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글은 애니메이션 SPY X FAMILY의 설정을 차용하였음을 알려드립니다.
“그럼 15일에 봐.”
“어... 그래.”
찰카당.
전화기 내려놓는 소리가 그렇게 절망적일 수가 없다.
“...아, 망할.”
머리가 지끈거렸다. 어쩌면 좋지. 손톱을 물어뜯다가, 다시 한번 전화기를 들어 올렸다.
신호음이 가고, 얼마 안 가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보세요-”
“저, 승관 씨...? 저 김여주인데요.”
“...아, 네. 여주 씨? 무슨 일로.”
목소리에 살짝 떨떠름한 기운이 느껴졌지만, 지금은 그딴 걸 신경 쓸 때가 아니었다.
“...그, 승관 씨.”
“네, 말씀하세요.”
“그, 아까 말씀하셨던 소개팅-”
“네에.”
뭔 소리 하려나, 싶을 것이다. 그렇지만,
“-할게요!!!”
“네에...”
“.......”
“네???!!!”
해야만 한다.
“하게 해주세요!!!!”
***
간만에 차려입은 긴 드레스가 몸을 휘감는다. 아, 이러면 움직일 때 불편한데. 훅 올라온 짜증을 누르며 약속 장소로 걸음을 옮겼다.
“진짜 윤정한만 아니었어도...”
망할 놈의 시스콤 새끼가 15일에 보러온다는 얘기만 아니었어도 이런 지랄까지는 필요 없었을 것이다. 아니, 결혼할 사람이 생겼다는 거짓말을 한 것부터가 문제였을까.
전쟁 분위기가 덜 가신 나라에서 이 나이 되어가도록 미혼인 여성에게는 의심과 걱정이 따라붙기 마련이니, 거짓말로라도 안심시켜주려던 것뿐이었는데. 이게 이딴 식으로 돌아올 줄은-
“꺄악-”
비명.
고개를 돌리니, 내 방향 쪽으로 도망쳐 오는 남자가 보인다. 품으로 넣는 가죽 지갑, 넘어져 있는 남자.
상황 파악은 끝났다.
“...마침 기분 더러웠는데.”
움직이면 된다.
우선 발을 걸고,
“우왓-”
등 돌려 휘청이는 몸뚱아리를 피한 다음,
쾅!!!
“컥-”
무릎으로 등을 누르기까지, 3초.
“쯔, 단순한 놈이네.”
재미없었다. 볼 장 다 봤으니, 이만 일어나야...
지이익-
...하는데.
“...설마.”
믿을 수 없는 소리에 천천히 시선을 내렸다. 허벅지 중간부터 와르르 찢어져 버린 실밥들, 쓰러진 날치기 새끼 아래에 깔린 원피스. 훤히 보이는 맨살이 믿기지 않아 괜히 더 몸을 일으켰지만,
뚜둑.
...이것은 필시, 내 이성이 끊기는 소리일 것이다.
그냥 이 새끼 죽이고 튈까.
그래, 소개팅이 뭔 대수야. 윤정한이 뭔 대수야. 거짓말 같은 거, 바로잡으면 그만-
“-이런, 옷이 못 쓰게 됐네요.”
낯선 목소리가 들렸다.
다가오는 기척에 눈을 돌리니, 웬 훤칠한 남자 하나가 재킷을 벗으며 다가오고 있었다. 셔츠 아래 체격이 보통 다부진 게 아닌 것이 어딘지 심상치 않아 몸을 움츠리는데,
“일단 이거라도 덮으시고...”
팔락, 하는 바람 소리와 함께 남자의 재킷이 내 허벅지 위로 올라왔다. 이해할 수 없는 행동에 굳어 있는 사이, 남자는 내 어깨를 잡고 천천히 자리에서 일으켰다. 찢어진 드레스가 가려지도록 잘 잡으면서.
“지갑은 주인한테 잘 간 것 같으니, 이만 일어나실까요.”
훅, 성숙한 머스크 향이 가까이 다가왔다. 어딘지 익숙한 얼굴 같았다. 까무잡잡한 피부, 선명한 코, 시원한 입. 그리고,
상냥한 빛을 머금은, 부드러운 눈.
