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1억
BGM
그렇게 긴 시간 동안 얘기를 나누는 것도 아니다. 길어봤자 하루 10분이다. 남자는 나를 보러 12시가 넘으면 지하실에 내려왔고, 나는 그 남자를 기다리고있었다.
남자와 나는 서로 아무말도 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서로 그렇게 마주보고 앉아있었다. 남자는 자주 다른 생각을 하는 듯 먼 곳을 보았고, 나는 그런 남자를 재촉없이 기다려주었다.
"……."
눈이 마주쳐도 서로 말이 없었다. 그리고 그런 것이 불쾌하지만은 않았다. 원래 알던 사이도 아니었고, 신나게 대화를 할 수 있는 그런 관계도 아니었으니까.
이회장이, 이 사람의 아버지가 무작정 나쁘다고 할 수는 없었다. 돈을 빌려서 사기를 치고 달아난 건 우리 아빠의 잘못이 확실했으니까.
오늘은 그렇게 남자와 나는 시시콜콜한 대화조차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궁금했다. 무슨 생각을 저렇게 하길래 아무런 말도 못하고 어색한 것도 모른 채 있을까.
"필요한 거 있어요?"
"…없어요."
"……."
"아, 캔들이요."
"……."
"캔들이 갖고싶어요."
겨우 한마디 건넨 남자는 나에게 필요한 게 있냐고 물었고, 나는 분명 없었지만 이상하게 필요한 걸 필사적으로 떠올렸다.
남자는 나에게 왜 그게 필요하냐는 말조차 하지도 않았다. 고갤 끄덕이고선 등돌려 나가는 남자에 나는 여전히 굳은 표정으로 침대에 앉았다.
준혁이 문을 열고 들어서면 자려고 누워있던 소희가 준혁을 힐끔 보았다.
준혁과 소희는 대화가 없다. 대부분 소희가 떠들고, 준혁은 듣는 척도 안 한다. 그래도 굴하지않고 소희는 준혁에게 살갑게 말을 걸었다.
"요즘에 밤에 웬 물을 그렇게 마시러 가."
"……."
"우리 신혼여행은 언제 해? 바쁘단 소리 하지 마. 아버님이 다녀오라고 했으니까."
"넌 여기서 계속 살고싶냐."
"응? 그럼! 일 안 해도 되잖아. 하루종일 집에 있어도 뭐라고하는 사람도 없고. 행복해."
"…그래."
"……."
"하루종일 안에 틀어박혀있어도 넌 행복하겠다."
"…왜 그러는데? 내가 뭐 잘못했어?"
"……."
"오빠."
"난 네가 잘못했고 말고를 따질 생각도 없어."
"왜 아니야? 우린 결혼했잖아."
"피곤하다."
"……."
"자라."
준혁은 저 말을 끝으로 욕실에 들어서 샤워를 했고, 소희는 기분이 나쁜지 콧방귀를 뀌다가도 '이게 무슨 냄새지..'하며 고개를 갸웃한다.
빈 시간에 준혁은 백화점에 들렀고, 속옷 매장에 들러 관심 없다는 듯 둘러보지도않고선 직원에게 말한다.
"다섯벌 정도 아무거나 담아서 주세요."
"네? 아, 사이즈는.."
"…글쎄요."
"……."
"사이즈별로 다 나눠서 주시겠어요."
"아, 네."
이렇게 주문을 하는 사람은 드물기도하고, 준혁은 vip이기도 하니까 얼굴을 기억한다. 결혼했다더니 아내분 선물인가보구나- 하고선 안에 있는 직원과 조용히 떠들다가
준혁과 눈이 마주치면 아무일도 없었다는 듯 보기좋게 웃어보인다. 손에 들린 캔들까지 완벽하게 사람들에게 말이 나오게끔 만들었다.
"안 그렇게 생겨서 완전 스윗하네.. 와이프 주려고 속옷이랑 캔들을 사가고."
"그러니까 의외다."
"근데 왜 사이즈별로 다 달라는 거지? 와이프 사이즈를 모르나?"
"에이.. 모르겠냐? 궁금하긴하네."
태오의 회사에 도착한 준혁은 운전수에게 기다리라는 말을 하고선 회사로 들어섰다. 준혁을 보고선 자리를 만들어주는 직원들에 준혁은 그래도 회사인지라 태오가 있는 곳에 노크까지 한다.
'네' 태오의 목소리에 준혁이 문을 열고 들어서면, 태오는 반가운 듯 표정을 지었다.
"무슨 일이야? 형이 내 회사에 다 오고."
"물어볼 게 있어서."
"응? 나한테 물어볼 게 다 있어?"
가식적인 웃음이 아니었다. 정말로 반가워서 웃어주는 것이었다. 늘 이래왔다. 어렸을 적부터 태오는 준혁을 따랐고, 준혁은 태오에게 거리를 뒀다.
