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석구] 마흔살 아저씨 짝사랑하기
w.1억
모르는 애라고 하면서 그냥 가버리고, 여자는 내게 목례를 하고.. 둘이 차를 타고 가버리는 것까지 내가 봐버렸다.
그래. 그럴 수 있지. 근데 왜 서운하고 화가 날까.
아니면 그 사람이 애인인 걸까. 그래서 계속 나한테 철벽을 친 거였을까. 그럼.. 그럼 진작에 있다고 얘기를 했어야지.
아무에게도 말을 할 수가 없는 게 서러웠다. 제일 친한 친구는 내가 이런말 하면 욕할 거 뻔하고.
다른 애들한테 말하기엔.. 내가 불편하다. 그 애들은 내가 착한 줄 아니까.
난 왜 아무런 얘기를 할 사람이 없어. 들어줄 사람도 없고. 내 성격이 이렇다. 짜증나는 일이 있으면 며칠 내내 생각나. 그래서 자다가도 화나고 마음이 아파서 깨버려.
그렇게 새벽에 몇 번을 깼고, 아침에 제대로 잠도 못잔 채로 출근을 했다.
"거기 맛있다고 좀 유명했더라고? 내가 맛집 다니는 걸 별로 안 좋아했어서 몰랐는데. 내 친구들 다 알더라. 내 친구 남친이 사장이라니까! 다들 배달만 시켜먹다가 직접 가서 먹겠다고 난리였어. 고맙지~~?"
"…어? 아, 고마워..!"
내가 시키지도 않은 짓을 했다. 마음은 너무 예쁘고 고마운데.
내가 지금 반응이 좋게 나올 수가 없는 건. 거짓말을 했기 때문이다. 난 떳떳하지 못한다. 왜 일을 만들어서 고생을 하는 거야. 김서림.
"이번주에 또 먹으러 가도 돼? 먹고싶은 게 있는데."
"응? 응."
"같이 가자!"
"…일 없으면 가자!"
"응. 좋아! 난 언제든 좋으니까. 편할 때 먼저 가자고 해줘."
"…어제는."
"……."
"미안해."
"응? 뭐가 미안해?"
"남자친구가 일부러 인사 안 한 거 아니야. 원래 그런 사람 아닌데.. 조금 말도 없고.. 내 친구라 조심스러워서 그런 것 같아."
"아냐~ 신경 안 썼어. 너한테만 잘해주면 됐지. 신경쓰였구나?"
"……."
늘 상대가 기분이 나쁘지는 않을까. 눈치나 보는 내 인생도 참 안쓰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피곤한 스타일이야.
점심시간이 되고, 밥을 먹고선 들어가려고 했을까. 황인엽에게서 전화가 왔다.
뭐야.. 헤어지고 처음으로 온 연락에 전화를 받지 말까 싶다가도 궁금해서 전화를 받게 됐다.
"여보세요."
-끝나고 잠깐 볼래.
"…왜?"
- 집에 네 물건 있더라고. 이사 가느라고 정리하는데 많이 나와서.
"…그냥 버려."
- 엄청 많아.
"…택배로."
- …….
"알겠어. 끝나고 어디로 갈까."
- 회사 앞으로 갈게.
항상 나는 이렇다. 아무도 날 도와주지 않는다. 하나의 일이 터지면 여러개의 일이 또 터진다.
끝나자마자 황인엽을 만났고, 황인엽이 들고있는 가방을 뺏어가듯이 가져가버렸다.
"……."
맞다. 화풀이었다. 안 그래도 화가 나는데. 너를 보고있어야 된다는 게 화가났다.
그래놓고 또 미안해서 눈치를 보고있는 난 참 뭐랄까.
"챙겨줘서 고마워."
등신같았다.
"근데 너."
"……."
"남자친구랑 잘 사귀고있는 건 맞냐."
그리고 이 상황도 등신같았다. 이건 왜 묻는 거야. 날 의심이라도 하는 걸까.
"…왜 물어봐 그건?"
"나이 좀 있는 사람 같던데. 너무 급하게 애인 만든 거 아닌가 싶었어."
"…무슨 소리야 그게?"
"나 때문에 그런 거라면 그러지 말라고."
"……."
"나는 네가 너 좋다는 또래 남자애 만나서 연애했으면 좋겠어."
