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 일곱, 여자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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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 시작
에디터_ 00에 대해 말해 줄 수 있어요? 유일한 여자 멤버라서 그런지 굉장히 궁금해지네요. 사전 인터뷰 때는 멤버들이 그렇게 칭찬을 하셨는데. 자기 PR 먼저 해 주실래요?
00_ 일단 한 가지 말하고 싶은 건 '000은 사랑이다.' 예요. 저는 사랑이죠. 93, 천재, 사랑, 성공적. 이 정도면 다 된 거 아니에요?
에디터_ 멤버들 표정이 다 별로인데요? 어떻게 된 거예요, 이게!
지민_ 어떻게 받아 줘야 하죠?
슈가_ 받아 주지 말죠, 우리.
뷔_ 네, 그게 제일 괜찮은 방법 같아요.
00_ 모르실까 봐 말씀드리는데 슈가와 저는 동갑이에요. 팀에서 진 오빠 다음으로 둘째고요. 동생들이 이렇게 누나를 무시합니다. 아셔야 해요.
랩몬_ 질문의 요지가 그게 아니잖아요. 일단 저희가 상남자라는 노래를 냈을 때도 저희 멤버들이 아닌 누나를 보고 영감을 얻은 거예요. 저희 팀이 남자쪽 비율이 훨씬 많아서 제목을 상남자라고 붙이게 됐는데, 전혀 저희 멤버들은 상남자가 아니고요. 박력 같은 건 누나가 훨씬. 사람 대 사람으로 멋있는 것 같아요.
00_ 어쩐지 저더러 작사를 맡기더라고요.
슈가_ 욕을 많이 해요. 팬분들께서 제가 욕을 제일 많이 한다고 욕쟁이라고 하시는데 00에게 보고 배운 겁니다. 오해 없으셨으면 해요. 이런 것 말고 또……. 선택의 여지를 주고 싶은 사람? 제가 가진 능력에 있어서는 권해 주고 싶은 게 많아요. 작곡도 해 봤으면 하고, 프로듀싱도 배워 봤으면 좋겠고.
지민_ 어떻게 보면 팀내에서 두뇌를 맡고 있는 사람. 두뇌하면 랩몬 형 아니냐 하시는데요, 누나는 여러 분야의 지식이 많은 것 같아요. 슈가 형처럼 인생을 살아가는 법을 잘 아는 것 같기도 해요. 가끔 정말 똑똑해서 놀랄 때도 있어요. 또 생각이 많아요. 속에 무언가가 많은 느낌!
태형_ 글쎄요……. 그냥 누나? 그냥 누나 같아요. 저는 누나 아니면 지민이랑 제일 잘 맞는 것 같아요. 아무래도 다른 형들보단 세심하니까 챙김받는 것도 많고. 진지한 것도 있고요. 뭔가 나를 제지해 줄 수 있는 것 같아요. 그냥 그런 느낌이 들어요.
진_ 저도 태형이 말에 동감해요. 그냥 여동생. 하는 짓도 예뻐서 사랑받는 게 티 나는 여동생? 00이 같은 여동생 있었음 매일 숨기고 다녔을걸요.
00_ 저 잠시 나가 있어도 되나요? 이런 말은 감당이 안 돼서.
제이홉_ 그런데 확실히 진짜 친누나랑은 좀 다른 게 있어요. 제가 누나가 있어서 그런가. 그러고 보니까 저 혼자 누나가 있네요. 뭐 아무튼. 성향이 달라서 그런 걸지도 모르지만 조금 달라요. 그런데 그 미묘함을 모르겠어. 누나가 싫단 게 아니라 그 다름이 좋단 거예요. 몰아가지 마세요.
정국_ 제 차례네요. 그냥 뭐. 엄마? 제가 미숙한 걸 보이면 따끔하게 혼낼 때도 있고, 굳어 있으면 풀어 주기도 해요. 사실 데뷔 막 했을 때 연상의 애인이 있으면 이런 기분일까 했어요. 장난으로 "여친!" 했는데 "왜, 남친." 했던 게 기억에 남아서. 열린 사람? 자연스러운? 모르겠다. 난 그냥 우리 누나라서 좋은데.
01. 지민이가 본
"오늘, 00의 로그. 음. 요즘 윤기가 멜로디를 줘서 가사를 쓰고 있는 중이다. 재미있어서 만족한다. 작곡도 배워 보라고 하는데, 어……. 글쎄. 아직까지는 무리인 듯하다. 윤기 보면 대단해 보인다. 작업실에 항상 붙어 있는 것보단 숙소나 바깥에서 노는 게 아직까진 더 좋다. 윤기나 남준이를 비하하는 게 아니라, 내가 아직 철이 안 든 거겠지.