“근처에 잘 아는 양장점이 있으니, 가시죠.”
쿵, 심장이 뛰었다.
***
“...어떻게 신세를 갚죠.”
드레스 수선에, 새 드레스까지. 남자는 감동적일 정도의 호의를 베풀어주었다. 태생이 다정한 사람인 탓일까. 섣불리 눈을 올려다보기 힘들었다.
“좋은 일 하신 건데, 저도 도와야죠.”
“...좋은 일이요.”
뭔가를 하고, 좋은 일이라는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있던가. 그런 얘기를 들을 만한 일을 해왔던가.
쿵, 다시 심장이 크게 뛰었다.
“잘 어울리시네요.”
“...아아, 네.”
붉은색도, 검은색도 아닌 옷을 입어본 지가 언제였더라. 머쓱한 마음에 목을 감싼 연분홍색 옷깃을 만지작거렸다.
“...감사해요.”
“사실을 말한 것뿐인데요.”
“...원래, 좀 그러신... 편인가요.”
민망함에 아무 말이나 주워 뱉었는데, 남자는 의외로 살짝 생각에 잠기는 듯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칭찬이 잦은 편이긴 한데.”
“...아아, 그런.”
“...뭐, 그렇다고 아무한테나 이러진 않고요.”
상냥한 눈이 다시 둥글게 휘어지는 순간, 다시 심장이 떨어졌다.
아, 위험한 얼굴이다. 위험한 얼굴이야. 그래도 꽤 오래 윤정한이랑 살아온 만큼 미인에는 익숙해졌다고 생각했는데. 이런 결의 미남에게는 영 익숙치 않은 것 같다. 어느샌가 흙투성이가 된 재킷을 괜히 손으로 말아쥐었다.
“...재킷은, 어떻게 빨아서라도 돌려드릴게요.”
“...새 약속을 잡고 싶다는 말로 들리는데.”
“아, 그건...”
“아니에요?”
...와, 선수다. 이건 위험하다. 더 무서운 건 이 약속 제의가 싫지 않다는 거다.
약속에 설레본 게 얼마만이던가.
약속.
...약속?
“...어어, 잠시만, 지금 몇 시죠???”
이리저리 고개를 돌려 보니, 양장점 벽 한쪽에 걸린 시계가 눈에 들어왔다. 바늘이 가리킨 시각은, 3시다.
...이전 약속이 아마, 2시...
“...세상에.”
“왜 그러세요?”
“제가, 그, 약속에 늦었, 아, 직장 동료가 주선한 거라, 실례 저지르면 안 되는데...”
“...어디서요?”
“그, 카페 포저에서요. 두 시에 뵙기로 했는데, 지금이라도 가야-”
탁.
발을 돌리려다, 본능적으로 날 향해 다가오는 무언가를 쳐냈다. 정신 차리고 보니, 어정쩡한 위치에 있는 팔이 보였다. 그제야, 내 손짓에 튕겨 나간 것이 옷깃을 잡으려던 남자의 손이었음을 깨달았다.
“...어, 죄송... 해요.”
“...아닙니다. 놀라셨겠어요.”
남자는 꽤나 당황한 눈치였다. 다급하다 보니 힘 조절을 안 했던 모양이다.
...이상하게 생각 안 했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문득 든다.
“그, 혹시-”
약속을 빠르게 파하고 올 테니 기다려달라, 라고 말하려는데,
“있죠.”
“...아, 말씀-”
“저도, 포저에서 2시 약속이 있는데.”
“...네?”
잠깐 멍한 사이, 어느새 꽤 익숙해진 남자의 향이 한층 짙게 다가온다. 무거운 듯, 시원한 듯한 향에 얹어지는,
“성함이?”
“...김여주예요.”
“스물여덟?”
“...네.”
예의 그, 상냥한 눈웃음.
그래, 익숙한 웃음. 스치듯 받은 사진에서 봤던 웃음.
“...김민규라고 합니다. 스물아홉이고,”
“...아아.”
“시청에서 일하는 부승관 씨 지인입니다.”
“...세상에.”
