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기요, 그러실 필요 없어요. 제가 데려다줄거라서."
"남자친구세요?"
"아니요. 그냥 여주씨 많이 좋아하는 사람인데요."
".........."
"제가 여주씨 일하는 모습에 반해서."
::그대에게 물들다::
여덟번째
어, 응. 당연하지. 나 괜찮아. 여주가 고개를 숙이고 어색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분명 그녀는 저번에 자신의 남자친구 때문에 약속이 깨졌으니 단둘이서 만나자고 했다. 그러나 보란듯이 남자친구를 데리고 와 남자친구가 나랑 떨어져있기 싫다고 해서- 라며 애정행각을 서슴치 않았다. 분명 친구의 얼굴을 보러 나온 것인데 서로를 끌어안고 쪽쪽거리며 꺄르르 웃음을 터뜨리는 모습에 여주가 더욱 술을 들이켰다. 벌써 4잔째였다. 평소에는 1잔도 채 마시지 못했으나 오늘만큼은 쓸데없는 오기가 생겨 한 잔씩 한 잔씩 비워내고 있는 것이었다.
"너 술 너무 많이 마시는거 아니야?"
"어? 아니야...근데, 너랑...재현씨랑...응...둘이, 진짜 잘,어울려..."
턱을 괴려했으나 자꾸 어긋나는 바람에 여주가 한숨을 쉬고는 약간 풀린 표정으로 말을 건넸다. 불안함을 느낀 그녀가 맥주잔을 구석 쪽으로 밀어내고는 잡은 그의 손을 끌어당기며 나가자는 눈짓을 했다. 우리 그만 가봐야 될 것 같은데. 여주는 아무 대답이 없었다. 너 데려다 줄 사람은 있어? 그녀가 연이어 물었지만 여주는 멀뚱멀뚱 천장만 쳐다보다 고개를 숙일 뿐이었다.
"아니, 넌 어떻게 데려다 줄 사람도 없어?"
"........."
"너 솔직히 저번에 그 남자한테도 차였지?"
"아니야......"
"너가 일만 너무 열심히 하니깐 좋아해주는 사람이 없는거야."
자신을 향한 핀잔에도 여주는 고개를 푹 숙이고만 있었다. 그녀가 한숨을 쉬고는 가방 안에서 핸드폰을 꺼내들어 번호를 누르고 간략하게 호프집 이름을 말한 후, 핸드폰을 도로 집어넣었다. 콜택시 불렀으니깐 10분 뒤에 나가, 알았지? 자리에서 일어나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하는 소리에도 여전히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그녀가 답답한 마음에 흠- 짧게 숨을 내쉬고는 고개를 더 약간 숙여 여주야- 이름을 불렀다. 그 때, 모든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민혁이 다가가 저기요- 그녀를 불렀다. 그녀가 고개를 돌렸다. 민혁이 한껏 여유로운 표정을 하고 서 있었다.
"그러실 필요 없어요. 제가 데려다줄거라서."
그 한마디에 그녀가 민혁과 여주를 번갈아쳐다보고는 다행이라며 밝은 웃음을 지었다. 남자친구세요? 기대가 가득 담긴 질문에 네- 거짓말을 하려 했으나 기현의 얼굴이 떠올라 민혁이 한 쪽 입꼬리를 올렸다.
"아니요. 그냥 여주씨 많이 좋아하는 사람인데요."
".........."
"제가 여주씨 일하는 모습에 반해서."
그 대답에 그녀가 고개를 갸우뚱거리고는 서둘러 그녀의 남자친구와 가게를 빠져나갔다. 그제서야 민혁이 한숨을 쉬곤 반대편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여주씨, 많이 취한 것 같아요. 말을 건네며 고개를 숙여 여주와 눈을 맞추려했다. 그러나 여주는 언제인지 잔을 끌어와 두 손으로 감싸쥐고는 눈물을 뚝- 뚝- 흘리고 있었다. 민혁이 깜짝놀라 눈을 크게 뜨고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다행히 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민혁이 가까이 다가가 여주를 살살 달래려했다. 내가 유기현이랑 커플로 오라고 했지, 커플을 데리고 오면 어떻게 해요- 라는 말부터 시작해 내가 여주씨 남자친구 불러줄게요- 핸드폰을 집어든 민혁이 연락처에서 기현의 번호를 찾아내 전화를 걸었다. 얼마 안 가 연결음이 끊기고 여보세요- 나른한 기현의 목소리가 들렸다.