로그를 찍을 때마다 항상 진지해지는 것 같아 조금 짜증 난다. 혼자 있으면 가라앉는 버릇이 싫다. 물론 로그는 진지하게 하는 것이 맞지만. 요즘따라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아져서 가벼움과 무거움을 잘 조절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곤 한다. 남자 친구라도 있었으면 외롭진 않았을 텐데.
"오늘은 여기까지 해야겠다. 오늘, 00의 로그 끝."
으아앙. 00은 조금 우는 소리를 내며 책상 위로 엎어졌다. 로그를 찍으면 찍을수록 점차 편해져서 문제였다. 속마음을 너무 끄집어내면 안 되는데, 자제해야겠다. 가수와 팬은 어느 그 누구보다 친애하는 사이라지만 인간적인 모습을 너무 많이 알고 있는 건 조금 껄끄러웠다. 어떻게 보면 모르는 사람이 '팬'이라는 사실 하나로 그 누구보다 가까운 사이가 되어버리는 거니까. 팬이어도 팬이라 얘기를 하지 않으면 그냥 모르는 사이인 거고. 내가 모르는 사람이 내 비밀을 알고 있다는 건 아무래도 사람 대 사람으로 조금 그랬다. 00은 조금 따끔거리는 입술을 흝으면서 작업실을 나왔다. 검정색이나 갈색으로 꾸며진 작업실과는 달리 작업실을 나오면 있는 복도는 새하얀 색이었다. 그리고 그 새하얀 벽에 기대어 꾸벅꾸벅 조는 사람은 지민이었다.
"야, 일어나."
"……."
"일어나라고."
"아, 저리 가아."
"……내가 네 친구냐."
엑. 지민이 눈을 번쩍 떴다. 호석일 줄 알았던 상대는 00이었다. 허얼. 지민이 자신의 턱살을 매만지던 00의 손을 다정히 잡았다. 누나, 그게 아니라, 악! 00이 가차없이 지민의 턱을 꼬집었다. 저리 가라니, 저리 가라니! 누나한테 못하는 말이 없어.
"홉이 형인 줄 알았어요, 진심!"
"나대지 마."
"진짜로. 아으. 아파라. 누나, 숙소 같이 가요. 누나 기다렸단 말이에요."
"숙소에 다 있어?"
"네. 누나만 없어서 나왔어요. 걱정돼서. 얼마나 기특해요."
"그래? 그럼 누나 다리 아프니까 좀 업어 줘."
"……업어 줄 수 있죠! 그럼요!"
웃기고 있네. 00이 코웃음을 쳤다. 왜 비웃냐고 지민 징징댔지만 턱 아래에다가 간지럽히며 우쭈쭈만 할 뿐 비웃음을 거두진 않았다. 원체 살이 안 찌는 체질이라 지민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면 뼈가 느껴질 정도였다. 근육인지 뭔지는 잘 모르겠지만, 아무튼 뼈가 느껴졌는데 사실 그건 멤버들 다 그랬다. 어쩜 그렇게 남자들이 말랐어? 홍일점은 뭐가 되냐고! 남자들이 체중 감량을 왜 하는 건데! 이미 저렇게 말랐는데! 이걸 트레이닝 실장님께 말씀드릴 수도 없고. 갑자기 더 화나 보이는 00에 지민이 아하하하하, 누나? 누우나아? 하고 불렀다.
"아이스크림 먹고 갈래요?"
"됐어."
"에이, 내가 살게요!"
"그럼 애들 것도 사자. 이렇게 모인 거 오랜만이잖아."
"알았어요. 가요!"
티는 안 내도 기분이 좋아 보이는 00의 뒷통수를 지민이 쓰다듬었다. 미안한 마음에 소리 없는 한숨을 쉬었다. 로그에 저런 말을 할 줄은 몰랐다. 사실 지민은 다 듣고 있었다. 자는 척은 그저 00의 기분을 풀어 주기 위한 수단이었을 뿐. 여자라서 더 외로웠을 텐데. 신경 써 주지 못한 점이 마음에 걸렸다. 그냥 마트 가자. 나 하드 먹고 싶어. 00의 들뜬 목소리에 지민이 마른 침을 느릿히 삼켰다. 그래요, 그럼.
먼저 잡아오는 손에 지민이 힘을 주어 꽉 잡았다. 미안하다는 말은, 00이 잘 때쯤 할 수 있으려나.
