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하루, 내 소원이었어."
"........."
"여주야."
"........."
"그렇게 먼저 뽀뽀하면 오빠 못 참아."
::그대에게 물들다::
아홉번째
한가지 잊고 있던게 있었다. 그녀의 집이 어디고 몇층이고 몇호인지까지는 알지만 제일 중요한 비밀번호를 몰랐다. 기현이 마침 바뀌는 빨간 불에 천천히 차를 멈추고는 슬쩍 고개를 돌려 창문에 기대 눈을 감고 있는 여주를 쳐다보았다. 전혀 자신의 부름으로 일어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그녀를 불렀다. 여주씨. 여주씨?
"여주씨, 비밀번호..."
"........."
역시나. 여주는 작게 표정을 찌푸리곤 더욱 웅크릴 뿐이었다. 기현이 고개를 절레절레 돌리며 한숨을 쉬었다. 초록불이 켜져 뒤에서 경적을 울리는 소리가 들렸다. 기현이 뒤를 힐끔- 보고는 차를 출발시켰다. 어쩔 수 없었다.
-
구석 자리에 차를 멈추고는 먼저 나와 조수석 문을 열은 기현이 몸을 숙이고 팔을 뻗어 다시 한 번 조심히 여주를 안아들었다. 손을 살짝 뻗어 겨우 문을 닫고는 아파트 안으로 걸어들어가 마침 1층에 멈춰있는 엘리베이터를 바로 타 14층 버튼을 눌렀다. 기현의 머릿속이 아까전 민혁의 일과 지금의 일이 이리저리 겹쳐 복잡해졌다. 기현이 고개를 돌려 벽을 쳐다보았다. 빨리 생각을 정리하려했다. 그러나 곧 들려오는 문이 열리는 소리에 집중은 다시 흐트러졌다. 기현이 표정을 찌푸리고는 내려 맨 끝쪽으로 걸어가 비밀번호를 누르고 문을 열었다.
넓은 집 안은 캄캄했고 조용했다. 기현이 하나- 둘- 불을 키곤 째깍거리는 시계를 쳐다보았다. 2시가 다되어가고 있었다. 무엇보다 여주를 눕히는게 먼저였으므로 기현은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 침대에 그녀를 눕히고는 이불을 덮어주기 전 조심히 운동화를 벗겨 현관으로 걸어가 자신의 운동화 옆에 가지런히 놓았다. 리본끈이 단정하게 묶인 하얀 운동화를 가만히 쳐다보았다. 누군가와 같이 집에 있는 것은 오랜만이었기에 괜히 설레는 기분이 들었다.
기현이 다시 걸어가 방 앞에서 노크를 하고 들어가야할지, 아니면 그냥 들어가야할지 한참을 고민하다 똑-똑- 두어번 문을 두드리고는 살짝 문을 열었다. 고개를 뺴꼼 내밀어 이불을 밀쳐두고 뒤척이는 여주가 보였다. 그제서야 기현이 문을 활짝 열고 침대의 끝에 걸터앉아 그녀에게 이불을 덮어주었다. 이렇게보니 참 예뻤다. 기현이 입꼬리를 가득 말아올리고는 아기를 재우듯 토닥거려주었다.
그러다 살짝 흘러내려 그녀의 얼굴을 가리는 머리카락을 귀 뒤로 쓸어넘겨준 기현이 조금 더 고개를 숙였다. 이렇게 작은 얼굴에 눈코입이 예쁘게 들어갈 수도 있구나. 여주 의 얼굴 하나하나를 찬찬히 살펴보던 기현이 손을 위로 올려 머리를 가득 쓰다듬어주었다. 그 쓰다듬에 여주가 아이처럼 앓는 소리를 내자 기현이 웃음을 참으려 입술을 꾹 깨물었다. 진짜 귀여워 죽겠다. 조금만 더 보고 나가자는 생각으로 얼굴을 가까이했다. 어느새 서로의 숨결이 닿아 오묘한 분위기를 만들어냈다. 기현은 여주 의 얼굴을 살펴보는 행동을 멈추지 않았다. 그만큼 오묘한 분위기는 갈수록 더 진해졌다. 결국, 그 농도가 더해져 방 안에 고르게 숨을 내뱉는 소리만이 가득 들어찼다.
