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석구] 마흔살 아저씨 짝사랑하기
w.1억
그래. 망상이란 걸 즐기는 내가 이런 날이 오지 올 거라고 생각을 안 했을 리가 없다.
근데 이렇게 빨리 올 줄은 몰랐다. 그것도 남자친구 집에서.
"…여자친구?"
여자는 날 보고 여자친구냐 물었다. 그럼 난 왠지 모르게 숙연해지면서 자신 없게 대답했다.
"네."
"…어디 갔어요?"
누군지는 말 안 했지만 아저씨를 말하는 것 같았다. 한참을 서로 바라만 보다가 겨우 입을 열었다.
"잠깐 나갔어요."
"…정말 미안한데요."
"……."
"잠깐.. 나랑 얘기 좀 할래요?"
싫다고하면 되는 거였는데. 나는 왜 저 말에 고갤 끄덕였을까. 분명 속으로는 저 사람이랑 마주치면 도망부터 치겠다고 다짐했는데.
여자와 동네에 있는 카페에 왔다. 마주보고 앉아서 한참을 말 없이 있었다.
먼저 말을 할 때까지 기다리던 나는 한참을 떨던 여자의 손을 보았다.
아저씨에게서 전화가 왔다. 전화를 받지 않자, 메세지가 왔다.
[어디갔어?]
- 집 앞에 카페요.
- 아저씨 전여자친구랑.
"제가 원래 이렇게까지 예의없고 생각없는 사람 아니거든요."
"……."
"부탁 하나만.. 해도 될까요."
"…말하세요."
"제가 누구인지는 알고계시나요."
"…알아요."
"……."
"어떤 상황인지도 알고요."
"…제가 곧 있으면 죽어요."
"……."
"하루가 다르게 몸 상태가 안 좋아지고 있고요."
"……."
"오빠랑은 헤어진지 4개월 정도는 됐어요. 서로 성격이 너무 안 맞아서 오빠가 많이 힘들어했거든요. 그러고나서 오빠를 바로 붙잡았어요."
"……."
"제 곁에 남은 사람이 없어서요. 그래서 싫다는 사람 붙잡고 계속 있어달라고 했어요. 불쌍한 척했거든요. 제발 옆에 있어달라고. 근데 여자친구가 생겼다고 이젠 더이상 못하겠대요."
"……."
"제 욕심인 거 알아요. 그쪽한테 이러면 안 되는 것도 알아요. 근데 한 번만요."
"……."
"아주 잠깐이면 돼요. 오빠 좀.. 빌려줘요. 내가요.. 정말.. 내 옆에 있어줄 사람이 없거든요."
"……."
"…정말 미안해요. 내가 이 미안함은.. 죽어서도 안고 갈게요."
눈물이 고여서는 나를 바라보는 여자를 또 한참 보았다. 내가 여기서 해야할 대답은 '그래요'였다. 근데 이상하게 아니었다. 내가 아는 내가 아니게 되었다.
"이기적인 것 같아요."
"……."
"굉장히."
"……."
"원래 같았으면 안쓰러워서, 나중에 후회하기 싫어서 알겠다고 했을 건데요. 제 대답은."
"……."
"안 될 것 같아요. 미안해요. 아니. 사실은 미안한 일도 아니죠. 세상에 남자친구를 전애인한테 빌려주는 사람이 어딨어요."
"……."
"지금 그쪽이 하는 건.. 여러명한테 피해를 주는 일이에요. 제가 그쪽 입장이 되어보지 못해서 마음이 어떤지는 가늠은 못하지만, 그래도 이건 아니라고 생각해요."
"……."
"남자친구한테도 안 찾아왔으면 좋겠어요. 오늘 제가 집에 없었더라면 둘이 만난지도 몰랐을 거 아니에요. 기분 너무 나빠요. 나도 하염없이 행복하고싶어요. 방해 받는 것 같아서 너무."
"……."
"너무 기분이 나빠요."
지금 당장 기분이 너무 나빠서 내 감정에 솔직해졌다. 일어나서 뒤돌아보면 아저씨가 나를 보고 있었다.
"……."
아저씨를 지나쳐 나가면, 내가 앉았던 자리에 다시 앉을 것만 같았던 아저씨는 나를 따라 나왔다. 그리고 나는 그대로 택시를 잡으려했고, 아저씨는 내 손을 잡았다.