02. 정국이가 본
"나 네 거 영어라 더블링 못 쳐 줘."
"아, 그런 게 어디 있어요. 쳐 줘야지."
"네 거 몰라. 야, 너 가사 다 외웠냐?"
"외우긴 했어요. 하루만에 바뀐 가사 외우는 건 진짜 할 짓이 아닌 것 같아요."
……바쁘구나 바빠. 래퍼 라인의 대화를 가만히 듣다가 윤기의 짜증이 스멀스멀 올라오는 걸 눈치챈 00은 지민과 정국의 옆자리로 자리를 급히 옮겼다. 솔직히 지민을 놀려 주려 온 거긴 하지만, 몸에 힘이 안 들어가 그냥 널부러져 있기로 했다. 플라스틱으로 된 하얀 의자는 꼬리뼈와 맞닿아 조금 아프긴 해도 잘 지탱해 줬다. 지민은 힘 없는 00의 손가락 끝을 매만지며 킥킥 웃었다.
"……아."
쿠당탕. 큰 파열음에 00과 지민 모두 고개를 들어올렸다. 널부러져 있던 몸을 똑바로 세워 고쳐앉은 00이 정국을 바라봤다. 정국이 떨어뜨린 마이크는 작은 경사가 있던 무대 아래 바닥에 데굴데굴 구르고 있었다. 지민이 놀라 작게 야! 하고 외쳤다. 몇몇 스태프의 시선이 모여들었다. 아. 스태프들 이런 거 싫어하는데. 우리가 잘 보여야 할 건 방송국 국장이 아니라 스태프들이야. 00이 누누이 했던 말이었다. 구른 마이크를 간신히 잡은 정국은 당황해 00만 빤히 쳐다봤다.
"죄송합니다. 00입니다."
00은 마이크를 떨어뜨린 게 정국이 아닌 자신이라고 말하고 정국을 쳐다봤다. 정국이 입술을 깨물었다.
"……실수로. 미안해요."
"조심 안 할래. 너 누나 없었으면 어쩌려 그랬어. 너 나 없을 땐 그냥 형들만 빤히 보고 있을 거야? 너 팀내에서 막내라고 다른 데서도 막내야?"
"죄송합니다."
정국의 사과말이 달라졌다. '미안하다'와 '죄송하다'는 엄청난 차이가 있었다. 정국이 고개를 숙였다. 차라리 혼자 대처를 했었더라면 꾸중은 면할 수 있었다. 정국이 다시 한 번 말했다. 죄송합니다. 평소 같았으면 괜찮아, 괜찮아 했을 지민도 조금 굳어 가만히 있었다.
"됐어. 고개 들어."
"……."
"왜. 할 말 있어?"
"고마워요, 누나……."
아까 마이크를 떨어뜨린 사람이 정국이 아니라 자신이라고 말했던 것. 정국은 그걸 뜻하고 있었다. 00이 픽 웃었다. 고마우면 정국아.
"애교 좀 부려 봐라."
"헐, 완전 좋죠, 누나!"
"……됐어요. 저 갈 거예요."
어쭈. 제법 새침하게 자리를 뜨는 정국을 보고 00과 지민이 웃었다.
03. 남준이가 본
"……누나, 이거 최종 가사예요?"
"응."
"그……."
남준의 말이 턱 막혀 버렸다. 이걸 뭐라고 말해야 하지. 그동안 여러 일들을 ─음란마귀 발언들─ 같이 지냈었지만, 이런 건 좀……. 조금 낯부끄러워지는 느낌에 남준이 큼큼 헛기침을 했다. 윤기를 불러와 같이 말해 볼까 했지만 윤기가 이 가사 야해, 하고 말할 사람은 아니었다. 담담하게 가사지를 내 주고 담담히 시집을 읽는 00의 얼굴이 맑았다. 그래. 이건 비즈니스다. 00이 부를 노래도 아니고. 남준은 으음, 하고 앓는 소리를 냈다.
"왜? 별로야? 언니가 그런 느낌을 원했는데."
"아뇨. 그게 아니라 누나 가사 스타일이 바뀐 것 같아서요."
바뀌긴 했다. 조금의 변화가 이런 차이를 나타낼 줄은 잘 몰랐는데. 호르몬 전쟁 때 빼고는 이런 돌직구 식의 가사가 없기도 했으니까. 00의 서정적이던 가사 스타일과 달리, 이번 노래의 가사들은 뭐 하나 감추어 놓은 게 없었다. 그냥 툭 까놓은 것 같다라고 해야 하나……? 평소 섹슈얼한 느낌의 가사도 정말 구렁이 담 넘어가듯 몽환적이게 풀어쓰던 00에게 이런 식의 가사는 거의 처음이었다. 넋을 놓고 있던 남준이 작업실의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정신을 차렸다.
