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담은 매일 밤 날 불러 글을 쓰게 했다. 덕분에 퇴근은 늦어졌지만, 마담의 이야기가 너무 흥미로워 차마 넘길 수가 없었다.
불령선인이 첫사랑이라니.
제국의 거물급 정치인과도 한 상에 앉는 그녀가 불령선인과 사랑에 빠졌었다니.
“그 이야기로 소설이라도 하나 낼 기세로구나.”
“세간에 내면 정말 불티나게 팔릴 거여요.”
“그러니?”
“예! 낭만적이잖아요. 위험한 사내와 연인관계가 된다는 것은...”
“...연인?”
“예!”
“...음, 원아.”
“예?”
꽤 친해져서일까, 아니면 오늘 유독 더 취한 것일까.
입에 물고 있던 담배 연기를 내뿜으며 작게 웃는 로라의 얼굴엔, 항상 가득해 보이던 긴장이 조금은 풀려 있었다.
“네 감상을 깨는 것 같아 미안하지만, 난 그의 연인이 아니었단다.”
“...예??”
“정식으로 교제한 적이 없다는 말이야.”
그 말을 들었을 때, 나는 그간 내가 썼던 마담의 이야기를 다시 곱씹었다.
글로리아에 오는 날이면 꼭 둘이 따로 술자리를 가지며 길게 이야기를 나누었다 했다.
공연이 있는데 못 오는 날이면 꽃을 보내왔다고 했다.
이따금씩 오래 못 보게 되면 꾹꾹 눌러 적은 편지를 주고받았다고 했다.
헌데 어째서 연인이 아니란 말인가.
“어째서 그렇게 생각하시는 건가요, 마담??”
“일단... 서로가 서로의 것이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단다. 알다시피, 그러기엔 그와 내 삶이 많이 달랐지 않니.”
“.......”
“밤에 가지는 가벼운 술자리 외에, 해가 떠 있을 때 만남을 가진 적도 없지. 서로의 공간에 가본 적도 없었고. 손도 공연히 잡아보지 않았어.”
“...그런...”
“우리는 암묵적으로 서로를 더 이상 궁금해하지 않으려고 노력했단다.”
“.......”
“서로 딱 한 번씩, 그걸 어겼는데,”
재떨이에 담뱃불이 툭툭 휘날렸다.
나는 이야기가 시작될 것이라는 걸 직감하고 바로 펜을 들었다.
“그게 아니었다면, 난 아마 그가 날 애틋하게 여기는지도 몰랐을 테지.”
“.......”
“일단... 내가 어겼던 얘길 해볼까.”
***
글로리아의 마담은 마사코를 안쓰러워했다.
확연히 어린 나이에 사내들에게 젊음을 팔기 시작한 것부터, 뒤늦게 찾아온 연심에 휩싸여선 아무에게도 말 못하고 끙끙 앓는 것까지, 하나같이 눈에 밟히지 않는 것이 없었다.
하여간 만나도 하필 그런 놈을.
기껏 붙여놓았더니 서로 간의 거리를 유지한 채 묵묵히 잔만 나누며 작게 대화하는 그들을 보노라면, 차라리 확 떼어놓고 싶어질 지경이었다.
“마사코.”
“예, 마담.”
“나성에서 꽤 유명하다는 양인 가수가 공연을 하러 왔다는 이야기 들었니.”
“예. 다들 그 얘길 하더군요.”
“아이들 다 같이 데리고 갈까 싶어 표를 구했는데.. 딱 하나밖에 못 구했단다. 이틀 뒤 4시인데, 가보겠니?”
“...가고 싶긴 한데... 저, 그날 공연이 있지 않던가요.”
“하루 정도는 휴가를 내어도 된단다. 몇 년 간 하루도 쉬지 않고 일했잖니.”
명백하지만, 이유 없는 호의.
오래 전 잊어버린 어머니와도 같은 얼굴을 빤히 바라보던 마사코는, 고개를 살풋 끄덕였다.
“감사합니다.”
빳빳한 종이표 위, 화려한 글씨체를 살살 쓰다듬는 손톱에 왠지 모를 아쉬움이 한 움큼 얹어졌다.
‘...욕심이야.’
표가 두 장이었을지라도 그에게 물어보지 않았을 것이다.
지나친 탐욕은 사람을 병들게 한다는 것을, 마사코는 너무 잘 알았다.
그를 탐하는 것은 주제에 맞지 않는 과욕이란 것도, 이미 뼈저리게 느끼고 있었다.
깊이 생각하듯 눈을 길게 감았다 뜬 후, 마사코의 손가락은 표를 반듯하게 접어 저의 가방에 넣었다.
***
공연에는 사람이 많았다.
