시기에 어디를 조심해야 하는지, 어떻게 예방할 수 있는지, 먹고 싶은 건 다 주고 싶은데 혹시 천혜향을 많이 먹여도 되는지 사소한 질문까지도 지훈은 놓치지 않았다.
“내가 알아야 대비하고 여보도 지키지.”
산부인과 데스크 앞에서 수납하다 말고 엄중한 목소리로 그가 말한다. 요즘은 공주뿐만 아니라 여보, 자기, 애기 등 부를 수 있는 애칭은 모조리 섭렵하는 중이다. 안면 있는 간호사가 넌지시 말을 건넨다. 산모분께서는 공주가 마음에 드시는 것 같은데요? 그러자 수납 용지에 멋지게 사인한 그가 내 허리를 부드럽게 둘렀다.
“공주야, 진짜로?”
지훈은 욕조에 물을 받고, 잠자리를 봐주고, 알람을 맞춰주고, 잠이 들 때까지 뽀뽀한다. 아기를 갖기 전에 승관과 자주 다녔던 테니스장과 족구장도 발걸음을 끊은 지 오래다. 그는 퇴근하면 곧바로 집으로 돌아와 오늘 회사에서 있었던 내 푸념을 듣는다. 사람들의 윤기 나는 머리카락과, 영양분 빠져 푸석거리는 내 머리칼과, 턱에 살이 붙은 것만 같은 느낌과, 살이 찔까 봐 운동에 집착하는 마음도.
“너한테 살이 어딨어.”
“거짓말.”
“나 없는 말 못 하는 거 알잖아.”
“정말?”
“어, 너는 좀 쪄야 돼.”
얼굴 바로 앞에서 카메라 버튼을 누르더니 그 사진을 배경화면으로 설정하는 지훈은 누가 봐도 노빠꾸 사랑꾼.
“봐, 예쁘기만 하구만.”
“누가 보면 어떡해.”
“원래 예쁜 건 자랑하는 거야.”
사랑꾼 말기 증상은 식탁에서 나타난다. 부편집장으로 승진한 김 팀장이 선물한 배냇저고리 세트를 들고 집 현관문을 열자, 한식-양식-일식-중식-태국식-그리스식 단어가 적힌 여섯 가지 포스트잇이 주방 식탁에 붙어있었다. 한식과 일식을 가리키자 준비한 음식을 척척 차린다. 다양성을 중시해 봤다는 그가 맞은편에 앉아 먹는 내 모습을 살폈다.
“괜찮아?”
“너무 맛있어. 난 입덧이 없는 걸까?”
“그러게.”
“넌 안 먹어?”
“……아까 많이 먹었어. 배불러.”
“표정이 안 좋은데? 일한다고 또 안 먹었지?”
“아냐.”
“진짜?”
“잠깐 화장실 좀…….”
다시 말하지만 사랑꾼 말기 증상은 식탁에서 나타난다. 지훈은 입덧을 했다. 과학적으로 증명되진 않았으나 남편이 임신한 아내를 과도하게 사랑하다 보면 입덧도 대신 하게 된다는 미신 같은 옛말이 있다. 선조들의 깨달음과 지혜를 존경하는 외과 전문의 윤정한은 지훈에게 말했다.
“예전부터 느꼈지만 넌 한번 꽂히면 작살을 내는 것 같아.”
“……형, 커피 좀 치워.”
“토하겠다, 토하겠어.”
“어우, 화장실 어디야.”
진료일에 맞춰 산부인과를 찾다가 로비에서 우연히 만난 정한은 커피 냄새만 맡아도 질색하며 화장실로 뛰어간 지훈을 신기하듯 바라본다. 이제 임신 6주가 된 정한의 아내도 입덧이 없다는데……. 정한은 내 말에 고개를 저었다.
“내가 입덧을 했으면 진작 하지 않았을까?”
“그런가요?”
“피곤하지도 않고 식욕도……우욱.”
내게 커피 컵을 맡긴 채 지훈의 동선을 그대로 따라가는 사랑꾼 윤정한. 사촌지간 아니랄까 봐 죽어라 사랑하는 것도 똑같았다. 그날 하루 동안 겨우 밥 한술로 허기를 해결한 지훈은 집에 돌아와서부터 내 배에 가만히 귀를 댔다.
“어, 좀 움직였다.”
“지금 자고 있어.”
“발로 날 찬 것 같은데.”
“자고 있다니까.”
“역동적이야. 대단한 인물이라는 얘기지.”
“일은 도대체 언제 해?”
“지금.”
“두 시간 째 아이맥 전원만 올리고 마우스는 움직이지도 않았잖아?”
“또 찼어. 내가 아빠라는 걸 느낌으로도 아나?”
“널 어쩜 좋을까요.”
지훈은 재택근무 시간을 제외하고는 늘 나와 함께였다. 가시적인 태동에 움찔하기도 했고, 태교 음악이랍시고 플레이 버튼을 누르다가 희대의 명곡 브루노 마스의 ‘베르사체 온더 플로어’가 나왔다. 지훈은 뻔뻔했다.
“음악은 되도록이면 다양한 장르를 접해봐야 어떤지 아는 거거든.”
“비발디 사계 2악장 듣다가 갑자기 키스하고 옷을 벗자는데 다양성이 너무 멀리 간 건 아닐까?”
“오늘 해줄까.”
“능구렁이처럼 빠져나가시겠다?”
“해줘, 말아. 얼른 말해.”
“……일은 다 했고?”
“그게 중요한가.”