내가 손으로 얼굴을 가리니 남자, 아니, 민규 씨의 얼굴에 시원한 미소가 피어오른다.
...위험한 얼굴이다. 정말 위험한 미인이다.
“민규 씨.”
“네?”
“초면에 정말 죄송한데요.”
입이 멋대로 움직일 정도로.
“혹시 약혼하실 생각 있으세요?”
“...네?”
잠깐 굳은 채, 고개를 갸웃하던 민규 씨가 이내 고개를 숙이며 푸흡, 웃음을 터트렸다.
...아까부터 느꼈던 거지만, 목소리도 좋다.
“와, 정말 처음 들어보는 말인데.”
“...음, 다행, 이네요.”
“그러게요.”
“...네?”
“못할 거 없죠, 약혼.”
“...어어,”
“일단 좀 알아가 보고?”
머릿속에서 종이 울리는 기분이다. 심장이 크게, 강하게 몸 안에서 요동치는 탓이다.
그래, 어차피 결혼을 약속한 사람이 필요한 거라면, 호감이 느껴지는 상대가 좋지 않겠나.
또 내 직업상, 이런 개소리를 받아들인다고 해서 나쁠 건 없다!
“일단 나갈까요?”
“네...!”
그날 하루는 그저, 즐겁고 행복했다. 내가 친 이 사고의 무게를 실감할 수 없을 만큼.
***
“야, 호랑이.”
사각, 사각. 권순영이 칼날을 가는 소리는 언제 들어도 안정적이다.
“왜, 까마귀.”
“나 결혼한다?”
사-가각. 리듬을 깨는 삐끗하는 소리에 고개를 돌리니, 황망한 시선과 눈이 마주쳤다.
“...넌 참 믿기 힘든 소리를 평온하게 하는 재주가 있어.”
“진짠데.”
“...그렇겠지. 넌 없는 말을 잘 지어내는 인간은 아니니까.”
사각, 사각. 다시 소리가 돌아온다. 이 업계의 장점 중 하나. 정신 나간 개소리를 해도 그러려니 한다는 것.
“식은 언제 올리는데?”
“1년 전쯤 한 셈 치기로 했어. 그 사람 사는 집에 들어가기로 했고.”
“이야, 그걸 오케이하는 그쪽도 보통 인간은 아닌가 보네.”
소리가 멈춘다. 살짝 돌아보니, 얇은 날붙이의 끝을 달빛을 비춰보는 권순영이 보였다.
“역시 너한테 맡기는 편이 마음에 들어.”
“어허, 쳐다보지 마. 부정 타.”
하여간 유난이다. 완벽하게 갈린 것 같은데, 어딘가 마음에 안 드는지 다시 갈기 시작하기까지 한다.
평소보다 좀 심하지만, 이번엔 중요한 건이니 가만히 두었다.
“점장님한테는, 허락 맡았고?”
“응. 오히려 좋대. 정보기관에 뜬금없이 불려가서 소명할 필요도 없고.”
“점장님도 제정신은 아니야.”
“아무래도 이런 일을 하는 시점에서?”
“뭐, 그건 그래.”
후우, 권순영이 마침내 작업물에서 먼지를 불어낸다. 작업을 마무리하는 루틴. 나는 재빠르게 내 ‘바늘’들을 낚아챘다.
“어우, 기다리느라 돌아가시는 줄 알았어요-”
“한 달 맡긴 적도 있으면서, 엄살은.”
“그땐 부러졌던 거고, 이건 날 가는 건데 같니.”
“뭐, 됐고... 그래서, 이번 건은?”
휘릭, 휘릭. 손에 감겨오는 익숙한 감각. 손을 한 번 내쉬고, 작업복의 익숙한 위치에 바늘들을 꽂아 넣었다.
“정보 팔아넘긴 차관 비서.”
“음, 무난하네.”
“응. 곧 신혼이니까, 무거운 건은 피하시는 모양이야.”
와장창-
“...뭐야, 왜?”
“...그, 너무 평범한 단어가 너무 평범하지 않게 튀어나와서.”
“그런가.”
쏟아진 물품을 주섬주섬 담은 권순영은 질렸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젓더니,
“김여주.”
