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석구] 마흔살 아저씨 짝사랑하기
w.1억
결국 둘은 같이 어색하게 마주보고 앉았다. 먼저 보자고한 건 분명 인엽인데 더 뻘쭘해하는 건 본인이다.
마시지도 않는 아메리카노를 시킨 건 석구 때문이었다.
항상 아이스티나 먹던 인엽은 자신이 잊지못한 전여자친구의 남자친구가 아메리카노를 마신다고하니 그게 또 멋져보여서 아메리카노를 따라 시킨 것이다.
"말 안 하면 간다."
"…서림이가 제 얘기 안 해요?"
"…해야 돼?"
"…혹시라도."
"안 해."
"……."
"너같으면 하겠냐."
"그건 오해였고.."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이야."
"…그 다음은 다 홧김에 그런 거였어요."
"……."
"저도 서림이도 서로 많이 좋아했어요. 그래서 오해가 더 커졌고.. 실망도 커지고.."
석구는 역시나 얘기를 들어주는 게 아니었다는 듯 고개를 작게 저었다.
아메리카노 한모금 마시고선 자신을 뚫어져라 무심하게 바라보는 석구에게 기라도 죽은 듯 시선을 아래로 떨군다.
"…정말이에요?"
"뭘."
"둘이 정말 좋아해서 만나는 거냐구요."
"……."
"서림이한테는 직접 들었지만 그쪽한테는 못들었잖아요. 그쪽이 서림이 그냥 어리다는 이유로 만날 거일 수도 있고, 금방 만나다가 헤어질 수도 있고."
"……."
인엽이 아무말도 하지 못한 채로 고갤 숙였고, 석구는 한참 삐딱한 자세로 인엽을 보았다.
고갤 뒤로 젖히고선 무언가 생각을 하던 석구가 조용히 말했다.
"네가 어떤 놈인지는 모르겠는데."
"……."
"남들 하는 만큼은 다 해."
"……."
"나한테 화내고싶을 땐 화도 내고, 창피하면 창피하다고 말할 줄도 알고."
"……."
"그렇게 살아."
"……."
"그때 우리 처음 만났을 때 김서림 앞에서 당당하게 얘기하던 때로 돌아가서 살아."
"……."
"네가 상처를 줬던 건 생각을 안 하나보지."
"……."
"헤어진 남자친구를 길 한복판에서. 그것도 새로운 여자친구랑 같이 있는데 마주쳤는데. 기분이 얼마나 좆같았겠어."
"……."
"이제서야 미안했던 감정들 올라온다고 신경쓰는 척 하지 마라."
"……."
"너 멀미하냐?"
"…네."
"걔는 너 볼 때마다 멀미하는 느낌일 걸."
"저도 알아요."
"……."
"제가 지금 하는 행동이 역겹고 구질구질한 행동이라는 거. 근데. 저희 엄마가 그랬거든요. 할 수 있을 때까지 해보라고. 도전 안 되면 안 되는 거고, 되면 되는 거라고. 그게 연애라면 더욱 더."
"뭐 마마보이 그런 거냐?"
"…근데 괜히 했나 싶네요. 그쪽 만나러 오는 길에 만 번 고민했거든요. 솔직히 쫄았어요. 포스가."
"……."
"솔직히 보면 완전 조폭같거든요."
"……."
"가끔 서림이한테 연락해도 돼요?"
"그래라."
"자신있나보네요. 바로 그러라고하네."
"다 마셨는데. 간다."
"……."
석구가 쿨하게 나가버리면, 인엽은 긴장이 풀렸는지 깊은 숨을 내쉬고선 잘 마시지도 못하는 아메리카노를 마신다.
아직 자기는 반이나 남았는데 다 마셔버리고 가버린 석구가 어이없는 듯 웃음이 나온다.
수영이를 만나고와서는 집에 힘없이 누워있으면 아저씨가 일찍 들어왔고, 아저씨 무릎을 베고 누워서 tv를 보고있다가 수영이랑 있었던 일이 생각나서 입을 천천히 열었다.
"수영이랑 만나고 왔어요. 근데 날 보면 무작정 화만 낼 줄 알았는데. 걱정을 해주더라구요?"
"……."
"아저씨 만나는 것도. 좋아하면 어쩔 수 없지만, 그래도 별로래요."
"……."
"기분은 나빠요."
"……."
