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죄, 태형의 입가를 비집고 나온 단어는 단단했다. 태형은 자신을 대신하여 죽어준 여자를 위한 속죄를 말하고 있었다. 목구멍에서 낮게 울리는 단어들을 곱씹어 보던 정국이 느린 속도로 눈을 깜빡거렸다. 여자는 그저 게임에서 졌고,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치렀을 뿐이다. 오로지 살고 싶다는 생각만 머릿속에 가득 차 가냘픈 숨이 껄떡이는 와중에도 그저 눈앞에 놓인 생존이라는 빛 좋은 개살구에 눈이 멀어서는, 발버둥 치는 꼴이란. 목숨에만 정신이 팔려서 발목이 없다는 사실은 잊고 있었으려나, 어차피 살아서 나간다고 한들 걷지도 못할 텐데. 정국은 눈앞을 스치는 여자의 모습을 떠올리며 웃었다.
" 속죄? "
정국의 낮은 웃음소리가 방 안에 퍼져나갔다. 여자와의 가위바위보에서 지자마자 살려달라고 눈물을 쏟아내던 사람이, 자신을 위해서 목숨을 양보해 죽음을 자초한 것도 아닌, 살기 위해서 눈이 벌게져서 아등바등하다 죽음을 맞이한 여자를 위한 속죄라니. 손을 뻗어 피가 흘러나오는 태형의 손목을 말아쥔 정국이 제 팔을 덮고 있던 옷을 걷어 상처가 즐비한 손목을 태형의 손목과 나란히 했다.
" 나는 이거 기념하려고 새기거든요. 근데 이게 태형 씨한테는 속죄의 의미네요. "
아직 채 낫지 않은 상처부터 이제는 희미해져 버린 상처까지. 정국의 몸에는 수많은 여자들에 대한 증거가 가득했다. 상처의 깊이는 정국이 그날 느낀 쾌감과 만족도에 비례했다. 자신을 전율하게 만들었던 아름다움의 깊이가 깊으면 깊을수록 정국을 베어내는 칼날도 더 깊게 살갗을 파고들었다. 그렇게 정국은 그녀들과 함께했다. 그저 서늘한 공기로 가득 찬 쇼윈도에 전시해놓는 것만이 아니라, 제 몸 위에 그들의 흔적을 새겨 넣었다. 정국은 언젠가 태형을 새기게 되는 날이 온다면 자신의 목을 깊게 베어낸다 해도 그 아름다움을 표현하기에 모자랄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사실상 태형의 죽음은 정국의 죽음과도 마찬가지였다.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정국을 더 이상 만족시켜줄 사람이 없다는 것. 그것은 정국에게 또 다른 의미의 죽음이었다.
" … "
" 계속 이렇게 방 더럽히는 건 별론데. "
" 아, "
" 온통 붉은색인 게 예쁘긴 하지만 금방 검게 변하거든요. "
근데 김 태형 씨는 그것도 감수할 수 있을 만큼 예쁘네. 톱날에 베인 상처가 아직 붉게 자리 잡고 있는 손가락을 태형의 손목 위에서 빙글빙글 돌리던 정국이 파르르 떨리는 태형의 입술을 부드럽게 쓸었다. 자신의 피로 붉게 물드는 입술은 마치 작은 꽃을 물고 있는 것 같이 보였다. 하얗게 질린 얼굴과 대비되는 입술은 언제나 정국의 시선을 멈추게 만들었다. 아랫입술을 세게 깨무는 버릇 때문에 항상 핏기가 도는 태형의 입술은, 그 어떤 것보다도 유혹적이었다. 초점 없는 눈으로 정국의 입술 부근을 바라보던 태형이 시선을 올려 정국과 눈을 마주쳤다.
" 몇 명의 흔적이 내 몸에 남으면, "
" … "
" 여기서 나갈 수 있을까요? "
태형의 말을 가만히 듣고 있던 정국이 빨갛게 물든 태형의 입술 위에 대답하듯 짧게 입을 맞췄다.
" 여기서 나가는 것보다 태형 씨가 속죄를 멈추게 되는 게 더 빠를 거라는 생각은 안 해봤어요? "
가깝게 맞닿은 입술을 떼어내며 말하자 길게 늘어지는 태형의 숨결이 정국의 얼굴을 간질였다. 태형의 몸의 남을 속죄의 의미를 가진 흉터들은 몇 개 남지 않을 것이다. 죄책감을 상기시키기 위한 붉은 띠와 같은 족쇄가 기념을 위한 메달처럼 변하게 될 날이 빠르게 다가오고 있었다. 사람은 무뎌지기 마련이다. 고통에도, 죄책감에도. 태형이 무뎌진 죄책감에 그저 버릇처럼 상처를 내게 될 날. 정국은 그 날을 기다리고 있었다.