지훈의 입술이 목을 잘근잘근 씹는다. 살갗을 빨아당기며 원피스 안으로 손을 넣었다. 착상 안정기가 되면 부부 관계는 아이 정서에게 좋다는데, 임신 서적에서 그 구절을 곱씹기까지 한 지훈은 진심으로 이래도 되는 건지 싶은 초보 아빠였다. 대답 대신 그의 허벅지를 톡톡 두드리자 그는 내 볼에 입을 맞추고 침대 헤드에 기대앉았다. 두 팔을 벌려 제 위로 나를 앉힌 뒤 젖은 머리를 넘겼다. 반동에 몸이 앞으로 기울어질 때마다 뽀뽀 귀신이 붙은 지훈의 입술이 여기저기 닿았다. 임신 전에는 서로를 묶고, 잡고, 결박하는 플레이였다면 지금은 한없이 따뜻한 섹스였다.
“애기, 자?”
“……으응.”
지훈은 입술을 삼킨 채 허리를 조금씩 쳐올렸다. 입술이 맞붙은 채로 달뜬 신음을 뱉는다. 그가 짧게 입을 맞췄다. 쉿, 울 애기 깰라. 땀에 젖은 몸을 끈끈하게 안고서 서로가 깊게 박힌다. 불규칙적인 숨소리와 팔에 힘이 들어갔다. 내 뒷머리를 그러쥔 지훈의 손가락이 머리칼을 당겼다. 파정의 신호였다.
서로를 한동안 끌어안았다. 반투명 커튼을 통과한 옅은 빛이 뽀얀 뺨을 비춘다. 내 안에 있는 아이도 거의 보드라운 뺨을 가졌으면 좋겠다.
“더 있으면 안 돼?”
이런 애닳는 목소리도.
“내일은 안 보챌게.”
얄쌍한 눈매에 감춘 속쌍꺼풀도.
“계속 안고 싶어.”
부서질까 조심스럽게 다루는 손길도.
“아직은 엄마 네 거 아니야.”
내 배를 어루만지며 뾰로통하게 변하는 보조개도.
아날로그에 별 흥미 없는 지훈에게 한 가지 취미가 생겼다. 잡지 〈우리 아내, 임신의 모든 것> 마지막 페이지에 동봉된 ‘무엇이든 물어보세요’에 질문을 보내는 일이다.
‘감정 기복이 심해지는 주기에 배우자의 사랑이 줄어들 수 있다는 두려움이 온다는 (본문 p.22 참조함) 서술에 대해 질문드립니다. 어떻게 하면 왜곡되지 않게, 아내에게 사랑을 표현할 수 있을지 답변 부탁드립니다.’
특히한 잡지 문화는 답장을 이메일로 보낸다. 답장은 20년 동안 부부 상담을 했던 전문의에게서 온다. 그것은 아래와 같다.
아내에게 별명을 붙여 이름 대신 불러주세요. 애기야, 자기야, 공주야 등 낯간지러운 것일수록 좋습니다. 잠에서 깨어났을 때, 혹은 잠들기 직전에 아내에게 사랑한다는 말도 자주 해주세요. 감정 기복이 심해 짜증을 낼 때도 당황하지 말고 아내가 하고 싶은 행동이나 좋아할 만한 것들을 보여주세요. 제 무뚝뚝한 남편도 일주일에 한두 번은 애교를 부렸답니다. 마지막으로 부부관계에 힘을 실어야 합니다. 사랑한다는 표현만큼 강력한 것이지요. 이지훈 님과 아내분의 건강하고 행복한 삶을 응원합니다 ^ ^~
초보 아빠 타이틀보다 ‘남편’의 책임감이 조금은 더 강한 현재의 지훈은 임산부와 남편을 위한 커플 필라테스에 등록했다. 지훈의 목표는 우리 공주가 아프지 않게, 건강하게, 힘차게 꼬물이를 낳는 것.
“훈.”
“목욕할까?”
“물.”
“응.”
“초콜릿도.”
“미니쉘?”
“다섯 개.”
“응.”
우리 공주가 아무 걱정 없이 행복한 것.
지훈은 자신의 바람처럼 진통의 시작부터 같이 있어 주지 못했다. 엔진이 망가지든 말든 외근을 나갔던 대구에서 악셀을 미친 듯이 밟고서 들어온 병원에는 열 달을 품지 못하고 태어난 아이가 있었다. 의사에게 달려가는 지훈의 발밑에 코트가 채인다. 공주는요? 산모요. 지훈의 첫 질문이었다.
인큐베이터에서 부단한 시간을 보낸 갓난쟁이가 입술을 옹알거린다. 유리창을 사이에 두고 지훈을 보는 아이가 눈을 크게 뜨며 하품을 한다. 지훈과 똑 닮은 2.1kg의 남자아이였다.
“울 애기 하품할 때 보조개 보인다.”
“웃을 때 너처럼 웃는다.”
“눈도 지훈이 너랑 닮았어.”
“코는 공주네.”
아이를 낳으면 자기를 닮았다고 신경전을 벌인다는데 지훈과 나는 그 반대다. 하루에 한 번 병실로 아이를 데려오는 날이면 지훈은 침대에 턱을 괴고 내 품에 안겨있는 아이를 빤히 들여다봤다. 나한테 말 거는 것 같아. 입을 오- 하고 오므렸을 뿐인데 마치 할 말이 많은 것처럼 느껴진다고 귀를 가까이 댔다. 포대기에 싸인 작은 손이 지훈의 귀를 뽁, 건든다. 권순영처럼 태권도를 시켜야겠단다.
“벌써 혼자 몇 년 앞을 내다본 거야?”
“아, 그래? 엄마보다 아빠가 좋다고?”
“둘이 대화해?”
“알겠어, 엄마한텐 비밀로 할게.”
