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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석구] 마흔살 아저씨 짝사랑하기
w.1억
"뭐 먹을래."
"…아무거나요."
아무거나라고 했더니 직원을 부르고 멋대로 음식을 시킨다.
그리고 우리 둘은 서로 음식이 나올 때까지 아무말도 없다. 괜히 나는 주변 사람들을 구경하고.. 아저씨는 턱을 괸 채로 창밖을 본다.
아무말도 없는 우리 사이에 정적을 깨게 해준 건.
"감사합니다."
음식이었다. 내 감사하다는 말에 사장님이 웃으며 갔고, 괜히 아저씨를 힐끔 보았다. 알 수 없는 표정으로 나를 본다.
아저씨는 늘 저런 표정이다. 무슨 말이 하고싶은 것 같은데. 말이 없어. 사람이 원래 저러나.. 아니면 낯을 가리나.
항상 재잘재잘 말이 많았던 남자들과 밥을 먹었고, 나는 늘 그 남자들에 비해서 말이 없었다. 근데 이젠 내가 말이 많은 사람이 된 것 같았다. 그저 감사합니다 한마디 했을 뿐인데.
사람을 보면 말하기 싫고, 말을 걸면 귀찮아서 대충 대답만 하는 내가. 이 아저씨랑 있으면 입을 열고싶어진다.
말도 없이 정적 속에서 조용히 밥을 먹다말고 아저씨를 보며 입을 열었다.
"왜 갑자기 밥 먹자고 해요?"
"……."
"나한테는 한심하다 뭐다 막말로 상처 줬으면서.. 밥 먹자고해서 바로 따라오기는 했는데.. 멋대로 막 물어보지도 않고! 가버려서 따라온 거예요. 저 약속도 있고 그래서 바로 먹고 가야돼요."
"……."
"…지갑은 일부러 놓고간 거 아니에요. 진짜 깜빡하고 놓고간 거예요. 저도 며칠동안 불편해서 죽는 줄 알았고.. 일부러 아저씨 없는 시간대에 온 건데.. 아저씨 있을 줄 몰랐어요."
"……."
"…왜요?"
"다 말했냐."
"……."
"다 말했으면 먹어. 식으면 맛 없어."
열심히 말했더니만 대답은 커녕 '밥이나 먹어' 이런 뉘앙스이길래 괜히 기분이 좀 그렇다가도 아무말도 않고 숟가락을 들었다.
정말 웃겼다. 말도 없이 이렇게 밥을 먹는 게 처음이라 어색할 만도 한데. 편안해지기도 했다.
"취소할게."
"네?"
"한심하다고 했던 거."
"……."
"하나도 안 답답해. 그 친구가 이상한 거야."
"……."
"남이 하는 말 듣고 네 스스로한테 칼 꽂지 마."
"……."
"그런 거 하나하나 다 신경쓰면 우울증.. 그런 거 걸린다."
"…아저씨 나한테 미안했어요?"
"……."
"미안했네~ 미안했구나? 그런 거 되게 신경 안 쓸 것 같았는데. 신경 쓰나 봐요."
"……."
"제가 예상했던 거랑 다르네요.. 엄청 욕할 것 같았거든요. 뭐 이런애가 다 있어~ 하면서 욕할 줄 알았는데. 그래서 마주치기 더 싫었는데. 아저씨가 오히려 미안해하니까.. 기분이 좋은 거 있죠."
"너 말 되게 많은 거 알지."
"저요? 저 말 진짜 없는데요. 진짜 친한친구 아니면 말을 아끼는 사람이에요."
"그럼 말 아껴."
"……."
"우리 안 친하잖아."
"……."
"머리 아파. 네가 말할 때마다."
"알겠어요.."
"……."
"근데 혹시라도 친구들이 남자친구 얘기하면 그냥 있다고 해도 되죠?"
"……."
"왜요.. 이미 저 못난 거 다 들켰는데. 계속 못나면 뭐 어때요. 아저씨만 허락해주면 계속 사귄다고하게요. 애들이 부러워하니까 기분 되게 좋던데."
또 알 수 없는 표정으로 날 보더니 밥을 먹는다. 아저씨가 그렇게 대답 안 하면 난 멋대로 생각할 거예요.
"먹고 가."
"……."
저러고 계산을 해버리더니 그냥 가버리는 아저씨에 웃음이 나왔다. 그냥 미안하다고하지..
아쉬웠다. 바로 1시간 전까지만 해도 피하고싶어서 고생을 다 했는데. 아저씨가 이렇게 가버리는 게 아쉽고 더 보고싶었다.
나도 참 마음이 쉽다. 금세 기분 풀려서 다시 좋아하는 것도 웃기다고 생각한다. 단순한 건가.
'하나도 안 답답해. 그 친구가 이상한 거야.'
'남이 하는 말 듣고 네 스스로한테 칼 꽂지 마.'
'그런 거 하나하나 다 신경쓰면 우울증.. 그런 거 걸린다.'
