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튼 그렇게 몇 달이 지난 우리는 꽤 친한 친구...
그래. 친구보다는 친한 앙숙이 되어있었다.
뭐..구체적 사례로는..
"야. 야,"
"왜"
"수영장"
이라며 되도않는 아재개그를 치고 도망간다던지
"야"
"뭐"
"뭘봐"
"니가 불렀잖아."
"그니까 뭐보냐고"
"와..."
이렇게 시비를 털고 도망간다던지
이렇게 시비에 시비를 반복하다보니 나는 7반 털리는애로, 이재환은 9반 터는애로 낙인이 찍혀있었다.
이재환은 내가 왜 터는 애냐며 투덜거렸지만 그걸 보는 한상혁은 나를 측은하게 바라봤다.
"굳세어라 김별빛"
"그러게.."
물론 시비를 터는 횟수에 비해 심쿵하는 횟수도 몇 있었는데
대표적인 상황이였던게 아마 야자 늦게까지 수행평가를 하는 날 이였을 것 이다.
*
영상물 수행평가가 있던 날이라 학교 전산실에서 작업을 하고 있었다.
다들 자습중이었고 불을 켜기에는 너무 관종같아보여 모니터 불빛에 의존한 채 차갑게 식은 손을
호호 불며 열심히 알지도 못하는 영상을 만지고 있었다.
그 때 갑자기 문이 열리고 이재환과 차학연이 같이 들어왔다.
나는 놀라서 한참을 문을 쳐다보고 있었고 둘은 아무도 없는 줄 알고 불을 켰다가 깜짝 놀라는 내 모습에
되려 더 놀랐다고 한다.
"뭐냐. 귀신도 아니고."
"별빛아 불은 켜놓지 그랬어"
"아.. 애들 신경쓰일까봐."
"그렇게 눈치보면 하늘에서 떡이 떨어지냐? 간도 콩알만해요 우리땅콩"
"죽는다. 너네도 수행평가하러 온거야?"
"그러지 않고선 이 얼어죽을 것 같은 전산실에 왜 왔겠냐?"
"그러게. 여기 너무 춥다. 별빛아 난방 안 틀어?"
"아, 그거 고장났어. 아침에 우리 여기 썼었는데 고장났다고 그러시더라고. 이렇게 추울 줄 알았으면
장갑이라도 가져오는건데."
"장갑이 뭐냐, 애도 아니고. 너 손시려?"
"조금?"
그때 내 손을 덥썩 잡고는 조물조물 주무르는데 솔직한 심정으로 설렘보다는 놀람이 많이 컸다.
그리고 애써 진정시켰다.
그냥 친구니까, 얘는 어디로 튈지 모르는 애니까 그려러니 하며.
"야, 이게 조금이냐? 얼음장이구만"
"뭐냐, 놔라. 너 손 끈적거려"
"너 손 녹으면"
"그래 별빛아 걔 쓸데없이 손만 뜨거워서 인간 손난로야. 이 김에 좀 부려먹어"
"아, 차학연 너무하잖아"
그렇게 한참을 조물락거려지는 손을 보며 손이 참 크다고 생각했다.
크고 따듯하고.. 그렇게 잠깐 설렜었다.
물론..
"아 무섭다고 그지새끼야!!!"
"아, 그럼 빨리 나오던가"
"불은 왜 끄는데! 차학연, 쟤 좀 말려봐!!"
"내가 쟤 이김. 너 빠여"
"악!!!"
결말은 별로였지만
*
아, 차학연? 걔는 잠깐 짝사랑을 했지만 좋아하는 애가 있다는 소문을 듣고는 깔끔하게 접었다.
원래 짝사랑의 묘미는 그거 아닌가, 혼자서 쉽게 마음정리를 할 수 있다는 것.
애초에 누군가에게 마음을 잘 털어놓는 성격이 아닌지라 더더욱 빨리 차학연을 정리 할 수 있었다.
*
그렇게 다사다난한 1년이 지나고 우리는 2학년이 되었다.
한상혁과 나는 같은 반. 이재환과 차학연이 같은 반이 되었는데
둘 다 문과라 엄청나게 떨어진 반은 아니었지만 제2 외국어에 따라 수업을 하는 우리로서는
딱히 마주칠 일은 별로 없었다.
심지어 나는 이 시기에 또 한 번 짝사랑이 오는데
이름은 정택운
1학년 때 남고에 있다가 전학을 왔다는데 뽀얀 얼굴에 꽤 큰 덩치가 북극곰을 연상케 했는데
조용하고 또 여자애들한테는 철옹성 같은 극한의 냉기를 뿜는 친구라 친해지는 데에 꽤나 애 좀 먹었다.
한가지 일화를 이야기 해 주자면
*
남자애들이라면 환장하는 체육시간. 덥기는 너무 더웠고 심지어 체육관 에어컨까지 고장난 상태라
우리 반 전원은 운동장에서 땡볕을 맞으며 축구를 하는 남자애들을 구경하고 있었다.
여기까지는 문제가 없었지.
"악!"
"시원하지 별빛아"
"뒤질래?"
언제 퍼온건지 수돗가에서 생수병에 물을 받아 그대로 등 뒤에 부어주신 우리 한상혁씨.
비록 체육복이 흰색이 아닌 하늘색이였지만 그래도 속옷 라인이 두드러져 보여 꽤나 민망했다.
"너 죽고싶냐?"
"오, 언니 개섹시. 오늘 나랑 우유 한 잔?"
"황천길 하이패스 끊어줘?"
그렇게 발끈해서 일어나려 할 찰나 얼굴 위로 뽀송한 동복 체육복이 덮여졌다.
병주고 약주나 싶어 잔뜩 골이 난 얼굴로 체육복 주인을 쳐다보니 뜻 밖에 인물이 서 있었다.
"..그거 깨끗해."
"어,어. 고마워. 근데 안 빌려줘도 되는데"
"다 비친다 너."
"야, 김별빛 괜찮냐?"
"너 아가리 열 때 마다 죽빵 날아간다."
"그거 입고 나중에 빨아서 줘"
"고마워"
*
이 사건을 계기로 이유는 모르겠으나 한상혁은 얘를 죽어라 싫어했고
그런 한상혁을 이해한다는 듯이 (사실 골려먹는 쪽이 더 컸지만) 정택운은 시비가 털릴 때 마다 그저 인자하게
웃을 뿐이였다.
사실 이 둘의 관계는 지금까지도 내겐 미스테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