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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장인물 이름 변경 적용
*본 글은 애니메이션 SPY X FAMILY의 설정을 차용하였음을 알려드립니다.




  아주 기분 좋은 날이었다.


“여주 씨 오늘 좋은 일 있나 봐~?”


  출근하고 벌써 세 번째 듣는 말. 이쯤 되면 내 얼굴이 정말 그렇게 보이는 거라고 볼 수 있다.

  나는 계속해서 그래왔던 것처럼, 세상 밝게 웃으며 대답한다.


“네!!! 오늘따라 기분이 너무 좋네요~”

“아아, 그래...”


  떨떠름한 얼굴로 멀어지는 선배의 뒤에, 더욱 더 시원한 미소를 갈겨주었다.

  시비를 걸든 말든, 난 행복하니까. 

  왜냐고?


“혹시 차 드실 분~?”


  오늘 퇴근하면 민규 씨랑 데이트하기로 했거든!




*** 




  솔직히, 저번에 보안국 조사관을 마주쳤던 날 민규 씨가 했던 말에 진심이 담겨 있으리라 생각하진 않았다.


- “고생도 했는데, 금요일쯤에 퇴근하고 외식이나 할까요. 술도 한 잔 하고.”


  아무리 생각해도 으레 건넬 법한 인사치레 정도가 아닌가. 날짜가 좀 구체적이긴 하지만, 설마 진담이겠어, 하고 혼자 설레었을 뿐이었다.

  그런데, 오늘 아침.


- “중앙광장 시계탑에서 만날까요?”

- “...네?”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채 고개를 갸웃했던 그때,


- “금요일에 외식하기로 했잖아요.”

- “...아-”

- “저만 기대하고 있었나 보네요. 서운하게.”


  이어진 말에 또 한 번, 숨이 멎는 듯한 기분을 느꼈더랬다.

  양복을 휘감은 큰 몸에 풀죽은 강아지마냥 바닥을 내려다보는 모습의 부조화가 그렇게... 그렇게까지 잘생길 일이냐 이 말이야.


- “...그쵸, 저녁 먹기로 했었죠.”

- “네에. 잊으신 것 같지만.”


  새침하게 눈썹을 씰룩이기나 하고. 행동 하나하나가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 알고 하는 것 같아 억울해질 지경이었다.


- “...그럼, 퇴근하고 보는 거죠?”

- “네. 봐둔 식당이 있는데, 먼저 가 있을래요? 아니면 광장에서 만나서 갈까요.”

- “같이, 가요. 그럼 7시쯤 시계탑 앞에서...?”

- “좋아요.”


  그래, 이 상황만으로도 심장박동이 역치에 달하고 있었는데.


- “그러고 보니 전부터 물어보고 싶었던 건데, 약지에 낀 그 반지는 뭐예요?”


  민규 씨는 한술 더 떴다.


- “아, 졸업 반지 같은 거예요. 보육원 나오면서 받은.”

- “의미가 큰 편인가요?”

- “얇아서 안 부담스럽기도 하고, 몸의 일부 같은 느낌이라 끼는 거죠. 별 의미는 없어요.”

- “그럼 그것 좀 줄래요?”

- “...이유는요?”


  괜히 휘둘리는 느낌에 새침하게 되물었다가,

[세븐틴/김민규] SPY X FAMILY - 05. 운수 좋은 날 | 인스티즈


- “제대로 반지 맞출 때가 되지 않았나 해서요.”

- “...어머.”

- “슬슬 동네방네 자랑할 때도 된 것 같은데.”


  예상 밖의 로맨틱한 대꾸로 되려 한 수 당하기까지.

  민규 씨의 얼굴 공격에 휘말린 나는, 18살부터 약지에 끼고 있던 반지를 홀랑 넘겼다. 보육원과 관련된 것이라, 오히려 나쁜 기억이 얽힌 쪽에 가까우니 미련도 없었다. 그나마 같은 보육원 출신인 사람에게 내 출신을 증명할 때나 필요한 것인데, 그마저도 많지 않고.

