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기요."
"네?"
"내가 그 쪽한테 관심 있어서 그러는데,"
"어......."
"오늘 나랑 데이트 해줄래요?"
::그대에게 물들다::
네번째
'어떡하죠? 오늘 못갈것같은데.' 별안간 울리는 문자음에 혹시나 오고 있다는 문자일까싶어 급히 확인한 여주가 금세 실망하고만다. 아침부터 엄청 기대했는데. 여주가 금세 입꼬리를 내리고는 힘없이 몇걸음 걸어가 얼음을 채워넣는다. 그 모습을 본 직원이 포장을 하며 말을 건다.
"왜 그렇게 갑자기 기분이 안좋아지세요?"
"어? 아, 아무것도 아니야.."
여주는 말끝을 흐린 채 흠- 하며 숨을 내뱉고는 입을 오물거리며 표정을 찌푸린다. 됐어. 오늘은 일이나 열심히 해야지. 차근차근 마음을 먹은 여주가 곧 친구로부터 온 전화를 받으러 뒤쪽으로 나간다. 그 모습을 유리창을 통해 꼼꼼히 지켜본 기현이 그제서야 문을 열고 들어와 카운터 앞에 서서 메뉴가 가득 적힌 판을 쳐다본다. 여주씨가 뭘 좋아할려나... 잠시 고민하던 기현이 똑똑- 카운터를 가볍게 두드려 직원의 시선을 끈다.
"여기 사장님은 뭘 좋아해요?"
"네?"
"여기 카페 사장님은 무슨 종류 좋아해요?"
기현의 웃음을 머금은 얼굴에 심상치 않음을 느낀 직원이 잠시 눈치를 보더니 입을 열었다.
"녹차라떼 좋아...하실껄요?"
"그럼 녹차라떼 하나랑 아메리카노 한 잔 주세요."
기현의 주문을 받은 직원이 속으로 '사장님한테 관심 있나? 아니면 남친인가?' 추측을 하며 분주히 손을 움직였다. 기현은 그 카운터 앞에 서서 휘파람을 불며 여주가 놀랄 생각에 웃음꽃을 가득 피우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베이지색벽과 높은 천장, 중간중간 걸려있는 그림이 커피를 마시기에 충분한 공간이었다. 여주씨랑 잘 어울리네.
"녹차라떼 한 잔, 아메리카노 한 잔 나왔습니다."
마지막으로 종이홀더를 끼운 직원이 두 잔을 내밀었다. 때마침, 전화를 끝내고 뒷문을 통해 안으로 들어오려는 여주 의 움직임이 보였다. 고개를 돌려 그 모습을 발견한 기현이 여유롭게 두 잔을 각각 양손에 든 채 카운터를 비껴 서 등을 돌렸다. 그런 기현을 채 보지 못한 여주가 핸드폰을 바지 주머니 속으로 집어넣고는 들어와 카운터 안으로 들어갔다. 기현은 나오려는 웃음을 꾹 참고는 뒤돌아 어느샌가 다시 자신의 일을 열심히 하고 있는 여주를 향해 "저기요." 하고 살짝 불렀다. 네?
"내가 그 쪽한테 관심 있어서 그러는데,"
"어......."
"오늘 나랑 데이트 해줄래요?"
-
"시간 안된다면서요."
그녀를 향해 내민 녹차라떼를 받아든 여주가 기분 좋게 빨대를 입에 문 채, 밖으로 나와 테라스에 앉았다. 날씨는 밤임에도 불구하고 상쾌하리만큼 선선했다. 내가 말했잖아요. 나 시간많은 남자라고. 근데 오늘은 진짜로 잠시 일하다가 늦게 온거예요.
"그나저나 오늘 안경썼네요?"
기현이 턱을 괸 채, 한 손으로 여주 의 동그란 안경을 가리켰다. 기현의 말에 여주가 안경을 올렸다. 그냥 한 번 써봤어요. 왜요, 이상해요?
"아니요, 나 안경 쓴 여자 좋아해요."
"여자?"
"왜요?"
"그럼...막...나 말고도 막...다른 여자가..안경쓰면 좋아요?"
여주가 내심 질투나는 척, 볼에 바람을 넣은 채 삐진 척 흥하고 콧소리를 낸다. 진심 반, 농담 반이 섞인 여주 의 모습에 턱을 괸 손으로 입을 가린 채 푸스스하고 웃음을 터뜨린 기현이 "정확하게 말해줘요?" 그녀와 눈을 맞추며 입을 연다.
"안경 쓴 여주씨만 좋아하는거예요."
".....뭐, 기분은 좋네요."
"왜요. 내가 여주씨만 예뻐해줬으면 좋겠어요?"
기현의 말에 슬슬 웃음이 번지는 여주를 행복 가득한 표정으로 쳐다보던 그가 자리를 일어났다. 의자를 정리하던 모습을 멀뚱히 쳐다보던 그녀도 엉거주춤 일어나 자리를 정리했다. 왜 갑자기 일어나는거지?