평소에는 잘 꺼내지 않는, 하얀 블라우스에 심플한 연보랏빛 드레스를 입고 작은 진주귀걸이를 한 마사코는 편한 신발을 신고 오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인파를 헤치고 도착한 자리는 무대와는 꽤 떨어진, 문과 가까운 자리였다. 옆자리에 앉을 누군가는 일을 보러 간 듯, 얇은 양장 재킷만이 놓여있었다.
보다가 재미없으면 살짝 빠져나와도 될 자리.
음악 취향이 까다로운 것까지 고려한 마담의 자리 선택에 만족한 마사코는 부드럽게 웃으며 제 몸을 푹신한 의자에 파묻었다.
그러다 문득, 그녀의 코 끝에 살랑거리는 시원한 향이 밀려 들어왔다.
기억 한 쪽을 건드리는, 잊을 겨를조차 주지 않는 그런 향.
“...설마.”
고개를 갸웃하며 몸을 바로 하기 무섭게,
“...아.”
하얀 셔츠에 연회색 조끼를 걸친 그의 검은 눈동자가 나타났다.
“...당신이, 어떻게.”
그동안 보았던 눈 중에 가장 인간적인 놀라움이 담긴 눈이었다.
당황하여 말없이 서로를 바라보기를 한참.
침묵 속에 목깃을 만지작거리며 자리에 앉은 그는 이유 모르게 입술을 축였다.
“...오랜만입니다.”
“...사흘 전에도 뵈었었습니다.”
“...그랬지요.”
사내의 손이 무릎 위에서 초조하게 말려 들어갔다.
그의 오른 손목을 감싸고 있는 은색 시계엔 전에 비해 먼지가 많이 끼어있었다.
그때, 익숙한 향수 속 다른 냄새가 마사코의 얼굴을 찌푸리게 만들었다.
약간 탄내가 나는 것만 같았다. 담배와는... 분명히 다른.
“...오늘은, 공연이 있다고 들었던 것 같습니다만.”
“...쉬게 해주셨습니다. 제가 보고파 했던 가수인지라.”
“표는 어디에서 구했습니까.”
“.......”
“마담입니까?”
마사코는 답하지 못했고, 남자는 헛웃음을 흘렸다.
블라우스 소매 끝자락을 조물거리는 소녀의 손끝이 붉게 달아올랐다.
“...이 가수는 노래를 잘 못합니다.”
뜬금없는 말이었다.
나성에서 가장 실력 좋은 가수라고 하던데, 이게 무슨 망발인가.
“...전에도 들어보신 겁니까?”
“오늘이 세 번째입니다.”
별로라면서, 왜 세 번씩이나 본 걸까.
어찌 답해야 할지 몰라 빠르게 깜빡이는 암갈색 눈동자를 곁눈으로 살핀 그가 다시 한 번 입술을 축였다.
“이름이 아름다운 것을 빼곤 별로입니다.”
“...로라였던가요.”
“예. 목소리가 옥구슬 같지도 않고, 음정도 잘 맞는지 모르겠고, 사람을 매혹하지도 않고... 옷은 또 쓸데없이 붉은색만 입어서 다른 사람만 떠오르게...”
“...예?”
“...아무튼, 그 아름다운 이름이 아깝습니다.”
대체 무슨 소리인지.
곰곰이 곱씹어보아도 잘 모르겠는 기분에 눈을 굴리고 있는 그녀의 옆에서, 남자는 살짝 떨리는 숨을 내뱉으며 벗어두었던 겉옷에 자신의 팔을 끼워 넣었다.
“...지금 당장 떠나실 정도로, 앉아있는 시간이 아까운가요?”
“...예, 그 정도입니다.”
“.......”
“그러니 당신도, 어서 나가는 편이 나을지도요.”
남자가 모자를 제 머리에 얹었다.
...가는 건가.
우연히 만나서 잠시나마 들떴던 마음이 발끝까지 떨어지는 감각이 밀려올 때, 소녀의 입술이 멋대로 움직였다.
“...그럼 - ”
“.......”
“...공연 대신, 저와 저녁 한 끼 하시는 건 어떤가요.”
“...예?”
튀어나온 내용이 무엇인지 스스로 알아채기도 전에, 말은 계속해서 이어졌다.
“다방에 가서 차를 한 잔 나누어도 좋습니다. 아니면, 영화를 한 편 볼까요. 같이 걸어도 좋고, 그...”
“.......”
“...아.”
꾹, 이내 입이 다물렸다.
과했다.
자존심을 깎아가면서까지 욕심을 부리면 안 됐다. 선을 제대로 넘어버렸다.
그러게 왜 갑자기 그런 말을 해서.
분위기에 취해, 우연에 취해 들뜬 자신이 부끄러워진 마사코가 말을 주워 담으려던 순간,
“...저녁이 좋을 것 같습니다.”
“.......”
“영화는... 제가 선호하질 않아서.”
“...아.”
“...같이 걸으면, 더할 나위 없을 것 같습니다.”
탁, 탁, 탁.