  반지를 받고 싱긋 웃는 민규 씨의 얼굴을 떠올리며 타자기를 치던 그때.


“진짜 오늘 뭐 있어요? 보통 신난 게 아닌 거 같은데.”


  일이 있어 먼저 들어간다던 승관 씨가 재킷을 입다 말고 말을 걸어왔다. 마침 다들 담배를 태우러 갔는지 아무도 없기에, 고개를 끄덕이며 목소리를 낮췄다.


“오늘 퇴근하고 민규 씨랑 외식하기로 했거든요. 아주 간만이라서 말이에요.”


  사실 민규 씨 집에 들어간 날 이후론 거의 처음이지만.


“...형이랑요?”

“네!”

“...퇴근하고요?”

“...네! 7시에요.”


  승관 씨의 얼굴이 아주.... 아주 오묘해졌다. 못 들을 걸 들은 것도 같고, 불가능한 내용을 들은 것 같기도 한, 그런 표정이랄까.


“...빠듯할 텐데.”

“네?”

“아, 아니에요. 알아서 하겠죠, 뭐... 이만 들어가 보겠습니다.”

“네, 들어가세요~”


  살짝 목례하고 나가는 승관 씨의 뒷모습에서 벽에 걸린 시계로 시선을 옮겼다. 3시였다.

  퇴근까지 3시간, 약속까지 4시간. 일찍 나가서 거리나 구경하고 있어야겠다.

  광장 쪽에 호랑이가 마련해둔 비밀 무기점이나 들러볼까, 하며 머리를 굴리는데, 사무실 문이 노크 없이 다시 열렸다.


“승관 씨세요? 뭐 두고-”

“.......”

“...누구시죠?”


  승관 씨가 뭘 두고 갔나 하고 답을 하려는데, 한 번도 본 적 없는 여자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그럴 수는 없다. 시청을 오가는 직원은 모두 외워두었는데.


“김여주 씨, 맞으세요?”


  거기다 인사도, 본인 소개도 없이 바로 이름부터 묻기까지.


“...네, 맞습니다.”


  손에 빳빳하게 힘이 들어갔다.

  임무라면 종이가, 적이라면 칼이 날아올 것이다. 어느 쪽이든 몸을 민첩하게 움직여야 하니, 몸의 모든 근육에 날을 세우려던 그 순간.


“윤정한 씨가 보내셨어요.”

“...네?”


  
  상당히 우아하게 밀봉된 편지 봉투가 눈앞에 내밀어지더니, 어정쩡하게 마중 나온 내 손에 사뿐히 안착했다. 


“...윤정한 씨요?”

“네.”

“...그냥 이렇게 들어와서 주고 가시는 거예요? 아니, 그전에 전혀 관계없는 관공서에 어떻게 들어오셨-”

“그건 알려드릴 수 없고요. 그럼 이만.”

“네? 아니 잠시-”


  쿵.


  현실감 없게 다가온 여자는, 정말 세상에 없었던 마냥 사라졌다.


“...뭐지, 꿈이었나?”


  그렇다기엔 내 눈앞에 편지지가 있긴 하고.

  와중에 고급 편지지인지, 암살업무 의뢰서와 비슷한 질감이기까지 했다. 이래서 고급 종이 잘 안 쓰는데... 뭐, 윤정한이 알 리가 없으니.


“보나 마나 어디 파티 와달라 그런 거겠지.”


  뜯고, 읽고, 다시 봉투에 넣어 가방에 처박기까지는 1분도 채 걸리지 않았다. 역시나 예상대로 파티 초대장이었다.

  평소였다면 적당한 핑계를 대며 거절했겠지만, 이번엔 가까운 친지로서는 안 가기 좀 애매한... 승진 기념 파티라는 게 문제랄까.


“사적인 명령으로 시청쯤은 쉽게 뚫는 거면... 특진 수준 같은데.”