"왔어, 글로스?"
"어. 가사 봐 달라고? 김남준 손에 들려 있는 게 가사야?"
"응. 포미닛 수록곡으로 들어갈 거야."
"우리 거 말고 작업하는 게 있긴 있었네. 괜히 일 안 하고 싶어서 한 거짓말인 줄 알았더니. 야, 너 왜 이러고 있어. 줘 봐."
작업실에 온 건 윤기였다. 사실 윤기 말고 올 멤버도 없다. 새벽 네 시, 멤버들은 잠에 빠져 허우적대고 있을 시간이었다. 가사지를 받아든 윤기가 00의 시집을 보더니 인상을 찌푸렸다. 새벽에, 그것도 시집을. 보기만 해도 눈이 다 아팠다. 소설이 아닌 게 다행인가. 그만 봐라, 좀. 윤기의 말에 00은 짧게 대꾸했다. 싫어.
"너 나쁜 남자 좋아하냐?"
"여자라면 다 갖고 있는 환상이지."
"어쩐지 내 동생이 사춘기 때 그렇게 나쁜 남자, 나쁜 남자 하더라."
"그렇지. 인터넷 소설 보면 거의 다 나쁜 남자가 주인공이야. 착한 남자는 서브고. 남자가 볼 때 나쁜 남자는 그냥 쓰레기일지 몰라도 여자가 생각하는 나쁜 남자는 섹시하고 돈 많고 나한테는 틱틱대면서 잘해 주는 남자인 거지."
"참 이해할 수가 없네. 너도 그런 거 좋아해?"
"그런 남자가 없긴 한데, 있으면 여자가 많거나 어딘가에 하자가 있겠지. 그리고 그 사람이 나를 좋아하진 않을걸. 그냥 환상은 환상이야."
"착하고 돈 많고 섹시한 남자는 매력이 없나?"
"이 바보들. 나쁜 남자가 좋은 이유는 '나한테만 잘해 줘서'야. 그런 남자도 좋긴 한데, 나쁜 남자에 환장을 하는 큰 이유가 그거라고."
……그럼 그게 나쁜 게 아니잖아. 그냥 철벽남일 뿐이지. 윤기와 남준은 여전히 이해를 못했다. 여동생이 있는 남준은 사춘기 때 나쁜 남자를 울부짖던 동생을 다시 한 번 회상하면서 윤기 손에 들려 있는 가사지를 봤다.
"가사가 좀 야한 것 같다는 생각은 안 하냐?"
"보수적인 척은 별론데."
"야, 김남준도 가사 야한 거 말하려다가 참고 있구만 뭘."
"차라리 누나는 네버랜드 같은 가사를 쓰는 게 나을 것 같아요."
"이거나 그거나야."
네버랜드. 비투비 앨범 하나 중 수록곡인데, 00의 가사 스타일이 그것과 거의 비슷했다. 실제로 작사한 거기도 하고. 팔랑. 시집 한 장이 넘겨졌다.
"너네들이랑 있으면서 내 귀가 얼마나 썩었는지 몰라."
"큼."
덜렁이는 황급히 입을 꾹 다물었다.
"그래서 쓴 거야, 그거. 난 순진하지는 않지만 순수해."
"……네 입장으로 쓴 거야?"
"뭐래. 그냥 가윤 언니가 이랬음 좋겠다 해서 쓴 거거든. 적어도 가사를 쓰는 사람으로서 아이디어는 있어야 할 거 아니야."
"그리고 이런 가사는 봐 달라고 하지 마. 암만 그래도."
"카마수트라."
"……."
"순진한 척도 별로야."
윤기의 귀가 달아올랐다. 동시에 남준의 귀도. 대충 그려지는 그림에, 00이 피식 웃었다.
04. 석진이가 본
"죄송한데 번호는 못 드려요."
"혹시 매니저분이나 회사에서 관리하시는 거면……."
"아니 그게 아니라, 제가 곤란해서……."
"저 00이랑도 친한데."
……누가 00이랑 친한 걸 물었냐고. 석진이 억지스레 하하 웃었다.