무슨 일이기에 나를 찾아왔을까 설레이는 마음으로 준혁에게 한발자국 다가선 태오는 준혁의 표정에서 심각성을 느꼈다.
"한회장 딸한테 왜 그런 거야."
"…어?"
"지하실에 사람이 한달이 넘도록 있잖아."
준혁의 말에 태오는 한참 망설이다가 그때의 상황을 떠올리면 괴로운 듯 인상을 쓰다가도 조심스레 말한다.
"…어쩔 수가 없었어. 죄를 지었다면 당연히 그렇게 하는 게 맞다고 생각했어."
"어쩔 수가 없어? 네가 한 짓.. 그거 감금이야. 아버지랑 닮기 싫다던 새끼가 왜 아버지랑 같은 짓을 하고있는데."
"내가 그러지 않았으면 아버지한테 이미 죽었을 거야."
"뭐?"
"집에 한회장이 찾아와서 무릎 꿇던 날에 형은 못 봐서 모를 거야."
"……."
"아버지가 뒤에서 처리하라고 손짓하는 거 다 봤어. 근데 나보고 어쩌라고 거기서 내가 뭘 어떻게 해야됐어? 죽는 걸 보고만 있어?"
"……."
"아버지가 계속 살인 하는 걸 보고만 있어야 돼?"
"…그렇게 사람을 지하실에 가둬놨으면 책임지고 한 번씩 들여다봤어야지."
"…내가 왜."
"……."
"왜 그래야되는데. 살려줬으면 된 거 아니야?"
태오의 말에 준혁은 아무말도 할 수가 없었다. 기가찬 듯 헛웃음을 흘리는 준혁을 본 태오는 하고싶은 말이 많았지만 그 어떤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준혁이 가고, 태오는 생각에 빠진 듯 허공을 바라본 채로 별 다른 행동을 하지않았다.
"사장님!"
"…아, 어."
"열 번을 넘게 불렀는데..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세요."
"…미안."
이상했다. 하루가 지날 수록 나는 그 사람을 계속 기다렸다.
그 사람과 있으면 기분이 좋은 것도 아니고, 내 얘기를 계속해서 들어주는 것도 아닌데. 그냥 같이 있기만 한 건데 왜 이렇게 기다려질까.
11시부터는 시간이 너무 안 갔다. 시계를 보고있어서 더 그런 걸까. 무슨 성 안에 갇힌 공주가 왕자를 기다리는 것처럼 느낌이 이상했다.
그 공주도 이런 마음이었겠지. 어렸을 적 동화책을 봤을 때는 공감하기가 꽤 힘들었는데 지금은 너무 공감이 잘 됐다.
"…왔다."
계단을 밟고 내려오는 소리. 기대에 찬 내 발소리.. 노크 소리.. 그리고 뜬금없이 올라가는 내 입꼬리.
문을 연 남자와 눈이 마주쳤고, 나는 천천히 입꼬리를 내렸다. 웃는 내가 이해가 안 갔으니까. 이 사람도 날 이해해주지않을 거야.
나와 눈이 마주쳤던 남자는 조금은 당황한 듯 싶었지만 잊혀지게끔 바로 나에게 말을 걸어주었다.
"물은 잘 나오죠."
"…아, 네."
"……."
"이게 뭐예요..?"
종이가방들을 손에 쥔 채로 자연스레 침대에 앉은 나는 안에 있는 것들을 들춰보았다.
내 앞에있는 테이블에 걸쳐 앉은 남자를 힐끔 본 나는 어이없다는 듯 웃어보였다.
"속옷을 사왔어요?"
"……"
"이거 설마.. 사이즈별로 다 사온 거예요?"
"……."
"아니 누가 이렇게 사이즈별로 다 사와요. 이게 몇개야..?"
"……."
"진짜 웃기다."
"……."
웃음이 나왔다. 한달이 넘도록 여기서 지내면서 처음으로 환하게 웃어보았다. 너무 웃겼다. 이런 사람은 살면서 처음이니까.
이 사람도 연애란 걸 해봤을 텐데. 심지어 소희 언니와 결혼까지 한 사람이 이런 바보같은 짓을 한 걸 보니 너무 웃겼고, 귀여웠다.
"혹시 그쪽 모쏠이에요? 소희 언니가 처음이죠. 나 살다살다 이런 사람은 또 처음이네 아.. 웃겨라."
"……."
나도 이 남자도 서로에게 처음 웃어보였다. 근데 이게 왜 이렇게 어색하지가 않았을까.
서로 그렇게 계속 웃었던 것 같다. 안 그렇게 생겨서 이런 모습 보니까 이것도 참 매력이네.
"안 그러겠지만.. 다음부턴 누구 속옷 선물해주려거든.. 아니다 아니다.. 그냥 속옷 선물 해주지 마요. 이게 뭐예요. 완전 웃기거든요."