"네가 뭔데. 나이 있는 사람 만나지 말라야"
"……."
"정말 좋은 사람이야. 남들 다 나한테 난리칠 때 묵묵히 편들어준 사람이라고. 네가 그 아저씨 알아? 모르잖아. 아저씨가 얼마나 좋은 사람인지 알지도 못하면서 왜 그래? 너 때문이라고? 내가 너 때문에? 왜 그래야되는데. 그건 무슨 자신감이야?"
"넌."
"……."
"애인한테 아저씨라고 부르는 게 맞다고 생각하냐."
"……."
"제대로 된 사람 만나라고. 난 네가 걱정이 된다고."
"걱정이 되면. 바람을 피지 말았어야지."
"바람이 아니잖아. 왜 자꾸 바람폈다고 생각하는데. 난 한순간도 널 버린적이 없어. 너한테 차인 순간에도 난 너 좋아했다고."
"확실한 건 알겠네. 아저씨는 적어도.. 너처럼 이렇게 하고싶은 말 다 하면서 상대방한테 상처 주지는 않아."
"…너 생각해서 말해주는 거잖아. 넌 왜 이렇게 늘 부정적이야."
"……."
차였을 때도 날 좋아했다는 애가. 헤어지자마자 그 여자랑 사귀냐. 저걸 말이라고 하는 거야? 다 거짓말이잖아.
왜 내가 헤어진 남자애한테 저런 소리를 들어야 되는데. 이걸 또 아니라고 아저씨 편이나 들어주는 내가 한심했다. 나 모른다는 아저씨 편을 왜 들어.
되게 웃긴다. 음식점 들어가서 사장 나오라고 깽판을 칠 자신은 없고, 또 영업이 끝날 때까지 쭈그리고 앉아서 기다리고 있는 게. 나 개그맨 해도 되겠어.
이제 곧 여름이라면서 왜 이렇게 추운데. 직원들이 나오는 걸 보니 영업이 끝났나보다. 그리고 익숙한 아저씨의 향수 냄새가 난다.
나를 본 아저씨가 멈췄고, 나는 아저씨를 지나쳐 가게 안으로 들어섰다.
난 아저씨 앞에서는 참 막무가내다. 제일 무서운 게 아저씨면서 아저씨한테 제일 나댈 수 있다니.
"……."
불이 다 꺼진 가게. 아저씨가 문을 잠궜고, 은은하게 불을 켜놓고선 내 앞에 섰다. 늘 아저씨는 표정으로 말한다. 할 말이 뭐야.
그럼 난 또 저 표정을 보고 대답을 해야된다. 내가 무슨 통역하는 사람도 아니고. 표정을 보고 말해.
"저 미친년처럼 보이는 거 알아요. 벌써부터 질리는 거 알아요. 근데.. 어제 친구분인지 여자친구분인지는 모르지만 모르는애라고 한 건 좀 아니지 않아요?"
"……."
"그래. 여자친구면 그렇다고 쳐. 여자친구 있는데 남자친구인 척 해준 것도 웃기고, 없는데 모르는 애라고 소개한 것도 웃겨요."
"넌 왜 맨날 폭주하냐."
"……."
"진정하는 법을 아무도 안 알려줬나보지."
"……."
"퇴근 시간만 되면 나오기가 싫더라. 너 있을까 봐. 오늘은 어떤 폭탄을 들고 왔나.. 심지어 너랑 나는 안 지 일주일도 안 됐어. 근데 벌써부터 이런 거 걱정이나 한다. 내가."
"…그래도."
"……."
"아무리 생각해도.. 제가 그냥 모르는 애는 아닌 것 같아서요."
"그럼 거기서 뭐라고하냐. 우리 깊게 아는 사이도 아니잖아."
"그래도.. 적어도 내 애인인척해준 사람인데. 그렇게 얘기하면 제 마음은 어떨지 생각 안 해봤어요?"
"넌 사람들한테 나 그렇게 얘기할래? 내 애인인척해준 사람이에요. 뭐 그렇게 말할 거야?"
"적어도 아는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는 거 아니에요?"
"내가 그렇게까지 너한테 신경 써야 돼?"
"……."
"넌 왜 자꾸 나 못 건드려서 안달이냐. 가던 길 갈 수는 없는 거냐."