" 얼굴에는 상처 내지 마요. "
태형에게 내재된 순수함에서 묻어 나오는 선정성은 외설이 아닌 예술이었다. 하얀 도화지에 붉은 잉크를 떨어뜨린 듯, 태형의 세상 속에 자리 잡은 정국은 금세 영역을 넓혀나갈 것이다. 서로에게 교집합이 생기기 시작했다는 건 정국이 더 깊게 뿌리내렸다는 것을 의미했다. 태형에게 작은 일부분이었던 것이 커져 태형을 잡아먹는 순간은 언제가 될까. 손등으로 태형의 얼굴을 어루만지던 정국이 눈꼬리를 접으며 웃어 보였다.
정국의 웃음에 뭐에 홀린 것처럼, 태형이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윤기 나는 머리칼이 팔랑이며 공중에 흩날렸다가 태형의 이마에 흐트러졌다. 정국의 손끝에 내려앉은 태형의 머리카락이 정국의 손가락을 간질였다. 속눈썹을 아래로 드리웠던 태형이 느릿하게 시선을 들어 올렸다. 정국의 새하얀 티셔츠에 물든 붉은 피가 눈에 스쳐 지나가고, 이내 새하얀 낯에 미소를 띠고 있는 정국의 얼굴이 시야에 가득 찼다.
" …정국아. "
순식간에 표정을 지운 정국이 이를 아득 갈며 태형의 뺨을 쓸어내리던 손길을 멈춘 채 태형과 마주했다. 태형은 단지 시험해 본 것이다. 저 세 글자가 정국에게 미치는 영향에 대해. 그 결과가 자신에게 어떤 영향을 끼칠지 상상조차 하지 못한 채.
사람이라고 생각이 들지 않을 정도로 표정 없이 태형을 바라보던 정국이 태형의 앞머리를 느릿하게 쓸어올렸다.
" 김 태형 씨가 눈치가 없다고 생각하지는 않아요, 제가. "
정국의 낮은 웃음소리가 방에 울려 퍼졌다. 본능적으로 위험을 느껴 몸을 잘게 떨던 태형이 정국에게서 멀어지려 발을 뒤로 뗐지만, 침대 끝에 발이 걸려 침대 위로 살포시 내려앉았다.
" 근데, 이딴 식으로 나온다는 건. "
정국이 태형의 얇디얇은 허벅지를 한 손으로 꽉 움켜쥐며, 다른 한 손으론 태형의 턱을 그러잡았다.
" 어떤 의미로 해석해야 되는 걸까요. "
비릿한 미소를 띠던 정국이 태형의 허벅지 사이로 무릎을 올려 태형 쪽으로 몸을 살짝 기울였다. 정국의 무게만큼 푹 꺼진 침대가 그만큼 태형의 몸을 감쌌다. 허벅지를 움켜줬던 정국의 손이 태형의 손목을 세게 그러잡았다. 아으…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꾹 닫혀 있던 태형의 잇새로 옅은 신음이 흘러나왔다. 하얀 도화지에 빠알간 잉크를 떨어뜨리듯, 태형에 의해 붉게 물들어가는 이불이 태형의 등을 적셨다.
아까 못한 거 하고 싶나 봐요. 태형의 손목을 잡은 손을 태형의 얼굴 옆에 고정시킨 정국이 작게 미소를 지으며 나머지 한쪽 손도 태형의 얼굴 옆에 고정시켰다. 태형이 하지 말라며 몸을 잔뜩 비틀어 대지만, 정국은 그저 아무 표정 없이 태형을 바라보기만 했다.
" 선생, 님. 잘못 했어요. "
태형이 잔뜩 젖은 목소리로 정국에게 애원하듯 말했다. 동그란 눈을 반쯤 가르며 내려다보는 정국이 두려웠다. 고개를 좌우로 세게 비틀던 태형이 무릎을 접어 세웠다가, 정국의 허벅지 뒷부분을 꾸욱 눌렀다. 무릎에서 느껴지는 정국의 단단한 허벅지에 당황한 낯이 역력한 표정으로 정국을 올려다봤다.
