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국도 분명히 가지고 있었다. 짧았지만 행복했던 유년시절의 기억, 그 흔한 놀이공원 한 번 가보지 못했어도 누구보다 행복했던 시절이 있었다. 쿠키에게는 뷔가, 뷔에게는 쿠키가. 서로가 서로의 하루를 밝혀주며 수많은 나날들을 보내던 둘이 서로가 알지 못하는 다른 이름으로 다른 삶을 살고 있어서일까, 늦은 재회에도 색이 바랜 기억은 다시 색을 입힐 수 없었다. 함께 지냈던 시간보다 혼자 지낸 시간이 더 길었고, 밝은 기억보다 어두운 기억이 더 많은 정국이었다. 정국의 머릿속을 끈적하게 뒤덮은 어두움은 밝은 빛을 쉽게 덮을 수 있었다. 언제나 혼자였던 정국에게 둘이라는 그 자체만으로도 달콤한 구원이었지만 둘이었던 게 다시 하나가 되었을 때 상실감이 자신을 더 깊은 구렁텅이로 밀어 넣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만남이 있다면 헤어짐이 있을 거라는 것을 생각하기에 정국은 너무 어렸고, 만남이라는 단어에 익숙하지 못했다.
미동도 없이 소파에 기대어있던 정국이 숨을 고르고는 자세를 고쳐 앉았다. 이미 닫혀버린 어린 시절의 문을 두드려도 굳게 닫힌 문은 열릴 기미가 보이지 않았고 기억의 주인은 항상 문가를 맴돌다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열릴 것 같이 보이는 문을 하염없이 바라보다 문고리 주변으로 손을 뻗어 맴돌기만 해도 어김없이 찾아오는 두통은 회상을 막았다. 자신을 정국이라고 부르던 유일한 여자의 목소리를 다시는 듣고 싶지 않았고, 그 입에서 나오던 자신의 이름을 다른 사람의 입에서조차 듣기 싫어서 별다른 인간관계를 맺지 않고 살아왔던 정국은 태형의 목소리에 동요했다. 누군가가 이름을 부르는 것에 트라우마가 있었기 때문이 첫 번째 이유였다. 그리고 그 목소리가 언제나 닫혀있던 문 너머에서 들려오는 것만 같아서, 그것이 두 번째 이유였다
" 안 괜찮네, 아직도. "
거기서 나온 지도 오랜 시간이 지났는데, 아직도 그곳에 얽매여 사는구나. 터져 나오는 헛웃음에 미약하게 떨리던 정국의 어깨가 살짝 들썩였다. 갑자기 터진 웃음은 멈출 줄을 모르고 점점 크기를 키워 어느새 조용한 거실을 정국의 낮은 웃음소리로 채워나갔다. 제 이름을 부르던 태형의 겁먹은 목소리 뒤로 날카롭게 갈라지는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정국은 아직 벗어나지 못했다. 그 고아원에서의 기억에서, 귀에 꽂히는 목소리 뒤로 이어지는 둔탁한 파열음과 통증에서, 눈을 감은 것처럼 깜깜했던 어두운 방 안에서. 이제는 다 커버린 정국이었지만 어린 쿠키는 그곳에 살고 있었다. 뷔가 없는 그 공허한 곳에서 말이다.
한참을 미친 사람처럼 소리 내 웃던 정국은 몸을 일으켜 욕실로 향했다. 거꾸로 매달려 있는 여자의 얼굴이 하얗게 질리다 못해 파랗게 변해가자 여자의 얼굴을 내려다보던 정국이 다리를 굽혀 여자와 얼굴을 마주했다.
" 나는 당신 같은 여자들이 싫다니까. "
정국이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생기가 돌았던 여자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다 손가락으로 툭, 툭 밀며 말을 이었다.
" 이 년이나 저년이나, 얼굴만 좀 반반하고 돈만 많으면 미쳐서는. 생각 없이 물불 안 가리는 꼴이 다 똑같잖아. "
꼭 누구처럼. 피식 웃던 정국이 손에 힘을 줘 밀기 시작하자 매달린 여자의 몸뚱이가 마치 추가 움직이듯 앞뒤로 움직였다. 여자의 볼에서부터 손가락을 타고 올라오는 냉기에 더러운 것이라도 묻은 듯 손가락을 옷에 닦아낸 정국이 바지를 털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 예전에 누가 그랬는데, 상품가치가 없는 건 폐기처분이래요. 수영 씨. "
욕실 벽에 걸려있는 서슬 퍼런 도구들을 찬찬히 살피던 정국은 손으로 기다란 톱의 날을 살살 쓸어내리다 순간 느껴지는 욱신거림에 미소 지으며 톱을 집어 들었다. 손가락에 맺히기도 전에 흘러내리는 피를 혀를 내어 가볍게 핥고는 바닥에 앉아 여자의 머리카락을 잡아 고정시키며 목 부근에 톱날을 갖다 댄 정국이 아무것도 들리지 않을 여자의 귓가에 속삭였다.