내게서 받아든 아이를 안고 어화둥둥 병실을 걸어 다니는 지훈의 보폭은 흡사 왈츠와 같다. 병실 문 밖에서 충격을 금치 못하는 눈으로 지훈을 보고 있는 정한이 모른 척 사라진다. 지훈은 자신과 빼닮은 얼굴에 눈을 떼지 못한다. 사랑스러워 죽겠다는 아빠의 정석이었다.
“병원 영양사님이 밸런스 맞춰서 준 건데 먹기 싫어도 다 먹어야지.”
“미역이 너무 싱거워.”
“퇴원하면 맛있는 거 사줄게.”
“힘이 없어.”
“자, 보자.”
지훈은 내게 밥을 먹였다. 역시나 먹는 둥 마는 둥 국물만 홀짝였다. 입맛에 맞지 않는 음식을 억지로 먹일 수도 없으니 지훈은 포기한다. 일 때문에 먼저 일어나야 하는 지훈은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으로 병실을 나갔다. 책을 읽다 포기한 눈은 시어머니가 하사한 호박 중탕을 한 그릇 넘기고 눈을 붙였다.
새벽 세 시쯤 되었을까, 병실 문을 여는 소리에 의사겠거니 했는데, 입구에서 살금살금 걸어오더니 테이블에 무언가를 내려놓고 다가왔다. 지훈의 향기였다. 얼굴을 이리 쓰다듬고, 저리 쓰다듬고, 종아리를 주무르고 발을 만지작거린다. 외투를 벗은 지훈은 소파에서 잠이 든다. 다음 날 아침도 어제와 비슷해 어디로 가야 할지 눈치만 보고 있을 때, 지훈은 냉장고에 넣어둔 보자기를 꺼냈다.
“……이게 뭐야?”
꽈리고추 멸치조림, 된장으로 버무린 시금치나물, 감귤 샐러드, 두부 전, 삼삼한 뭇국까지…… 익숙한 찬합에 담아온 걸 보면 집에서 왔다는 건데……?
“퇴근하자마자 장보고 요리하니까 딱 2시더라.”
“진짜? 진짜 직접 했어?”
“먹어봐.”
한다면 하는 지훈은 건축계를 넘어 요리계도 넘보고 있다. 입가에 밥풀이 붙은 줄도 모르고 이것저것 주워 먹다 보니 지훈의 뻑뻑한 눈가가 보인다. 밥그릇을 비운 걸 본 그가 소파에 눕는다. 나 딱 30분만 잘게.
지훈의 휴대폰 문자가 울렸다. 난 게시한 질문에 댓글이 달렸다는 팝업창을 눌렀다.
http:// cookingforlovers/receipe/view.asp?id=01582
산모를 위한 반찬 추천 좀 해주세요
꼬물이❤ | 2025.02.19 | 답변:14 | 조회:2143
산후조리원 음식이 입에 맞지 않아서 아내가 계속 고생하네요.
퇴원까지 일주일 정도 남았는데 미역국도 질려서 몇 숟갈 못 먹어요.
뭐를 딱히 먹고 싶어 하는 것도 아니라서 산모가 잘 먹을 만 한 호불호 없는 반찬 추천 좀요~
태그: 산모가 좋아하는 반찬, 산모 음식, 짜지 않은 것, 반찬, 간단하게 할 수 있는 반찬
퇴원 날 지훈의 부모님과 승관, 석민, 그리고 가운을 입은 정한이 대기실 유리창에 달라붙어 입을 뻐끔대는 아기를 관찰했다. 정한은 아기의 이목구비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지훈과 간호사를 포함한 모두가 웃음을 터트렸다.
“진짜 이지훈 거푸집이다.”
5장. 귀여운 뾰푸집과 세 명의 기사들
― “삼촌, 해 봐.”
― “웅.”
― “우리 강낭콩, 입을 떼보련?”
― “웅.”
― “쬐그만게 먹금 장난 아닌데?”
첫 번째, 기사 승관의 목표는 ‘우리 부승관 삼촌이 지구 행성에서 제일 멋져요’라는 말을 아이의 입을 통해 듣는 거였다. 최고 시속 1,200km 초고속 열차 하이퍼 튜브를 타고 봐도 불가능한 목표치였지만 승관의 좌우명은 ‘하면 된다’였다. 하지만 누구의 아이던가. 이지훈 주니어가 그렇게 호락호락하던가.
눈에 거슬렸는지 승관이 관심을 끌고 싶어 쓰고 나온 핑크퐁 안경을 냅다 거실 바닥으로 던져버리고는 와! 하고 짝이 맞지 않는 손뼉을 쳤다. 성깔은 분명 친탁이라는 승관의 탄식이 흘러나왔다.
― “애 성질 긁지 말고 탕 끓나 안 끓나 보라니까?”
― “프리지아 새댁 아가씨, 저도 엄연한 손님이거든요?”
― “손님이 아침 일곱 시부터 찾아와서 배를 까고 자?”
― “내 덕분에 방해 안 받고 주방에 계신 것만 해도 감지덕지 아닙니까요?”
― “승관 씨.”
― “예, 주인집 대감마님?”
― “애가 네 핑크퐁 안경 밟았다.”
― “아악! 내 오만 원!”
안경 위에 방석을 깔고 앉은 애는 뭐가 그리고 좋다고 손뼉을 치는지. 마음으로 눈물을 토한 승관은 말없이 내 옆에서 꽃게탕 거품을 걷어냈다.
― “저 귀요운 꼬맹이 프리지아는 언제 내 마음을 알아줄까?”
― “네가 장가가는 게 더 빠르겠다.”
퇴근 후 현관문을 열고 들어온 지훈은 다리에 애를 매달고 앞으로 힘겹게 발을 내디뎠다. 그럴수록 삼촌의 입지가 작아져 간다며 지훈 앞에 쪼그려 앉은 승관은 아이와 일대일 면담을 진행했다.
