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걱정은 언제나 그랬듯
신호등처럼 초록 불이 찾아온다.
그러니 불안해하지 마라.
내가 너의 초록 불이 되어줄 테니
내 다섯 번째 계절
01
순간이 너무 짧아.
뭐 하나라도 더 기억하고 싶었는데.
내가 모든 것을 잃고 혼자가 되던 그 순간.
잃는 건 순간인데, 고통은 영원히라는 거.
그게 너무 고통스러워.
그 순간을 만든 당신의 고통이 영원이 아니라는 게.
너무 슬퍼.
당신은 순간이 지나면 모든 것을 잊고, 훌훌 털고 살겠지만.
나는 그러지 못 할 거라는 거.
당신에게는 집도 있고, 돈도 있고, 가족도 있겠지만,
나는 다 잃었잖아.
"나는요, 아저씨가 세상에 다시 나오게 된다면."
"......."
"여기서 발을 떼고 세상에 나오는 순간.."
"......."
"나처럼 모든 걸 다 잃거나, 죽어버렸으면 좋겠어요."
"미안하다."
내가 더 미안하죠.
나는 그 사과 못 받아요.
나 이제 집에 돌아가면 아무도 없어요.
집에 돌아가면 정적만이 나를 반겨주겠죠.
아저씨는 가족들이 찾아올 거고,
집에 돌아가면 가족들이 반겨주겠죠.
난 어떤 이유로도 여기 오지 않을 거예요.
아저씨도 그걸 바라겠죠.
"정말 미안하다. 후회 많이 하고 있어."
"후회 하지 마세요. 아저씨가 운전대를 잡은 순간부터 후회할 기회마저 사라졌으니까."
"내 와이프와.."
"아니요."
당신 가족들도 끔찍해. 나 이제 갈게요. 절대 후회하지 말고 아저씨가 저지른 일, 잊지 말고 살아요.
물기 어린 눈으로 나를 쳐다보는 아저씨를 뒤로 한 채, 교도소를 빠져나왔다.
들어올 때부터 먹구름이 잔뜩 껴있던 하늘은 아예 까매져버렸고, 비가 쏟아져내렸다.
엄마, 내가 지금 슬픈 이유 중 가장 큰 이유가 뭐냐면요.
아빠, 아빠 딸이 지금 너무 힘든 이유가 뭐냐면요.
내가 여기서 나가면.
여기서 발을 떼는 순간부터 나는 이제 더 이상 그 사람을 탓할 수가 없어.
마음 같아선 똑같이 해주고 싶은데, 엄마 아빠는 그런 거 안 좋아하잖아. 안 바라잖아.
더 이상 내가 커피를 만들고 케이크를 만드는 이유가 없어.
내가 만든 커피를 마시며 나와 이야기하던 엄마도,
내 코에 생크림을 묻히던 아빠도..
"아가, 비 온다."
"......"
"늦게 찾아와서 미안하다."
"......"
"내 아들이 그렇게 너를 금쪽같이 여긴 이유를 알겠구나."
나와 네 아비를 아주 쏙 빼다 닮았구나.
..할아버지에요?
할아버지라니. 오랜만에 듣는 소리네. 손자새끼 맨날 할배, 할배 거리는데.
쏟아지는 빗속에서 우산을 들고 나타난 할아버지는 내가 그토록 간절히 기도했던 수호천사 같았다.
웃는 모습이 아빠랑 똑같아요.
당연하지, 내가 네 아빠의 아빠니까.
저는 어떻게 찾아오신 거예요?
네 아빠가 나에게 전화를 했다.
할아버지는 내 한 손을 양손으로 붙잡으시고는 나를 쳐다보셨다.
보면 볼수록 아빠 생각이 나요.
"아버지께 손 벌리고 살며 더 이상 힘들게 해드리고 싶지 않았는데, 어쩔 수가 없었다고. 순영이에게 제대로 된 사랑하나 못 줬는데 너한테도 그렇게 될 거 같다고. 자기가 18년 동안 꼭꼭 감춰두고 숨겨온 딸을 돌보아달래. 내 손주인데 내가 어떻게 거절할 수 있겠니."