" 그래도 수영 씨 덕분에 즐거웠어요. "
정국은 지루한 표정으로 느릿하게 톱질을 하다 예리한 날에 금방 잘려나가는 목을 바닥에 가볍게 던졌다. 굴러가는 머리를 보던 정국의 눈썹이 약하게 꿈틀거렸다. 별로 예쁘진 않지만, 버리기는 아깝긴 하네. 정국이 머리에 향해있던 시선을 돌려 기괴하게 변한 채 천장에 매달린 여자의 몸을 바닥에 내려놓고는 무거운 어깨를 두어 번 돌렸다.
방금 죽은 따뜻한 시체처럼 한참을 미동조차 하지 않던 태형이 번뜩 눈을 떴다. 기억해야 된다, 오늘을. 눈 한 번 깜빡이지 않고 멍하니 천장을 응시하던 태형이 상체를 벌떡 일으켜 조심스레 바닥에 발을 붙였다. 차갑기만 했던 바닥이 태형의 온기에 점차 따스하게 변해갔다. 태형은 온기를 빼앗겼다. 몸의 온기뿐만이 아니라, 마음의 온기까지도. 몇 시간 만에 웃음기를 잃어버린 태형이 이렇다 할 표정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협탁으로 천천히 발걸음을 뗐다. 종이와 펜이 없는 태형에게 기록할 수 있는 방법은 단 한 가지다. 태형이 눈을 감는 순간에도 볼 수 있는, 단 한 가지 방법.
쨍그랑-
태형이 협탁 위에 있던 유리 화분을 바닥에 내리꽂았다. 하얀 바닥 위로 하얀 유리 조각과, 붉은 꽃이 흐트러졌다. 유명한 화가의 작품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매혹적인 광경에 시선을 떼지 못하던 태형이 자신의 발치에 떨어져 있는 꽤 날카로운 유리 파편을 집어 이리저리 살폈다. 괜찮네. 낮은 음성이 방안에 울려 퍼지는 동시에 유리와 살갗이 만나 비명을 내지르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욕조에 커다란 비닐을 씌운 정국이 꽤 많은 양의 염산을 욕조에 퍼부었다. 콸콸 쏟아지던 염산의 소리가 점점 줄어들더니 이내 끊겨버렸다. 찰랑이며 욕조를 매운 염산 속으로 방금 발라낸 뼈를 부어버리고는 타일에 널브러져 있는 살덩이들을 비닐 팩에 담아 마당으로 향했다. 마당에서 뛰놀고 있던 검은 개 세 마리가 정국이 보이자 꼬리를 살랑이며 정국에게 다가왔다.
" 밥 먹자. "
밥 먹자는 말에 모터를 단 것처럼 꼬리를 흔들어대는 개들의 머리를 한 번씩 쓰다듬어 주고 마당 구석에 있는 개 밥그릇에 살덩이들을 후두둑, 부었다. 살덩어리들이 밥그릇에 떨어지게 무섭게 먹어치워 버리는 개의 길쭉한 몸통을 주욱 쓸어내리던 정국이 작게 웃으며 자신의 오른손에 묵직하니 담겨져 있는 검은 봉지를 들고 집으로 들어갔다.
손에 봉지를 달랑달랑 들고 정국만이 아는 은밀한 장소로 내려간 정국이 복도 끝에 위치한 문을 열어 들어갔다. 바깥보다 현저히 내려간 온도에 잘게 몸을 떠는 정국의 코로 비릿한 향기와, 고기 썩는 냄새가 섞여 들어왔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눈살을 찌푸릴 만한 냄새가 오히려 정국에게는 반가운 냄새로 다가왔다. 마치 오랜만에 찾아간 고향의 정겨운 냄새같이. 숨을 깊게 들이마시며 냄새를 음미하던 정국이 한 발 안으로 들어와 문을 닫았다. 바스락거리며 자신의 존재를 알리는 봉지를 툭, 툭 치며 더 깊숙이 들어가 커다란 냉장고들 앞에 서서 왼쪽 끝에서부터 오른쪽 끝까지 느릿하게 훑다가 왼쪽에서 두번 째 냉장고를 활짝 열었다.