― “너 잘 생각해 봐라? 나중에 용돈을 누가 더 많이 줄 것 같냐? 경제 관념 투철한 네 아빠가 퍼줄 것 같냐? 절대 아니지? 나처럼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사람이 씀씀이가 더 좋은 거여! 너 인마 근데 왜 내 폰을 자꾸 먹냐!”
침으로 범벅된 제 휴대폰을 안타깝게 쳐다보는 승관이다. 여전히 애를 다리에 매달고 주방에서 손을 씻은 지훈은 다리에 붙은 쪼꾸미를 안아 거실로 들어갔다.
― “말하면 잘도 듣겠다.”
― “너도 나한테 잘해야 돼. 애 사춘기 오면 누구한테 갈 것 같냐? 너겠냐? 당연히 아니지! 바로 배려심 깊은 나……!”
― “응, 이석민.”
석민아, 애기 좀. 현관문 안으로 들어온 두 번째 기사 석민에게 바통 터치한 지훈이 주방으로 달려왔다.
― “안 울어?”
― “석민이 왔어.”
― “아, 좋아하지.”
― “부승관, 울지 말고 와서 도와.”
석민에게 안기고 싶은 몸짓이 훤한 쪼꾸미는 석민 표 호롤롤로 비행기를 타며 꺄륵거렸다. 승관은 거실에서 주워온 지훈의 선글라스를 끼고 눈물의 양파를 썰었다.
아, 왜 눈물은 안 나고 콧물이 나냐. 만성 비염인가.
석민은 애를 안고 덩실덩실 잘도 놀았다. 잠시 후 장난감을 들고 온 정한까지 합세하자 아이는 내게도 보여주지 않는 미소를 띠었다. 지훈을 빼닮은 보조개와 눈꼬리를 폭 접으면서.
― “승관, 울어?”
― “꽃게탕은 내가 만들었으니까 아무도 손대지 마라.”
승관은 한쪽 지지대가 나간 핑크퐁 안경을 쓰고 꽃게만 퍼먹었다. 눈치 빠른 작은 두 발의 쪼끄미는 소파를 집고 천천히 일어나더니 엉거주춤 승관의 어깨를 짚었다. 아- 하고 입을 벌리는 아이에게 승관의 인생은 이미 저당 잡힌 듯싶었다.
― “너 인마, 지금의 선택을 절대 후회하지 않을 거다. 삼촌 재산 다 네 거여, 알지? 엉?”
두려울 것 없는 미혼의 승관은 통장 번호 네 자리를 세 번이나 읊었다. 곧잘 따라 하던 아이는 정한이 옆에서 팔을 벌리자 냅다 안겨버렸다. 지훈의 말대로 단지 꽃게 살이 먹고 싶어서였던 걸지도.
― “자식 키워봐야 소용없어.”
― “이제 13개월이야.”
― “다 컸지. 우리는 그 나이 때 밭농사를 거들었다고. 정한이 형, 맞죠?”
― “도대체 어느 시대의 세 살을 겪은 거야?”
― “형이 날 이럴 때 도와줘야지!”
― “아니, 가능성 있는 말을 해야 도와주든 말든 하지.”
― “형제 다 키워봐야 소용없어.”
― “너만 형제였던 거지.”
잠시 후 핑크퐁 안경을 뒤집어쓴 채 마당 밖을 내다보고 있는 승관에게 폭 안기는 작은 두 발. 녀석은 아이에게 걸리적거릴까 안경을 벗고 한아름 품에 안았다. 오늘도 승관의 사랑은 제자리 걸음.
― “울 쪼꾸미 사랑해.”
승관은 알고 있을까.
세 명의 기사가 궁궐을 나간 밤이면 아이가 거실 탁자에 놓인 액자를 가리키며 녀석을 가장 보고 싶어 한다는 사실을.
― 저만 잘 나오게 해주세요.
고등학교 졸업식 사진에 찍힌 만세 승관이를.
6장. 쪼꼬미는 엄마바라기 & 이지훈은 육아 중
말귀를 알아듣기 시작한 쪼꾸미가 끅끅 운다. 지훈의 ‘엄마 없어’ 발언 때문이었다. 웬일인지 일찍 일어난 아이가 엄마를 찾기에 회사 갔다는 말을 뭉뚱그려 엄마 없다고 대답한 것이 화근이었다.
엄마가 없다-엄마가 사라졌다-엄마는 안 온다-엄마를 못 본다-난 혼자다
인생 통틀어 고작 2년이 전부인 두 살배기 아이의 생각 회로다. 하루아침에 부모의 반을 잃은 쪼꾸미가 아일랜드 식탁 위에서 통곡한다. 밥 먹이다가 졸지에 와이프를 잃은 지훈도 얼마나 기가 찼을지 모를 일이었다.
겨우 울음을 그친 아이를 앞에 두고 지훈은 진지하다. 좀 더 심도 있는 대화를 하고 싶은 아버지의 마음이랄까.
“지금까지 아빠가 했던 말 정리해서 말해봐.”
“웅.”
“다음부턴 아빠도 조심해서 말할 테니까 너도 울기 전에 과연 그 말이 사실인지 따져 물어볼 필요가 있다고.”
“으웅.”
“넌 입장정리 언제 해줄 건데. 이제 언어 구사 잘할 때도 됐잖아.”
“우!”