" 태형 씨. 그거 알아요? "
" 흐으, 아으… "
" 발정 난 개새끼 풀어주지도 않을 거면서, 자꾸 쓰다듬기만 하는 주인은. "
" 선생, 흐윽, 님. 제발, 제발요. "
" 나쁜 주인이래요. "
나쁜 주인은 되기 싫은데. 서로의 숨결이 느껴질 만큼 가까운 거리에 바르작 몸을 떠는 태형의 턱가에 쪽, 쪽 입을 맞춘 정국이 픽 웃음을 터뜨리며 불룩하게 솟은 태형의 목젖에 입을 맞췄다. 태형은 자신의 쓸데없는 호기심을 자책하며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피가 새어 나와 점점 차게 식어가는 몸에도 뜨거운 눈물이 나와 뺨을 적셨다.
" 개새끼가 죽게 내버려두는 주인이 더 나쁜 주인이니까. "
태형의 위에서 묵직하게 짓누르던 정국이 태형에게서 떨어져 서랍장으로 갔다. 정국이 위에서 내려갔다는 것에 대한 안도감과, 속수무책으로 당하던 자신의 모습이 비참하다고 느낀 태형의 흐느낌이 점차 커져갔다. 서랍장 한 켠에 차지하고 있던 구급상자를 꺼낸 정국이 욕실로 들어가 수건에 따뜻한 물을 적셨다.
문이 열리는 소리에 잘게 몸을 떨던 태형이 붉게 자국이 남은 손으로 자신의 눈을 가렸다. 따뜻한 수건을 손에 쥔 정국이 여전히 침대 위에 널브러져 몸을 떠는 태형을 가만히 내려다보다, 피가 굳어가는 손목을 잡아당겨 상체를 일으킨 뒤 태형의 옆에 앉았다. 손. 마치 주인이 개에게 명령을 내리듯 태형에게 손을 내밀며 손을 달라고 하는 정국을 바라보던 태형이 마른 입술을 혀로 축이고 조심스레 손을 내밀어 정국의 손에 안착시켰다.
" 말 잘 듣네. "
태형의 손을 살짝 그러잡았다가 힘을 풀며 느릿하게 손가락 틈으로 자신의 손가락을 끼워 넣은 정국이 태형을 제 쪽으로 살짝 끌어당겼다. 아윽. 손목에 저릿하게 느껴지는 고통에 작게 미간을 찌푸린 태형이 아랫입술을 꽉 물으며 새어 나오는 신음을 막았다. 입술 괴롭히지 마요. 따뜻한 물수건으로 말라비틀어진 피를 닦아내던 정국이 속삭이듯 말을 뇌까렸다. 통통하게 부은 입술을 놓아준 태형에게서 들리는 소리는 색스럽기 그지없었다. 아, 흐읏. 고통에 가득 찬 신음이 방에 울려 퍼지자 만족스럽게 웃음을 짓던 정국이 능숙하게 태형의 손목을 치료하기 시작했다.
의사긴 의사구나. 순식간에 태형의 손목을 치료한 정국이 구급상자를 정리하는 것을 흘끗 쳐다보던 태형이 왼쪽 손목에 정갈하게 감겨있는 붕대를 보고 한숨을 내쉬었다. 저딴 것도 의사라고. 차마 입 밖으로 내뱉진 못하고 입안에서만 웅얼거리던 태형이 방금 전 여과 없는 신음을 내뱉던 자신의 모습이 떠올라 뺨을 붉게 물들이고는 피가 흩어진 바닥을 발로 쓱 훑었다.
어느새 정리를 마친 정국이 창살에 걸려있던 수갑을 풀어 손목에 건 뒤 태형의 다리 밑으로 손을 끼워 넣고서 태형을 번쩍 안아 들었다. 잠, 잠시만요. 허공에 팔을 휘두르며 잔뜩 당황을 한 태형이 발을 휘저으니 공중으로 핏방울들이 튀겼다. 그 모습을 본 정국의 표정이 일그러지자 태형은 모든 행동을 멈추고 입을 꾹 다물었다.
" 여기서 자고 싶어요? "
" …제가 걸어갈 수 있어요."
" 바닥 더러워져요. "
떨어지기 싫으면 목에 팔 둘러요. 정국이 말을 마치자마자 방을 나섰다. 태형의 얇은 팔이 낭창하게 흔들리다가, 차마 목에 두르지는 못하고 정국의 어깨 위로 조심스레 손을 얹었다.
애정하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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