"좋아하니까요."
"그거 착각이야. 너 자존심 지켜준 사람한테 잠깐 고마운 거라고."
"아저씨는 그냥 제가 싫은 거죠?"
"그럼 좋겠냐. 13살이나 어린 애가 좋다고하는데. 변태 새끼 아닌 이상 누가 좋다고 하겠어."
"저는 괜찮아요. 아저씨가 좀 그렇다면 아저씨가 저 좋아질 때까지 기다려줄 수도 있어요."
"……."
"오늘 전남친이랑 만났는데. 아저씨가 뭐라고 사귀는 사람도 아닌데 막 편을 들었어요. 아저씨 좋은 사람이라고. 아저씨에 대해서 아는 게 하나도 없는데. 근데 그냥 좋은 사람이라고 난리를 치고 왔어요."
"……."
"그만큼 아저씨가 좋아요. 그래서 계속 이렇게 찾아오는 거고."
"……."
"한 번쯤은 만나봐도 되잖아요. 그냥 나이 차이 많이 난다고 싫다고만 하지 말고.."
좋아한다고 말을 하고 나니까 사람이 차분해졌다. 난 참 이상하다. 이상할 일이 많다.
"야 너는 네 또래 만나. 나중에 가서 너한테 못해준 것들만 쌓아놓고 있다가 또 폭주하지 말고."
"안 해요.."
"……."
"좋아하는 사람한테는."
"……."
"술 조금만 마셔요. 여자친구 없으시면. 있다면 바로 뒤돌아 나갈게요."
"……."
"……."
"술은 알아서 꺼내라."
아저씨 말을 듣자마자 웃으면서 일어서면, 아저씨가 어이없다는 듯 웃으며 주방으로 향했다.
남들이 우리 대화하는 거 들으면 웃을 것이다. 내가 봐도 어이없으니까. 내가 화냈다가 갑자기 고백하는 거. 이거 찍어놓고 다시 보는 것도 재밌겠다.
아저씨랑 같이 앉아서 아무도 없는 가게에서 술을 마신다라..
가끔 상상했던적이 있었던 것 같은데.
"아저씨가 보기에 저는 어때요? 아저씨한테는 진짜 미친년 소리 들어도 될 만큼 미친년짓 많이한 것 같은데. 근데.. 제가 정상인처럼 막 정상적인 척하면 아저씨가 저한테 눈길도 안 줬을 것 같은데."
"……."
"진짜 예쁘거나.. 아니면 미친년이거나. 그쵸?"
"우선 너는."
"……."
"네가 잘난 줄 좀 알아야겠다."
"……."
"진짜 너만 보면 예쁘다고 매일 말해주고싶어서 미치는 그런 남자 만나서 너 예쁜 거 좀 알아라."
"…저 예뻐요?"
"사실은 네가 스스로 예쁜 거 아는데. 한 번 더 듣고싶어서 묻는 거지."
"…아저씨 심리상담사 해보는 거 어때요? 가끔 보면 진짜 마음을 너무 잘 알아요."
"모르는 게 이상하지."
"저 예쁘면 왜 안 만나요..?"
"…쪽팔려할 거면서 뻔뻔해가지고."
"…아저씨한테만 그런 거예요."
"칭찬 받으면 몸둘바를 모르겠지."
"……."
"그럴 땐 그냥 안다고 해. 예쁜 거 알아요 하라고."
"……."
"아니에요- 하고 얼굴 붉어지는 것보다 멋있어보여."
"알아요. 예쁜 거."
"……."
"아저씨 웃는 거 되게 잘생긴 거 알아요?"
"……."
"가만히 있을 때는 엄청 무서운데. 웃으니까 엄청 설레네. 그거 알고 일부러 안 웃고있다가 웃어주나? 아저씨 저한테 처음 웃어주는 거예요."
"…너 보면 개 보는 것 같아."
"…개?"
"강아지 보는 것 같다고. 지가 원하는 거 해주면 좋다고 웃고.. 지가 싫어하는 모습 조금이라도 보이면 싫다고 난리."
"그럼 이름 지어주나? 강아지처럼?"
"요즘 강아지들은 이름을 어떻게 짓는데. 해피?"
"…해피??무슨 해피.. 촌스러워요."