아저씨를 올려다보았다. 또 알 수 없는 표정이다. 분명 나는 화가 난 표정이겠지. 아저씨는 내 표정을 읽겠지.
"나 원래 이래요."
"……."
"이기적이고. 죽는 사람 앞에서 못하는 말도 없어요. 이제 지겹거든요. 왜 자꾸 나한테만 이런 일이 일어나는지. 착한 척하는 것도 지겨워."
"……."
"정 떨어지죠."
아저씨는 말이 없었다. 그래. 어쩔 수 없이 나한테 정 떨어졌겠지.
"…아, 폭주할 때 미친년 되는 건 알았는데. 이렇게까지 또라이일 줄은 몰랐네 싶을 거잖아."
"……."
"그래서 아무말도 안 하는 거잖아. 평소에는 이렇게까지 대답 안 하지는 않는데. 안 그래? 아저씨도 그래. 어떻게 얘기를 하고 왔길래 저 여자가 다시 나타나는 건지."
"너 왜 자꾸."
"……."
"은근슬쩍 말 까냐?"
어이가 없었다. 갑자기 저렇게 말하는 게. 어이가 없어서 벙찐 표정으로 아저씨를 보았다.
"잘했다고 말해주고 싶었어."
"……."
"큰 용기내고 너 자신을 지켜낸 것 같아서, 그게 장해서."
"……."
"일단 칭찬 먼저 해주려고했다. 근데 넌 왜 화가 나있냐."
"……."
"너는.. 우선 나를 좀 믿어볼 생각을 좀 해라. 어?"
"……."
"나 믿어."
"……."
자신을 믿으라며 내 손을 꼭 잡아주는데 아저씨가 처음으로 내 손을 잡아주었다.
"믿으라고."
진심으로 하는 말 같았다. 항상 읽을 수 없는 표정이었는데. 오늘은 이상하게 아저씨의 표정이 읽혔다. 믿음을 주는 표정이었다.
사람에게 이런 표정을 너무 오랜만에 봤다. 20년 전에 놀이터에서 잠자리 잡고싶은데 못잡는 내게 자신을 믿으라며 입술을 꽉 깨물던 친구 이후로는 처음이었다.
아저씨가 집에 데려다줬고, 잠깐 스트레스를 받아서 그런가.. 어지러워서 씻지도 못하고 침대에 누워버리면.. 아저씨도 날 따라서 옆에 누웠다.
"…왜 안 가고요.."
"아플 때 혼자있으면 더 아프던데 난."
"…애도 아니고."
"……."
"얼른 가요. 집 가서 편하게 쉬어요."
"너 잠들면 갈게."
"……."
아저씨와 마주보고 누워있는 건 처음이었다. 부담스럽기는 커녕 옆에 아저씨가 있다는 게 이렇게 안심이 되다니.
한참을 눈을 감고 있다보면 아저씨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너 만나는 동안에는 너한테만 노력할게.노력하는 모습이 안 보인다고 해도. 노력하고 있다는 건 알아줘라."
"……."
"나 너무 미워하지 마라."
"……."
"응?"
눈을 천천히 뜨고선 아저씨를 보았다. 아저씨는 다정한 얼굴을 하고선 나를 마주보고 있었다. 아저씨의 말에 고갤 천천히 끄덕이며 작게 말했다.
"…응."
"…또."
"……."
"또 말 까."
"뭐."
뭐- 하고 작게 웃으면 아저씨도 따라 웃기 시작했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아저씨랑 같이 회사에 가서 사직서를 냈다. 이렇게 아침에 가서 사직서를 내고 바로 안 가는 것도 처음이었다.
아, 맞다. 나 여기 처음으로 취직한 곳이었지. 근데 이런 일로 관두게될 줄 몰랐지.
그리고나서 나는 아저씨의 친구분 카페로 가게 됐다. 당장 일하는 건 아니고. 얘기 좀 해보려고. 나를 카페에 데려다준 아저씨에 저녁에 보자며 인사를 하고 내렸다.
"왔어요?"
아저씨 친구분은 역시 착했다. 첫인상이랑 다를게 없어.
"카페에서 일해본 적 있어요?"
"네. 그냥 동네 카페..!"
"여기도 동네 카페."
"아..!"
"ㅋㅋㅋ다들 제 얼굴만 보고 알바한다고 들어와서는 막 실수하니까. 성실한 알바생이 필요하겠더라구요. 서림 씨 직장인인 거 몰랐을 때 이미 내가 서림 씨 여기서 일하면 안 되냐고 물었었거든요?"