지훈의 눈썹이 꿈틀거린다. 저 의미심장한 ‘우!’가 느낌표를 받은 초긍정인지, 엄지를 밑으로 내려 강력하게 야유하는 우우- 인지 목소리의 높낮이가 애매했기 때문이다. 기저귀 찬 대빵만한 엉덩이가 지훈에게 안긴다. 거실에 내려달라 한바탕 조르더니 소파 밑에 앉아 못다 한 레고를 조립했다. 지훈은 먹여야 할 양이 반도 더 남은 그릇을 들고 쪼꾸미 옆에 앉는다. 표현에 대해 제대로 가르쳐 줄 셈이었다.
“엄마한테 다 들었어. 너 승관이 삼촌 좋아하는데 아닌 척한다며. 아빠처럼 좋아하면 좋아한다고 바로바로 표현해야 나중에 후회가 없는 거야. 아빠가 엄마한테 만나자고 용기 안 냈어 봐. 너 지금 여기 없다? 당연하지 않은 걸 당연하게 받아들이면 안 돼. 무슨 말인지 이해했어?”
“어마!”
“엄마 회사 갔다고 했잖아.”
“어마!”
“이따 영상통화 할 거야. 근데 이거 지반이 너무 부실한데?”
쉬는 날에도 직업병 앓는 지훈은 레고 건축에 진심이다. 밑바닥부터 튼튼하게 만들어놓으면 꺄르륵 웃다가 발로 툭 밀어버리는 작고 귀여운 악마 때문에 정신을 바짝 붙들어야 하지만.
“오늘 살 게 뭐냐면…… 호박, 당근, 키위 주스, 기저귀, 아기 손 장갑, 타코야키 기계…… 타코야키는 사 먹는 게 낫지 않나.”
지훈은 손뼉을 짝짝 맞대는 아이를 안고 카트를 민다. 유전적인 동안의 단점은 바로 여기에 있다. 스몰 톡이 자유로운 50대 이상 중년 손님들은 하나같이 걸음을 멈추고 말을 건다. 막내동생이에요? 아이구, 그놈 참 오빠랑 판박이네. 누가 보면 자식인 줄 알겠어. 부모님 금술이 어지간히 좋은가 봐요? 그쵸?
“아들인데요.”
“……아들?”
“제 아들이요. 생후 24개월 3일.”
부자가 동시에 입을 앙다문다. 확신의 보조개가 쏘옥 들어갔다. 매번 형으로 오해받느니 차라리 등본을 이마에 붙이고 다녀야겠다고 지훈은 생각한다. 2층으로 올라가는 무빙워크에 탑승한 그는 옆을 비추는 거울로 자신과 아이의 얼굴을 확인한다. 누가 봐도 화가 난 아빠와 깜찍한 붕어빵 아들이다.
“잘 때는 엄마 닮았는데 눈만 뜨면 나네.”
“아바!”
“고맙다는 의미로 엄마한테 타코야키 기계 선물해주자.”
“우!”
“알겠어, 내가 만들게.”
“오와!”
“가만 보면 내 말 다 알아듣네? 혼날 때만 모른 척하는 거 아냐?”
호박, 당근, 키위 주스, 기저귀, 아기 손 장갑, 타코야키 기계…… 지훈은 물건으로 가득 쌓인 카트를 두고 휴게실 의자에 힘겹게 앉는다. 혼자 장을 보는 것도 고독한 일이었다. 자판기에서 뽑은 음료를 한 번에 삼킨다. 캐릭터 음료에 꽂힌 빨대를 문 아이가 신난듯 발목을 짤랑거린다. 지훈의 무릎에 앉아 방싯거리는 얼굴이 꽤 귀엽다. 이런 맛에 자식 키우는 걸지도 모르겠다.
“조금만 더 늦게 커. 아빠도 후회 없이 맘껏 안고 다니게.”
“아바!”
“맞아, 아빠도 그렇게 생각해.”
힘들어도 작은 몸 하나 안을 힘은 거뜬한 지훈은 아이와 일어나 눈을 맞춘다. 너 하나는 꼭 지키겠다는 아버지의 눈빛이었는데, 쪼꾸미는 그것보다 조금 더 급한 것이 있다.
“……쌌어?”
“아바…….”
말을 줄이는 것까지 똑 닮은 부자가 화장실로 사라진다. 초보 아빠 지훈에겐 치트키 아기 물티슈가 있다. 10분 뒤 새아기, 새 삶으로 당당히 나온 쪼꾸미가 뒤늦은 사랑의 눈빛을 건넨다. 지훈은 와이프가 보고 싶었다.
“안 돼. 엄마 줄 거야.”
뭉그러지지 않게 장미꽃을 조수석으로 뺀 지훈은 뒷자리 카시트에 아이를 앉혔다. 안전벨트를 두 번 확인한 그는 운전석에 앉아 룸미러를 조정한다. 제 딴에도 쇼핑이 힘들었는지 아이는 졸림으로 가득하다. 때마침 걸려온 영상 통화에 지훈의 표정이 밝아진다. 화면을 돌려 잠들락 말락 꾸벅거리는 아이를 비추자, 단전에서부터 끌어올린 애교 많은 목소리가 아이를 부른다. 아바! 아바! 청개구리는 엄마를 아빠라고 불렀다.
― 엄마 여기 있어! 울 애기 모해?
― 애기 장 봤어.
― 남편 말고 울 애기.
― 와, 이건 좀 서운한데.
지훈은 정말이지 서운하다. 쪼꾸미가 태어난 이후부터 와이프 관심에서 밀린 그는 생물학적으로 당연한 이치라는 걸 인정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질투가 났다. 최근에도 둘이서만 같이 잔 적이 없다. 가운데는 항상 아이가 껴있다. 물론 지훈도 아이를 목숨 보다 아끼지만 새벽만큼은 부부의 시간을 갖고 싶기도 했다. 혹여 자신만 애끓는 건 아닐까 지훈은 걱정한다. 아직 정으로 살기에는 자신의 남성이 와이프만 보면 불끈 솟구치는데.