그 때, 여주가 천천히 눈을 떴다. 코앞에서 보고있던 기현이 너무 놀라 소리도 내지르지 못하고 그대로 얼어 눈을 깜빡였다. 기현의 얼굴이 당황으로 물들어가는가 싶더니 기현씨- 하고 자신을 부르는 뭉개지는 발음에 살짝 고개를 떼고 두 팔로 여주를 껴안았다. 애정이 가득 담긴 눈빛으로 보이는 얼굴을 훑었다. 나 불렀어요, 우리 여주씨? 약간 물 속에 가라앉아있는 듯, 깊고 잔잔하지만 달달한 목소리에 여주가 예쁜 웃음을 지어보이며 두 팔로 기현의 목을 감쌌다. 다시금 숨결이 닿았다.
"나 기현씨 좋아해요."
"난 여주씨 사랑해."
"그럼 나도 사랑할래."
"난 여주씨가 나 사랑해주는거 좋아."
"우와, 그럼 나 좋아해주는 남자가 있는거네."
"내 눈에는 여주씨가 가장 꽃같아."
"그럼 기현씨가 내 남자친구야?"
"아니, 남편."
"그럼 나도 기현오빠라 부를래."
"...다시 불러봐."
"오빠, 기현오빠."
"솔직히 말해봐. 오늘 오빠한테 뽀뽀받고싶어서 그러는거지."
기현이 그녀의 한 팔을 풀어 손을 꼭 잡아쥐고는 입꼬리를 가득 말아올리며 장난스럽게 말을 내뱉었다. 그러나 여주는 장난으로 받아들이지 못했다. 뽀뽀? 할래! 술기운에서 헤어나오지 못한 여주가 살짝 얼굴을 올려 입술을 지그시 눌렀다. 짧게 쪽- 하는 소리와 함께 순식간의 입맞춤에 기현이 크게 뜬 눈을 깜빡였다. 그녀는 눈이 휘어지게 웃고 있었다. 기현은 혹시나 쿵쾅거리는 심장소리가 들릴까싶어 손깍지를 풀고는 이불을 덮어주었다. 여주는 언제 그랬냐는 듯, 눈을 감고 새근새근 소리를 내며 다시 잠에 빠져들고 있었다. 기현의 마음이 분홍색으로 그득 차자 그 간지러움을 참지 못하고 웃음을 흘렸다.
잘 자. 한참을 그렇게 바라만보다 조심히 침대에서 일어난 기현이 불을 끄고는 방을 나와 문을 닫았다. 그러나 쉽사리 걸음을 떼지 못했다. 그저 문손잡이를 잡은 채, 한 쪽 입꼬리를 올리며 여주 의 얼굴을 떠올렸다. 기현이 손으로 입을 가리고는 문가에 속삭였다. 잘 자, 여주야. 새벽 3시, 그 속삭임이 하나- 둘- 불이 꺼지는 소리와 함께 고요하게 파고들었다.
-
기현이 젖은 머리를 수건으로 털어내고는 주방으로 가 냉장고에서 가득 재료를 꺼내 손질을 하기 시작했다. 자신이 만든 음식을 여주가 먹는다는 생각에 기현이 웃음을 흘리고는 여유롭게 마저 하던 칼질과 함께 분주하게 물을 끓이고, 이것저것 넣어 요리를 했다. 그러나 같은 시간, 방 안의 상황은 달랐다. 처음에는 그저 이불을 꼭 끌어모으고 한참을 더 자려던 여주가 번쩍 눈을 떴다. 낯선 방은 물론, 기현의 얼굴과 새벽의 일이 두통과 함께 수면에 떠올랐다. 미쳤다. 여주가 멍한 눈으로 말을 중얼거리고는 뒤따라 몰려오는 창피함에 몸을 이리저리 굴렸다. 진짜 김여주 너 무슨 생각으로 그런 짓을 한거야. 머리를 가득 흐뜨리며 침대 끝과 끝을 왔다갔다 하던 그녀가 결국 이불과 함께 바닥에 쿵- 떨어졌다.
