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을 달리는 소녀 - 변하지 않는 것
필수!
※ 타사이트에서 동시 연재 되는 글입니다. ※
첫사랑과 애증 사이 02
- 너는 아직도 나의 봄이었나 보다.
w. 이여운
평생 볼 눈치는 다보며 일주일의 끝이 다가오고 있었다. 내일이면 토요일이었다. 직장인에게 허락된 자유의 시간. 허리가 아파 몸을 쭉 펴며 시선을 조금만 멀리 두어도 저 멀리 팀장실이 보였다. 블라인드가 된 날은 괜찮았지만 무의식적으로 볼 때마다 툭하면 전정국과 눈이 마주쳐서 죽을맛이었다.
그 후로 기지개는 발끝만 펴고 나갈일이 생겨도 의자로 뒤를 돌린채로 앞을 향해서만 걸었다. 눈치만 얼마나 봤던지. 점심때는 눈치는 보였지만 민윤기가 처들어 오기 1분 전 미리 복도 저 끝에서 오는 민윤기를 낚아채 먹으러 갔다. 민윤기가 오지 않는 날은 김태형대리와 도망치듯 나왔고.
띠링-
- 점심 뭐 드실래요?
- 오늘은 민윤기 안와?
- 외근이래요. 다행이에요.
- 초밥어때.
- 콜. 대신 대리님이 쏘는걸로. 저 곧 일어날게요. 저랑 바로 눈 마주치고 가야돼요. 알았죠?
셋
둘
하나
드르륵-
의자를 다리로 밀며 눈은 바로 대리님을 찾았다.
“ 아. 오늘은, 초밥이, 먹고, 싶네. ”
“ 어? 솜이씨도? 나돈데. 우리, 먹으러, 갈까? ”
“ 어머. 정말요? 가.요. 빨.리. ”
오늘도 연기는 완벽했다. 마침 팀장실에서 나오는 전정국이 우리를 쳐다보는게 느껴져서 더 의식했던 거 같다. 하여튼 김태형 대리님이나 나나 어색하게 연기하는 건 고수였다.
터벅터벅 걸어가서 대리님의 팔목을 잡고 밖으로 이끌고 있을때였다.
“ 오늘 점심 제가 쏘겠습니다. ”
발걸음이 멈췄다.
“ 메뉴는, ”
“초밥 어때요. ”
“ 김태형 대리, ”
“ 그리고 이 솜씨. ”
다른 팀원들의 환호 소리를 가로질러 전정국과 눈이 마주쳤다.
근 4일만이었다.
1
초밥을 입으로 먹은건지 눈으로 먹은건지 모르겠었다. 난감하긴 해도 눈 앞에 보이는 맛있는 초밥에 입을 앙 벌려 넣으려 할때마다 마주치는 전정국의 눈빛에 초밥이 목구멍에 턱턱 걸리는 느낌이 들었다. 날 기억하나? 우리가 좀 친하긴 했어도 그래도 연락 안한지가 거의 10년이었다. 이름도 은근히 흔한편이기도 했다. 그저 내 바램은 나를 기억해줬으면, 그것이 아닌 그냥 모르는 채였으면 좋겠다는게 내 솔직한 심정이었다. 고백을 할 적만 해도 그래도 전정국의 머릿속에서 잊혀지지 않고 작게라도 남고 싶은 마음에 한 당찬 고백이었는데 이렇게 뒤집힐 줄이야.
전정국은 내게 아픈 손가락이다. 떠올리자니 쓰라렸고 추억하자니 나 혼자만의 추억이어서. 내가 추억하는 것이 전정국에게는 남아있지 않을 것이라 생각하니 숨이 턱턱 막혀왔었고 나는 전정국을 잊기 위해 갖은 노력을 다 했었다. 그런데 이제와서 재회라니. 이런식의 만남은 하나도 안 반가웠다.
가장자리에 앉아있던 나는 화기애애한 테이블을 두고 스르륵 가게 밖으로 빠져나왔다.
나오면서 뽑은 커피를 손에 들고 벤치에 앉아 있으니 문이 열리며 김태형 대리님이 나왔다.
“ 체했어? ”
“ 곧 그럴예정이에요. ”
“ 은근 매의 눈이라니까. 팀장님. ”
“ 은근은 무슨. 저 진짜 죽는줄 알았어요. 눈치보여서. ”
내 말에 허허 웃더니 담배 한개피를 꺼내 불을 붙이는 대리님이 보였다.