― 훈, 오늘 밤에 뭐해?
― 왜.
― 와인 사갈까?
― 마시고 자게?
― 자기랑.
― 애기 있어.
― 그러니까 여보 할 일은 뭐겠어? 일찍 재워서 애기 방에 눕혀야지.
지훈은 이제 서운하지 않다.
― 울 애기, 나 올 때까지 딱 기다려.
지훈은 초조하다. 작업실에서 마우스를 딸각거리면서 계속해서 시계만 보고 있다. 넓은 품에 안겨서 새초롬하게 자신을 올려다보는 뾰푸집과 눈이 마주친다. 오늘은 같이 엄마 데리러 갈까. 헐레벌떡 마루에 나간 아이가 신발을 꿰어신는다. 좌우 반전 착용이 특기인 아이의 신발을 벗겨 제대로 신기던 지훈이 픽 웃는다. 언젠가 짝짝이 슬리퍼를 신고 뛰쳐나갔던 자신이 떠올랐기에.
“이런 것까지 안 닮아도 돼.”
추운 날씨에 목도리를 둘러맨 아이가 엄마를 발견하자마자 뒤뚱뒤뚱 달려 나간다. 똑같은 목도리를 멘 지훈이 반달 눈으로 웃는다. 신난 쪼꾸미는 부모의 손을 잡고 다리를 구른다. 엄마는 팔 빠질까 걱정이고, 아빠는 어떻게 하면 더 높게 날려줄지 걱정이다. 세계 각국의 아버지가 그렇듯, 지훈은 옆구리에 아이를 끼고 줄행랑을 친다. 아내는 남편과 아들의 뒤를 쫓는다. 아들은 재밌어 죽겠다.
“선물이래.”
“진짜? 엄마 주는 거야?”
귀여운 아들이 제 몸만 한 장미꽃을 내민다. 높이 올려 건네주다가 기우뚱거리는 모습까지 깨물어주고 싶다. 카드에는 ‘엄ㅁ ㅏ 사란헤요’ 삐뚤빼뚤 적혀있다. 오늘이 무슨 날이냐고 물으니 쪼꾸미는 매일이 엄마 생일이라고 말한다. 기똥차게 다정해 미쳐버리는 저 아들을 누가 낳았지? 내가 낳았지. 영재 학원 보내야겠지? 당연히 영어 유치원도 보내야겠지. 남편, 당신 생각은 어때?
“태권도 시켜야 돼.”
“또!”
“발재간이 남다르다니까.”
“권순영이 본인 태권도 학원 등록하라고 꼬셨지?”
“걔가 잘해.”
“안 돼, 무조건 영어 유치원 보낼 거야.”
“보내. 저녁에 태권도 하면 되니까.”
기다렸다는 듯 쪼꾸미가 짜잔- 손바닥을 펼친다. 흰 띠다. 사실 지난주에 트라이얼을 받고 왔는데 이대로만 하면 권순영 사범님이 겨루기는 시간 문제라고 했단다. 고사리손을 펼친 아이는 벌써 지훈이 준 사탕이 물려있다. 어린 나이에 뇌물 맛을 알았다.
처마에 알전구를 주렁주렁 매단 안우재가 반짝인다. 신상 레고 상자를 지훈의 머리 위에서 오픈한 효자가 레고 덩어리를 우르르 쏟아냈다. 지훈은 홍당무 같은 통통한 다리를 붙잡고 있을 뿐 별말이 없다. 끝났어? 딱 세 마디로 아들의 잘못을 덮었다.
“오늘 거의 30만 원 쓴 것 같다.”
“또 사달라는 대로 막 사줬지?”
“뭐 어떡해, 계속 엄마만 찾는데.”
타코야키 가게 직원으로 변신한 지훈은 굴리기에 열심히다. 옆에서 파스타 면을 줄줄이 턱에 매달고 꺄르륵 웃는 리틀 지훈은 잘게 여민 문어만 먹다가 하이체어에서 꾸벅꾸벅 졸았다. 어떤 꿈을 꾸고 있길래 자는데도 웃고 있는 걸까. 엄마 꿈인가? 아빠 꿈인가?
“여자친구 꿈.”
“여보야, 나 지금 감동받으려고 했는데.”
“현실적으로 엄마아빠 꿈꾸면서 웃는 건 불가능해. 건담 사준 아빠라면 모를까.”
“아, 그걸 또 샀어?”
“방금 내가 뭐라고 했지?”
쪼꾸미를 아이 방에 눕힌 지훈은 식탁에서 와인을 땄다. 입안에 머금은 포도주가 내 입술로, 턱선으로, 목으로, 속옷으로 흘러간다.
“지금은 아빠 말고 남자.”
7장. 학부모 이지훈
― “그림에 약간 소질이 있는 것 같지 않아?”
― “크레파스로 선 하나 그렸는데?”
― “어, 아니다. 음악이다.”
― “실로폰을 손바닥으로 쳤잖아?”
― “요리가 가장 맞는 것 같기도 한데.”
― “얘는 손으로 토마토 꽁다리를 찢어.”
― “혹시 건축?”
― “레고를 막 던지고 있는데?”
― “봐, 리코더를 너무 잘 불어.”
지훈은 입술을 씰룩거렸다.
― “곡의 흐름이…….”
새벽에 본 EBS 특강 〈아이와 소질>을 풀 시청한 지훈은 하루에 하나씩 재능이 될 만한 것들을 사 왔다. 이번 주는 목관악기였는데, 음계조차 알지 못할 나이의 바람 빠지는 호흡을 듣다 귀여움에 몸서리치는 그였다. 소리만 질러도 명창이 될 것만 같다는 부모의 마음이랄까.