"순영이가 누구예요..?"
"곧 알게 될 거다."
차 시트에 괜히 비가 스며들까 불편하고 아슬아슬하게 걸터앉아있었다. 슬슬 발끝과 허리가 저려올 때쯤, 도착했다는 운전기사분의 말씀에 할아버지를 따라 차에서 내렸다.
앞으로 내가 살 집이라고 말씀하시는 할아버지를 쳐다보니 그저 웃기만 하셨다.
머뭇거리지 말고 들어가 봐, 순영이가 많이 기다린다.
조심스럽게 등을 떠미는 할아버지에 열린 대문 사이로 발을 뻗었다.
내가 살던 집 거실보다 몇 배는 더 넓은 것 같은 마당이 보였고 고개를 들어 앞을 보면 누가 보기에도 깔끔하고 잘 지었다.라는 말을 하게 하는 집이 보였다.
뒤돌아보니 멈추지 말고 가라는 할아버지의 손짓에, 다시 앞을 보고 집으로 한 발짝씩 다가갔다.
뭘 망설이고 있어. 할애비 뻘쭘하게.
할아버지의 호통 아닌 호통에 눈앞에 보이는 문을 열었다.
"왔어!! 왔다고요!! 아주머니!! 동생 왔어!!!"
"어... 할아버지.."
"냅둬. 저도 낯설어서 그럴 거다."
"할배!! 얘 동생 맞지!?"
문을 엶과 동시에 안쪽에서 뭔가 튀어나왔고, 곧 방방 뛰며 호들갑을 떨기 시작했다. 꼭 눈 오는 날마다 우리 집 앞에서 뛰던 강아지 같았다.
터치도 못하고, 손가락으로 가리키기도 뭐 한지 손바닥으로 공손하게 나를 가리키며 말하는 모습에 웃음이 풋 하고 터져 나왔다.
"할배랑 안 닮아서 다행이네."
허허, 저 싹수없는 것. 꼬박꼬박 반말이네. 엥? 할아버지 삭스가 없긴 왜 없어! 지금도 신고 있잖아! 두 사람 사이에 껴서 대화를 듣고 있자니 슬슬 뻘쭘해졌다.
두 사람은 싸우는 건지, 대화를 하는 건지. 뻘쭘함에 헛기침을 하자, 그제야 나를 인식하고 대화를 멈췄다.
"내일 학교 끝나면, 기숙사로 들어가지 말고 이름이랑 같이 집으로 좀 와라."
"왜? 왜?"
"평일엔 집에 없으니까 이름이도 기숙사 들여보내야지. 내일모레부터 들어갈 거다."
"들었어!? 들었지!? 가까운 동이였으면 좋겠다!!"
어색하면 어색하다고 말을 해 이 사람아. 괜히 내가 더 뻘쭘하고 어색하다.
말하면서 눈도 못 마주치고, 당장이라도 내 손을 잡고 방방 뛰고 싶은데 그러지 못하는 게 보였다.
내 방을 알려주라는 할아버지의 말씀에 내 손을 잡고 가려고 손을 뻗었다가 멈칫하고는 다시 앞장 서가는 남자의 뒤를 졸졸 쫓아갔다.
여기야. 너랑 나랑 주말이나 방학 때 쓸 방. 짐 풀.. 아, 짐이 아직 없구나. 뒷머리를 긁적이며 말하다가, 더 이상 할 말이 없는지 다시 거실로 가자며 먼저 가버렸다.
"내일 순영이 먼저 학교 가, 이름이는 이 기사랑 집 들렀다가 친구들한테 작별 인사도 하고, 그러고 학교 가거라."
"아 왜! 바로 안 가고!?"
"그럼 넌 전학 수속 이런 거 다 무시하고 갈래?"
"그건 아니지."
쭈뼛거리며 서있는 나를 할아버지께서 보시고는 말씀하셨다.
긴가민가하지? 얘가 순영이다. 너에게는 오빠겠지? 할아버지의 말씀에 쑥스러운 듯 키득거리며 뒷머리를 긁적이는 오빠를 쳐다보았다.
