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등교길에 나 혼자였다. 백현이가 오늘은 나랑 가주지 못한다고 해서 슬펐다. 나 혼자 삐쳐있는 걸 백현이가 얼른 알아줬으면 좋겠다. 힘없는 발걸음을 옮기며 집까지 걸어가는 중이었다. 버스를 타도 됐지만 괜히 걷고 싶었다. 잡생각에 빠져 계속 걷다 보니 어느덧 학교에서 멀리 떨어져 인적이 드문 골목길이었다. 길을 잘못 돌아선 것 같아 방향을 틀었는데, 저만치에서 우리 학교 교복의 한 남학생이 벽쪽으로 몸을 틀고 바짝 붙어있었다. 노상방뇨를 하나? 그쪽으로 걸어가는 참에 얼굴을 봤다. 낯이 익었다. 눈을 가늘게 뜨고 다시 옆 모습을 확인하는데 아는 얼굴이었다. 동아리 후배 종인이었다.
순정소설
w. 아우디
여기 사나? 인사를 해볼까, 말까 해볼까 말까 고민을 몇 차례 하다 별로 반가워하는 눈치가 아니라서 그냥 지나쳤다. 집쪽으로 가는 인도를 따라 옆에 있는 건물도 쳐다보면서 천천히 행보했다. 자꾸 내 시야에 누군가 잡히는 것 같아서 뒤를 돌자 종인이 제 몸집보다 작은 가로수 뒤에 숨었다. 나는 나쁜 생각에 빠지게 됐다. 설마 쟤가 선배라고 부르라고 해서 날 미행을 하는 건 아닐까? 해코지를 하려고? 그때 인사 안 하고 씩 웃은 것도 마음에 걸렸다. 에이, 아니겠지. 나는 발걸음을 빨리 재촉했다. 내가 발걸음을 빨리할 수록 뒤에서도 저벅저벅 소리의 빈도가 잦아졌다. 별의 별 생각이 다 들었다. 난 살면서 맞을 짓을 안 했기 때문에 엄마한테 회초리 맞은 거 빼고는 맞아본 적이 없다. 발에 식은땀이 차고 이 상황에서 난 어떻게 해야 할까 고민했다. 첫 번째 방법은 냅다 뛰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것은 일회적인 해결책이 될 뿐 내일이 되면 종인이를 피해다녀야 한다는 단점이 생긴다. 두 번쨰 방법은 내가 먼저 다가가서 말로 푸는 것이다. 이 방법은 궁극적인 해결책이 되지만 실패할 확률이 높다는 단점이 있다. 끌려가서 맞을 수도 있다. 전자든 후자든 맞는다는 생각이 드니 차라리 후자가 낫다고 판단했다. 단단히 마음을 먹고 걸음을 멈춰세웠다. 몸을 돌려 방금 종인이 몸을 숨긴 귀퉁이로 다가갔다. 내가 야, 하고 부르자 종인이가 화들짝 놀랐다. "어.... 형.""내가 잘못했어. 선배라고 안 불러도 돼.""네?""선배라고 안 불러도 된다고. 그니까 따라오지 마. 너 정말 무서운 애구나." 이제 진짜 맞겠다, 무서움에 나도 모르게 울먹거렸다. 백현이한테 전화해서 이르고 싶었다. "형이 뭔가 오해를 하시는 거 같은데..""오해는 무슨 오해야. 너 담배도 피고 친구들도 다 무섭잖아.""그 담배는 제가 핀 게 아닌데.. 저 절대 형 쫓아온 거 아니에요.""그럼 뭐야?""저도 이쪽에 갈 일이 생겨서, 하하. 여기 있던 건 숨은 게 아니라 쉬어가는 참이었어요.""진짜? 나무 뒤엔 왜 숨었어?""아... 그건.. 가로수가 너무 아름다워서 기대고 싶었어요.""뭐야! 괜히 나 혼자만 이상한 생각했어." 한 시름 놓였다. 