  가서 친분 과시 좀 하고, 외무부 고위직 좀 알아두고 하면... 어쩌면 임무 수행하다 곤란해질 때 얼렁뚱땅 넘어가기 좋을지도 모른다. 뒤처리하기도 쉬울 수 있고.

  그렇다고 혼자 가긴 좀 그런데. 오해도 자주 샀고, 이젠 유부녀이기까지-

  -아.


“민규 씨한테 같이 가자 할까.”


  좋은 생각인 것 같았다. 아니, 좋은 생각이다.

  이건 전적으로 오해받기가 싫어서다. 나 이제 유부녀다, 인증도 좀 하고. 윤정한 여자친구인 마냥 여기던 동료분들 편견도 좀 풀고. 이렇게 건실한 남편이랑 산다, 자랑도 하고. 서국 이민자 출신이지만 정말 엘리트니까 잘 봐달라고 높은 분들한테 눈도장도 찍고...

  ...뭐, 겸사겸사 민규 씨 정장 입은 것도 보면 좋겠지. 평소에 출근할 때 입는 양복도 잘 어울리지만, 제대로 복장을 갖추면 정말 멋있을 테니까.


  ...이거, 무기점을 들릴 때가 아닌 것 같았다.




*** 




“어머, 지금 몇 시죠?”

“6시 50분이네요.”

“더 고민하면 늦겠네... 그냥 아까 그걸로 주실래요?”

“보던 걸로 안 하시고요?”

“...그거 안 사면 후회할 것 같아서요.”


  한동안은 나만의 허리띠를 졸라매야 할 듯 싶지만, 뭐 어때. 그게 더 잘 어울리는 걸.

  후, 한숨을 내쉬며 돈을 내미는데, 문득 금은방 주인 할머니의 따뜻한 미소가 시야 끝에 걸렸다.

  ...뭐지, 우수 고객이라고 판단한 걸까.

  어색하게 고개를 돌리자, 포장된 물건을 가지고 온 할아버지가 입을 열었다.


“그러고 보니 오늘 점심때쯤이었나, 이 물건이랑 아주 잘 어울리는 남성분이 오셨었는데.”

“...아아, 네...”

“키도 훤칠하고, 얼굴도 잘생기고, 아주 남자답게 생겨서는.”


  ...늦을 것 같은데, 빨리 물건이나 주지-


“실반지 하나 가져와선, 반지를 추천해달라고 하더군요.”


  ...어?


  고개를 들자, 내 손가락을 향해 내리깐 주인 할아버지의 눈동자가 보였다.

  그러니까, 오늘 아침까지 실반지가 자리 잡고 있던 왼손 약지 말이다.


“꽤 어릴 때부터 낀 건지, 성인 여자 치곤 아주 작은 사이즈라 괜찮은 걸 찾기가 힘들었는데.”

“...아아, 그래요.”

“지금 보니 아주 잘 어울리는 걸로 골라 간 것 같네요. 부부가 참 보는 눈이 좋아.”


  포장된 물건을 안고 시계탑으로 가기까지, 발을 어떻게 움직였는지 모르겠다.

  그냥, 마냥 좋았던 것 같다. 처음 민규 씨랑 마주쳤던 날 이후로, 이렇게 기분 좋은 감정만이 가득했던 날이 있었던가.

  홧홧해진 낯이 이상하지 않을 만큼 날이 쌀쌀해서 다행이었다.




*** 




  ...음, 다행이란 말은 취소.


“엣취- 어우.”


  아침에 괜히 신경 쓴다고 얇은 코트를 주워입고 나온 게 실수였다. 그나마 장갑을 끼고 와서 다행인가. 품에 안은 선물을 괜히 더 꽉 끌어안았다.

  벤치에 앉고 얼마나 기다렸더라. 30분쯤? 그것보단 더 된 것 같기도 하고. 

  조금 늦을 수 있다. 직장이 다 그럴 수 있는 거지.