간만에, 내 이름을 불렀다.
“...왜?”
“결혼 축하해. 여러모로.”
“새삼? 그래.”
어깨를 으쓱하고는, 등을 돌렸다. 내일은 아침 일찍부터 이사를 해야 할 테니, 오늘은 일찍 마무리해야 한다. 장관도 아니고, 차관도 아닌 그 비서 명줄 끊는 것쯤이야 한 시간도 안 걸릴 테니까.
“몸이나 좀 풀까.”
김여주가 까마귀의 옷을 입는 시간. 입에 담배 한 대를 물고, 발을 뻗었다.
“어떻게 끊지, 이거.”
담배를 별로 안 좋아한다던 예비... 아니, 현 남편의 말이 머릿속에 맴도는 채로.
***
‘황혼’은 입에서 시가를 내려놓으며 머금고 있던 연기를 부드럽게 내뿜었다. 차관 비서가 변사체로 발견되었다는 뉴스가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중이었다.
“곤란한데...”
꽤나 중요한 정보원의 죽음. 그것도 꽤 급작스럽기까지 하다. 연기가 가득한 방 속, ‘황혼’이 약간의 탄식과 함께 머리를 쓸어넘겼다.
“다른 관공서를 뚫을 수밖에 없는데.”
위장 부부로 함께할 부인이... 시청 기록관리부 소속일 텐데.
“마침 심어놓은 사람도 있으니, 이쪽으로 파볼까.”
그러면, 아내를 중심으로 직장 동료 부부 모임 같은 곳에서 인맥을 넓혀나가야 할 것이다. 평범한, 있는 듯 없는 듯한 부부로 숨어들어야 하는 상황에 마냥 적절하지는 못하다. 부인의 성향이 어떨지에 따라 결과가 천차만별일 수도 있고.
조용히 부인 될 사람, 아니 부인 되는 사람의 특징을 되짚어보던 ‘황혼’은, 문득 한 장면에서 멈췄다.
“...감각이, 상당히 기민했지.”
시나리오를 실행한 요원에게 발을 걸고 제압할 때. 생각보다 조금 큰 곤경에 처한 그녀에게 친절을 베풀고자 다가섰을 때. 급히 나가려는 그녀를 잡으려 손을 뻗었을 때. 길에 당연하다시피 따라붙은 동료 요원들의 시선을 알아챈 마냥, 정확히 고개를 돌렸을 때.
근방 국가, 나아가 대륙 전체에서 날고 기는 비밀 요원들의 시선과 움직임을 알아채는 건 일반인의 몸으로 불가능에 가깝건만.
“...그냥 선천적인 건가.”
그는 가만히 고민하다가, 손에서 빙글빙글 돌던 펜의 끝을 펼친 노트 위에 올리곤 아내에 대해 한 줄을 추가했다.
"김여주. 28세. 5월 26일생. 미혼.기혼. 수도 시청 기록관리부 소속."
"남부 출신으로 예상. 고아."
"기타 인간관계로 보이는 것은 확인 불가하나 친하게 지내는 남성 1명 존재."
"사내 인간관계는 무난, 특별히 좋은 관계로 지내는 이는 전무."
"휴가를 자주 쓰는 편이라 관련해 사내에서 안 좋은 평이 존재."
"담배연기를 혐오. 검은색과 붉은색에 대한 선호도가 높은 편."
...
"신체 능력이 좋고 감각이 기민한 편. 동거 시 주의 필요."
“...이게 뭔 짓인지.”
임무만 아니었어도.
미간을 구기며 시가를 입에 대던 ‘황혼’은, 문득 제가 한 거짓말을 떠올렸다. 금연이라니, 무슨 말도 안 되는 망발인가. 부부라는 장기 위장을 하는 줄 알았다면, 그렇게까지 품이 꽤 드는 거짓말을 하진 않았을 것이다.
“...어떻게 몰래 피나.”
외근을 늘려야겠다는 생각과 함께, ‘황혼’은 노트를 덮었다.
앞으로 수없이 늘어날, 아내에 대한 글귀들에 대해서는 예상하지 못한 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