석진은 아까부터 자신의 곁을 떠날 줄 모르는 여자 때문에 곤욕이었다. 숨이 턱턱 막히는 기분. 원체 연예계에는 아는 사람이 없는 석진에게 이런 식으로 다가와 번호 교환을 하는 일은 고문이나 마찬가지였다. 거절을 잘 못하는 성격이 이렇게 독이 될 줄은 몰랐다. 평소에 대기실 밖으로 안 나가고 딱 하루만 나왔을 뿐인데. 착잡한 마음에 입꼬리가 굳었다. 여자는 휴대폰을 준비 중이었다.
"진짜 안 주실 거예요? 저 번호 교환하자고 먼저 안 해요, 다른 사람들한테."
"드릴 마음 없, 00아!"
"오빠 왜 여기 나와 있어요? 바쁜 거 알면서. 언니, 언니 리허설은 끝났어요? 내가 못 봐서. 미안해요."
오빠가 어린 애도 아니고…….
작게 속삭이는 00에게 석진은 아하하하, 하고 웃었다. 한없이 어색해 보일지 몰라도 아까보다 마음이 훨씬 편해져 있었다. 나 대기실로 돌아가야 해? 석진이 살풋 미소를 지었다. 00은 여자의 어깨를 잡고 말했다. 들어가 있어요. 여자는 00에게 끌려가면서도 꿍얼댔다. 나 할 일 있어. 사실 석진 씨 번호 따려고 했단 말이야…….
"으음, 그래요? 나 언니 좋아한다는 지인짜 좋은 사람 알아냈는데. 내 주위에 완전 괜찮은 사람만 있는 거 알죠. 어떻게 해. 알려 줘, 말아."
"……진심이야? 나 좋아하는 거 확실하대?"
"그럼요. 왜, 이번에 상 휩쓴 그룹."
"A그룹?"
"쉿. 목소리 낮춰요. A그룹보다 상 하나 더 받은 그룹 있잖아."
"대바악……."
"여기까지."
"아, 뭐야아! 알려 줘, 응? 궁금하게!"
푸핫. 기분 나쁘지 않게 여자를 애 태우고 있는 00을 석진히 가만히 바라보다 기분 좋게 대기실로 들어갔다. 물론 석진보다 나중에 들어온 00의 꾸중은 면하지 못했다. 오빠, 어린 애예요? 어떻게 저런 거 하나 거절을 잘 못해. 바보 같은 김태형도 번호 교환 같은 건 알아서 잘 거절하거든요? 응? 누나 나 불렀어요? ……아니야. 잠이나 자. 아무튼 오빠!
05. 태형이 본
'"태형아."
"네에."
"감기 걸렸어?"
활동이 끝나고 천 만 년 만에 있는 것 같은 스케줄 없는 날이었다. 멤버들은 어디 가기 귀찮다며 숙소에 눌러붙었다. 석진과 윤기는 DVD 하나를 빌려 시청하는 중이었고, 남준과 정국은 노래를 감상하는 중이었다. 석진과 윤기가 빌린 영화도, 남준과 정국이 튼 노래도 제 취향이 아닌 00은 호석과 지민, 태형이 있는 방으로 들어갔다. 거실에 혼자 있으면 쓸쓸하니까. 조금 열려져 있는 문을 조금 더 열고 자연스럽게 들어갔다. 놀라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만났다 하면 대화의 장을 열던 셋도 오늘만큼은 조용했다. 이 얼마만의 평화로움이던지. 팀내에서 종이인형을 맡고 있던 태형의 옆자리를 차지한 00은 심신의 안정을 되찾는 느낌이 들어 헤헤 웃다가도 휴대폰을 보는 태형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색색, 오늘따라 숨이 거칠다. 뭔가 화장실 옆칸이 아니더라도 태형인 걸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같은 화장실을 쓸 리가 없겠지만. 공용 빼고. 음.
"왜요? 나 기침도 안 했는데."
"숨소리가 거칠어서. 몸 무겁진 않았어?"
"……에, 몸이 좀 안 따라 주긴 했었어요."
"헐, 그걸 어떻게 알아요?"
"거의 윤기 형이랑 나인데?"
"형 태형이 감기 걸린 줄 알았어요?"
"아니. 나는 몰랐지."
"뭐예요. 숨소리로 사람 맞출 수만 있고. 엄청 쓸데없는 능력이네요."
"죽을래?"
그럼 그렇지. 이들이 안 시끄러울 리가 없었다. 조금 놀란 얼굴을 하고 있는 태형에게
00은 잘래? 하고 물었다. 몸이 무겁긴 해도 뭐 아직은.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감기는 네 눈은 뭐냐."
"……사실 졸려요."