집에 와서 씻으면서도 생각이 났다. 나한테 저렇게 말해준 사람이 처음이라 마음이 참 이상했다.
심지어 잘생겼어. 늘 남자친구도 내게 답답하다고만 했는데. 저런 사람이 나타나기는 하는구나.
"어? 서림아!"
"어, 안녕! 뭐야?"
"나 여기 일주일 실습! 너 여기 회사 다니는구나."
"응. 얼마 안 됐어..!"
생일파티에 왔었던 친구다. 내가 다니는 회사에 실습을 하러 왔고, 내가 이 친구에게 모든 걸 알려줘야했다.
그러다보니 혼자 먹던 점심도 이 친구와 같이 먹어야했다. 평소에 낯을 가리는 나는 말이 많이 없었다. 말은 이 친구가 다 하게 되었다.
솔직히 말해서 나랑은 그렇게 많이 친한 사이가 아니었다. 그냥 지나다 마주치면 유난떨며 인사하는 사이.
물론 내가 유난떠는 게 아니라. 이 친구가.
"근데 남자친구분은 뭐하는 사람이야?"
"……."
"아, 너무 실례되는 말인가.. 애들끼리 만나면 다 너 얘기만 하잖아. 다들 궁금하다고 하니까 나도 궁금해서."
"요리해. 음식점 사장."
"아, 진짜? 대박.. 그럼 매일 맛있는 거 해주겠네~ 부럽다..ㅠㅠ 그럼..혹시 나이는..?"
"…마흔살."
"아.. 그래? 뭐! 그럴 수 있지! 요즘 애들 다 연상 만난다잖아. 많이 차이 나도 뭐.. 어때 그치?"
"…ㅎㅎ."
"그럼 그분은 어때? 잘 만나고 있는 거야?"
비꼬는 게 절대 아니다. 그냥 순수하게 궁금해서 묻는 것 같아서 한참 아저씨를 상상했다. 아저씨..
"말은 엄청 없고."
"……."
"막말 엄청 할 것 같은데. 진짜로 하고.."
"……."
"근데 또 미안해할 줄은 아는 사람."
"……."
"나도 오래 만난 건 아니라. 서로에 대해 제대로 아는 게 없어. 알아가는 단계야."
"…엄청 스윗하시던데? 돈도 내주시고.. 데리러오고.. 그때 진짜 놀랐잖아. 애들이 다 황인엽 때문에 있는 척 한 거라고..난리도 아니었어."
그래. 나도 알아. 그래서 더 통쾌했던 거였어. 아저씨한테 고맙고.
회사가 끝나고 아저씨를 볼 생각이었다. 물론.. 아저씨가 허락을 해준 건 아니지만. 그냥 혼자 몰래라도 보거나, 끝날 때까지 기다리려고 했는데.
"뭐해? 여기서? 집에 바로 간다고 했잖아!"
실습하는 친구랑 아저씨 가게 앞에서 마주쳤다. 자기 집이 바로 근처라며 웃으며 나를 보는 친구가 조금 미웠다. 그냥 가지..
"아, 가려구..!"
"어? 저기 안에.. 남자친구분 아니야??"
이런.
가에 안에 있는 아저씨를 본 모양이다.
여기서 또 아니라고 하면 좀 그러니까. 고개를 천천히 끄덕이고선
"가자. 밥 사줄게."
불편한 친구를 이끌고 밥이라도 사주려고 했더니만.
"여기서 먹자! 여기 파스타 맛있다고 유명하던데? 여기 사장님이셨구나."
가자며 내 대답도 안 듣고 가게로 그냥 들어가버리는 친구에 한숨을 내쉬었다. 나보고 어쩌라고..진짜.
"오늘 일찍 끝나는 날이라.. 안 될 거야. 다른 곳에서 먹자."
"된다는데? 우리가 마지막 손님인가봐."
하필이면 또 우리가 마지막 손님이란다. 진짜 골치아프네.. 직원이 내게 '안녕하세요' 인사했고, 난 어색하게 웃을 수밖에 없었다.
친구랑 밥을 먹는 동안에 아저씨가 안 나왔으면 했다. 내가 이렇게까지 민폐를 끼치는 사람이 아닌데.. 그렇게 오해하면 어떡해. 너무 억울할 것 같아.
안 마주칠리가 없다. 아저씨를 보고 반가워서 '안녕하세요^^'하고 웃는 친구가 미웠다.
"……."
직원한테 내가 왔다는 얘기를 못들었나보다. 나오자마자 나를 보더니 별로 좋지 않은 표정으로 목례를 하고선 다른곳으로 향하는데. 이 시간이 빨리 지나기만을 바랄 뿐이다.
친구는 뻘쭘한지 날 보고 어색하게 웃었고, 나도 덩달아 어색한 표정을 짓는 방법밖에 없었다. 그러게 내가 다른곳에서 밥 먹자고 했잖아.
친구는 가고, 나는 가게 옆에 앉아서 아저씨가 나오기만을 기다렸다.
