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문 키워드: 소녀가장, 발레슈즈, 긴머리, 취향, 발목, 물, 가난] 으로 누가 써달랬는데 없네요.
글 뭐로 쓸까 고민하다 연습으로 정말 짧게 잠깐 써봅니다.
+어제 오늘 연달아서 조각글 2개 나갔습니다.
-단편, 일본에서의 소풍-
w. 그루잠
1.
얼떨결에 객사를 찾았다. 벚꽃으로 가득한 길을 따라, 줄로 이어진 등불을 따라. 코 끝이 벚꽃 냄새에 젖어 걷다보니 한 객사가 숨어있었던 걸 발견했다. 그러자 한 긴 머리의 여자 아이가 창을 열어 나를 본다. 놀란 나는 다시 길을 돌아갈까했지만 뒷길이 안 보일 정도로 어둡다. 길을 잃어 돌아가는 방법도 잃었다. 어두워져가는 하늘을 잊고 벚꽃에 홀렸더니 깊은 산골까지 들어와버렸다. 절뚝거리며 나오는 긴 머리의 여자는 바닥에 끌리는 기모노를 입고 있다. 자기 몸보다 훨씬 큰 기모노. 흰 기모노에 벚꽃 모양 수들이 날려있다. 그녀는 객사 입구 앞에 서 나를 기다린다.
"들어와."
낡은 발레 슈즈 하나 들고 돌아다니던 나는 한 푼 조차 없다.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상황을 애매해하자 여자는 손을 잡아 올려세운다. 그저 그녀를 따라 나무 바닥을 밟았다. 삐걱삐걱 쇠소리가 낯설다. 등불을 든 소녀가 걸음이 불편해보여 넘어질까봐 속이 안절부절했다. 그럼에도 씩씩하게 잘 나아가는 소녀.
"이름이 지민?"
"어떻게 아세요?"
"목걸이에."
아. 태어날 때부터 걸고 다닌 목걸이를 알아본 여자의 눈썰미가 대단하다. 아직 여물지 않은 소녀는 거실로 데려가 따뜻한 이불에 앉혔다. 따뜻한 불의 온기를 쬐며 이불 속으로 파고 들었다. 물을 끓이기 위해 장작을 더 넣는 소녀는 곧 차를 만들어 내게 건내주었다.
"저, 사실 머물 돈이 없는…."
"괜찮아."
한창 쓸쓸했는데 머무는 동안, 내 말동무 되어줘. 그거면 돼.
방석에 앉은 소녀는 벽걸이에 등불을 걸어 책을 읽는다. 불편하지만 도움을 받아 다행이다. 차를 마시다 슬쩍 드러난 소녀의 발목을 보았다. 유독 얇아 몸을 가누기 힘들어보이는 발목. 그리고 아슬해보였다. 지금 불빛에서 보니 조금 쑥쑥해보이는 얼굴. 소녀는 책을 읽다 말고 곧 불을 껐다.
"오늘은 일찍 피곤해."
내일은 나무에 물을 주러가야겠어.
같이 갈 거지?
고개를 끄덕인 나. 머리를 쓰담는 소녀의 손길이 이상했다. 이불 안에서 발레 슈즈를 놓지 않겠다는 듯 더 꼭 쥐었다.
점점 잠에 녹아 들어가 아침을 기다린다.
2.
객사 뒷뜰의 대단히 큰 벚꽃 나무. 화사하게 달린 등이 너무나 아름다워 넋놓고 올려봤다. 벚꽃 잎이 아픔을 잊게 할 만큼 황홀하다. 물뿌리개를 든 나는 뒤에 풀밭에 앉아 보기만 하는 소녀를 본다.
"왜 안 와요? 이렇게 예쁜데."
"난 그쪽으로 걸어갈 수 없어."