" 너도 할래? "
" 네? 뭐를요. "
" 식후땡. "
" 무슨. 저 끊었어요. "
" 거짓말하지마. 지난주에 민윤기 욕하면서 피는거 봤어. "
" .. 하루에 한개도 안펴요. 거의. 그날은 화나서. "
" 왜 화났는데? "
" 홍보팀에 박여시 아시죠. 왜 대리님한테도 들이댔던. "
" 어어. 알지. "
" 퇴근하고 태워달라니까 약속있다고 안된다더니 버스타러 가는데 둘이서 카페에 있더라구요. 기분이 너무 확 상해서. "
" 그래서 피셨다? 걔가 거절 잘 못하잖아. 은근 약속 이런거는 성격도 꼬장하고. "
" 그렇긴하죠. "
" 그래도 너랑은 대하는게 완전 다른거 알잖아 너도. 아직도 그게 신경쓰여? "
" 아뇨. 꼭 그렇다기보단.. 그냥 저랑 민윤기는 무슨 사인가 해서요. 다시 이렇게 된지 벌써 1년이에요. "
" 하나 줄까? "
" ..네. "
" 윤기가 너 피는거 신고하면 맥주 한병씩 적립해준댔는데. "
" 아 진짜. 둘이 아직도 초딩같아요. "
" 대학때부터 이랬어. 나랑 걘. "
" 여전하시네요. "
" 너 입사전엔 민윤기가 너 꽁꽁 숨기고 보여주지도 않아서 궁금했는데 이젠 윤기보다 솜이 너랑 더 얘기하는거 같아. "
내가 입사할 적에 민윤기와 어색하게 복도에서 마주쳤을 때, 아무렇지 않은 척 인사하는 민윤기를 보았다. 그래봤자 나에겐 숨길 수 없었다. 나는 민윤기의 사소한 표정까지도 다 알아볼 수 있으니까. 지금 엄청 놀랐으면서.
대뜸 걸어와서 하는 말이
" 어디 부서야? "
" 인사과. "
" 거기 김태형이라고 대리있는데 걔랑 놀아. "
" ..... "
" 내 친구야. 말해놓을게. 힘든거 걔한테 말해.
민윤기는 사소한 것부터 나를 챙기곤 했다. 그 예전부터.
03
대리님은 내게 담배 한개비를 던져주곤 먼저 들어간다며 안으로 들어갔다. 이제 진짜 이게 마지막이다. 오늘은 체했으니까. 말도 안되는 변명을 스스로에게 위로하며 가게 안의 흡연실로 향했다. 길거리에선 여자가 담배를 핀다는 이유만으로 탐탁치 않게 바라보는 시선이 거슬렸다. 지들은 다 피면서 왜 여자는 안돼? 초기에는 이런 꼬인 생각으로 담배를 배운 것 같기도 했다.
흡연실에 앉아 담배를 태우며 전정국을 생각했다. 나를 정말 기억하는건가. 안다고 쳐도 전정국도 아직까지 내게 아는 척을 하지 않는걸 보니 나와 비슷한 생각이거나 아는 체 할 생각도 없는 거겠지. 그렇게 생각하니 조금 쓸쓸했다. 나는 참 모순적이었다. 전정국이 내게 아는척을 하지 않길 간절히 바라면서도 아주 조금은, 조금은 알아주기를 바라는 그런 마음.
복잡한 생각을 정리하며 밖을 응시하던 유리창 너머의 시야로 전정국이 검은 실루엣이 비춰졌다.
전정국이었다.
놀란 마음에 담배를 든 손을 아래로 떨구며 다리 아래로 숨겼다. 이미 봤겠지? 이 솜. 언제는 여자도 당당해야 한다면서 전정국한테는 보여주기 싫다 이거야? 그건 무슨 상관인데. 하.
빨리 지나가길 바라는 마음으로 고개를 떨궜다. 지나가겠지. 이젠 지나갔겠지.
" 너 담배도 펴? "
등 뒤에서 아주 오래전 들었던 음성이 들려왔다. 오로지 나를 향한 말소리. 회사에서 팀원 모두에게 말 하던 목소리 외에 오직 나를 향한 전정국의 목소리는 정말 오랜만이었다.