"자기가 뭔데 별로다 뭐다인지. 내가 알아서 하겠다는데. 지는 뭐 맨날 좋은 사람들만 만났나? 무슨 내 엄마도 아니고 별로라고 하는지 기분 나빠서 뭐라고 하려다가도 그냥 말았어요.
난 맨날 왜 집에 와서 이렇게 후회만 하는지."
"……"
"답답한 짓만 골라서해요. 내가 하는 행동들이 다 답답하다고 하니까. 내가 선택하는 것들이 정말 옳지 않은 선택일까. 이것도 보면 다 수영이 때문이야. 뭐만하면 답답하대."
"그렇게 자존감 떨구는 말을 했어. 속상하게."
"……."
"자기 가치관을 다른 사람한테 대입하면 안 되는데."
"……."
"그치."
아저씨도 나름 부드러워졌다. 팩폭만 날리던 아저씨도 따뜻한 공감이라는 것을 해주기 시작했다. 아저씨 말에 웃음이 다 나왔다. 맞지.
"나중에 밥 한 번 사주겠다고 해."
"진짜요..?"
"그래."
"……."
"그런데도 싫다하면 싫은 거지."
"……."
"어때."
아저씨도 불편할 텐데. 날 위해서 저런 말을 해주는 게 이렇게 고마운 일인가.
"너 그 전남자친구한테는 연락 안 오냐?"
"응? 아뇨? 왜요??"
"…아까 걔 만나서 얘기했어."
"에? 왜요!?"
"찾아왔길래."
"미쳤나봐. 왜요??"
"그냥 너 얘기하지."
"…허."
"너한테 연락해도 되냐고 하길래 자신있게 그러라고했거든. 생각해보니까 센척을 너무 심하게 했던 것 같아서."
"……?"
"연락 오면 받아주지 마."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
어이가 없어서 웃음이 다 나왔다. 아저씨 옷자락을 잡고선 웃음만 막 흘리다가 tv를 보다 잠에 들었다.
아저씨가 황인엽이랑 무슨 대화를 했는지는 중요하지않았다. 원래는 중요했고, 꼭 들어야지만 편했는데. 이번엔 물어보지않기로했다.
중요하지 않았으니까. 내가 몰라도 되니까 그래서 저 부분만 말해준 거겠지.
"어 왔어요?"
"안녕하세요!.."
"잘 지냈어요?"
"네. 삼촌도요?"
"오~ 삼촌~ 좋지~~~"
낯을 가리는 나를 편하게 해주는 건 준혁 삼촌이었다. 오늘부터 삼촌과 함께 일을 해야됐다.
아저씨는 나를 태워다주고 바로 일하러 갔고, 어색할 줄 알았는데. 오랜만에 봐도 어색한 게 없었다.
"……."
"죄송해요.."
"괜찮아요. 원래 다 실수하면서 살아요."
내가 실수해도 웃으면서 넘겨주는 게 너무 고마웠다. 고마움은 잠시였고, 하루종일 일 배우느라 정신이 없었다.
퇴근시간이 다 되어서야 드디어 숨을 쉴 수가 있었다. 첫날이라서 너무 긴장했어.
그리고 여고생들이 왜 이렇게 많아? 혼자 중얼거리는데
"옆에 여고 있잖아요?"
"아하..!"
여고 있는 것도 깜빡하고 있었다. 나 바보인가..
"오늘 고생했어요."
"아니에요!.. 알려주느라 더 고생하셨죠.."
"그런가? 엄청 잘하던데? 알아서."
"하하.. 아닙니다.."
"같이 저녁 먹을래요?"
"네???"
"오늘 원래 일찍 문 닫는 날."
"…아."
"형 가게가서 먹지 뭐. 내가 앞으로 엄청 부려먹을 거라서. 오늘 맛있는 거 사줄게요."
"……."
"콜?"
"엇..네..!"
삼촌은 말이 참 많다. 누구와 다르게.
"원래 형이 음식을 더럽게 못했거든요? 의욕도 없는 사람이 갑자기 연락 딱! 끊고 어디 갔지? 아무튼 다른 나라에 가서는 음식 배워가지고 딱! 음식을 하는데.."
근데 또 내용이 재미가 없지는 않다.
"형 술취한 거 못봤죠? 술취하면 말이 얼마나 많아지는지 알아요? 제~일 시끄러워. 세상 시끄러워서 입에 뭐라도 물려놔야 된다니까."