보다시피 발목이 많이 아프거든. 아, 뒷뜰은 벚꽃 나무 뿌리가 나와 접근하기 어려운 지형이다. 인정하고 끄덕한 나는 뿌리를 피해 콩콩 뛰어 벚꽃 나무에 도착했다. 벚꽃 나무 중심지로 오니 뿌리들이 너무 메말라있었다. 끊어져 부러질 듯이. 뿌리에 물을 뿌리자 황금빛으로 변하는 닿는 부분. 느낌적으로 생기가 돌았다. 소녀는 웃으며 가디건을 더욱 껴 안았다. 꼬르륵. 나무에게 물이 필요한 만큼 가난한 내 배에게도 밥이 필요했다. 부끄러운 표정으로 소녀를 보자 하얀 손이 소풍용 가방을 흔들거린다. 물뿌리개를 들고 해맑게 뛰어갔다. 바람이 불자 분홍색 꽃잎이 잔잔히 떨어진다. 내 머리에 앉은 꽃잎. 행복하게 벚꽃 나무 아래서 그녀와 소풍을 즐겼다. 소녀는 뽀얀 얼굴에 붉은 뺨이 무르익었다. 쉬면서 아팠던 발목도 차차 나아가는 것 같다. 잊어간다. 객사로 들어간다면 발레 슈즈를 먼저 찾아야겠다. 검은 머리카락을 쓰담는 손길이 나쁘지만은 않은데.
3.
오늘은 그녀와 뜨개질을 하기로 했다. 이불에 앉아 실을 돌돌 마는 것만 하기로 했다. 워낙 손재주가 없기에 그녀가 뜨개질을 하는데 도움만 준다. 작은 손으로 실뭉치로 만드니 동글동글하다. 뿌듯한 나는 바보처럼 웃었다. 소녀와 함께 있으면 분홍 솜사탕이 된 것처럼 기분이 몽실몽실 떠올랐다. 소녀는 능숙하게 무언가를 만들어갔다. 색을 섞어 만든다고 했기에 반대편 실도 동그랗게 말아야했다. 자리를 옮겨 앉아 실을 꼼지락거리면서 만졌다. 언제 후딱 만들었는지 분홍색 목도리에 하얀 꽈베기를 넣은 목도리를 짠 보여준다. 소녀에게 딱 어울리는 예쁜 색이다. 내가 메어준다며 둘러주었지만 길이가 많이 남았다. 소녀는 남은 목도리로 내 목에도 감아주었다. 많이 길었던지 목도리에 파묻혀 눈만 빼꼼 내놓았다. 소녀는 웃으며 또 다시 내 머리를 쓰담는다. 익숙해진다. 따뜻한 곳에서 사랑받으며 사랑을 주고 싶다. 잠시 쉬어가는 곳이 아니었으면 좋겠다. 하지만 내 곁에 있는 발레 슈즈는 주인을 찾았다. 발레 슈즈따위 벚꽃 나무 밑에 묻고 싶다.
하지만 떠오르는 당신의 얼굴은 어째서 슬픈지.
타오르는 불에 식은 얼굴의 형상은 내 마음을 아프게 했다.
4.
비가 온다. 비가 객사로 들어오려기에 문을 닫으려고 했지만 소녀는 물 튀기는 창가에 서있다. 물이 고이면 뒷뜰 벚꽃 나무가 썩을텐데. 우려하는 그 눈빛을 잡은 나는 그릇을 들고 나가 비를 맞았다. 뿌리 사이 사이에 고이는 물을 퍽퍽 퍼내는 나를 본 소녀는 놀라 뛰쳐나왔다. 소녀는 몽땅 흙탕물에 젖은 내 위에 우산을 씌웠다.
"이제 올 수 있네요."
"네 덕분이야."
그리고 물 퍼내려고 하지마. 어짜피 서서히 죽어가는 나무니까.
"아니에요! 그런 말 하지마요."
썩지 않게 제가 돌봐줄게요. 물을 퍼내며 기진맥진한 숨을 골라 쉬었지만 멈추지 않았다. 이렇게 말이에요! 우는 소녀는 나를 멈출 수 없었다. 결국 다음날 감기에 걸린 나는 이불 안에서 따뜻한 차를 마시며 골골 거려야했다. 소녀는 내가 죽을까봐 슬퍼하며 등불을 여러개 주위에 놓았다. 그리고 달인 쓴 약을 가지고 와 마시게 했다. 콜록거리며 거부했지만 소녀는 어쩔 수 없이 모두 삼키게 했다.
"단 것도 좋지만 네 몸에 좋은 건 쓴 약이야."
약을 먹으며 괴로워 하면서 그 다음날 훌쩍 나은 그 아이가 생각났다. 그 생각으로 참아 마셨다. 오늘도 비가 내려 꽃잎 무리가 떨어졌다. 꽃잎이 떨어질 때마다 소녀는 울었다. 하늘도, 소녀도, 나도 아프지 않았으면 좋겠다. 다음날 일어나보니 발레 슈즈가 축축히 젖었다.