이 와중에 나는
왜 이 상황이, 이 목소리가 반가울까.
4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한 채 멍하니 전정국와 눈을 마주친거 같다. 시선을 피할 수가 없었다. 피하고 싶은 맘도 없었다.
아, 이렇게 전정국의 눈에 나만이 비춰줬던적이 있었던가? 얼마만이지?
담배가 다 타들어가는 지도 모르던 사이 필터 가까이에 있던 손까지 담뱃불이 닿았다.
" 아! "
갑자기 느껴지는 뜨거움에 담배를 놓쳤다.
나와 시선을 마주치던 전정국은 성큼 다가오더니 내 손목을 잡고는 손을 이리저리 살폈다.
" 다쳤어? "
" ..... "
" 아. "
앉아있던 나를 일으키더니 손목을 잡고 먼저 빠르게 걸어나갔다. 나는 그에 끌려서 화장실로 갔고.
" 여기 남자 화장실인데.. "
" 괜찮아. 이게 더 중요해. "
솨아아-
수도꼭지에서 차가운 물이 흘러나왔다. 전정국은 내 손을 살짝 잡고는 함께 차가운 물이 손에 닿는 것을 느꼈다.
온통 물소리만 흘러넘쳤다.
" 왜 피해? "
" .....뭐가? "
" 나를. "
" ..... "
" 너 피하잖아. "
" ..... "
" 눈도 안 마주치고. "
거울을 통해 상체를 약간 숙인 채 내 손만을 응시하는 전정국이 보였다. 언제 이렇게 컸을까. 이제는 그저 어른이었다. 아직 내 흐릿한 기억속의 전정국은 풋풋하던 모습인데.
" 나 기억 못하는 줄 알았어. "
나는 너에게 사소한 부분일뿐이니까.
" ..... "
" ..... "
거울을 통해 고개를 들어 나를 쳐다보는 전정국이 보였다. 나도 고개를 돌려 지금의 전정국을 마주봤다.
" 기억 못할리가 없잖아. "
" ..... "
" 내가 처음 받은 고백이었는데. "
아, 현실이다. 거울이 아닌, 생각이 아닌,
현실이다.
그날은 전정국과 같은 동아리로써 축제에서 무대에 오른날이었다.
나와 함께 춤을 추던 너. 떨리는 마음에 춤을 추면서 바라본 너는 너무나 빛났고 그 무대 위에서 빛나는 너와 눈이 마주쳤던 그 순간을, 그것만큼은 하나도 잊지 못했다.
대상 발표에 기대도 않던 우리가 이름이 불렸을 때, 친구들과 하나 하나 하이파이브를 하며 기뻐할 때 ,나도 모르게 너와 손이 부딪힐 때 너의 손을 깍지 껴 꽉 잡았던 순간을 나는 아직도 기억해. 그리고 깨달았을 때 놀라서 손을 빼려던 내 손을 다시 꽉 잡고 내 손을 흔들어 주던 그 빛나던 순간을 나는 아직도 보관하고 있어.
내게 희망을 준 건, 너였어. 정국아.
마지막 윤기는 융기도 있다는 것을 잊지 말라는 뜻!
오늘은 그저 정국이에 관한 글이었네요. 하루에 두번오다니 다음주에 올랬는데 잘 써지고 댓글 달아주시는 분들이 너무 고마워서 왔다능! 기대해주시는 만큼 될지 모르겠어요ㅠㅠ
일단 솜이는 앞서 말했듯이 정국이를 잊고 나름 잘 지냈어요. 그래도 전정국은 여주에게 단순한 첫사랑이 아닌 솜이의 학창시절의 전부에요. 기억에서 잊더라도 항상 잊지 못하는 정국이와의 추억을 깊이 잊은 줄 알았는데 마주치고 나니 그 감정들이 하나 둘씩 터지는 거죠.
그러나 우리의 윤기도 솜이에겐 큰 존재입니다. 윤기는 솜이의 20대의 전부니까요.
감정 소모가 큰 글인거 같아요. 여러번도 잘 읽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고마워요! ♡
암호닉 신청해 주신 분들 모두 감사합니다! 저 노트북 껏다가 댓글 보고 다시 바로 키고 왔어요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