"촌스럽나."
"…으."
"으?"
"ㅋㅋㅋㅋ."
아저씨랑 이렇게 앉아서 잠깐 잠깐 웃는 게 처음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기분이 너무 좋았다.
심지어 술도 취해서 모든 게 다 내 세상같았다. 뭘해도 기분이 좋았다. 아, 어지러워.
"너 술은 잘 마시냐."
"음.. 못마셔요."
"벌써 한병째야."
"취했어요."
"…그래보여."
"그런가.. 많이 듣기는 한데. 아마 갑자기 가버릴 수도 있어요."
"어디."
"어디론가?"
"…허."
"근데요.. 하나만 물어봐도 돼요?"
뭘 물어볼 거냐는 듯한 표정을 하고서 나를 보는 아저씨에 뜸을 들였다. 이걸 물어도 되나...
"어제 그 여자분은.. 그럼 누구예요?"
"……."
"그냥.. 친구인가."
"전에 만났던 애."
"…아. 미련이 남아서..?"
"난 미련이 없는 사람이야. 있어도 없게 만들어. 끝이면 끝인 거니까."
"…되게 매정하네."
"안 되니까 끝난 건데. 그걸 또 붙잡기도 싫고. 생각도 안 나. 끝나면 안 좋았던 순간들만 떠오르니까."
"……."
"근데 걘 그렇게 만든다. 아프다는 핑계로 그렇게 만들더라."
많이 취했다. 근데 이런 말을 듣고도
"아저씨."
"……."
"좋아한다는 애 앞에 두고서 그렇게 말하는 거 진짜 재수없는데.."
"……."
"근데도 계속 아저씨랑 얘기하고 술마시고 싶은 거 보니까. 괜찮나봐요. 그래도."
"……."
"그래도 좋아요. 괜찮아요."
"……."
"……."
"너 자냐.."
"……."
"참나.. 말하다가 잠드냐.."
석구는 한참동안 자는 서림을 바라보다가 혼자서 술을 마셨다. 서림이의 손에 핸드폰이 쥐어져있었고, 핸드폰 화면이 켜져있어서 확인을 해보면 자신의 집주소와 비밀번호가 적혀있다.
서림을 집에 데려다주고선 혼자 대리를 타고 집에 가는 길에 석구는 서림을 떠올렸다.
"……."
아무것도 모르면서 뭘 다 좋대.
아침엔 알람 소리에 눈을 떴다. 집이네.. 어제 뻗었나보다. 아저씨가 데려다줬나.
나 변태인가.. 뭘 바라는 건지. 옆에 아저씨가 있기를 바랬나.. 옆자리부터 확인을 한 나는 치- 하고 창밖을 보았다. 아, 날씨 겁나 좋네. 옘병.
알람 끄고선 나오니 메모장 화면이 나왔다. 아, 나 어제 취해서 집주소 적었었다. 근데 이건 뭐지.
아침부터 기분이 좋아졌다. 당황함도 섞여있기는한데.
혹시몰라 저장을 해서 이름을 확인했더니.
이름이.. 손석구란다. 아저씨인가? 백구도 아니고 무슨.. 손석구야. 안 어울려. 생각해보니까 난 아저씨 이름도 몰랐네.
근데 이 번호가 아저씨가 맞나? 의심도 했지만, 이상하게 아저씨라고 확신이 됐다.
점심시간이 되기 전에 괜히 핸드폰을 봤다. 한 번 그런 건 아니다. 계속해서 생각이 났다. 어제 같이 술마실 때 순한양이 된 나랑 아저씨가 떠오르고. 아저씨의 번호가 떠올랐다.
정확히 아저씨가 아닐 수도 있는데. 나는 미쳐서 아저씨라 확신을 하며 카톡을 보냈다.
아저씨가 아니라면 어쩔 수 없겠지만.
아저씨라면 너무 좋을 것 같다.
아저씨한테 답장을 바라는 것도 아니다. 그냥. 오면 좋은 거고. 안 오면 아쉬운 거고.
근데 생각보다.
답장이 오니까 너무 너무 너무 좋았다. 나도 모르게 헐- 하고 소리를 내면 모두가 나를 쳐다보고, 나는 죄송하다며 사과를 해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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뿅 뿅 뾰요뾰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