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유 / 없던 일로 치자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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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년 전.
무언가를 새로 시작하기에도 그만두기에도 애매한 9월.
난 오랜 연인과 이별을 맞이했다.
손끝이 둥글어 머리를 쓰다듬을 때
불편함이 없어 좋았던 그 남자는
그렇게 내 청춘까지 다 가져간 사람이었다.
찬란했던 대학생활
힘들었던 취준기
조금씩 안정되어가던 사회초년생
그렇게 나이가 들어
삶이 익숙해질 때가 되면
꽃피는 봄에 바다가 보이는 넓은 정원에서 식을 올리자며,
내 청춘도 모자라 평생을 함께하고 싶어했던
욕심이 많던 사람.
부모도 없어 늘 혼자였던 내게
큰 안식처가 됐던 그는
9월 7일 밤 10시 37분
나의 곁을 떠나버렸다.
"교통사고였대.
옆에 탔던 여자는 멀쩡하고,
이 집 아들만 죽었다더라고."
"아이고, 그년 팔자 쎄네."
"아들내미만 불쌍하게 됐지 뭐."
그가 없는 내 세상은 무너졌고,
무너진 세상은
그 어떤 것도
날 지켜주지 못했다.
"김혜진"
익숙한데 편하지 않는 목소리였다.
그의 장례식장 앞에서
들어가지도 못하고 가만히 서있는데
누군가 내 어깨를 잡아왔다.
내가 울고 있었나?
사실 그 시절의 나에 대한 기억은 잘 없다.
떠올리면 대체로
울고 있거나 죽고 있거나.
그의 부재를 온전히 받아들이기엔
난 아직 어른이 되지 못했고,
시련을 견디고 일어서기엔
그는 내 전부였다.
글썽이는 눈물 사이로
까만 정장차림의 이진기가 보였다.
그 뒤로 놀란 얼굴의 동기들까지.
"...아...
...왔어?"
"소식 듣고 너무 놀래서 일단 우리 셋만 왔어.
...얼굴도 많이 다쳤네. 괜찮아?"
"너 괜찮은 거 맞아?
여기 있어도 돼?"
"...아, 난...괜찮..."
"괜찮아도...!
너라도...
...너 몸 챙겨야지."
이진기가 잡고 있는 어깨가 아팠었다.
아마 거기도 상처가 있었겠지.
하지만 그깟 상처가 뭐라고.
내 옆에서 죽은 사람도 있는데.
결국 그날 난
동기들의 부축을 받고
그에게 인사도 못한 채
다시 병실로 올라갔다.
평소 외조하겠다며
내 동기들에게 술이고 밥이고 다 사줬던 그였기에
한 걸음에 달려와준 이들이 고마웠지만
그의 마지막을 함께하지 못했단 죄책감,
바로 옆에서 혼자 살아남았다는 무능력함,
이젠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는 허무함에
난 시들어갈 수 밖에 없었다.
다시 돌아와 현재.
이진기는 대답이 없다.
비어있던 잔에 다시 소주가 따라지고
말없이 소주잔을 든다.
소주잔을 따라
가는 손목을 따라
올려다본 얼굴.
"...물론 기억하지."
홀로 잔을 들고 있던 그는 내 눈을 피하곤 술을 들이켰다.
헐레벌떡 내가 소주잔을 따라 들자,
그도 다시 술을 따르곤 팔을 뻗어 내 잔에
짠.
"많이 힘들었지?"
짠.
"그래도 잘 견뎠어, 너."
짠.
오늘 난 무슨 말을 하려고 했던 걸까.
괴로워서?
아님 외로워서.
어쩌면 말하고 싶었던 게 아니라
듣고 싶었던 건지도 모른다.
버티고 서있는 나에게
그만 잊고 다른 사람 만나라 부추기는 말보다
그동안 잊는다고 고생했다는 말들을
괜히 코끝이 찡해져
웃기지도 않은데 헤픈 웃음을 흘렸다.
"그치? 나 잘 견뎠어.
아~ 대견하다! 진짜!"
목을 타고 넘어가는 소주가 시려
코를 훌쩍이는 나를
이진기는 빤히 쳐다보다
테이블에 떨어진 소주를
손끝으로 문지르기 시작했다.
대뜸,
이진기의 손끝도
참 둥글다 싶었다.
"이제 좀 괜찮아?"
"응, 그럼.
지난 주에 오빠 부모님도 뵙고 왔어."
"...부지런하네."
"참나, 너보단 덜 하거든요?
이번에 프로젝트는 어떻게 따낸 거야?
진짜 요물이라니까."
"내일 친구 결혼식 끝나면 뭐해?"
"아마 뒤풀이 가겠지?"
"내일도 바쁘겠네?"
"아니 뭐,
그렇게 친한 애들 아니라...
요즘 그런 자리 불편하기도 하고."
"왜?"
"...다들 물어봐서."
"..."
"언제 연애하냐고."
짠.
벌써 소주 한 병이 비워졌다.
밑바닥에 찰랑이는 소주를
그의 잔에 마저 따라 붓고
테이블에 붙은 벨을 눌렀다.
딩동-
"난 어때?"
"어?"
"네네~
뭐 드릴까?"
"여기
소주 한 병 더요."
"나, 어떠냐고."
어떠냐니?
뭐가?
이진기가?
연애 상대로?
진짜?
엥?
근데 쟤 왜 웃지?
웃는 게 원래 예뻤나?
언제부터?
아니 근데 갑자기 왜?!
"뭘 대답을 못해
또 물어봐줄까?"
"아니? 아니, 아니!
아니야.
가만 있어봐."
"그래"
"오빠가 내 연애 상대로 어떠냐고?"
"응."
"이렇게 갑자기?"
"갑자기 아닌데"
"...?"
"대답은?"
"...아? 그게 듣고 싶었지 참..."
"..."
"어...그게..."
왜 저렇게 눈을 동그랗게 뜨고 쳐다보는 거야.
술 먹어서 그런가.
얼굴은 왜 달아오르는 것 같지?
갑자기 이 전개가 맞나?
이진기 술 취했나?
아니아니,
내가 취했나?
"..."
"...조, 좋지?"
"그럼 됐네."
"뭐가...?
뭐가...!"
"해줄게. 너랑 연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