"어휴. 나 지민이 침대로 가 있을게."
"아, 안 돼요. 못 가요. 안 돼."
자리를 뜨려는 00을 태형이 다리로 결박했다.
"이따 깨서 나 아픈지 안 아픈지 알아차려야죠!"
"……그래. 알겠으니까 눈 감아."
이불을 덮어 주는 손길을 받으면서, 태형이 히죽히죽댔다.
06. 호석이 본
"네, 언니. 네. 호석이가요. 네. 그러셨구나."
제가 잘 말해 볼게요. 에이, 뭘요. 얘기해 주셔서 감사해요. 네. 그럼 들어가세요!
00은 혹여나 들을까 입과 휴대폰 사이를 막았던 손을 떼어냈다. 발신인은 호석의 누나였다. 이런 얘기해도 될지 잘 모르겠어요, 로 시작한 말을 그리 길지 않았다. 호석과 싸웠다는 말이었다, 결국은. 그래서 오늘따라 호석이 가라앉아 보였던 거였네. 00이 한숨을 내쉬었다. 진짜 가족과의 다툼을 같은 멤버일 뿐인 자신이 풀 수 있을지 미지수였다. 아무래도 가족보다는 조심스러워야 했다. 물론 호석의 누나는 다른 멤버들보다 여자인 00이 그런 데에 더 신경 써 줄 수 있을 것 같아 전화를 했겠지만, 다른 멤버와 마찬가지로 00은 어떻게 해야 하는 건지 막막했다. 괜히 끼어들었다고 생각하면 어쩌지 싶기도 하고, 아무래도 가족과의 교류 때문에 생긴 문제는 팀 멤버가 나서서 해결해 주기 힘들기도 했다. 아, 이걸 어쩌지. 잘 말해 본다고는 했는데. 때마침 호석이 연습실에서 나왔다.
"……여기서 뭐 해요."
"나 때문에 연습 못하고 있었어?"
"그건 아니고요. 혼자 뭐 하나 해서."
"음. 그래, 호석아. 잠깐 얘기 좀 해도 될까?"
"……."
확실히 평소와는 다른 어조였다. 평소 같았으면 얘기 좀 하자, 했을 텐데. 다른 때와 같지 않은 모습에 뭔가가 있구나 느낀 호석은 말 없이 잠시만 기다려 달라고 연습실을 다시 들어갔다. 갑자기 사라지면 자신과 00 때문에 연습이 중단되니 공식적으로 연습의 중단을 알리려 한 것이었다. 밝은 표정이 아닌 호석에, 멤버들은 그저 고개를 끄덕이고 그 자리에 앉아 있을 수밖에 없었다. 윤기는 발간 얼굴을 물병으로 식히면서 부재인 00의 대형 자리를 봤다. 아마 00과 호석의 이야기가 있으리라. 눈치가 빠른 건 좋기도, 안 좋기도 했다. 조금 쓸데없는 생각을 하며, 윤기는 나가는 호석을 눈으로 좇았다.
호석은 알아차릴 수 있는 00의 달라진 태도에 당황하지 않고 빈 연습실로 향했다. 무슨 얘기예요? 중요한 거냐고 묻지는 않았다. 중요한 얘기라는 걸 누가 모를까. 호석은 마주 보고 앉은 00의 얼굴을 보지 못하고 책상으로 시선을 고정했다. 대화를 하려면 사람의 눈을 보고 하는 건데. 기분이 많이 안 좋다고 생각한 00이 눈썹을 내렸다.
"이런 말 내가 해서 많이 안 좋을 수 있어. 조금 주제 넘는 거라고 생각할 수도 있어. 부정하지는 않을게. 지금 호석이 너는 같은 팀일 뿐인 내가 이런 말을 한다는 거에 대해 조금 싫어할 수도 있으니까."
"……무슨 말이 그래요."
……뭔가 호석의 심기를 더 건든 것 같아. 어떡해! 00은 입술의 각질을 이로 뜯어내고 다시 입을 뗐다.
"네가 누나랑 싸웠다고 들었어. 무슨 일인지 물어도 될까? 언니께서 네가 그러는 이유를 잘 모르겠다고 하시더라. 사과하라는 게 아니라, 언니께 화를 낸 이유가 뭔지 알고 싶어."
"……."
"강요는 안 하겠지만, 그래도……."
"사촌이."