작은 비명소리와 함께 무언가 떨어지는 소리에 깜짝 놀란 기현이 칼질을 멈추고는 방으로 다가가 똑-똑- 노크를 했다. 답이 없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녀가 창피함에 답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여주씨, 괜찮아요?"
닫힌 문 틈새 사이로 물어보았으나 들려오는 소리는 진짜 미쳤지, 미쳤어- 부산스럽게 자신을 탓하는 소리와 이불을 걷어차내는 소리뿐이었다. 여주 의 목소리에 한시름 걱정을 놓은 기현이 슬쩍- 입꼬리를 올리고는 새벽을 떠올리며 느긋하게 말을 이었다.
"오빠 들어가도돼?"
꺄아아- 작게 비명을 지르는 소리가 기현의 귓가에 흘러들어왔다. 결국, 기현이 배를 움켜잡고 웃음을 터뜨리고는 눈가에 맺힌 눈물을 닦아내고 다시금 문 틈새에 얼굴을 갖다대었다.
"여주야, 오빠 들어간다?"
기현이 문손잡이를 잡아 돌리자 그제서야 여주가 내가 나갈게요- 다급하게 대답을 했다. 기현이 푸스스 웃음을 흘리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빨리 나와요. 아침 준비해놨어. 여주가 천천히 일어나 이불을 정리하고는 벽에 걸린 거울로 달려가 얼굴을 확인했다. 얼굴이 잔뜩 빨개져있었다. 여주가 입을 한껏 내밀고는 손으로 부채질을 하다 엉망이 된 머리를 대충 빗었다. 나가서 뭐라고 하지. 다시금 떠오르는 기억에 여주가 입술을 깨물었다. 마음같아서는 안나가고 싶었으나 현실에서는 안나갈 수는 없는 상황이었다. 여주가 조심히 문손잡이를 잡아돌렸다. 소리가 나지않게끔 문을 열어 나오기까지 성공한 여주가 벽에 딱 달라붙어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했다.
그러나 기현이 한 수 위였다. 조심히 고개를 돌리자 그녀의 눈 앞에 기현이 가득 웃음을 짓고 서있었다. 여주가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보지마요."
"어차피 마주앉아서 밥먹어야되는데 뭘 보지마."
"그럼 우리 밥 따로 먹어요."
"오늘 하루 할 일 1순위가 여주씨랑 밥먹는거였어요."
기현이 여주 의 손을 잡아 겨우 의자에 앉히고는 반대편에 마주앉아 그녀가 먼저 젓가락을 들기를 기다렸다. 충분히 예쁜거아니깐 빨리 밥 먹어요. 기현이 표정을 찡그리곤 보채듯 얼굴을 보려 고개를 이리저리 숙이자 여주가 결국 얼굴을 가리던 손으로 숫가락과 젓가락을 쥐었다. 예쁘기만 하네. 기현이 반찬을 집으며 넌지시 말을 내뱉자 여주 의 얼굴이 빨갛게 물들어갔다. 분명 기현은 어제 일을 기억하고 있는게 확실했다. 그러나 왠일인지 기현은 그저 반찬을 그녀의 밥 위에 놓아주며 입꼬리를 말아올릴 뿐이었다.
약간은 불안했으나 한결 편해진 마음으로 여주가 맛있다며 오물거리는 모습에 기현이 웃음을 꾹 참고는 젓가락을 놓았다. 왜 안먹어요? 눈을 동그랗게 뜨고 하는 물음에 기현이 고개를 절레절레 돌렸다.
"난 여주씨 먹는것만 봐도 배불러."
"...기현씨가 우리 부모님이에요?"
"아니? 남편인데?"
"........."