"뭐해요? 내 손 안잡고."
"네?"
"내 데이트 신청 받아줬잖아요. 나 여주씨랑 영화 보고싶단 말야."
이제는 자연스럽게 손을 뻗어 여주 의 손을 잡는 기현을 쳐다본 그녀가 그제서야 웃어보였다. 난 또 뭐라고. 그와 영화를 볼 생각에 신이 난 여주가 금세 기현의 뒤를 맞춰 걸었다.
-
영화관은 그리 멀지 않았다. 주말 오후 8시. 길거리에 사람들이 넘쳐났다. 간신히 엘리베이터를 탄 기현과 여주가 금세 쏟아져들어오는 사람들에 막혀 거의 구석 부분을 차지했다. 기현이 표정을 찡그린 채, 여주 앞에 서서 묵묵히 사람들의 무게를 받아냈다. 또한 어쩔 수 없이 둘의 거리는 가까웠기에 여주는 숨을 흡- 하고 참았다. 숨을 참음에 따라 점차 여주 의 얼굴에 열이 올랐다. 그 얼굴에 풉- 하고 웃음을 터뜨린 기현이 금세 아무 일 없다는 듯 입꼬리를 내리고는 더 가까이 다가가 여주 의 어깨를 감싸고는 얼굴을 가까이 해 조용히 중얼거렸다. 이제 숨 쉬어도 괜찮아요.
딱 맞춰 띵- 하고 멈춘 엘리베이터는 금세 사람들의 우르르 나가는 소리로 들어찼다. 그제서야 후- 하고 숨을 내뱉는 여주를 보며 웃음을 터뜨린 기현이 그녀의 손을 잡아 엘리베이터에서 나왔다. 영화관도 시끌벅적함은 마찬가지였다. 기현과 여주는 나란히 서서 상영하는 영화의 포스터와 소개로 번뜩이는 전자판을 따라 시선을 움직였다.
"생각보다 볼 게 없네요."
"네? 어..어..그러게요.."
속으로 재미있는게 없다고 생각하던 여주 의 마음을 들여다보기라도 하듯, 허탈하게 말을 내뱉는 기현을 힐끔 쳐다본 그녀가 대충 반응을 해보였다. 음...하고 골똘히 생각이 잠긴 듯 기현이 포스터들을 쳐다보았다. 그러다 곧, "여주씨는 뭐보고싶은거 있어요?" 라는 물음에 그녀가 "어....음..." 하며 말을 얼버무리자 "그냥 우리 나갈까요?" 라며 표정을 찌푸려보였다. 왠지 나가면 헤어져야 할 것 같아 다급해진 여주가 손을 뻗어 한눈에도 음침해보이는 포스터를 가리켰다. 저거, 우리 저거 봐요!
"....진심이예요?"
"네? 네! 네...그렇죠."
기현은 그 포스터와 여주를 번갈아쳐다보더니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그 모습에 괜히 양심이 찔린 여주가 오히려 더 떵떵거렸다.
"혹시 기현씨 무서운거 못봐서 그래요?"
"아니, 난 괜찮은데...여주씨 괜찮겠어요?"
"네! 저 무서운거 엄청 잘봐요!"
-
라는 말은 금세 거짓말로 들통났다. 여주는 금세라도 울음을 터뜨릴 듯, 손으로 눈을 가린 채 화면을 제대로 쳐다보지 못했다. 괜히 이 영화를 보자고 한 자신이 미워졌다. 순간 번뜩이는 화면과 함께 소리를 지르며 껴안는 여자와 남자들을 태연하게 쳐다보던 기현이 고개를 돌려 손으로 여주 의 턱을 가볍게 들어올려 자신에게만 눈을 맞추게 한 후 소곤소곤 말을 걸었다.
"우리 그냥 나갈래요?"
"네?"
"사실 아까 잘본다고 했던거 거짓말이었어요."
그녀를 배려해 대충 거짓말이라며 기현이 둘러댔다. 그러곤 여주 의 손을 잡아끌어 커플들의 눈총을 받으며 자리를 빠져나왔다. 어두웠던 영화관에서 밖으로 나오자 긴장이 풀린 여주가 몸을 축 늘어뜨리자 괜히 미안해진 기현이 아무 말 없이 길을 걸었다. 그렇게 아무 대화 없이 카페를 거쳐- 가까운 거리였으므로- 그녀의 집 앞까지 걸어온 기현이 문 앞에 멈춰섰다.
"솔직히 말해봐요."
"뭘요....?"
"나랑 그렇게 같이 있고싶었어요?"
기현은 이미 다 안다는 듯한 표정으로 여주를 쳐다보았다. 여주가 한숨을 쉬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저 사실 겁 진짜진짜 많거든요..."
"그러게 그냥 나가자니깐."
"몰라요........"