종인이가 말하는 걸 보니 날 때릴 의향은 없는 것 같았다. 나는 종인이에게 앞으로 인사하자고, 잘 가라는 인사를 하고 난 내 원래 경로를 따라 집에 무사히 도착했다. 길을 돌아와서 그런지 시간이 꽤 지나있었다. 학원을 가는 날이 아니어서 우울했다. 지금도 백현이가 보고 싶다. 벽에 달린 시계를 쳐다보며 백현이의 문자를 목이 빠지게 기다렸지만 문자가 오지 않았다. 난 완전 심통이 났다. 휴대폰을 꺼버리고 침대에 누워서 잠을 청했다. 엄마와 아빠는 맞벌이 부부셨기 때문에 밤 늦게야 들어오신다. 쾅쾅. 현관문을 두드리는 시끄러운 소리에 눈을 떴을 땐 여덟 시였다. 큰 하품을 하고 이불을 걷어냈다. 현관문의 렌즈로 밖을 보는데 아무도 없었다. 난 다시 침대 속으로 들어가서 웅크렸다. 그때 다시 노크 소리가 들렸다. 이번에도 밖에 아무도 없었다. 간담이 서늘해졌다. 도시 괴담이 무성한 요즘, 괴한이 날 죽이려고 밖에서 대기하고 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문을 열기 전에 부엌에서 식칼을 하나 들고 나왔다. 엄마가 김치 썰 때 애용하는 아주 날이 날카로운 식칼이었다. 안전고리를 끼우고, 문을 열어 밖을 살짝 봤다. 시야가 좁아 보이는 게 없었다. 나는 문 틈새로 칼을 천천히 내밀었다. "거기 누구야. 안 가면 신고한다." 내가 생각해도 되게 낮고 되게 멋있는 목소리였다. 그때 누군가 불쑥 얼굴을 내밀었다. 백현이었다. 나는 한 손에 식칼을 들고 허겁지겁 안전고리를 빼서 문을 열었다. 백현이 두 손으로 촛불이 꽂혀진 생크림 케이크를 들고 있었다. 아무 말도 못하고 입을 벌리고 있는데 백현이가 노래를 불러줬다. 웬만한 가수 저리 가라 할 정도의 감미로움이었다. 선곡은 듣고 싶은 세레나데 1위에 빛나는 이적 아저씨의 다행이다였다. 백현이가 마지막 소절을 하고, 난 좋아서 죽을 뻔 했다. "그대라는 아름다운 세상이 여기 있어줘서.."
"어떡해?""뭐가?""너무 좋아. 백현이." 촛불을 후, 불고 백현이의 볼에 뽀뽀했다. 식칼을 쥐고 입맞추는 모습이 남들 눈엔 으시시하게 보였을지도 모르겠지만 아파트 복도에는 나와 백현이밖에 없었다. 이런 줄도 모르고 백현이를 미워하다니 나는 나쁜 사람이다. 근데 오늘이 무슨 날이지? 난 일단 백현이에게 들어오라고 했다. 케이크를 테이블에 올려놓고, 우리 둘은 소파에 앉았다. "근데.. 오늘 무슨 날이야?""오늘? 화이트 데이." 기념일을 잊었을까봐 걱정했는데 화이트 데이라니 다행이었다. 나는 다시 싱글벙글해서 앞에 놓여진 케이크의 생크림을 백현이의 콧잔등에 묻혔다. 백현이도 질세라 생크림을 한 움큼 집어서 내 볼에 발랐다. 난 손가락으로 생크림을 훔쳐냈다. 생크림이 묻은 검지손가락을 쪽쪽 빨자 백현이가 정색했다. "왜?""나도 남자야.""나도 남잔데.." 백현이가 왜 갑자기 자긴 남자라고 했는지 모르겠지만 난 케이크를 들고 냉장고에 넣으러 갔다. 아직 남아있는 생크림 때문에 달콤한 냄새가 진동을 했고, 기분이 너무 좋았다. 다시 거실로 왔을 때 백현이가 무릎을 두드리며 여기 앉으라고 했다. 