" 수영 씨 자리는 어디가 좋으려나. "
봉지에서 여자의 머리를 꺼낸 정국은 고심 끝에 긴 머리칼들이 즐비한 머리 사이로 동그란 머리통을 세워놓고 아직은 부드러운 머리칼을 느리게 쓸어내렸다. 깔끔하게 절단된 목 덕택에 정국의 손길에도 균형을 잘 잡던 머리가 순간 균형을 잃고 옆으로 고꾸라졌다. 도미노처럼 줄줄이 쓰러져 가는 머리를 바라보던 정국이 남들이 보기 좋은 웃음을 터뜨리며 천천히 머리들을 바로 세웠다. 사람 성가시게. 얼굴에 번졌던 미소를 한순간에 지워버린 정국이 낮게 욕을 읊조리며 농도 짙은 한숨을 내쉬었다.
" 최대한 느리게 썩어줘요. 수영 씨는 배려심 많은 사람이잖아. "
정국은 나름대로의 일가견이 있다. 여자의 몸을 훼손시키는 것은 정국의 마음이었지만, 머리는 아니었다. 머리는 하나의 작품이다. 작품을 훼손시키는 것은 그 작품을 만든 장본인조차 조심해야 될 일이다. 속에서부터 들끓는 화를 겨우 삼켜낸 정국이 제각기의 표정을 한 얼굴들과 마주보며 눈꼬리가 호선을 그리도록 휘어접었다.
3월 7일. 태형이 한쪽 벽면에 걸려있는 달력을 보며 머릿속에 되뇌었다. 오늘을 잊어서는 안 된다. 자신 때문에 희생한 여자를 기억하라. 왼쪽 손목에 붉은 피를 뚝, 뚝 흘리며 바닥 위로 새로 그림을 창조하는 태형은 마치 광기에 미친 화가 같았다. 날카롭게 빛을 내는 유리 파편 위로 망설임 없이 여린 살결을 뽐내는 발이 한번 휘젓고 지나가자 하얀 바닥이 금세 빠알간 발자국으로 얼룩졌다. 태형은 아무것도 느낄 수 없었다.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었다. 단지, 이 공간에 숨 쉬는 것 자체가 죄스러웠다.
" 하… "
지친 기색이 역력한 태형이 침대 끝에 걸터앉고선 아무 초점 없이 멍하니 앞을 바라봤다. 별안간 문에서 청아한 노크 소리가 들렸다. 태형 씨. 노크 소리에 뒤이어 정국의 앳된 목소리가 울렸다. 태형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고르게 숨을 내뱉으며 금방이라도 열릴 것만 같은 문고리에 시선을 고정했다.
" 들어갈게요. "
정국에게 태형의 의사는 밤하늘을 은은하게 빛내주는 별과 파도에 부드러이 쓸리는 모래 사이와도 같았다. 정말 아무 상관이 없었다. 정국은 밖에 단단히 고정돼 있는 잠금장치들을 풀어내 안으로 들어갔다.
" 제가 경고했을 텐데. "
정국은 눈 앞에 펼쳐진 광경에 골이 아파와 한숨을 푹 내쉬며 으르렁거리듯 낮게 말을 내뱉었다.
" 김 태형 씨는 못 죽어요. "
" … "
" 자의든, 타의든 간에. "
반쯤 풀린 눈으로 정국을 응시하던 태형이 삐걱거리며 고개를 틀어 벽에 얼굴을 처박았다.
" …죽을 생각 없어요. "
" 그럼? "
붉은빛으로 온 바닥을 적신 풍경은 너무 아름다웠다. 온몸을 피로 적신 태형의 모습은 황홀했다. 문에 기대서 태형의 모습을 바라보던 정국이 큭큭 웃음을 터뜨리며 태형에게 다가가 태형의 턱을 검지손가락으로 슬쩍 들어 올려 눈을 맞췄다.
" 그냥, 제 나름의 속죄에요. "
태형은 정국을 닮아갔다. 사람을 살인하고 난 후 몸에 상처를 내는 것. 의미는 다르지만, 행위는 같았다. 태형은 알게 모르게 정국이 밟아왔던 발자국을 그대로 뒤따르고 있었다.
혁명이 시작됐다. 머지않아 새로운 혁명의 시대가 도래될 것이다.
애정하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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핑계 주저리 주저리. |
많이 늦었습니다. 새학기라 바쁘다는 것은 핑계에 불과하겠죠. 많이 기다리셨는데, 짧은 글로 찾아 뵙게 된 것에 대해서는 사과드리겠습니다. 보고 싶었습니다. 그대들이 생각했던 것 보다 훨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