다 아저씨 얘기라서 그런가?
"맛~있는 걸로 부탁해. 내가 지금 아주 아주 중요한 예쁘고 아름다운 여성분을 좀 꼬셔야 되거든. 로맨틱한 그런 메뉴로!"
"……."
아저씨는 삼촌과 같이 자리로 향하는 나에게 대충 눈짓으로 인사를 해주었고, 난 웃음이 나왔다.
저렇게 아저씨한테 장난칠 수 있는 사람은 삼촌밖에 없겠지.
삼촌이랑 앉아서 아저씨 일하는 걸 보는데.
"형 어디가 그렇게 좋아서 만나요?"
왜 안 물어보나했다.
"잘생겼고, 차갑잖아요."
"에? 잘생긴 건 뭐 패쓰...하지만.. 차가운 건 왜?"
"제가 원래 좀 구질구질 매달리고 재미없는 사람을 별로 안 좋아해요. 어려운 사람이 더 만나기 좋더라구요."
"완전 특이하다."
"그쵸..하하.."
아저씨가 주방에서 요리하는 걸 힐끔 보는데 아저씨는 저럴 때 더 섹시하기도 하다. 어쩜 저렇게 요리도 잘해. 혼자 어디 가서 배워서 오다니.. 역시 마이웨이.
우리 테이블에도 음식이 왔고, 내가 좋아하는 치즈볼까지 해준 게 너무 고마워서 힐끔 아저씨를 보니, 아저씨가 작게 웃으며 나를 보았고.
곧 삼촌이 아- 하고 치즈볼을 포크로 찍어 내 입 앞에 들이밀자, 아저씨가 어이없는 듯 웃었다.
"……."
너무 웃겨서 웃으면서 하지 말라고 삼촌에게 작게 말해도, 아저씨는 얼른 받아 먹으라며 난리를 친다. 아저씨가 이런다고 질투를 하나... 겨우 받아먹고선 아저씨를 보면
아저씨가 신경을 쓰지 않는다는 듯 주방으로 들어갔고, 삼촌은 이 상황이 그저 재밌는지 장난스레 웃기 바쁘다.
"사람이 재미가 없잖아. 재밌게 싸우기라도 해보라고요."
"에이.. 아저씨는 질투 안 할 걸요?"
"음.. 그럴 수도 있긴 하겠다. 난 저 형이 질투하는 거 한 번 봐보고싶다니까요."
"한 번도 못 봤어요..?"
"네. 무뚝뚝하잖아요."
"아.."
"그래도 완전 건조해서 말라 비틀어진 연애나 하겠네 싶었더니 이런 상큼한 친구랑 연애한다니 마음은 놓이네."
삼촌 덕에 계속 웃을 수 있었다. 부담스럽지않게 계속 칭찬도 해주고.. 장난쳐도 기분 나쁘지도 않고.
밥을 다 먹고선 삼촌이 집에 데려다준다고 했고, 계산을 하려고 하면, 아저씨가 직접 나와서 계산을 하면서 말한다.
"같이 가."
"응? 아저씨 10시에 끝나잖아요!"
"일찍 퇴근하려고."
"아.."
아저씨랑 대화를 하고있으면, 삼촌이 옆에 스윽- 나타나 얄밉게 말한다.
"불안해? 나랑 같이 있으니까."
"술마셨냐."
"나 서림 씨랑 둘이서 술 마셔도 돼?? 그런 사이야??"
"?"
"그럼 나 먼저 갈게. 서림 씨 내일 봐요~"
저 말을 하고선 그냥 가버린 삼촌에 괜히 뻘쭘해서 가만히 아저씨를 보면, 아저씨가 영수증을 꾸깃꾸깃 접어서 쓰레기통에 넣더니 가자며 턱짓으로 밖을 가리킨다.
아저씨랑 차까지 향하는데 아무말도 없길래 그냥 평소와 다를 게 없어서. 역시 질투가 없구나.. 생각을 했다.
뭔가 그럴 것 같기는 했어. 서운하지는 않고..그냥 뭐..
"맛있었냐."
"에?"
"이준혁이 먹여주니까 더 맛있어?"
난 또 아저씨에게 빠질 수밖에 없다.
항상 예상도 못한 행동들을 해버리니까. 내가 반할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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뾰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