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셋째 형님처럼 의도가 빤히 보이는 그런 혼인은 하지 않을 것입니다."
"셋째 형님처럼 권력에 눈이 멀어 혼인하였다 폐하의 눈 밖에 나기라도 하면 어쩝니까?"
"요 형님네는 늘 한겨울이지요. 갓 혼인한 부부의 집이 저렇게 삭막한 것은 처음 봤습니다."
이 이야기는 억지로 맺어진 인연에서, 끊어지지 않을 운명이 되어버린 어느 부부의 이야기임
3황자 왕요 x 부인 망상 썰 1
예나 지금이나 좀 있다하는 집안 사람들 사는게 다 그렇듯 아무리 휘황찬란한 황궁을 등에 업고 태어난 황자라 한들 딱히 다를건 없었음.
3황자 요는 화려한 수가 놓여진 혼례복을 입고 자리에 앉아 찻잔을 기울었어. 누구에겐 오늘이 평생 가장 행복한 날로 기억될지도 모르겠지만, 요에게는 특별할 것 없는 그저 평범한 날이었지. 황후의 입김으로 간신히 얼굴만 알고 지낸 여자와 혼인하는 날이었지만 전혀 개의치 않았어.
요에게 이 혼인은 그저 자신이 원하는 위치로 가기 위한 디딤돌 중 하나일 뿐이거든.
그도 그럴것이 요의 혼인상대는 고려에서 손에 꼽힐 정도로 알아주는 귀족 집안에서 금이야 옥이야 아낀다는 둘째 딸로, 태조가 정윤의 부인으로 탐낼 정도로 귀한 인물이었음.
아버지를 따라 황궁에도 여러번 들린 적이 있었기에 요도 부인의 얼굴을 알고 있었지. 확실히 보기 드문 미인이었지만 화려한 집안 배경에 비해 허전하다 싶을 정도로 수수한 옷차림이 오히려 그 미모를 감추는 듯 보였어. 스스로의 위치를 알리기 위해 화려하게 치장하는 황실 사람들이나 여느 귀족들과는 확연히 다른 아가씨였음.
요는 자신의 부인이 될 그런 여자를 딱히 마음에 들어하지 않았음.
자고로 가진 자는 가진 만큼 보여줘야 한다고 생각했거든. 이는 감히 흉내도 내지 못할만큼 화려하게 치장하며 살아 온 자신의 어머니를 보고 자랐기 때문이기도 함.
황후는 요에게 이번 혼인이 얼마나 중요한 지에 대해 입이 닳도록 말했지. 태조의 반대가 심했지만 요의 외가, 즉 황후의 집안에서 힘을 많이 썼다고.
그러니 꼭 보란듯이 혼인하여 부인의 집안을 뒷배경 삼아 정윤이 되어야 한다고 말했어.
황후와의 대화를 떠올리자 잠시 어지러워진 요는 어느새 식어버린 찻잔을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나.
이번 혼례가 끝나면, 자신은 이 고려의 주인의 자리에 조금 더 가까워지게 될 거라고 생각하면서.
.
.
.
한편 요의 부인은 설레는 마음으로 평소와 달리 화려한 장신구로 치장하고 있었음.
오늘은 부인에게 특별한 날이었지. 늘 마음에 품어온 이와 혼인하는 날이거든.
요의 부인은 어릴적 아버지를 따라 황궁에 처음 왔을때 만났던 요에게 마음을 뺏겨 오랜시간 짝사랑을 해왔음. 비교적 친화력이 좋은 다른 황자들과 달리 유독 무뚝뚝한 요에게 자꾸만 마음이 가게 되었었지. 어린 시절 처음 만나고 난 후에도 여러번 요를 본 적이 있지만, 대부분 뒤에서 숨어서 훔쳐보거나 멀리서 바라본게 다여서 대화를 나눠본 적은 거의 없어.
그래서 처음 자신이 요와 혼인한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부인은 기쁘면서도 불안한 마음이 들었지.
꿈에 그리던 3황자님과 혼인하게 되다니..!
너무 기쁘다가도 한편으론 황자님의 눈에 자신은 눈에 차지 않는 신붓감이 아닐까 싶어 불안했음. 하지만 황후가 워낙 사탕발린 말로 부인을 잘 구슬린 덕에 어느새 불안한 마음은 사라지고 설렘과 기대로 가득찼지.
'요도 네가 어릴 적부터 너를 눈여겨 보고 있었다고 하더구나. 하긴, 너처럼 고운 아이를 어찌 마음에 담지 않고 지낼 수 있겠느냐?'
생각해보면 요는 자신에게 말을 걸어준 적도 없고, 자신을 봐도 매번 차갑기만 했기에 조금만 더 생각해보면 황후의 말이 거짓말이라는 것쯤은 쉽게 알 수 있었음.
하지만 부인은 요를 혼자 연모했던 긴 시간을 보상 받는다는 기분에 황후의 사탕발린 말도 진실이라고 믿었지.
그도 그럴것이 부인은 그동안 수많은 남자들에게 구애를 받았지만 모두 다 거절하고 오직 한 사람만 바라봤어.
'저 죽기 전에 아가씨 시집 가시는건 보고 죽어야 할텐데... 이러다 정말 저승에서 아가씨 보내드려야겠어요! 어찌 이리 다 성에 차지 않는다 하시는지.. 고려에서 손에 꼽는 신랑감을 다 데려와도 싫다 하시면 대체 어찌하면 좋습니까?'
부인을 어릴 적부터 보살펴 온 하녀가 늘 하는 말이었지. 하지만 부인은 따지고 보면 기준이 높은 것도 아니었어.
