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계절의 우리
w.1억
"어디 갔다와?"
"아, 깼어? 잠깐 친구가 보자고해서.."
"이렇게 늦은 시간에 보자고 한다고?"
벽에 달린 시계를 보면 벌써 새벽 3시가 되었고, 주혁은 대충 고개를 끄덕인다. 왠지 모르게 자신의 눈을 바라보지않고 피하는 주혁에 성경이 한숨을 내쉬었고, 정적이 흘렀다.
제 12화_
재회
온갖 욕들을 쏟아 낸 혜선이 정신을 차리고나서 주변을 둘러보았다. 어머 여기가 어디람. 옷도 그대로고, 화장은 번져있다. 내가 술취해서 모르는 사람 집에 끌려오기라도 한 건가. 문을 열고 나와 집 안을 대충 둘러보며 '누구 없어요?'외쳐도 아무 대답도 들리지않는다. 애들 장난감은 널려있는 걸 보니.. 나 지금 애아빠랑 놀다가 집에 온 거야? 이혼남인가.. 날 집으로 데리고 온 걸 보니.
"술 취한 사람을 데리고와서 재웠으면 깨우고 갈 것이지."
식탁 위에는 잘 차려진 밥상과.. 메모지가 있었다. [밥 먹고 가요] 글씨 하나는 더럽게 못 쓰네.
"어이 대표. 안녕? 늦었네 오늘은."
"아, 안 안녕하세요 부회장님."
"안 안녕하세요? 됐고, 네 따까리는 어딨어?"
"제가 쉬라고 했습니다. 무슨 볼 일이라도?"
"그렇게 아랫놈들 자주 쉬게하면 버릇 잘못 들어. 우도환 그 자식 몇 번 쉬게하는 거야?"
"제가 알아서 할게요. 신경쓰지 마세요."
"뭐..?"
"그리고. 아랫놈들 아니고 비서요."
선호는 늘 그렇다. 강자에겐 강하고, 약자에겐 약하다. 그런 선호가 얄미운지 부회장이 '빽 믿고 나대네'하며 주먹을 꽉 쥐었다.
- 그래? 집에 없길래 전화해봤어.
"잠깐 아빠한테 와있어. 며칠은 있다가 갈게."
- 천천히 와~
"으응."
혜선과 통화를 마친 열린이는 힘겹게 입을 여는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바나나 먹고싶어? 바나나 사올까?"
고개를 끄덕이는 아버지에 지갑을 챙겨 병실에서 나온 열린이는 어머니와 마주쳤고, 둘은 어색했다. 서로 아무말도 오고가지않았고, 어머니가 먼저 입을 열었다.
"언제왔대."
"한참 전에. 어디갔다와. 아빠 혼자두고."
"연희엄마가 와서."
"아.. 난 아빠가 바나나 먹고싶다고 해서."
"있으니까 사오지 마."
"…그래."
손짓으로 구석진 곳을 가리키기에 열린이 고갤 돌려 과일 바구니를 확인했다. 엄마가 직접 산 건 아닐테고..
"누가 사온 거야?"
"사오긴 누가 사와. 나간 김에 사온 거지."
"시키지 나한테."
어머니가 아버지에게 바나나를 먹여주었고, 열린이는 그 옆에 서서 둘을 바라보았다. 이럴 때 보면 사이 엄청 좋은 것 같단 말이지.
"언제 가려고."
"나 며칠은 여기서 지내려고. 그래서 옷들도 챙겨왔는데."
"이제서야?"
"늦었다는 거 알아. 나중에 후회하기 싫어서 지금이라도 계속 아빠 옆에 붙어있으려는 거고."
"으유.. 못된 년. 욕 얻어 쳐먹는 게 그렇게도 좋디?"
"엄마한테 욕 먹는 건 그렇게 기분나쁘지도 않아서 괜찮아."
어머니는 '미친년..'하며 고갤 저었고, 열린이는 웃으며 어머니의 옆에 앉아 물었다.
"나한테 궁금한 거 없어?"
"없어, 이년아."
"왜 없지? 하나뿐인 딸인데. 적어도 밥은 먹었는지, 무슨 일은 없었는지 궁금할 거 아니야."
"잘 먹고 다니겠지."
"엄마."
"정신 하나도 없으니까. 여기서 지낼 생각 말고, 집에 가."
"아빠 계속 힘들어하시는데 어떻게 집에 가."
"그래. 평소에는 관심도 없었잖아.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알아서 다 할테니까 가라."