공연장의 조명이 차례로 꺼지고, 좌석 사이사이에 어둠이 들어차며 사내의 달아오른 얼굴을 가렸다.
무대에 불이 들어오기 전, 그 짧은 적막.
그 속에서 느릿하게 숨을 내뱉던 둘은 조심스럽게 옆문으로 빠져나갔다.
소리 없이 복도를 나오며, 소녀는 편한 신발을 신고 오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
“그렇게 밤늦게까지 함께 있었단다. 좋은 식당에 가서 저녁을 먹고, 다방에 가서 차를 한 잔 마시고, 거리를 거닐었어.”
“좋으셨나요?”
“다음 날 아침 일어날 때까지는 좋았지. 사내와 술자리도, 잠자리도 아닌 무언가를 함께한 것은 처음이었으니 말이야.”
빙글빙글, 잔에 담긴 황갈빛 위스키가 손목의 움직임을 따라 돌아갔다.
크리스털을 감싼 손톱은 아주 새빨간 붉은색으로 답답하게 덮여있었다.
“원아.”
“네.”
“다음 날 신문에는, 나성의 유명 가수 공연장에서 총에 맞아 죽은 내국인 경부에 대한 기사가 실렸단다. 불령선인을 보면 신고하라는 이야기가 쫙 깔렸지.”
“.......”
“그때에야, 그에게서 나던 탄내가 화약 냄새였단 걸 알았어.”
나는 눈치를 보다 슬그머니 다시 펜을 들었다.
“화약 냄새란 건 말이다, 딱 맡으면 그 매캐함이 전해져와. 담배와는 다른... 가스등 같은 곳에서 나는 불 냄새와도 다른 그런 냄새.”
마담의 설명에 그저께 글로리아에 대대적으로 짐을 가지고 왔던 남자들이 기억났다.
벽을 수리해주러 온 것치곤 짐이 엄청 많았는데, 곧 다른 곳에 철거건물에 가야 해서 챙긴 화약이라고 했었다.
아주 고약한 냄새가 났었는데. 그런 냄새를 마담도 맡은 거겠지.
저 가녀린 몸에는 너무 과한 냄새인데.
“그렇게 그이는 한참을 숨어서 다녔지. 애초에 그날에 나와 시간을 보낸 것조차 모험이었을 거야.”
“...얼마나 후에 다시 보셨나요?”
“밤거리를 거닐었던 날에 초승달이 떠 있었는데, 그믐이 되어서야 얼굴을 다시 보았더랬지.”
“여전하셨던가요?”
“그림자도 안 보이던 이유가 있더구나. 얼굴이 잔뜩 상해서는... 뭐, 여전히 아름다웠지만.”
“어지간히 멋있으셨던 모양이어요.”
“...맞아. 잊지도 못하게.”
“.......”
“비슷하게 이별하게 될 것을 직감해서였는지... 그 이후로는 매일같이 글로리아에 찾아오더구나.”
***
들판의 꽃, 조선의 시, 대한의 별, 만주의 낭만.
사내는 뜬금없이 그런 얘길 꺼내곤 했다.
누가 들으면 붙잡혀갈 만한 이야기에 대해, 마사코가 모른 척 그것이 무어냐고 물으면,
“...내가 사랑하는 것입니다.”
라고, 대답하곤 했다.
어느 날이었던가, 그녀가 ‘로라’라는 이름을 좋아하지 않았느냐는 질문을 했던 날.
그는 뜬금없이 마사코에게 물었다.
“마사코라는 이름이 본명은 아니지 않습니까.”
“...예.”
“조선 이름은...”
“.......”
“...가르쳐주지 않을 것 같고.”
부정하지 않는 미소가 작은 얼굴에 번지는 것을 보며, 사내는 잠시 제 손에 얼굴을 묻었다.
“그대를 마사코라고 부르고 싶지 않은데.”
“.......”
“내가 당신을 부를 별칭을 하나 지어주고 싶은데, 생각이 나지 않는군요.”
“.......”
“원하는 이름이 있습니까? 마사코 말고, 좀 더...”
“...어떠한?”
“...좀 더, 그대 같을 이름.”
마사코는 잠시 머뭇거렸다.
오래전 잊어버리고 지운 이름을 모른 척 내밀어볼까.
아니면 그럴듯한 세련된 이름을 지어내 볼까.
그러다 떠오른 것이,
“...로라는 어떤가요.”
“.......”
“그때, 이름이 어여쁘다 하셔서.”
잠시 사내와 그녀의 눈이 마주쳤다.
빠져들 것처럼, 빠져든 것처럼 묘한 빛깔의 암갈색 눈동자를 바라보던 그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이름은, 당신에게 더 어울리는 것 같습니다.”
“.......”
“로라... 로라.”
“네.”
“내가 사랑하는 것이 하나 더 늘었군요.”
소녀가, 로라가 된 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