할아버지도 처음이고, 사촌형제가 있을 거란 생각은 해본 적이 없었다.
외동으로 태어났고, 외동으로 자랐고. 명절 때도 친가, 외가 없이 지내왔다.
"나중에 안 좋은 상황에서 덜컥 듣는 것보다는 이게 훨씬 나을 거라 생각해서."
"네?"
"내 아들의 아들이다."
"... 네?"
"나, 너 친척 오빠 아니야. 나랑 너랑 아빠 같은 사람이래."
아니, 이런 걸 어떻게 아무렇지 않게 얘기하는 거야?
오빠랑 내가 이복남매 사이라고?
솔직히 지금 이 상황도 엄청 떨떠름하고 낯설고, 믿기지가 않는데.
오늘 엄마 아빠의 발인까지 모두 마치고, 교도소에서 그 남자를 마지막으로 보고 나왔어. 근데 할아버지가 대뜸 나타나더니 내 친 할아버지래. 근데 오고 나니까 아빠가 밖에서 낳아온 아들이 있대. 이런 일들이 하루 동안 일어난다는 게 말이 되는 소리야?
난 우리 아빠가 그런 사람일 거라 생각해본 적도 없고, 그런 사람일 거라고 믿지도 않았는데.
이복남매, 이런 거도 다 드라마 속 이야기일 뿐이라고 생각했는데.
"나 지금 좋은 기분만 가지고 이런 말하는 거 아니야."
"......."
"나도 어제 처음 들었어, 너보다 더 심한 반응 보였었는데."
"근데 왜.."
"할아버지 빼면 이 세상에 피 섞인 사람이라고는 너밖에 없잖아."
다른 사람도 아니고 아빠 딸 이래잖아. 나 아빠 얼굴 기억도 못해, 몰라. 근데 이것도 할아버지 빼면 아빠 얼굴 아는 사람 이 집에 너밖에 없어. 엄마는 다르긴 하지만, 아빠는 같대. 너 내 동생이라는데 뭘 어떻게 하라고. 이제 남매 사이로 지낼 거 그냥 나쁜 감정 다 버리고 좋은 감정만 가지고 지내면 좋잖아. 오빠의 말에 숨이 턱턱 막혀왔다. 그래, 다 맞는 말이긴 한데. 나는 준비가 하나도 안 되어 있었잖아. 할아버지는 한참 전부터 알고 계셨을 거고, 오빠는 어제 알았다지만. 난 오늘 처음 이 상황을 대면한 거잖아. 근데 내가 뭘 어떻게 오빠한테 갑자기 잘해줘.
떨려오는 손을 꽉 맞잡아 숨기고, 흔들리는 동공을 눈을 감아 숨겼다. 혼란스럽기만 한 이 상황을 어떻게 벗어날 수 있을까.
누군가가 나타나서 그냥 이 모든 게 꿈이라고, 잠시 긴 꿈을 꾸고 있는 것이니까 빨리 일어나라고 해줬으면 좋겠어.
"네가 당장 적응하는 건 바라지 않아."
"......."
"근데 네가 마음의 문을 닫는 건 더더욱 원하지 않아."
"......."
"네가 어떻게 지내왔는지 모르지만, 난 엄청 외로웠어."
그래서 난 네가 반가웠어. 우리 남 아니잖아. 그래서 더 반가웠어.
약간은 흔들리던 그 목소리가 계속해서 잔향으로 남아 내 귓가에 맴돌았다. 간절하면서도 애처로운 오빠의 목소리가 나에게 손을 내미는 것 같았다.
꽉 붙잡지 않아도 되니까 내치지만 말아달라고, 한 번만 믿고 잡아달라고.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내 끄덕임에 오빠는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았지만 알 수 있었다. 아까는 스치지도 않았던 손이 지금 맞닿아 서로의 체온이 얕게나마 느껴졌다.
"우리 엄마가 그랬는데, 나 엄청 지랄 맞대."
"괜찮아, 할배가 맨날 나한테 싹수없는 놈이랬어."
그래도 괜찮아. 그게 각자의 애정을 표현하는 거니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