기현이 팔짱을 끼고는 새벽의 일이 기억나게끔 장난을 치자 여주가 다 삼키지 못하고 사레가 들어 콜록거렸다. 놀란 기현이 물을 따라주었다. 그녀가 표정을 가득 찌푸리고는 두 손으로 컵을 쥐어 물을 가득 들이켰다. 진짜 밥먹는데 그런 장난 치면 나 울거예요. 그럼 장난 안치면 뽀뽀해줄거야? 우리 뽀뽀 얘기는 그만 하죠? 뽀뽀 먼저 한게 누구더라. 기현이 시선을 위로 올리며 곰곰이 생각을 하는 척 하자 여주가 빨개진 얼굴을 감추려 고개를 푹- 숙이곤 밥을 먹었다. 그 모습을 가만히 쳐다보던 기현이 그녀가 조금 남아있던 밥을 한 입에 집어넣자 의자를 더욱 끌어당겨 얼굴을 가까이했다.
"나 부르지 그랬어요."
"......뭘요?"
"어제, 호프집에서."
"........."
"나중에 꼭 그 친구분 만나자고해요."
"........."
"얼굴 한 번 보고싶네."
그녀가 여주 에게 늘어놓았다던 핀잔이 생각나 기현이 물 한 모금과 함께 다시 차오르려는 화를 삼켰다. 그러나 약간 굳어진 표정과 진심이 담긴 말투에 여주가 불안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민혁씨가 다 말해줬나보구나. 여주가 어제의 일을 떠올리다 약간 차가워진 분위기를 풀려 자리를 일어나 식탁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기현도 따라 일어나 식탁을 같이 정리했다. 내가 설거지할게요. 냉장고에 반찬이 담긴 그릇을 집어넣으며 여주가 말을 걸었다. 그 뒷모습을 멍하니 쳐다보던 기현이 천천히 다가가 두 팔로 허리를 감싸안았다. 여주가 깜짝 놀라 몸을 돌리려했으나 어깨에 얼굴을 파묻는 기현의 행동에 푸스스 웃음을 흘리곤 마저 그릇을 집어넣었다.
"우리 되게 신혼부부같다."
"이렇게 나 안는 대신 내 술주정은 잊어줄래요?"
"...그건 좀 아닌 것 같아."
"창피해죽겠단말이에요."
"난 제일 행복했으니깐 됐어."
설거지는 내가 알아서 할게. 여주씨 슬슬 가봐야되지 않아요? 기현이 입꼬리를 말아올리며 물었다. 여주도 결국 같이 미소를 짓고는 천천히 기현의 팔을 풀었다. 정말 미안한데 카페 때문에 가봐야돼요. 미안한 감정을 가득 담고 기현을 쳐다보며 조곤조곤 말을 내뱉자 기현이 뭐, 어쩔 수 없으니깐- 완전히 팔을 풀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여주는 다시 방에 들어가 가방과 핸드폰을 챙겨나왔다. 데려다주겠다는 말에 여주가 고개를 절레절레 돌렸다. 나때문에 힘들었을텐데 오늘은 좀 쉬시죠. 장난스러운 말투로 맞받아친 그녀가 엘리베이터 버튼을 꾹 눌렀다. 바로 문이 열렸다.
갈게요. 진짜 고마웠어요. 여주가 손을 흔들며 말하자 기현도 같이 손을 흔들었다. 그러나 막상 쉽게 보내주기가싫은지 한참을 뚫어져라 쳐다보던 기현이 그녀의 팔을 잡아끌어 품에 안기게끔 하고는 약간 흐트러져있는 앞머리를 살살 정리해주었다. 그러다 곧, 그녀의 얼굴을 살짝 들어올리고는 고개를 틀어 입을 맞췄다. 지그시 입술이 맞닿고, 천천히 빨개져있는 여주 의 얼굴을 하나하나 훑어보던 기현이 한 쪽 입꼬리를 살짝 올리고는 볼을 가볍게 꼬집었다.
"오늘 하루, 내 소원이었어."
"........."
"여주야."
"........."
"그렇게 먼저 뽀뽀하면 오빠 못 참아."
엘리베이터 문이 스르륵- 닫기고, 복도는 오롯이 둘만의 공간이 되었다. 기현이 여주를 더 끌어안았다. 아침, 10시. 자는 내내 생각했던 기현의 소원이 이루어지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