00은 급하게 입을 다물었다. 호석은 담담한 어투로 말했다. 사촌쪽이 많이 힘든 상태예요. 저희는 아빠께서도 사회 생활 이어가시고, 누나랑 저도 수입이 있잖아요. 사촌쪽은 아예 그런 게 없거든요. 그런데 사촌이 춤쪽으로 나가고 싶다고 하더라고요. 제가 보기엔 재능이 있어요. 있는데 집안이 어려워서 뜻이 잘 펴지는 것 같아서, 돈 조금 대 주면서 이곳저곳 추천하고 다녔어요.
……그런데 누나가 보기에는 애를 휘젓고 다니는 것 같다고 뭐라고 하더라고요. 춤쪽으로는 돈벌이도 안 되고, 꿈만 가지고 그러기에는 상황이 너무 열악하다고. 괜히 쓸데없는 짓하지 말라고, 그래서 그냥 누나한테 짜증만 내고 왔어요. 저는 그 친구보다 상황도 훨씬 좋았고 부모님도 반대하시지 않았지만, 옛날에 그냥 저를 보는 것 같아서……. 그런 것뿐이었어요. 제가 갑자기 화를 내니까 누나도 당황스러웠을 거 알아요. 그래도 그냥…….
"이렇게 싹 다 정리해 보면 진짜 별거 아닌데."
"아니야."
"누나도 내가 괜한 짓 하는 것 같아요? 애 희망고문하는 것처럼 보이나?"
"호석아."
"……."
"음. 너도 어른이고, 많이 고민했을 테고. 무엇보다 그 애가 하고 싶어 하는 걸 도와 줬다는 건 너 나름의 최선이었을 거 아니야. 경험의 차이라고 생각해, 난. 처해 있는 상황은 달라고 어쨌거나 같은 입장이어 봤잖아. 언니는 너랑 그 아이를 조금 더 멀리서 본 상태인 거지. 너는 그 아이와 한공간에 같이, 언니는 그걸 멀리서. 생각이 어긋나는 건 당연한 일일 수밖에 없어. 시야가 다르니까."
……으음, 너무 내 말만 했나. 주절주절, 어느 정도 생각을 정리했음에도 의식에 흐름대로 말한 것 같은 느낌에 00은 고개를 들어 얼굴을 살피려 했다.
"……."
"왜, 왜 웃어?"
놀랍게도 아까 그늘이 진 호석의 얼굴과 달리, 호석의 입가에는 옅은 미소가 피어올랐다. 놀란 00은 눈알을 굴리다가 호석을 따라 웃었다. 그래. 기분이 풀렸으면 됐지. 뒷마무리는 잘할 거라고 믿는다. 어른이잖아.
"자리 너무 오래 비운 것 같은데."
"어, 음, 그렇지."
"갈까요?"
"그래."
놀랍게도 호석은 다시 밝아진 채로 룰루랄라 00과 함께 손을 맞잡고 돌아왔다. 멤버들은 갑자기 변한 태도에 흠칫 놀랐다. 00도 마찬가지였다. 기분이 다시 좋아졌으면 된 거야. 아무래도 호석에게는 해결책보다는 누군가에게 이야기를 털어놓고 싶어 하는 경향이 많았나 보다, 라고 생각한 00은 그냥 씩 웃었다. 호석은 다시 연습을 재개했다. ……기분 좋아진 건 좋은데 뛰어다니지 말라고! 야, 연습한다며!
"에이, 이 정도면 연습 많이 한 거지."
……95년생이나 94년생이나. 철 없는 것들. 쯧. 00과 윤기가 혀를 찼다.
07. 윤기가 본
"병신아, 조심 안 해? 넘어질 뻔했잖아!"
"……아. 갑자기 힘 풀려서 그래."
"아무리 생각해도 회사에 건의해야겠어. 다이어트는 하는 게 아니야."
건의해 봤자 다이어트는 한 달 후에 또 하게 될 거다. 윤기가 픽 웃었다. 얇은 다리가 콤플렉스이긴 하다만, 옆에 있는 00보다야 뭐. 넘어질 뻔한 윤기의 모습이 아직까지도 아른거리는 00은 윤기의 손목을 꼭 쥐었다.
"아. 진짜. 뼈밖에 없네. 오늘 나랑 점심 먹어."
"나 작업실 갈 건데. 너도 갈 거야?"
"숙소에 갈 줄 알고 밥해 주려고 했더니."
"귀찮게 왜. 그냥 도시락 먹어."
