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유 / 없던 일로 치자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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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고로 내가 생각하는 연애란,
"혜진 밥 먹었어? 으이구 많이 먹었어?
또 속 아프진 않구?
속 아프면 말해. 오빠가 가서 약 사올게."
포근하고 다정하거나
"누나...
저 한 번만 안아주면 안 돼요?
누나가 너무 좋아서
저 진짜 심장 터질 것 같아서요..."
설레고 간질거리는 것.
"자기..! 오늘 너무 예쁜 거 아냐?
오늘 착장 진짜
백 점 만 점인 것 같아!"
오글거리고 낯간지러워도 서로 사랑을 표현하는 데 있어서는
자신의 마음을 아끼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언제 사라질지 모르는
유한하고 소중한 그 마음을
상대방에게 예쁜 말과 행동으로 전하는 것.
그것이 내가 생각한 '연애'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나는.
어째서.
"뭐긴 뭐야.
밥은 너가 알아서 먹었어야지.
우리가 마주 보고 밥 먹을 상황이냐."
"아 진짜 왜 이렇게 안 나와.
화장실에 전세 냈나..."
이런 놈과 연애를 하게 된 걸까.
차라리 없던 일로 치고 싶은 그 날은
지옥 같던 일주일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
.
.
내일은 고등학교 동창 결혼
모레는 단짝 친구들의 부부 동반 모임
주말 스케줄이 온통 남의 연애사로 꽉 차버린 나는
혼자 주말을 보내기가 점점 벅찬 3년 차 솔로다.
오랜 친구의 결혼도 좋고, 부부 동반 모임에
혼자인 나 불러주는 것도 다 좋다.
그런데,
그래도...
"혜진아 너 마지막 연애 언제지?"
"소개팅 받아볼래? 한 번 갔다오긴 했는데 사람은 괜찮아!"
"너 그러다 진짜 때 놓친다?"
나 불러 놓고 청문회 열었냐.
나도 모르는 내 연애사
너네가 묻는다고 술술 말 할 수 있는 처지가 아니라구.
라는 말이 목 끝까지 차오르지만
결국 난 또 아무 말도 못하고 돌아오겠지.
벌써 정신이 아득해지는 스케줄에
코가 삐뚤어질 때까지 술이나 퍼먹고 싶지만
바쁘다 바빠 현대 사회의 금요일은
이미 연애 사업 중이거나
연애 사업 준비 중으로 바쁜 친구들 빼면
유부녀 아님 워커홀릭.
퇴근하자마자 맥주 한 잔 들이키고
막차 다닐 때쯤 거나하게 취해서
세상물정 모르고 내일 아침까지
푹 잤으면 소원이 없겠구만...
그럴 친구 하나 없는 게 바로 이 사회의 팩트다.
집으로 가봤자
출근 전 어질러 놓은 빨래들 뿐일 거고
혼자 술상 차려 먹을 생각하니
외롭고 혼자 있기 싫어
책상 앞에서 우물쭈물 망설이고 있는데.
"김 대리 뭐해.
퇴근 안 해?"
"...할 거야."
"벌써 6시 반이야."
"...다 부질 없어."
"...
딱 표정 보니 술 필요하네.
친구 없냐?"
아픈 곳만 기가 막히게 찾아내서
안 좋은 기분 더 짜증나게 하는 저 자식은
입사 동기 이진기.
눈치 빠르고 일도 잘해서
승진도 동기들보다 1년 먼저 하고
인사 이동 있을 때면 어느 팀이든 데려오려고
난리부르스인 우리 회사 에이스다.
말만 예쁘게 하면 참 좋으려만
맨날 저렇게 얄밉게 말한다니까.
다른 동기들 다 지방으로 발령나서
본사에 남은 딱 우리 둘인데.
동기 사랑 나라 사랑이라고
좋게 지내면 좋을 텐데. 으휴.
"됐어. 나 친구 많거든?
내일도 친구 결혼식 가야 해."
"결혼할 친구는 있어도
그 친구가 오늘 술 같이 먹어주진 않겠지."
"..."
"...내가
같이 가줘?"
"뭐?"
"술.
내가 같이 먹어 주냐고."
저 새끼 저거 무슨 일이지.
회식은 물론 야유회 가서도
소주 한 잔 마시지 않는 놈이 웬일.
잠시 고민에 빠진 난
이내 미적거리며 정리하던 짐을 가방에 쓸어넣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난 술 먹자고 안 했다.
너가 술 먹고 싶어하는 거 같아서
내.가. 먹어주는 거야.
이거 확실히 해."
"(웃음 참으며)
그래, 내가 먹고 싶었어."
그렇게 나는
그와 술 자리를 가지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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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랑,
울리는 종소리가 예쁜 회사 앞 술집.
옛날에 동기들 많을 때 자주 오다
요근래엔 정말 오랜만이라
종소리만 들었을 뿐인데 벌써 술에 취한 듯
입꼬리가 내려가지 않았다.
"뭐 먹지?
여기 안주 다 맛있어서 뭐 골라야 할지 모르겠어."
"너 두부 김치 제일 좋아하잖아.
그거 시켜."
"그랬나?
그럼 두부 김치하고~
오빤 뭐 먹을 건데?"
"오뎅탕.
날도 추운데."
"아싸 나 오뎅탕도 좋아.
그대로 주문한다?
이모~ 여기 두부 김치랑 오뎅탕 주시고
소주도 한 병 주세요!"
간만에 혼술도 아니고 혼밥도 아니고
진짜 (술로) 불태우는 금요일이 얼마만인지.
이모가 테이블에 소주를 내려놓기가 무섭게
흔들어 깠더니 그가 피식 웃으며 날 쳐다본다.
"너, 내가 술 먹자고 했을 때
솔직히 좋았지?"
"뭐래. 아니거든."
"아니긴.
줘, 니껀 내가 따라줄게."
나의 손끝을 스쳐
차갑고 미끌거리는 술병이
그의 손으로 넘어갔다.
빈 소주 찬을 채우는 소주가
오늘 따라 예쁘게 넘실거렸다.
"짠 해야지?"
"아."
짠.
부딪히는 술잔 너머로.
그의 살짝 올라간 입꼬리가
왠지 떨리는 것 같기도.
공백을 메우는 자연스러운 주변 소음.
입술을 타고 넘어가는 차가운 소주.
여기저기 흩어졌던 그의 시선이 다시 나를 찾아온다.
"그래서.
오늘 술은 왜 먹고 싶었는데?"
외로워서?
아님 괴로워서.
섣불리 대답하지 못하고
그의 눈을 피해 이리저리 눈을 돌렸다.
신입 땐 하루가 멀다하고 왔던 것 같은데.
정말 오랜만이네.
몇년이 지났지만 하나도 바뀌지 않은 인테리어를 둘러보다
문득 몇년이 지났음에도 하나도 바뀌지 않은
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난 뭐가 괴로워서 여지껏
그 자식을 놓지 못하고 있는 걸까.
날 두고 혼자 떠나간 그 놈이 뭐가 좋아서.
"오빠.
3년 전에 나 기억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