"아, 정말요..?"
"네. 근데 직장인이라고 해서 내가 얼마나 우울해했는지 알아요?"
"앗...ㅎㅎ.."
"아무튼 고마워요. 급한 거 아니니까. 좀만 쉬다가 일 하고싶을 때 와요. 그 동안에 나 혼자 엄~청 고생하고 있을게요."
"…ㅎㅎㅎ..하핳.."
"ㅋㅋㅋ농담이에요."
"다음주... 쯤부터 일해도 될까요?"
"그럼요. 그럼 다음주 월요일! 10시 출근 부탁해요."
"네에..ㅎㅎ.."
"혹시 형한테 뭐라고 불러요?"
"…아저씨?"
"아저..씨...그럼.. 나는.."
"……."
"삼촌........?"
"…삼..촌....?"
"삼촌..! 이.. 제일 낫겠는데?"
"…사장..님..?"
"…그럼.. 너무.. 멀어보이지 ...않나...?"
"그런..가....?"
"……."
"ㅋㅋㅋ.."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삼촌..이라고 할까요.. 그럼...!?"
"그래요. 아니면 오빠? 석구 형 있을 때 오빠라고 한 번 불러보자. 엄청 싫어할 것 같은데."
"에.. 전혀 안 그럴 것 같은데..!"
"진짜? 아닐 텐데."
"…표정의 변화가 없는 사람이잖아요 ㅎㅎ;;.."
"아냐.. 한 번 해보자! 원래 해봐야지 아는 거야."
"…흐음."
하이파이브 하자며 손바닥을 보이길래 웃으며 손바닥을 맞췄다.
낯을 많이 가리는 내가 낯을 하나도 안 가리는 삼촌 덕분에 편하게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그러다보니 아저씨 전애인 얘기까지 나오게 됐다.
"그 여자는 아저씨가 전부예요?"
"……."
"궁금해서."
"……."
"가족 있어요."
"근데?"
"근데. 어렸을 때 걔를 잃어버린 거야. 그래서 보육원에서 자랐다가 성인이 되기 전에 부모를 찾았어요."
"……."
"근데 본인이 버림 받았다고 생각해. 그러니까 만나고 있던 형만이 자신의 전부라고 생각을 한 거지."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네."
"그렇게 생각할 수는 있지만 서림 씨가 이해를 해줘야할 문제는 아닌 것 같은데? 그 친구는 지금 사람이 그리운 거야. 사랑이 그리운 게 아니라."
"……."
"지금은 아무것도 아닌 사이인데. 현재 애인이 그것까지 신경쓸 필요가 있나."
"…죄송한데."
"……."
"그 여자분..번호 좀 받을 수 있을까요?"
아저씨가 날 데리러 와줬다. 병원 앞에 서서 맞은편에 주차 되어있는 아저씨 차로 향하면, 아저씨가 차에 타는 나를 보고 궁금한 듯 물었다.
"병원에는 왜. 어디 아파?"
"…아뇨. 나 말고."
"……."
"혜선 씨."
"…네가 왜."
"내가 나름 생각을 좀 많이 했거든요."
"……."
"그렇게 화를 내고 나니까. 속이 다 시원하더라구요. 그래도 사람이 죽는다는데.. 혼자 죽게 두려니까 그게 또 마음이 아파서."
"……."
"아저씨를 보여주는 건 아저씨한테는 너무 못된 짓이고, 난 너무 질투가 날 것 같아서. 그래서 나 혼자 왔어요."
"……."
"일주일에 한 번이요. 외롭지않을 만큼만 같이 있어주고 올 거예요. 그러니까 걱정 마요."
"……."
"아저씨 위해서 20프로. 나 위해서 70프로. 그 여자 위해서 10프로."
"……."
"……."
"왜 그래.. 왜.. 그래도 이건.. 아니야."
3시간 전_
여자의 병실 문에 노크를 하면, 여자가 힘 없이 대답을 했다. 문을 열고 들어서면 여자는 내가 올 줄 몰랐는지 표정이 꽤나 놀란 듯 했다.
'아저씨는 안 와요.'
'…….'
'아저씨 오면 다 괴로울 것 같아서요. 저만 왔어요. 많이는 못 와요. 일주일에 한 번 정도 와서 그냥 평범한 친구처럼 얘기도 하고, 하고싶은 것도 해요.'
'…….'
"영화는 어떤 장르 좋아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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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