너무하네. 집밥 먹고 싶어 할 땐 언제고. 00이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남자들 중에 귀염성 있는 성격이 몇 안 된다고는 해도, 이런 건 섭섭할 수 있단 말이야. 아무리 가족 같은 사이고, 같은 팀이더라도 남자 멤버들은 여자인 00과의 차이점을 생각하려 하지 않았다. 아니, 생각해 보지 않았다는 게 맞겠다. 언젠가는 해결해야 할 문제니까 말을 해 봐야겠다고 한 00이 걷는 데에 집중한 윤기를 퍽 칠까 생각하다 생각을 바꿨다. 민윤기 쪼다. 할배. 등신.
"……그만하지?"
"하긴. 할배는 좀 심했다. 너랑 내가 동갑인데, 나까지 비하하는 발언이라니. 너무했어."
……그 말이 아니잖아. 일부러 익살스러운 척하는 00에 절로 헛웃음이 나왔다. 지금 도시락 먹으라고 해서 저러는 거지, 지금? 윤기의 생각을 읽은 00이 빼액 외쳤다. 도시락이 문제가 아니라 네 태도가 문제라고. 귀찮게라니, 귀찮게라니. 어떻게 내 정성을 무시할 수가 있어.
"……으휴. 미안하다. 밥 먹는 시간에 너 작곡 가르쳐 주면 좋, 아! 왜 때려."
"작곡 안 배워."
"알았어, 그럼 나 말고 선생님한테 배우면, 악! 왜 자꾸 때려!"
"작곡 안 배울 거야. 싫어. 자꾸 나한테 배움을 강요하지 마!"
"……."
결국 윤기는 할 말을 완벽히 잃고 말았다. 보통 여자들이 다 이러나? 그러니까 000 얘가, '보통 여자'는 맞나? 윤기는 둥둥 떠다니는 생각들에 고개를 휘저었다. 아니. 아닐 거다. 아닐 것 같긴 한데……. 맞나? 서운한 건 그렇다 치고, 반응이 원래 저렇게 나오는 건가. 가끔가끔 튀어나오는 아이 같은 모습이 나쁘지 않았다. 그냥 '여자'를 파악하는 게 어려운 건지, '000'이란 사람을 아직 잘 알지 못하는 건지. 어쩌면 둘 다일지. 윤기는 하는 수 없이 그냥 픽 웃었다. 야, 거기 차도거든? 어쩌라고. 꺼져. 작업실 갈 때까지 이럴 거냐? 신경 쓰지 마.
"……어우씨. 정호석이라도 불러야 하나."
휙휙 가버리는 00의 뒷모습을 멍하게 쳐다봤다. 누나나 여동생을 가지고 있는 것들은 많은데 쓸 데가 없어, 쓸 데가.
08. 인터뷰로
에디터_ 팬분들이 보는 00 씨랑 멤버들이 보는 00 씨랑은 많이 다른 것 같아요?
진_ 다르다는 생각은 딱히 해 본 적 없는 것 같아요. 애가 이중적인 모습을 가지고 있는 건 아니라서.
랩몬_ 그 지난번인가? 팬싸인회 때 한 팬분이 누나한테 "언니, 우리도 여잔데 오빠들 대하는 것처럼 대하지 마세요! 우리 여자란 말이에요!" 하시더라고요. 누나가 "나도 여잔데?" 하니까, "그렇네요. 하트 많이 그려 주세요!" 하고 가셨어요.
슈가_ 이쯤되면 애 정신 상태를 좀 제대로 알고 싶네요.
뷔_ 맞아요. 누나 정신세계가 알고 싶어요.
00_ 네가 할 소리는 아니고.
지민_ 누나뿐만 아니라 팬분들한테는 좀 더 다정해지는 게 있어요. 어찌 보면 당연한 거죠. 특히 김태형(뷔)을 인터넷에서 남친돌이라고 그러던데요? 초반에 누나는 팬분들을 되게 도자기 다루듯, 만지면 깨질까 하다가 작년부터인가, 점점 편하게 대하시더라고요.
00_ 초반에는 정말 무서웠어요. 생각해 봐요. 나는 몇 년 동안을 남자들이랑만 같이 생활을 해 왔잖아요. 여자들이 이만큼인데! 정말 함부로 건들다가 다치면 어쩌지, 깨지면 어쩌지 했죠. 요즘은 익숙하기도 하고. 남자팬이 늘어서 좋아요. 저보다 나이가 많으신 분들은 이름 부르거나 동생 대하듯 하잖아요. 그게 좋아요. 그렇다고 니들(멤버 5명)이 싫은 건 아니에요. 아무래도 팀에서는 동갑 한 명에 오빠 한 명밖에 없으니까. ……그렇게 시무룩해 있지 말고요. 다음 질문 빨리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