― “손놀림이 나쁘지 않아.”
― “옷은 갈아입고 분석하자.”
― “악보를 대하는 눈빛이.”
― “미쳐.”
고슴도치 사랑은 밖에서도 끊이질 않았다. 어느 정도 소통이 가능한 세 살이 되었을 때, 지훈은 자신과 꼭 닮은 아이의 손을 잡고 아침 산책을 자주 나갔다. 산책의 용도는 산뜻한 공기를 마시는 것보다 길가에 있는 가게를 터는 일이었는데, 어느 날은 너구리 가방에 마카롱, 실 팔찌, 미니 플라스틱 컵, 외떡잎식물을 가방에 넣고 카페로 들어왔다. 아주 동네의 명물이었다.
― “일찍 왔네? 둘이서 아예 가게를 매입하지 그랬어?”
― “쌍떡잎식물과 외떡잎식물의 차이점이 뭔지 물었더니 배아의 과정을 설명하더라고. 멋지지.”
― “멋지다. 근데 집에 화분만 몇 개일까?”
아이가 뒤로 숨긴 꽃을 내밀었다.
― “이러면 화를 못 내잖아.”
― “그게 우리 산책의 목적이야.”
붕어빵인 부자가 아침 마실을 돌아간다.
그가 한 팔에 아이를 안고 나머지 한 손은 뒤로 뻗어 고개를 돌렸다.
― “울 애기 빨리 와.”
내게 ‘울 애기 빨리 와’라는 말을 집에서도 그가 빈번히 사용했을 때, 정한은 아이를 위한 만 3세 글쓰기 교실을 한참 화상으로 진행 중이었다. 멀리서 들려오는 지훈의 앙증맞은 목소리에 정한은 공룡 탈을 쓴 채 아이에게 말을 이었다.
― “우리 꼬맹이는 저런 나쁜 말 배우면 안 돼, 알겠지?”
― “웅.”
― “삼촌 공룡 멋지지? 삼촌처럼 잘생기고 훌륭한 공룡이 되어야 해.”
― “웅.”
― “우웅, 착하다.”
사각지대에서 정한을 주시하고 있던 지훈은 불쑥 휴대폰에 얼굴을 내밀었다. 직접 작곡 작사한 공룡송을 부르다 지훈과 눈이 마주친 정한은 ‘3절은 지훈이가 작사할래?’라며 태연하게 물었다.
― “애한테 이상한 거 가르치지 마.”
― “교본으로 글씨 알려주고 있잖아.”
― “형은 병원 쉬는 날이 손에 꼽으면서 집에서 뭐 해. 이럴 때 누나랑 나가서 데이트라도 하든가.”
― “울 애기 출근했어.”
이미 정한은 지훈의 ‘울 애기’ 습관에 전염된 듯했다.
아이가 유치원에 들어 갈 즈음엔 내원에서 열린 ‘너도 나도 명랑 운동회’에 참가했다. 그날은 젊은 아빠 지훈의 승부욕 피크이자 자랑스런 나의 이공계와 예술인 친구가 가담한 체육 모임이기도 했다.
발야구 대진표
피카소 반 VS 고흐 반
고흐 반 아빠 대표로 출전한 3번 선수 지훈은 핸디캡으로 제 몸만 한 타이어를 부착했다.
― “에이, 어깨에 거는 건 반칙 아니지. 어쨌든 ‘같이’ 달리기만 하면 되잖아.”
성깔 하나는 승관 못지않은 지훈이 번트 후 1루로 뛰기 시작했다. 3루에서 서성이던 공룡 승관은 재빨리 4루로 진출했다.
― “고흐 반 아버지들! 집중하세요! 우리 역전 가능 오케이? 난 오케이!”
벤치에서 학부모들에게 요구르트를 나눠 주던 석민은 승관의 외침에 반사적으로 두 주먹에 힘을 주었다. 성량이 커서 그렇지 민주화 운동권 선수는 절대 아니다.
― “자랑스런 동무들! 우리 모두 힘내자!”
역전극을 노렸던 고흐 반은 끝내 3점 차이를 이길 수 없었다. 모두가 흙먼지를 뒤집어쓰고 벤치로 걸어갈 때, 유유히 경기장에서 대역전극을 노리는 자가 있었으니.
― “나야 뭐 일상이지.”
(상대 팀에서 한 번만 봐주는 게 어떨까? 라는 얘기를 듣자마자 조건부 쉬운 무릎 꿇어버리기.gif)
학부모도 아닌데 왜 저렇게 열심히 할까 생각해본다. 하지만 가만히 생각해 보면 이들은 뭐든 다 열심히 했다.
유치원 운동회에서 승부욕을 다지는 지훈을 필두로 축구 경기에 출전한 이들은 한 조기 축구회 회원 아버지들이 몰려있다는 강팀을 만나게 됐다. 그러나 연희동 조기 축구회 주장 정한은 발야구 기세와 달리 의기양양한 모습이었다.
― “무조건 골대로 차. 저 팀은 골키퍼가 약점이야.”
등판한 조기 축구 회원들과 과거 경기를 했던 기억을 떠올린 의료계의 키커 윤정한 선생님께서는 5대 1로 적군을 전멸하고 트레이드마크인 긴 머리를 쓸어 넘겼다.
― “상품권 다 내 거라고!”
요즘은 스노우볼 토끼가 유행이라던데 꼭 닮은 것 같기도 하고.
― “진정한 승부였다.”
― “직장 스트레스를 유치원 운동회에서 풀고 갈 줄은 상상도 못 했다.”
― “내년에 또 했으면 좋겠어. 정한이 형도 올 거죠?”
― “내년엔 쪼꾸미 아버지로 와도 돼?”
― “응, 안 돼.”