아까 전 영화의 후유증으로 무기력해진 여주가 고개를 절레절레 돌리며 대충 대답을 한 후 잘가라는 말을 중얼거리며 몸을 돌려 도어락을 통해 문을 열었다. 그 때 선뜻 기현이 집으로 들어가려는 그녀를 다시 불렀다.
"정 무서우면 전화해요."
"............."
"새벽 두시라도 괜찮으니깐. 꼭 올게요."
기현이 손으로 전화기 모양을 만들어 흔들어보이자 여주가 입꼬리를 살짝 올리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천장을 골똘히 쳐다보며 손으로 계산을 하던 여주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우리 왠지 한 두시간 있다가 다시 볼 것 같네요."
"난 좋아요. 밤에 여주씨 보는거."
"근데 진짜 전화해도 돼요?"
"그럼요. 난 여주씨가 무섭다고 핑계대면서 전화해줬으면 좋겠어."
그 말을 끝으로 기현이 점점 닫혀가는 엘리베이터에 타 점점 사라져가는 여주를 향해 손을 흔들어보였다.
-
한 손으로는 핸드폰을 손에 꼭 쥔 채 거실을 돌아다니던 기현이 새벽 한 시라는 여성기계음이 울리자 작게 하품을 한 번 하고는 넓은 방으로 들어가 나무의자에 앉았다. 곳곳에 걸려있는 그림과 채 다 걸지못해 천에 덮어씌워진 채, 언젠가 벽에 걸리길 기다리고 있는 그림들이 한가득 이었다. 기현은 눈을 한 번 비빈후 연필을 들어 마저 하던 스케치를 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얼추 한시간쯤 지났을까. 핸드폰 벨소리가 울려왔다. 기현이 화면을 쳐다보았다. 그녀의 이름이 써져있었다. 여보세요?
"......................."
"....여보세요?"
상대편에서는 아무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내가 안받은건가 하고 화면을 쳐다보았지만 분명히 통화는 이어지고 있었다. 괜히 불안해진 마음에 기현이 방에 들어가 옷장에 있던 외투를 걸친 채 여주씨? 하고 이름을 불렀다. 그러자 히끅거리며 우는 소리가 들려왔다. 여주는 침대에 이불을 덮은 채, 웅크려 눈물을 닦아내고 있었다. 그 소리에 더욱 다급해진 기현이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곤 평소대로 올라오는 엘리베이터의 속도를 참아내지 못한 채 신경질을 내며 계단을 통해 지하주차장까지 내려갔다.
"왜그래요, 왜 울어, 응?"
"그게....꿈을..꿨는데..."
운전을 하면서도 한 손에 들려있는 핸드폰을 놓지 않은 채 전화를 이어가던 기현이 고개를 끄덕거리며 한마디 한마디에 반응을 해주었다. 응, 그랬구나 하고.
"근데..막 밖에..이상한 소리도 들리고..."
"그래서 지금 방 안에 있어요?"
"네에...그런데 무서워서...불도 못키겠고..."
"나 지금 가고있어요. 근데 여주씨가 문을 열어줘야되니깐 천천히 나올래요?"
"......................."
"괜찮아. 그러니깐 내 전화 끊지말고 방에 불도 키고 거실도 불키고 있어요."
그렇게 차근차근 어린아이에게 무언가를 하는 방법을 가르쳐주듯, 하나하나 말을 건네던 기현이 "나 지금 거의 다 도착했어요." 라며 차문을 닫고는 달려가 다행히 1층에 머물러있던 엘리베이터를 잡아탔다. 그러곤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다 말고 그녀에게 "지금 나와요." 라며 말을 꺼냈다. 건너편에 들려오는 기현의 목소리에 여주가 빨개진 눈가를 비비며 고개를 끄덕거리고는 조심스럽게 문을 열어 빼꼼 고개를 내밀었다. 마침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던 기현이 눈에 들어왔다. 기현의 모습에 긴장이 풀린 여주가 더 울음을 터뜨렸다. 그 모습에 기현이 한숨을 쉬더니 팔을 벌렸다.
"....이리와요."
"................."
"그렇게 무서웠어요?"
자신의 품으로 안아든 여주 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기현이 말을 걸자 여주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렇게 불이 켜진 복도에 아무 말도 없이 서로를 안은 채 서 있었다. 그리고 시간이 흐르자 기현이 살짝 몸을 떼낸 후 여주 의 얼굴에 있는 눈물자국을 지워주며 웃어보였다. 훌쩍거리며 자신을 쳐다보고있는 모습조차 귀여웠다.
"사실 전화할까 말까 고민했는데..."
"잘했어요. 전화 안했으면 어쩔뻔 했어."
"그런데 이렇게 우는 모습을 기현씨가 보면 어떡해요...."
금세 창피함에 여주가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기현도 물러서지 않았다. 다시 한 번 그녀를 끌어당겨 눈을 맞추게 한 뒤, 머리를 귀 뒤로 넘겨주었다.
"여주씨."
"......................"
"오늘 밤에 나랑 같이 있을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