난 그 위에 앉아 리모컨으로 티비를 켰다. 위성 방송을 틀자 신작 액션 영화가 방영하고 있었다. 백현이가 내 등을 끌어안고 앞쪽으로 손을 뻗어 내 배를 꼬집었다. "아야.""경수 뱃살 있네?""이거 그냥 피부야. 뱃살 아냐.""에이, 뱃살인데 이거.""아니야.. 그래서 나 싫어? 못난이야?""우리 경수한테 못난이라고 누가 그래?" 역시 백현이는 나만 아는 바보다. 백현이의 손을 잡고 다리를 흔들거리면서 티비를 봤다. 박진감 넘치는 액션신에 신나서 다리를 더 세차게 움직일 때마다 백현이가 날 꽉 끌어안으면서 미치겠다 경수야, 나도 남자라니까, 라고 했다. 역시 남자라면 액션 영화지. 백현이도 영화가 아주 마음에 드는 모양이었다. 난 백현이가 다리를 저려할까봐 무릎 위에서 내려와 쇼파에 앉았다. 쇼파도 푹신푹신하니 좋았다. 백현이 옆이라면 가시 방석에 앉아도 좋을 것 같다. 점점 졸려온다는 게 문제였다. 아까 분명히 잤는데도, 긴장감 넘치는 영화인데도 눈이 점점 감기더니 잠이 들었다. 아침에 일어났을 땐 얇은 담요 한 장이 내게 덮여있었다. 친구들이 말뚝 박기를 하는 걸 구경하면서 배가 아프도록 웃고 있던 평화로운 금요일 점심시간이었다. 금요일은 행복한 날이다. 내일이 토요일이고 주말엔 백현이랑 도서관도 갈 수 있고 영화관도 갈 수 있고 아무데나 다 갈 수 있다. 오랜만에 찾아온 찬열이가 중대 사항이 있다면서 교실 밖으로 날 불렀다. 나는 또 찬열이가 내게 무슨 소리를 하려나, 기대하면서 나갔다. 예상대로 동아리에 관한 얘기였다. "야. 오늘 동아리 애들 다 모이면 그거 한다고 해. 마니또.""마니또? 그걸 왜 해?""선후배 친목 모르냐? 다른 동아리 애들은 다 한다더라. 대신 뽑을 때 혜리 이름 쓴 종이는 꽁쳐뒀다가 나한테 줘. 그리고 혜리는 맨 마지막에 뽑게 해서 내 이름 적힌 종이만 슬쩍. 오케이?""그냥 너가 번호 달라고 해서 접근하는 게 낫지 않을까..""야. 그런 일방적인 추파는 여자를 꼬시기에 적합하지가 않아요. 내 말대로 해, 그냥. 그리고 왜 오티 안 가냐? 작년엔 누나들이랑 잘만 갔잖아.""돈 걷기 귀찮아서..""미쳤네. 무조건 가. 무, 조, 건." 찬열이에겐 다른 꿍꿍이가 있었다. 나는 마치 찬열이의 조종에 따라 움직이는 힘없는 동아리 부장이 된 것 같았다. 그래도 찬열이의 사심이 들었다는 것 빼고는 좋은 취지였기 때문에 찬열이의 말대로 하기로 했다. 육 교시엔 열심히 종이를 찢어서 아이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적었다. 후배들은 남자애들 여섯 명에 여자애들 네 명이어서 성비가 맞지 않았지만, 그런 건 찬열이만 신경 쓰일 일이다. 남녀 짝을 지으려고 하는 건 아니었다. 동아리 부장이 맨 처음으로 등장하면 안 될 것 같아서 조금 늦게 동아리실에 들어갔다. 1학년 남자애들이 바닥에 앉아서 휴대폰으로 노래를 틀고 시끄럽게 굴고 있었다. 특히 음악에 맞춰 헤드뱅잉을 하고 있는 태민이는 통제 불능이었다. 세훈이란 애는 웬 조각칼을 가져와서 동아리실 바닥에 무언갈 새기고 있었다. 