  입술을 깨물면서, 애써 오기 전의 행복한 감정들을 되새겼다.


“...좀 더 기다리지 뭐.”


  그게 뭐, 어려운 일이라고.




*** 




  장갑 안쪽도 살살 얼어붙을 즈음에는, 걱정이 들었다.


“...무슨 일 생긴 건 아니겠지.”


  부러 시계는 보지 않았다. 올 거라는 믿음만 줄어들 것 같아서.

  배가 꼬르륵거렸지만, 예약해둔 식당은 어떡할지에 대한 걱정만 들었다. 아니, 봐두겠다고만 했으니 예약은 안 했을지도 모른다.

  차라리 그랬어야 할 텐데. 민폐는 끼치기 싫으니까.


“...배고파.”


  현저히 줄어든 사람들을 알아차렸을 때는, 조금 서글펐던 것도 같다.




*** 




  가게들의 불이 반 이상 꺼졌을 때쯤, 시계를 올려다봤다. 시침이 9를 넘은 지 오래였다.

  살짝은 초조한 마음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별일 아니겠지, 뭐. 깜빡하고 집에 갔을 수도 있고.”


  조금만 더 기다려볼까.

  애매한 시각이니까, 그래, 정각만 맞추고.


“...그래도 안 오면 어쩌지.”


  좀 서운할 것 같은데.




*** 




  찰칵, 뎅-


  네 번째 정각 종이 울리는 것에 맞추어, 선물을 가방에 넣었다.

  바로 안겨줄 수 없어졌으니, 굳이 꺼내고 있을 필요는 없지.


“...유치하게 뭐 하냐.”


  ...이럴 때 유치하게 안 굴면, 또 언제 굴어보겠어.

  괜히 자문자답하며, 집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배가 울고, 손발이 얼고, 머리가 굳는다.

  땅바닥에 버린 3시간이 아까우면서, 더 기다려야 하나 미련한 생각이 피어오른다.


“...별일 없겠지 뭐.”


  괜히 멀쩡한 돌부리를 걷어찼다.

  집 가면 민규 씨가 있었으면 좋겠다.

  그냥 일하다 보니 까맣게 잊어버린 채, 루틴대로 집에 와선 왜 할 일 많지 않은 위장부인이 늦는지 의문스러워했으면 좋겠다.

  들어오는 나를 보며, 야근을 얼마나 한 거냐며 걱정하는 투로 물었으면 좋겠다.

  차라리 그러면-


“...여주 씨-!!!”


  -화라도, 낼 텐데.


“여주 씨, 여주 씨!!!”

“.......”

“하아, 아까부터 몇 번을 불렀는데... 그, 이게 아니고.”


  믿고 싶지 않았지만, 민규 씨였다.

  출근할 때 입고 나간 옷 그대로. 아니, 흐트러진 채로, 올리고 나간 머리는 다 흘러내려선 제멋대로에, 숨을 몰아쉬고 있는.


“추운데, 많이 기다렸죠. 정말 미안, 아니, 그게...”


  세상에서 가장 미안한 표정으로, 이마의 상처에서 흐르는 핏물도 채 못 닦아내고 있는.


“...이마는, 어쩌다가.”

“...아, 이거는.”

“.......”

“환자가 난동을 부려서. 괜찮아요, 별거 아니에요.”


  ...잔뜩 미워지게 해놓고, 차마 화도 못 내게 만드는.


“...일단 집에 가요.”


  그에게 할 수 있는 말은 그것뿐이었다.




*** 




“...가끔 있는 일이에요. 요주의 환자라, 더 주시했어야 했는데. 제 잘못이죠, 뭐.”

“.......”

“저번 주였나, 병 깨트려서 자살소동 벌이는 사람 제압한 적도 있었어요. 그때 진짜 아찔했죠.”

“.......”