"너 여친분 지금 우리 술집에서 울고 계신다."
아무 미동이 없는 여주를 힐끔 쳐다보고는 내뱉는 소리에 기현이 무슨 일이냐는 물음도 하지 않고 대신 벌떡 일어나 다급하게 움직이는 소리가 났다. 곧 우당탕- 한껏 들려오는 시끄러움에 민혁이 푸스스 웃음을 터뜨렸다.
"여친이라고만 했는데도 알아들은거 보니깐 남자친구 맞네, 뭐."
"나 갈때까지 옆에 꼭 붙어있어야돼."
"안그래도 그러고있어."
"좀 잘 달래줘. 빨리 갈테니깐."
연신 고개를 끄덕거리며 듣고있던 민혁이 달래주라는 기현의 말에 장난이 가득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그럼 내 방식대로 달래줘도 돼? 목소리 또한 장난끼가 서려있었기에 불안해진 기현이 하던 행동을 멈추고는 폰을 제대로 잡아 들어 뜸을 들였다.
"막 머리 쓰다듬어주고-"
"죽는다."
그러나 곧 헛웃음을 흘리고는 낮게 목소리를 깔고 죽는다- 그 한마디를 마지막으로 전화가 끊겼다. 통화한 시간이 깜빡거리는 화면을 쳐다보며 민혁이 장난스레 혀를 내둘렀다. 여주는 어느새 작게 우는 소리를 내고 있었다. 민혁이 티슈를 집어들어 왜 울고 그래요- 여주 에게 건넸다. 그러나 받아줄리 만무했다. 한두방울 떨어지던 눈물이 가득 고여있었다. 결국 민혁이 손을 뻗어 조심스럽게 여주 의 얼굴을 들어올리곤 기현아, 미안하다- 들리지 않을 사과를 중얼거리며 눈물을 닦아주었다.
"우리 얘기 할래요?"
"........."
"내가 여주씨 남자친구 얘기 해줄게요."
민혁이 한 손으로 턱을 괴고는 넌지시 건네는 말에 여주가 울망한 눈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처음으로 자신에게 또렷이 향한 시선에 민혁이 살풋- 웃음을 머금고는 유기현 이상형이 뭔지 알아요? 질문을 던졌다. 여주는 한참을 생각하더니 예쁜 사람? 가득 발음이 뭉개지는 소리로 답을 했다. 그 대답에 그건 당연한 거죠- 라며 장난 가득한 표정으로 뒷머리를 긁적이던 민혁이 그녀가 다시 우울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이려 들자 다급하게 말을 뱉어냈다.
"말 하나하나 예쁘게하고 자기만 봐주는 사람."
"........."
"근데 며칠전에 전화를 하는데 이상형이 바뀌었대요."
"뭐라구요...?"
"김여주. 이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여주씨 말고는 안된다던데."
으, 얼마나 오글거리던지. 민혁이 오소소 닭살이 돋아난 팔을 문지르자 여주가 베시시 웃음을 지었다. 술기운과 더불어 부끄러움으로 볼이 빨갛게 물들었다. 덕분에 울음을 완전히 멈춰 안도의 한숨을 내쉰 민혁이 더욱 기분을 좋게 해주려 기현이 자신에게 했던 말을 읊어주었다.
"여주씨만 보면 막 이 세상에 있는 모든거를 다 갖다바쳐주고 싶다고 하던데."
"........."
"내 생각에는 유기현 인생을 갖다바친것같아요."
"........."
"12년지기 친구로서 이런 모습 처음보거든요."
