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기 꼼짝말고 있으라는 전화를 받은 남준. 남준은 학교에서 밥을 잘 안먹는데 뭐, 오늘이 유독 쓰레기같이 맛없기도 하고 도서관에서 책 한줄 더 읽는게 즐겁기도 한 낭만주의 다독왕임. 여기가 어딘줄 알고 꼼짝없이 있으래. 존나 예측왕이신가. 점심시간 땡, 종 치자마자 본관에서 별관 도서관으로 넘어온 남준은 식사하러 가신다는 사서선생님에게 인사 후 반납한 책들을 하나씩 정리하기 시작했음. 3학년은 동아리 활동을 하지 않아서 현재 2학년인 남준이 도서부장일듯. 학년 사이에서도 소문난 낭만쟁이. 시끄러운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고 갈등을 싫어하는 평화주의자. 덩치에 비해 소녀감성 가득함. 그런 남준은 도서관에 온 몇몇 학생들 사이로 반납책들을 정리하고 있었는데 호석의 전화로 물음표 가득한 상황이었음. 오늘은 반납한 책들이 몇개 없어서 금방 정리를 하고 가장 좋아하는 책장 끝 창가에 있는 빈백에 앉아서 책을 펼쳤음. 눈은 하늘을 보며 손가락은 책갈피를 찾고 있었음. 그 순간, 날카로운 모서리에 검지 손가락을 베였고, 운동장에서는 동시다발적으로 비명이 들리기 시작했음. 교실보다 상대적으로 조용한 도서관은 그 소리가 더 잘들렸고 남준을 포함한 학생들은 창문으로 모여들었음. 저게 뭐야..? 한 학생의 원초적인 물음에 남준도 운동장을 둘러봤음. 보나마나 공부와 입시에 시달린 학생들이 별 이상한 짓을 하고 있겠거니 느릿하게 눈을 감았다 떴지만 상황은 여전했음. 웅성거림은 더 커졌고, 전화 넘어 호석의 마지막 외침에 머릿속에서 맴돌았음. 거기 꼼짝말고 있어.. 거기 꼼짝말고.. 거기 꼼ㅉ.. 거기.. 책 모서리에 베어버린 손가락이 더 쓰라려오는 듯함. 3층 창가에서 보고 있는 운동장의 모습은 아비규환. 누가 장난이라도 친듯 목덜미, 팔, 다리, 옆구리 할것 없이 물려성을 잃고 달려드는 것들과 그것을 피하려는 학생들의 대립이었으니. 배드민턴 라켓을 들고 도망가던 한 남학생이 넘어졌고 뒤따라오던 여학생은 그를 덮쳐 어깨를 물어버림. 극한의 공포에 기절한 남학생을 두고 일어난 여학생은 기함을 하는 소리를 따라 고개를 돌렸으며 그곳은 도서관의 학생들의 소리였음. 가만히 쳐다보던 남준과 눈이 마주치고는 피범벅을 한 입을 크게 벌리며 포효하겠지, 마치 짐승처럼. 여전히 느린 움직임으로 부산스러운 소리가 들리는 도서관 입구를 바라보는 순간, 현실로 돌아오게 됨. 아, 책을 내려놔야한다. 현실로 돌아와야 한다. 그 현실 앞에는 라켓을 든 호석이 얼굴에 피를 튀긴 채 숨가쁘게 달려오고 있었거든. 자신이 생일날 사준 정호석의 이름이 새겨진 테니스라켓을 든 호석이 말이야. “야, 문 잠궈.” 도서관 문은 반투명한 시트지가 붙어있는 유리문. 그리고 같이 온 테니스부 후배에게 문을 닫으라고 얘기하며 멍하니 서 있는 자신에게 다가오는 호석. 그리고 그를 느린 움직임으로 눈 맞추는 남준이었음. 뭐냐, 진짜. 예측왕이냐. 내가 여기 없었으면 어쩌려고. 느리지만 빠른 속도로 호석의 어깨를 잡으며 말하는 남준이었음. 정신차려, 니 초점이 좀 흐리다? 얼마나 라켓을 꽉 잡고 여기까지 올라왔으면 부들거리는 손목을 잠시 주무르는 호석이겠지. 그리고 자기 라켓에 묻은 정체 모를 것들의 피를 보고 눈을 질끈 감아버림. 자신이 초등학교때부터 잡았던 라켓으로 사람을 휘두를 줄을 꿈에도 몰랐으니까 말이야. 달려드는 것들을 막고 겨우 문을 잠근 호석의 후배는 여전히 믿을 수 없다는 듯한 목소리를 냈음. 도서관에 있던 소수의 학생들 또한 마찬가지. 비명소리가 들리고 아수라장을 목격하면서부터 유난히 두려움에 떨던 한 여학생은 나간다며 부모님을 불러 도망가겠다며 문을 열려고 했음. 모두가 두렵고 혼란스러운 이 상황에서 문을 막고 있는건 지쳐 문 앞에 기대있던 호석의 후배와 반납책 카트를 끌고 와 문 앞을 막아버린 건. “나가려면 너 혼자 창문으로 가.” 공교롭게도 여긴 이제 길이 없네. 생존을 위해 낭만을 포기한 남준이었음. 20xx년 9월 오후 12시 10분 김남준, 현재 위치 별관 3층 도서실 정호석 합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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