“그나저나 여주 씨 처치 잘하네요. 좀 크게 찢어졌는데-”


  탁-


  부러 소리 나게 구급상자를 닫으니, 민규 씨의 목소리가 멈췄다. 불편하게 찾아온 침묵은 한동안 이어지다, 다 쓴 거즈를 버리고 온 내가 테이블에 앉았을 때에야,


“...미안합니다.”


  이미 몇 번째일지 모를 민규 씨의 사과와 함께 끊겼다.

  ...저건 듣고 싶은 말이 아닌데.

  그렇다고 다른 말이 튀어나오면, 마음이 더 언짢을 것 같기도 하고.


“...민규 씨 탓이 아니니까 사과할 필요 없어요. 어쩔 수 없었다면서요.”


  내가 기대하게 만들었으니, 민규 씨 때문인가. 아니, 그렇게 생각하면 애초에 민규 씨에게 기대란 걸 한 내 탓인가.

  ...아니, 언제부터 민규 씨한테 기대를 하게 됐지. 서운해하지도, 아쉬워하지도 말자고 마음먹었었잖아.


“...후우.”


  수많은 생각들이 빙빙 돌면서 머리가 뜨거워진다.

  역시 얇은 코트를 입는 게 아니었어.


“...먼저 들어가서 자요. 간단히 먹을 것도 먹었고, 대강 치료도 했으니까 푹 쉬어야죠. 몸도 다쳤는데.”

“...여주 씨는요.”

“...조금만 생각 정리하고 잘게요.”

“...미안-”


  듣기 싫은 문장이 완성되려는 찰나.


“사과는 안 해도 된대도.”


  말이 조금 날카롭게 나간 것 같아, 애써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그냥 조금만 혼자 둬요. 얼마 안 걸리니까.”


  감기 정도야 뭐, 하룻밤이면 떨구지. 이런 것도, 더 호의 있는 쪽이 먼저 접고 들어가는 거고.

  진지한 어투가 통했는지, 민규 씨는 머뭇거리다 결국 자리에서 일어났다. 방문을 닫기까지 내 쪽을 바라보던 그는, 소리 없이 문을 닫으며 한 마디를 남겼다.


“...푹 자요.”


  쿵.


  문이 닫히며 눈앞에서 민규 씨가 사라지고 나니, 서서히 현실감각이 돌아왔다.

  이 정도의 서운함과 아쉬움, 원망과 자책감이 몰려들 일이 아니다. 그래, 내가 진짜 저 사람을 적당히 사심 있는 위장 남편으로 생각한다면.

  뒤늦게 뛰어온 민규 씨의 상태가 어땠든 화를 냈어야 했다. 그 전에, 3시간 동안 기다리지도, 수십 분 동안 선물을 고르지도 않았어야 했다.

  ...애초에, 퇴근하고 만나기로 한 것만으로 이렇게까지 들뜨지도 말았어야 했다.


“...머리 아파.”


  언제부터 열이 올랐더라. 

  집에 도착했을 때. 집으로 발걸음을 돌릴 때.


“...집으로 돌아올 때...”


  문득 오늘의 약속을 입에 올리던, 집에 오는 길 그 노을 속의 민규 씨가 떠올랐다.

  그날도 얼굴이 뜨거웠는데.

  그 열과 이 열은 또 다르지만은.


  ...모르겠다.


“...진짜 머리 아프네.”


  아무래도 열기가 쏠려서 정신이 없는가 보다. 머릿속의 생각이 영 정리가 안 되고 단편적인 말만 툭툭 입 밖으로 튀어나오는 걸 보면.


“...약 먹고 자자...”


  물과 약을 한입에 털어 넣고, 몸을 씻어 침대에 눕히기까지 어떤 정신이었는지 모르겠다.

  조용해진지 한참인 민규 씨의 방을 신경 쓰지 않으려 빠르게 눈을 감고 나서야 거실에 두고 온 가방이 생각났지만,


“...됐어.”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지금은.

  그냥, 모든 걸 꺼버리고 싶을 뿐.