"엄마 왜 그래?"
"……."
"선호씨한테 왜 그렇게 차갑게 대하고?"
"선호씨?"
"내 애인. 처음봐서 얼결에 마주쳐서 당황했을 법도 한데 정직하게 살갑게 인사하는 사람한테 왜 그렇게 차갑냐고. 그 사람이 얼마나 착한 사람인데. 괜히 나까지 민망하게 만들어? 그 사람한테 내가 얼마나 미안했는지 알아? 뭐가 문제야."
"처음에 네가 주혁이 데리고 왔을 때도 좋은 사람이라고 했어. 알아?"
"그 둘은 달라."
"뭐가 달라."
"선호씨는 남한테 피해주기 싫어하고, 자기가 피곤해도 나한테 다 해주려고 하는 사람이야. 그리고 하루에 몇 번씩은 나한테 예쁘다고 해주는 사람이라고."
"고작 며칠을 만났다고, 벌써부터 착한 사람이라고 확신하는데."
"엄마도 참."
"모르겠다. 어차피 모든지 다 네 맘대로 할 거. 네가 다 알아서 해라."
"우리 엄마지만 진짜 못 됐어."
"뭐?"
"그래. 엄마가 걱정하는 마음에 나한테 모질게 대하는 거 이해 해. 근데 엄마는 너무 심하잖아. 조금이라도 내 뒤에 서서 날 이해해주기는 커녕, 어떻게는 엄마 뜻대로 다 이뤄져야 되고, 엄마 말이 다 맞잖아. 내가 행복하든 말든.. 그런 건 신경도 안 쓰고."
"……."
"그래. 엄마 말대로 나 여기서 자면 나도 힘들 것 같으니까. 그냥 갈게."
열린이 병실에서 나가버리자, 어머니는 한숨을 내쉬며 아버지를 보았다. 당신이 좀 참지 그랬어. 그런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남편에 눈물이 고인다.
도환의 손을 꽉 잡은 다섯살 된 여자 아이는 회전목마 줄에 서서는 도환을 올려다보며 웃었다.
"근데 집에 아줌마는 집에 갔을까?"
"아줌마?"
"집에! 소리지르면서 자던 아줌마."
"갔겠지?"
"그 아줌마 예뻐서 조금은 마음에 들어!"
"오름이도 크면 그 아줌마보다 더 예뻐질 건데."
"그건 당연하지!"
"당연해?"
"응!"
"바보."
"오늘 성경 누나 왜 이렇게 뜸해?"
"글쎄."
"너는 여자친구 걱정도 안 되냐? 맨날 카페 찾아오다가 오늘 안 오잖아."
"바쁜가보지."
"연락을 해봐."
"해봤는데. 안 받아."
"싸웠냐..?"
"뭘 싸워.."
새벽에 주혁이 나갔다 온 이후로 성경은 연락이 잘 되지도 않았고, 카페에 찾아오지도 않았다. 점심시간이 되자, 여대생들이 카페에 몰려왔고.. 주혁은 아무일도 없었다는 듯 손님을 받는다.
띵동- 초인종 소리에 성경이 팩을 하다말고 인터폰을 확인한다. 집에 찾아온 적 없었던 주혁이 집에 찾아오자, 놀란 듯 급히 팩을 떼어내 쓰레기통에 넣고선 문을 열어준다.
"집에서 뭐해? 연락도 안 받고."
"그냥 tv보고.."
"전화는."
"……."
"톡은 보지도 않고.. 나는 또 아픈가 싶어서 죽 좀 사왔는데."
"아파."
"어디가 아파."
"마음이 아파. 됐냐?"
성경이 울먹이며 주혁을 보았고, 주혁이 말 없이 성경을 안아주었다.
"네가 안 찾아올까봐 마음이 더 아팠어."
"그 날 새벽에 누구 만났었는데?"
"……."
"말 못 해?"
"친구 부모님이 아프셔서 병원에 잠깐 다녀왔어."
"그 새벽에?"
"몇년을 알았던 분이신데.. 안 뵌지 오래돼서.. 잠깐 보려고 갔던 거야. 뵙지도 못 하고 왔어."
"치."
"그거 때문에 삐졌어? 참.. 이성경."
"나 정도면 엄청 쿨한 거야."
"알겠습니다. 죄송해요~~"
성경은 뭐라고 하려다가도 싸울까봐 주혁에게 아무말도 하지 못 했다. 분명 뭔가 숨기는 것 같은데. 물어볼 수가 없었다.