정신 이상자인 줄 알았다. 무기력한 2학년 애들은 1학년이 뭔지 인생이 뭔지, 하는 표정으로 거울에 비친 자신을 멍하니 쳐다봤다. 동아리실은 사방이 거울이었다. 찬열이만 아주 도도한 눈빛으로 나를 쳐다봐주었다. "애들아 조용!" 모든 아이들이 날 순한 양의 눈빛으로 바라보긴 커녕 쟤 뭐야, 하는 눈빛으로 눈을 치켜뜨고 날 쳐다봤다. 나는 부장이니까 쫄면 안 된다. 나는 우리가 아직 춤 선곡을 안 했으니 이번 주는 아주아주 재밌는 마니또 게임을 할 거라고 했다. 귀찮아서 대답도 안 하고 있는 2학년 애들과 달리 1학년 애들은 아유를 퍼부으며 그게 뭐냐고 난리를 쳤다. 나는 세훈이 '들어오자마자 웬 븅신 같은 게임을 하냐', 라고 말하는 것을 똑똑히 들었다. 상처였지만 그래도 이미 뱉은 거 이대로 밀고 나가기로 했다. "애들아 그런 게 아니야.. 이거 해서 선후배간의 친목을 돈독히 할 거야. 마니또 어떻게 하는지 알지? 건성으로 하면 선배가 혼낼 거야. 2학년부터 종이 뽑자~" 애들이 안 집어가서 내가 뿌리다시피 하고 1학년 애들에게 갔다. 태민이가 아주 비장하게 종이를 뽑고 나머지 애들도 마찬가지였다. 싫은 내색은 다 했으면서 귀여운 녀석들. 찬열이의 말대로 일부러 혜리에겐 늦게 종이를 줬다. 조작된 운명인 줄도 모르고 찬열이에게 빠져들 후배를 생각하니 불쌍했다. 나는 병진이란 후배를 뽑았다. 어깨가 넓어서 내 옆에 서면 내가 아주 위축될 것 같은 꺼림칙한 후배였다. 아이들에게 자신의 이름을 적어 다시 그 종이를 나에게 내라고 했다. 한편으로 날 뽑은 건 누굴까? 생각하면서, 오티에 관한 얘기를 시작했다. "이제 다 뽑았지? 그게 너희 마니또다?""네.""이게 진짜 중요한 건데, 다음 주까지 오천원 가져와야 돼. 돈 모아서 오티 할 거야.""올!!" 애들이 단체로 환호성을 지르면서 내 귀를 아프게 했다. 다시 동물원이 돼버린 동아리실을 빙 둘러보며 한숨을 쉬었다. 그 와중에도 종인이는 계속 나를 쳐다봤다. 아직도 나한테 앙심이 있나? 내가 눈을 맞추자 성급히 고개를 돌리는 종인이었다. 「항상 지켜보고 있어요 ^^ 많이 먹어요」 내 마니또의 쪽지는 스토커스러웠다. 오늘이 수요일이었는데, 삼 일째 마니또가 고가의 선물을 내 사물함에 넣어두면서 이게 대체 누굴까 궁금증이 증폭됐다. 첫째날은 내가 스티치를 좋아하는 건-심지어 이건 백현이도 몰랐다-어떻게 알았는지, 휴대폰 기종은 어떻게 알았는지 스티치 폰케이스를 갖다놓고 둘째날은 스티치 양말을 열 켤레나 갖다놓고 오늘은 백화점에서만 팔 법한 수제 쿠키 세트를 넣어놓았다. 물론 이런 호의가 고마운 건 사실이었다. 누군가 털어놓을 사람이 필요해서 나는 찬열이네 반에 찾아갔다. "너 혜리가 선물 뭐 줬어?""휴대폰 고리. 이거 봐라, 졸라 귀엽지.""음.. 저렴해보여.""뒤진다?""나 마니또가 이상해. 선물을 너무 과하게 줘. 누군지 너무 궁금한데 이름 모아둔 통 뒤져볼까봐.. 아님 이틀만 참을까?""뭘 참냐. 그냥 열어. 어차피 아무도 몰라." 그래. 