*** 

[세븐틴/김민규] SPY X FAMILY - 05. 운수 좋은 날 | 인스티즈





  ‘황혼’의 손이 편지지를 제자리에 돌려 넣었다. 봉투와 함께 딸려 나온 선물 꾸러미 역시 다시 가방 안으로 들어갔다.

  아마 저를 기다리는 동안 산 것이리라. 의남매를 위한 승진 축하 선물일 테고.


“...그럴 사이지.”


  가까운 친지니, 그 정도의 호의 표시는 어색하지 않다. 부부로서 오해받을 행동도 아니고.

  남의 가방을 어색하게 정리한 ‘황혼’은, 소리 없이 걸어 방문을 열었다.

  그러니까, 동거인의 방을.


“...잘 자네.”


  침대 옆 작은 탁자에 가방을 올려둔 그는, 잠시 서서 곤히 잠든 여자의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봤다.

  이마와 끝에 맺힌 땀방울. 살짝 상기된 뺨. 평소보다 조금 거친 숨. 거실에서 몇 번이나 읊조리던 두통 탓인지, 잔뜩 찌푸려져 있는 미간.

  부정할 수 없는 제 탓이었다.


“...제기랄.”


  예상치 못한 변수로 임무가 늦춰지는 건 자주 있는 일이다. 당연히 오늘 약속에 늦을 상황도 염두에 두었다.

  오히려 이 정도면 꽤 열의를 가진 편이다. 다른 비슷한 상황이었다면 부상을 입은 즉시 뒤의 임무를 치워냈을 테지만, 관계 형성이 중요한 일이니만큼 무리해서라도 달려온 것인데.

  화를 낸다면 충분한 이유도, 기분을 풀어줄 만한 변명거리도 마련해두었는데.


- “...이마는, 어쩌다가.”


  무언가 체념한 듯, 바로 상처부터 묻던 목소리.


- “일단 집에 가요.”


  대상을 알 수 없는 원망이 복잡하게 섞인 눈.


- “그냥 조금만 혼자 둬요. 얼마 안 걸리니까.”


  그래놓고, 차분하게 웃고 있는 입이라니.


“...후.”


  그대로 굳어버렸던 저를 떠올리며 머리를 거칠게 턴 ‘황혼’은, 한숨을 쉬며 품에서 작은 상자를 꺼냈다.
  
  겪어본 적 없는 기분은 푸는 방법도 알 수가 없다.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성의를 보일 수밖에.

  한참 동안 그의 무력한 손을 맴돌던 상자는 결국 탁자 위로 조심스럽게 얹어졌다.


“...이렇게 줄 생각은 아니었지만.”


  그날 밤, 수첩 앞에 한참을 앉아 있던 ‘황혼’은 결국 단 한 줄도 추가하지 못하고 표지를 닫아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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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udY
오랜만에 뵙습니다... 사실 타자를 오래 못 칠 만한 사정이 생겨서 못 왔네요😂 대신 그 동안 완결까지 스토리 흐름을 정해둘 수 있었기 때문에 앞으로 글 쓰는 게 더 수월해질 듯 합니다! 즐겁게 읽어주시고 찾아주셔서 감사합니다~
1년 전
독자1
작가님 정말 기다렸어요!!! 자꾸 서로에게 진심이 되는 게 왜 이렇게 불안하게 다가오는지🥺🥺 이번화도 잘 읽었습니다!
1년 전
독자2
역시 재밌다 ...................
1년 전
독자3
첫화부터 차근차근 읽고 왔는데 왜 이제서야 작가님 글을 접하게 된 것인지ㅜㅜㅜㅜ민규와 여주가 서로 조금씩 얽혀가는 스토리 너무 좋아여,,
1년 전
독자4
넘 재미있네요 정말 ㅠㅠㅠ
얼른 서로 마음 깨닫고 행복한 신혼생활 즐겼으면 좋겠네요 ㅠㅠㅠ

1년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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