"여보세요~~~"
- 열린씨 어디~?
"병원이죠!"
- 병원에서 뭐해요.
"그냥.. 엄마랑 좀 다퉈서요.. 집에 간다고하고 나오기는 했는데. 괜히 마음이 그러네요.. 그냥 앉아있죠 뭐."
- 잠깐 나올래요?
"네? 어딘데요?"
- 정문쪽 볼 수 있어요?
핸드폰을 귀에 댄 채로 창밖을 본 열린이 곧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병원 앞에 차를 세워둔 선호가 차에 기대어 서서는 손을 흔들고있자, 열린이는 기분이 풀린 듯 하다.
"금방 내려갈게요!"
- 천천히 와요. 나 시간 엄청 많아요.
"네에!"
- 뛰지 마요. 뛰는 것 같은데?
열린이 급히 뛰다가 간호사분들의 눈치를 보며 천천히 걸었고, 열린이 가고나서야 간호사들이 창밖을 내다보았다. 누구한테 그렇게 인사를 한대...? 궁금한지 간호사 몇명이 밖을 보더니 웅성거린다.
"뭐야.. 저거 엄청 비싼차 아니야?"
"남자친구인가??"
병실에서 나온 열린이의 어머니는 간호사들이 하는 소리를 듣게 되었다. 별로 들을 생각도 없었는데. 열린이의 이름이 들려서였다.
"열린씨도 참 부럽다.. 잘생기고, 비싼차 탄 애인이라.. 나는 저런 사람 언제 만나봐?"
"저봐.. 열린씨 사랑받는 거 한눈에도 보인다. 이야.."
한참을 서서 간호사들의 얘기를 듣다가, 왠지 씁쓸한 듯 표정을 짓는다.
"짠!"
"와.. 이게 뭐예요.. 일도 바쁘면서 이걸 또 언제 사왔어요.."
"열린씨 생각나면 사고싶은 게 더 많은데. 스스로 진정 좀 시키느라 고생했어요."
빵, 과일, 양갱, 홍상즙 등등 맛있고 건강에 좋다는 것들은 다 챙겨온 선호에 열린이 울먹인다. 선호가 자신의 볼을 톡톡- 검지손가락으로 건드리자.. 열린이 바보처럼 '제 얼굴에 뭐 묻었어요?'했고, 선호가 웃으며 말한다.
"뽀뽀 해달라구요. 와 여기서 자기 얼굴에 뭐 묻었녜."
"ㅋㅋㅋㅋㅋㅎㅎㅎㅎ."
대충 뽀뽀를 해주고선 떨어진 열린이는 얼굴이 붉어진 선호를 보고 웃음을 보인다.
"이건 비타민이에요. 어머님 잠도 못 주무실 텐데. 이거 꼭 드시라고 해요."
"진짜 안 그래도 되는데.."
"짐이 좀 많아서요. 병실 앞에까지만 들어다줄게요."
"…괜찮아요! 제가 들고가도.."
"어머님이랑 마주치면. 얼굴에 철판깔고 인사드리죠 뭐."
"선호씨.."
"괜찮아요. 제가 마음에 안 든다고 하셔도! 마음에 들 때까지 들이댈 거니까요. 제가 또 한 들이댐 하죠."
이러는데 어떻게 선호씨를 미워할 수 있을까. 엘레베이터에서 내려서 병실 앞에 그가 박스들을 다 갖다놓아주었다. 하나씩 볼펜으로 상자에다가 이건 뭐고 이건 뭐라며 써주는 그에 웃음이 나왔다. 그러다가도 혹시라도 엄마가 나와서 그를 보고 또 무시할까봐 그게 너무 신경쓰였던 것 같다.
"나오지 마요."
"아니에요. 마중은 가고싶어요!"
"내가 열린씨 보고싶어서 온 건데. 열린씨 편하게 있었음 좋겠어요."
"말도 참 예쁘게 하네에."
"어머님 걱정하시겠다. 얼른 들어가봐요."
마중나가려고 그를 따라가려니, 그가 내 어깨를 잡아 돌리며 말한다. '어머니랑 꼭 화해해요~' 그 말에 뒤돌아 그를 보면, 그는 내 마음을 안정시키듯 웃어주었다. 이 사람 없었으면 나 힘들어서 어떻게 지냈을까.