5.
일주일이나 지났다.
벚꽃 나무에 물을 자주 주니 꽃도 많이 늘어나 눈처럼 내렸다. 소녀의 발목도 호전되어 더이상 목발을 짚지 않아도 된다. 그녀 스스로 벚꽃 나무에 물을 줄 수 있는 정도까지 왔다. 내가 필요하지 않다. 그녀를 향해 무당벌레도 날아오고, 반딧불이도 찾아왔다. 예쁜 등불도 여전하다. 여전히 남고 싶지만 그녀에게 짐이 될 순 없었다. 발레 슈즈를 들고 객사 입구에 섰다. 떠나기 아쉽고 그녀가 많이 생각 날 게 분명하다. 하지만 아른거리는 얼굴이 나를 계속 불렀다. 이대로 있으면 그 얼굴도 보이지 않아 내가 슬퍼질 것 같아 먼저 나선다. 따라 나온 소녀는 오늘도 하얀 벚꽃의 옷을 입었다. 예쁘다. 한결같이 예쁜 너는 여기 있어줘. 환한 길, 벚꽃과 등불. 나만큼 슬픈 지 소녀의 얼굴에 눈물이 떨어졌다.
"기필코 돌아가야겠어?"
"네."
"돌아가는 길도 모르잖아."
"모르지만 갈 거에요."
"가지마."
"가야해요."
날 끌어안는 소녀는 차갑다. 그래서 더욱 불을 가까이 하고 따뜻하려고 했던 걸까. 그녀에게 필요없는 불은 나를 위해 피워주었다. 이 눈물도 나를 위해. 아이처럼 우는 너는 내 손을 꼬옥 잡는다.
"네 주인이 널 버렸는데 어째서 찾으러 가?"
"버렸는지 잃어버렸는지 어떻게 알아요."
그냥 찾는 거에요. 갈 곳 없으니까.
"나랑 같이 벚꽃 안에서 살자."
평생 나랑 살자. 사랑해줄게. 네가 닳을 때까지, 네가 사라질 때까지.
강아지야, 나랑 살자.
속삭이는 소녀는 날 떠나보내게 될 줄 알면서도 희망을 잡으려 했다. 앎이 점점 이성을 찾고 소녀는 눈물을 닦았다. 그녀는 멈췄는데 내가 흐른다.
"저 없어도 잘 지내야 해요."
"응. 그럴게."
"꼭 주인이랑 올게요."
"지민이랑 같이 와야해."
천천히 떨어지는 발걸음. 발레 슈즈를 물고 작은 몽실몽실한 발이 차차 객사를 떠나간다. 뒤로 돌아보자 소녀는 벛꽃으로 변해 나를 따라온다. 길을 알려주는 소녀의 벛꽃 무리를 따라 달리며 산을 내려간다. 힘차게 내려가자 사당의 표시가 보인다.
-벚꽃 신사-
벚꽃 길이 끝나갈 무렵,
산 길 아래서 하염없이 울고 있는 소년. 작은 몸덩어리를 향해 달려가 손을 핥았다.
'주인, 발레 슈즈 여기 있어.'
믿기지 않는 광경에 지민은 큰 눈으로 감각을 느꼈다. 꼬리를 흔드는 나를 안아 올렸다. 바닥에 떨어진 발레 슈즈는 얌전하다. 지민이 나를 찾고 있었구나.
사실 희망을 가지지 않고 무작정 달렸다. 주인이 날 찾지 않아도 달리려고 했다. 잃어버린 나를 찾아준 지민의 눈물을 핥았다. 목에 달랑거리는 목걸이에 지민의 이름이 쓰여져있었다. 산으로 올라가는 사당 길. 계단 입구에 서있는 소녀. 하얀 벚꽃이 그려진 기모노를 입은 그녀는 하얗게 웃는다. 나도 그녀를 따라 웃어본다.
'다행이야. 착한 주인을 만나서.'
어느새 우리의 머리 위로 하얀 벚꽃이 내린다.
저녁이 찾아와 깜빡이며 거리의 불빛이 켜지니 소녀는 온 데 간 데 사라지고 없다. 오직 지민의 발걸음을 따라 멀어질 뿐이다. 멀어질수록 소녀를 보고 싶은 생각이 간절해졌다.
- 단편, 일본에서의 소풍 (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