찬열이의 말대로 내가 그 종이를 몰래 본다고 해서 뭐가 달라지는 건 아니니까. 나는 반으로 곧장 달려가서 사물함 구석에 있던 통을 꺼냈다. 꾸깃한 종이들을 하나하나 펼쳐서 내 이름이 있는 종이를 찾아내고, 떨리는 마음으로 뒤집었다. 거기엔 오세훈이라고 적혀있었다. 예상치 못했던 이름이었다. 이상한 후배인 줄 알았는데 이렇게도 날 감동시키다니, 난 내가 규칙을 어긴 것도 까맣게 잊고 세훈이에게 문자를 보냈다. 「세훈아 경수선배야!! 학교끝나고선배가밥사줄게」「?」「다 알고 있어 너만 혼자나와야해!학교앞 스파게티집으로 와^^」「ㅇㅋㅋ」 답하는 게 좀 싸가지 없긴 했지만, 원래 표현을 못하는 앤가 보다. 백현이에게 사정을 말하고 먼저 보냈다. 그런 좋은 후배가 있느냐며, 우리 경수는 누구에게나 사랑 받아 마땅하다고 했다. 아닌데, 나는 백현이한테만 사랑 받을 건데. 식당에 들어가서 혼자 포크를 세팅하고 물도 따르고 있을 때 세훈이가 나타났다. "갑자기 밥은 왜 사줘요?""부장으로써 이러는 거 안 되는 거 알지만.. 마니또가 누군지 너무 궁금해서 종이를 열어봤거든.""아.. 예?""선물 짱 고마워. 나 스티치 좋아하는 거 어떻게 알았어?""그건 김종..이 아니고, 그게요. 제가 그냥 어쩌다가 산 건데 좋아했구나.""우와.. 이거 봐. 나 여기에 케이스 끼웠어." 세훈이가 뿌듯한 표정을 지어주길 바랐는데 날 거들떠도 안 보고 메뉴판을 보면서 선배는 크림 먹고 나는 토마토 소스를 먹겠다고 했다. 말하지도 않았는데 메뉴를 정해줘서 참 고마웠다. "학교는 재밌어?""그냥요. 근데 선배는 남자가 남자 좋아하는 거 어떻게 생각해요?" 헉. 나는 세훈이의 뜬금없는 질문에 괜히 마음이 찔렸다. 백현이랑 나랑 사귀는 걸 알고 있는 사람은 백현이랑 나뿐이다. "당연히 그럴 수도 있지.""선배. 좋아해요.""..응?""이럼 어떨 거 같아요?""근데 왜 물어보는 거야?""그냥. 할 말 없어서." 어디로 튈지 모르는 대화에 나는 연신 물만 마시면서 아, 덥다를 연발했다. 누가 저번에 백현이랑 몰래 뽀뽀하는 걸 봐서 소문이 퍼진 건가? 그럼 백현이 안 되는데. 백현이 전교 회장인데.. 스파게티가 나오고 세훈이는 라면 먹듯이 그걸 후루룩후루룩 흡입했다. '내 것도 먹을래?' 하자 거절도 안 하고 그것마저 걸신 들린 듯이 먹었다. 그런 세훈이의 시선을 뺏아간 건 저녁 때가 돼서 들어선 우리 학교 선생님들 무리였다. 세훈이는 잘 걸렸다, 하며 그쪽을 계속 주시했다. "내가 재밌는 거 보여줄게요.""뭔데?" 세훈이가 재밌는 걸 보여준다며 선생님들이 있는 테이블로 걸어갔다. 그리고 다짜고짜 그 앞에 무릎을 꿇더니 외쳤다. "루한 쌤. 쌤이 아무리 트랜스!! 제엔더!!! 여도 저는 선생님을 사랑해요. 나중엔 꼭 제 마음 받아주세요." 식당 안에 있던 사람들이 웅성거렸다. 사태를 벌여놓은 세훈은 뒤도 안 돌아보고 나갔고, 나 혼자만 남겨져 계산을 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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