오늘은 정말 아저씨 얼굴만 보고 가려고했는데. 맘처럼 쉽게 되지가 않는다. 친구 때문에..
직원들 다음으로 한참 지나서야 아저씨가 나왔고, 내가 일어서면 아저씨도 날 한 번 바라보더니 어디론가 향하기에 같이 따라 걸었다.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면서 계속해서 아저씨의 뒤를 따랐다. 딱 한발자국 뒤에서.
"……."
"제가 데리고온 거 아니에요."
"……."
"전 그냥 아저씨 얼굴만 보고 가려고 했는데. 친구가 주변에 산대요. 지나가다 저랑 마주친 거예요. 또 저 친구가 오늘 저희 회사에 실습하러 온 친군데.. 막 안 된다고 할 수도 없고.. 아저씨 얼굴 아는데.. 좀 그렇잖아요. 죄송해요."
"……."
"쟤가 친한애는 아니거든요. 근데 그 무리에서 제일 착해요. 그래서 아저씨 안 와서 애들 다 난리칠 때 편들어주고 그랬었는데. 그거 고마워서 그냥 제가 샀어요. 근데..제가 사람을 좋아하는 줄 알았는데. 아닌가봐요.
특히 애는 더 싫더라고요? 실습하러 와서 모르는 게 있으면 그냥 알려주면 되는데. 두 번 물어보니까 그냥 막 짜증이 났어요. 그리고 여기 오는 길에 웬 꼬맹이가 날 쳐다보는데. 그냥 또 짜증나고."
"……."
"근데 되게 웃긴 건 뭔지 알아요?"
"……."
"사람들이 저 보면 착한 줄 알아요. 초등학생 때는 별명이 천사였고. 중학생 때는 착하다고 소문나서 친구들이 많았고, 고등학생 때는 착하다고 하니까 하나둘씩 와서 친구니까 돈 빌려달라고하고."
"……."
"근데 저 하나도 안 착해요. 착한 척하는 거예요. 일기장 보면 사람 욕만 한바가지야. 근데 더 웃긴 건. 엄마도 제가 착한 줄 알아요. 철이 일찍 들었다. 우리 애만큼 착한 애 없다. 남자한테는 착하지 마라. 이모가 우리 엄마 부러워한다니깐요. 내가 너무 착하대. 그래서 예쁜데 안쓰럽대. 난 그냥 나 편하려고 착한 척하는 거고. 나 편하려고 하기 싫은 거 해주는 건데. 막상 해보니까 집에 가면 억울하고 스트레스 받아. 나 성격 진짜 이상한 것 같아요."
"……."
"나.. 진짜 착한 척하는 건데. 제 진짜 모습 아는 거 아저씨밖에 없어요. 우리 엄마도 모르는 거 아저씨가 아는 거예요."
갑자기 가다말고 우뚝 멈춰서서는 나를 보는 아저씨에 나도 멈춰서 아저씨를 보았다.
"……."
"왜요..?"
"그게 착한 거야."
"……."
"진짜 못된 새끼들은 자기 편하려고 짜증내고 멋대로 해."
"……."
"앞에선 착한 척하고 뒤에서 욕해도 그래도 착한 거라고."
"…호구 아니고요?"
"호구는."
"……."
"저런 애들이 호구고."
저런 애들이 호구라며 저 멀리 싸운 여자를 위해 길 한복판에서 무릎을 꿇은 남자를 턱짓으로 가리켰다.
"화 안 나요?"
"……."
"제가 친구 데리고 막 들이닥쳤는데."
"화나야 돼?"
"…뭔가 그랬을 것 같은데! 아닌 것 같아서. 기분 되게 이상하다."
"……."
"아저씨 저녁 먹었어요? 직원들이랑 먹었으려나.. 아닌가? 지금 8시니까.. 아직 안 먹었겠네요? 밥 같이 먹을래요?"
"저녁을 두 번 먹니."
"좋아하는 사람 있으면 한 번 더 먹어요."
"……?"
다시 걸으려고 했었는데. 아저씨가 다시 멈춰서 나를 보았다. 내가 갑자기 너무 이상한 소리를 했나.
"선약 있다."
"……."
"너랑 먹을 일도 없고."
"……."
"가라."
선 긋는 건 엄청 좋아해. 그냥 잠깐 얘기하는데 느낀 건.
아저씨는 나이 차이 나는 사람은 별로인 것 같았다. 그럴 수 있지. 4살 차이도 아니고 13살 차이인데.
"선약이 몇시인데요? 그럼 그 전까지만 같이 걸으면 안 돼요?"
아저씨 뒤를 계속 밟으며 걸으면, 아저씨가 대답을 하지 않다가 '가라 그냥'하고 작게 말했다. 그리고 누군가 저 앞에 차에서 내려 아저씨를 불렀다.
"너무 안 와서 가게쪽으로 천천히 가고있었는데.. 여기 있었네."
"……."
"뒤에 분은.. 누구셔?"
"…그냥"
"……."
"모르는 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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뿅
내일
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