"…그래요? 미안해요."
"…아, 진짜 너무 웃겼어.. 눈물 고인 거 보여요?"
"…네."
"……."
"보여요."
"…그렇게 뚫어져라 보라던 건 아니었는데."
나도 어색이란 걸 아나보다. 눈물 고인 거 보라는 내 말에 내 눈을 뚫어져라 보는 남자에 너무 놀랐고, 심장이 이상했다.
급히 등을 벽에 붙여 앉고선 캔들을 보았다. 나 저 냄새 진짜 좋아하는데.
"아카시아 냄새 좋아하는 거 어떻게 알았어요."
"……."
"나 저 냄새 제일 좋아하는데."
"……."
"모쏠은 아니긴한가보다. 여자를 아예 모르지는 않네."
"여기서 나가면 뭐하고싶어요?"
"…무슨 교도소에 있는 것 같네요 그렇게 말하니까.'
"……."
"여기서 나가면.. 엄마랑 아빠랑 맛있는 거 먹을래요. 엄마랑 아빠는 행복하겠죠 지금? 그랬음 좋겠는데."
내 말에 남자는 한참 동안이나 말이 없었다. 대답을 바라고 말한 건 아니었다. 그치만, 남자는 고민하느라 말을 안 했던 거였을까 천천히 입을 열었다.
"행복하지 않을 거예요."
"…빈말이라도 행복할 거라고 해주죠 좀.."
"미안해요. 내가 빈말을 잘 못해서."
"…조금은 할 줄 알아야해요. 너무 솔직하면 재수없거든요. 안 그래도 생긴 거 엄청 차갑게 생겨서는.. 빈말도 못하면.. 너무 싫을 것 같아."
"……."
"그래도 그쪽한테 너무 고마워요."
"……."
"나한텐 그쪽이 희망 같아요."
내 말에 남자는 평소처럼 아무 표정도 없이 나를 바라보다가 살풋 웃어보이고선 일어섰다. 잘자요- 잘자라는 인사도 몇번째일까.
이상하게 저 잘자라는 말을 들으면 정말로 잠이 잘 왔다. 그가 가고, 침대에 앉아서 그가 계단을 밟고 올라가는 소리를 눈을 감은 채로 들었다.
저 소리가 너무 좋아. 저 소리가 나한테는 위로같아. 저 사람은 나에게 참 이상한 존재야. 어쩜 저렇게 이상한 게 많을까 저 사람은.
다음 날 나는 씻고선 그가 선물해준 속옷을 입어보았다. 어제 생각이 나서 또 웃음이 나왔다.
그러다 전에 내게 사주었던 옷이 떠올랐다. 계속 똑같은 것만 입었더니.. 찝찝하기도 하고.. 어제 이후로 조금은 가까워진 것 같기도하고.
내 기분탓일 수도 있지만.. 이상하게 저 옷을 입고싶었다. 불편한 옷은 아니었다. 편한 옷이었기에 입을 수가 있었다.
이 비싼 옷을 이 지하실에서 입어도 되는지 모르겠지만..
'어제 이대표님 왔다 가셨는데. 좋으셨겠어요~'
'네?'
'저희 매장 속옷 엄청 사가셨는데.'
'아~ 네! 그랬죠. 맞아요. 우리 그이가 선물하는 걸 좋아해서.. 오늘은 그냥 구경만 하러 온 거예요.'
'저희 직원들이 다 부러워했다니까요~? 아, 얼마 전에는 옆 매장에서 옷도 사가셨잖아요. 그때도 다들 부러워하구..'
소희는 낮에 있었던 일을 떠올렸고, 설마 설마하며 지하실에 내려가기 시작했다.
준혁은 바빠서 오늘은 들어오지 않았고, 밤 12시면 모두가 잠들어 아무도 나오지 않는 시간이었다.
조심스레 문을 연 소희는 자신의 앞에 당황한 듯 보이는 혜를 위아래로 훑어보였다. 아마 저 깨끗하고 비싼 옷은 내 남편이 준 거겠지.
터벅 터벅 걸어가 침대로 향한 소희는 수많은 속옷들과 옷들을 보았고 그 다음으론 스탠드 캔들 책들을 보았다.
어이가 없다는 듯 콧방귀를 뀐 소희는 혜 앞에 서서 주먹을 꽉 쥔 채로 말했다.
"그 옷 말이야."
"……."
"이 썩은내 나는 지하실에서 그런 옷 입고있으면 어울릴 것 같아?"
"……."
"그냥 웃겨. 하수구에나 있던 쥐들이 목줄을 맨다고 애완동물로 보일 것 같아? 전혀? 전혀 안 그래보여. 여전히 여기는 냄새가 나고, 너는 그런 냄새 나는 곳에 사는 쥐일 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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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