몇 년 전, 선 본 여자와는 잘 만나고 있냐는 자신의 물음에 잘 모르겠다며 답을 회피하다 얼마 못 갈 것 같다며 한숨과 함께 사실대로 말을 하곤, 얼마 후 정말로 여자가 찼다는 말을 하던 기현이 떠올랐다. 민혁이 반쯤 남은 맥주잔 옆에 얼음이 가득 담긴 물을 한 모금 마셨다. 우는 소리 대신 기분이 좋아져 웅얼거리는 소리가 민혁의 귓가에 들렸다. 내가 사람 달래주는거 하나는 잘하지. 어깨를 으쓱거리며 그녀를 따라 방실방실 웃음을 지었다. 그 때, 문을 열고 숨을 채 고르지 못하고 고개를 두리번거리는 기현이 민혁의 눈에 가득 들어찼다. 여주씨, 남자친구 왔어요. 손을 흔들곤 빠르게 말을 속삭인 민혁이 편안하게 몸을 뒤로 기댔다.
기현은 손을 뻗어 여주 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눈을 맞추려 다정하게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실로 처음보는 모습이었기에 민혁이 분위기를 참지 못하고 미친놈- 작게 욕을 내뱉자 기현이 고개를 돌렸다.
"예~예~ 위대하신 유기현님의 말씀을 어떻게 거역할수가 있겠습니까."
한껏 놀림조로 말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자신을 노려보고 있는 기현의 표정에 민혁이 한참 멋쩍은 표정을 짓다가 결국 너무 우시길래 눈물 좀 닦아드렸어- 한숨과 함께 고백을 했다.
"아니, 친구를 만나기로 했나본데 이 여자분이 남자친구를 데리고 와서는 하라는 말은 안하고 애정행각만 하고 있는데 여주씨 속이 타, 안 타."
"........."
"그러면서 자기 가봐야되는데 너는 데려다줄사람 있냐고 물어봤는데 여주씨가 대답을 못하니깐 너는 어떻게 데려다 줄 사람도 없냐는 둥, 너가 일만 열심히 하니깐 좋아해주는 사람이 없다는 둥 잔소리만 하는거 있지."
너 되게 세세하게 들었다. 기현이 스멀스멀 차오르는 화를 꾹 참고는 말을 내뱉자 바로 옆에서 그러는데 어떻게 못들어- 넌지시 답한 민혁이 자리에서 일어나 기현의 눈치를 한 번 보고는 주머니에 손을 꽂으며 한숨을 쉬었다.
"그러니깐 빨리 고백 좀 제대로 해서-"
"........."
"복수 좀 해 줘. 듣는 나도 화나더라."
'고백'이라는 단어에 잠시 멍을 때리던 기현이 어느새 자신의 손길에서 빠져나와 꾸벅꾸벅 졸고있는 여주를 보고는 흔들어깨우지도 않고 바로 그녀를 안아들었다. 그 모습에 깜짝 놀란 민혁이 눈을 크게 뜨고는 표정 하나 흐트러지지않는 기현과 눈을 맞췄다.
"너 힘 좋다?"
"내가 힘이 좋은게 아니라 여주씨가 가벼운거야."
"........."
"왜, 불만 있어?"
"내가 나중에 꼭 여자친구 만들어서 너한테 복수 한다."
얄미워 죽겠어, 진짜. 일부러 기현이 들릴만큼 중얼거린 민혁이 맞받아치지않고 그대로 돌아서는 기현의 등 뒤에 서 손을 흔들었다. 잘 가라- 자신을 향한 인사에 우뚝- 멈춰선 기현이 다시 등을 돌려 민혁을 쳐다보고는 입꼬리를 말아올렸다. 오늘 일 고맙다. 연락해. 밥 한 번 살게. 그 세마디에 민혁도 웃음을 머금고는 알았다는 표시를 해보였다. 인사 대신 고개를 끄덕인 기현이 가게를 나와 주차장으로 가 조수석 문을 열었다. 혹시나 그녀가 깰까싶어 잠시 쉬던 숨을 멈추고 머리가 부딪히지않게끔 조심히 놓아준 기현이 허리를 완전히 피고나서야 숨을 내뱉었다. 차의 앞으로 돌아가 운전석에 탄 기현이 문을 완전히 닫고는 시동을 걸었다. 우리 여주씨, 피곤한데 빨리 데려다줘야지. 기현의 중얼거림이 살짝 열린 창문에 바람과 함께 흩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