"다녀왔습니다~~~"
오름이 집에 들어오자마자 아무도 없는 집에 인사를 했고, 도환이 웃으며 오름의 가방을 챙긴다. 그러다 거실에서 들리는 tv소리에 도환이 거실을 보았을까.
"아직도 안 갔어요?"
"나 재워준 사람이 누군가.. 하고 너무 궁금해서 말이야. 얼굴이라도 보고 가려고 했더니. 그쪽이었어요? 그것도.. 애 아빠?"
오름이 안녕하세요- 하고 인사를 했고, 혜선은 대답도 않고 도환을 올려다보았다. '방에 들어가있어 오름아' 도환의 말에 오름은 방에 들어갔고, 혜선이 팔짱을 낀 채로 도환을 바라본다.
"밥 안 먹었네요."
"누가 알아요. 거기에 약을 탔을지."
"씻기는 했고."
"하루종일 안 씻을 수는 없잖아요."
"이제 얼굴 봤으니까 가시죠."
"근데요. 그쪽이 왜 저를.. 아니.. 내가 왜 그쪽 집에 있어요? 설마."
"쓰레기더미에서 자는 거 데려와서 재워줬더니 고맙다는 말은 커녕 변태취급을 하시네요."
"제가 무슨 쓰레기더미에서 잤다고."
"옷에도 묻었잖아요."
도환이 턱짓으로 가리키자, 혜선이 옷을 살펴보더니 뒤늦게 헛구역질을 한다.
"옷 빌려줄테니까 입고 가세요."
"됐구요."
혜선이 도환을 지나쳐 걸어 구두를 신으며 말한다.
"애아빠일 줄은 몰랐네요. 대박.."
혜선이 나가고나니, 방에서 나온 오름이 도환의 손가락을 잡으며 말한다.
"아줌마 목소리 짱 커."
"저 사람은 아줌마 아니야."
"그럼 뭔데?"
"음.."
"음?"
"이모..."
"이모?"
"이모지."
"무슨 이런 걸.."
"요즘 어머니께서 속이 안 좋으시다고 빨간 음식은 삼가해달라고.. 게장 좋아하신대서 간장게장으로 챙겨왔습니다. 그리고 이 약은 태국에서 직접 받아 온 약인데요. 눈에 좋다고 합니다. 어머니께서 눈이 안 좋다고 그러시더라구요. 이건 하루에 한알씩 드세요. 그리고 이 흑생강은 피로회복,두통에 좋아서 끓여 마시면 좋다고 합니다."
"이걸.. 다.. 선호씨가 시킨 거예요??"
"대표님께서 하루종일 걱정하시느라 일에 집중을 못 하십니다. 그래서 제가 직접 챙겨드린다고 말씀드리고 온 거니 부담갖지 마세요."
병실 안에서 과일을 깎던 어머니는 병실 밖에서 들리는 도환과 열린이의 목소리에 잠시 멈춰있다가도 다시금 과일을 깎는다. 열린이의 앞에 서있던 도환이 목례를 하고선 뒤돌아 겆자, 열린이 한숨을 내쉬며 혼잣말을 한다.
"나는 선호씨한테 잘해준 것도 없는데.. 맨날."
그렇게 다음 날.. 선호가 점심시간에 들러 열린과 어머니가 먹을 고급 도시락을 주고선 간다. 그리고 그 다음 날.. 도환을 통해 망고 한박스와 몇단으로 쌓아진 도시락을 전해준다. 또 다음 날 선호가 아침에 잠깐 들러 샐러드와 빵을 갖고 온다. 그리고 또 다음 날.. 몸에 좋다는 즙과, 열린이 마실 음료수를 챙겨온다. 선호가 며칠동안 정성들여 무언갈 해줘도 어머니는 눈 한 번 깜빡하지않고 고맙단 소리 하나 없었다. 열린이는 그런 어머니가 미운지 입만 열면 다투기 바쁘다. 일주일이 더 지난 지금.. 아버지의 상태는 더 악화되었고, 열린과 어머니는 그런 아버지를 보고 숙연해질 뿐이다. 이제 정말 얼마 안 남았다는 의사의 말을 듣고 나온 열린이는 복도에서 마주친 사람을 바라본다.
"괜찮냐."
"…너."
주혁이었다. 열린이의 옆에 서서 내려다보고 있는 건 분명 주혁이 맞았다. 열린이 당황한 듯 주혁을 한참 바라보면, 엘레베이터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린다. 그리고 엘레베이터에선 사랑하는 사람이 내린다.
"열린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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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
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