쪼꾸미를 안아 들고 수돗가로 건너가는 지훈의 뒷모습이 든든하다. 확성기로 들을 수만 있다면 아마 그들은 이렇게 말하고 있을 거야.
― “아빠는 네 운동회 때마다 평생 뛸 수 있어. 그러니까 넌 건강하게 열심히만 커.”
― “웅.”
― “아빠 뛰는 거 아까 봤어?”
― “웅.”
― “……너 엄마 품에서 자고 있던데?”
7장. 그리고 또다시 우리는
― “왜 삼겹살데이는 아무도 챙기지 않는 거야? 나 정말 속상해.”
석민의 자나간 삼겹살데이 타령으로 운동회가 끝난 후 삼삼오오 안우재에 모여 고기를 구웠다. 처마와 처마 사이에 달아놓은 꼬마전구와 조명을 보며 승관은 감탄했다.
― “이쥰은 이러려고 안우재를 지었나 보오.”
― “지훈, 땅값 장난 아닌데 어떻게 샀어?”
― “대출.”
― “이제 얼마나 남았는데?”
― “다 갚았지롱.”
나는 자유의 모미에요. 리틀 주니어는 지훈과 똑같은 포즈로 하늘을 날았다.
― “야, 돈이 좋긴 좋다. 난 언제 이런 집 짓고 살아 보냐.”
― “낑깡은 잘 있냐.”
― “어엉, 씨가 말라비틀어졌더라.”
― “축하한다.”
― “내 팬들은 왜 내 얼굴은 안 보고 낑깡만 몰래 따고 가냐?”
― “그냥 집 이름을 ‘낑깡의 집’으로 바꿔.”
― “고맙다. 기분 낑깡 같고 좋다야.”
정한 맞춤 특수부위 고기를 냉장고에서 꺼내 온 지훈은 바비큐 그릴에 차례대로 펼쳤다. 다가올 가을 캠핑은 자신이 책임지겠다고 다부지게 말하는 정한이다.
― “형은 병원을 그만두지 않는 이상 캠핑을 못 가.”
― “동생아, 악담하니?”
― “형, 지금도 늦지 않았어요. 연예계 진출합시다.”
― “여기서 더 인기가 많아지면 우리 예쁜 공주 속상해해. 난 더이상 만인의 남자가 아니니깐. 다들 이해하지?”
― “여주, 나 갑자기 담배가 피고 싶어.”
― “적응되면 괜찮아질 거야.”
― “될 리가 있나.”
저녁 식사 후 멍하니 침대에 누워있던 지훈이 발가락을 꼼지락거렸다. 그리고는 이따금 고개만 들어 허공에 말을 뱉었다.
― “쓰읍, 어허. 안 돼.”
도도도- 거실을 뛰어다니는 작은 발자국이 순간 멎는다. 이내 안방으로 들어온 곰도리 발가락이 침대 위로 폴짝 넘어갔다.
― “안 된다고 하니까 허락 맡으러 왔네.”
― “웅.”
― “안 돼.”
― “우웅.”
― “……안 돼. 진짜로.”
― “웅…….”
― “……돼. 엄마 올 때까지만 돼.”
바베큐 파티 후 내가 배웅을 나간 사이, 천하장사 소시지를 몰래 다섯 개나 해치운 부자가 조용히 증거를 인멸한다.
― “엄마한테 말하면 안 돼.”
― “웅.”
― “아빠 쫓겨나.”
― “웅.”
― “어째 대답이 미심쩍스럽다.”
현관문을 닫고 안으로 들어가자 토덕토덕 거실로 달려온 아이가 그동안 저지른 부정을 내게 알림장처럼 보고했다. 거짓말을 못 하는 입술로 천하장사 소시지를 아빠와 다섯 개나 까먹고, 방금 아빠가 민 청소기를 타고 놀다가 넘어져서 발등이 까졌으며, 어제 놀이터에서 마음에 든 친구에게 다가갔다가 된통 까인 것까지.
늦은 밤, 마당 밖을 내다보며 명상으로 벌을 받고 있는 부자의 은밀한 대화가 이어진다.
― “어제는 우리가 좀 섣불렀어. 마이쮸는 아빠 때나 통한 거지, 지금은 기프티콘 쏴야 돼.”
― “……웅.”
― “내일 걔한테 뭐 좋아하냐고 물어봐. 어제 빌드업을 잘했어야 했는데…… 엄마 온다.”
똑같이 눌린 뒷머리와 같은 자세로 멍하니 밖을 내다보는 부자 사이에 코코아를 든 내가 슬며시 자리에 낀다.
기프티콘은 엄마가 줄게. 여자 마음은 엄마한테 물어봐야지. 아빠는 엄마한테 고백만 할 줄 알지 다른 건 아무것도 몰라.
― “왜에. 나 다른 것도 잘해.”
― “그래? 보일러 대신 장작불 떼고 싶은데 별채 엎어서 전통식으로 만들자. 일주일이면 되지?”
― “……어우, 사랑한다고.”
― “봐, 틈만 나면 고백이라니까.”
봄바람.
여름냄새.
가을향기.
겨울내음.
비슷한 색의 옷을 입고, 사이즈만 다른 같은 신발을 신고, 고요한 하늘 아래 한 지붕 속 아옹다옹 다리를 얹는 세 사람.
누군가 우리의 근황을 묻고 있다면 이렇게 답하고 싶다.
― “쟤 소세지 하나 더 먹었어.”
우린 꽤 동화처럼 살고 있다고.
Q. ㅇ ㅏㅃ ㅏ ㅁ ㅓ ㅎ ㅐ
A. 엄마 그려.
Q. ㅇ ㅖㅃ ㅓ ?
A. 당연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