물론 요도 굉장히 잘생긴 편이었고, 다른 황자들에 비해 성격이 무뚝뚝한 편이라 다가가기 어려워 그렇지 굉장히 매력있는 남자였음. 하지만 부인이 요를 좋아하게 된 건 평소엔 냉기가 돌 정도로 차가운 요가 예의상으로나마 자신에게 간간히 보인 웃음 때문이었고, 그 웃음에 매료되어 긴 시간을 요만 바라보고 살았던 거였음.
부인은 설레는 마음으로 머리에 꽂은 장신구를 만지작거려. 무겁고 걸리적거리는 것을 싫어하는지라 이렇게 뭔가 주렁주렁 다는건 질색이었는데,
오늘만큼은 그 질색하는 것도 다 참고, 평생 함께 할 정인의 앞에서 곱게만 보이고 싶었음. 부인은 자신과 요가 행복할 거라는 막연한 확신을 가지고 있었어.
황후의 말에 따르면 요도 자신을 마음에 품고 있다고 하였으니, 더 이상 혼자 연모하는 감정을 품지 않아도 되니까.
황후의 달콤한 거짓말이 후에 부인에게 얼마나 큰 상처가 될 지, 그때는 알지 못했지.
-
혼례식은 부인이 생각했던 것만큼 낭만 가득한 행사는 아니었지. 모든 것이 정신없이 지나가서 사실 뭘 어떻게 했는지 기억도 잘 나지 않았어.
두 사람의 혼인은 황실혼인데다가 황후 유씨 가문의 힘이 쫙 들어간 혼인이라 다른 황자들의 혼례식보다 훨씬 더 화려하고 거창하게 치뤄졌음. 항간엔 태조가 혼례식 내내 불편한 기색을 숨기지 못하고 언짢은 표정을 하고 있었다 하여 말이 많았지만 어쨌든 황후 유씨와 요의 목적은 이미 이뤄졌으니 태조가 어떻게 생각하든 중요하지 않았지.
문제는 혼례식이 끝난 후의 첫날밤이었음.
귀족이든 평민이든 새색시 마음이 다 그러하듯 부인은 목이 빠질 듯 꽂아놓은 장신구를 하나도 건드리지 않은 채로 곱게 앉아 요만 기다렸지.
사실 평소에 지금의 반의 반도 안되는 최소한의 장신구만 하고 다니는 지라 불편해 죽을 지경이었지만 3황자를 볼 생각에 참을 수 밖에 없었어. 그렇게 설레는 마음으로 기다리고 있는데, 요는 한 시진이 훨씬 지나고 나서야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처소로 들어왔지,
3황자는 멀리 앉은 자리에서도 냄새가 날 정도로 취해 있었음.
다른 황자들은 이제 셋째 형님도 장가를 가시는구나 하면서 기분 좋게 술잔을 건넸지만, 정작 술잔을 받는 요는 복잡한 마음이었어.
자신의 어머니가 원하는 것을 이뤄주었다는 것에 대한 기쁨과, 꼭두각시처럼 황후가 하는 말에 모양 뿐인 혼례를 치뤘다는 자괴감.
요는 늘 자신이 황제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며 살았지만, 정작 '왜?' 라고 물어보면 '어머니가 그렇게 말했으니' 라는 답 밖에는 없는거야. 자신은 황제가 되기 위해 태어났다는 소리를 붓을 잡기도 전부터 들으며 자랐어. '제가 왜 황제가 되야합니까?' 라고 황후에게 물으면 '반드시 이 고려는 내 아들의 것이어야 하니까' 라는 대답이 돌아왔지.
권력을 위한 황후의 도구로 자라면서도 요는 그게 황후의 사랑이라고 믿었어.
자신은 어머니에게 사랑받는 아들이라고 굳게 믿었지. 그래서 황후가 하라는 것은 모두 하고, 황후의 말을 따랐어.
하지만 요즘따라 요는 생각이 많아졌음.
황후의 말에 무조건적으로 따르면서도 한편으론 자기 자신에 대한 회의감이 드는거야. 나는 정말 황제가 되기 위해 태어났는가 부터 시작해서, 어머니는 정말 나를 사랑하시는가? 까지.
그래서 형제들이 건네는 술을 모두 다 받아 마시고, 형제들 몫의 술까지 죄다 퍼부었어.
더 이상 그런 생각을 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덕분에 거하게 취한 상태로 처소에 들어왔고, 들어오자 마자 보이는 부인의 모습에 입 안이 썼음.
억지로 여인과 합방하는 것은, 사람을 죽이는 것보다 내키지 않았거든.
하지만 어쩌겠어, 혼인을 했으니 합방도 치뤄야지.
결국 요는 내키지 않으면서도 군말없이 부인의 옆에 앉아 옷고름을 풀기 시작했음.
-
요가 처소에 들어온 순간 부인의 얼굴엔 화색이 돌았음. 무슨 일이라도 있으셨나, 왜 이렇게 늦으시지 하던 차에 반가운 얼굴이 보인거야.
사실 부인은 금방이라도 터질 것 같은 심장을 부여잡고 내내 안절부절 못하고 있었어. 정인과 혼인하는 것도 정신이 혼미해질 만큼 좋은데, 합방은 너무 갑작스럽기도 하고 솔직히 부끄럽잖아. 그래서 막 황자님을 어떻게 대해야할까, 황자님께서 나를 어여쁘다 해주실까.. 그것만 죽어라 걱정하고 있었어.
하지만 정작 요는 담담한 얼굴로 일을 치르기 시작했지. 정말 배려라고는 없는 합방이었어.
이건 아닌 것 같아 밀어내려고 해도 건장한 사내를 밀어낼 수 있을리가 만무했고 그만 하라고 해도 말려줄 사람이 있을 리가 없었음.
술김에 치뤄진 합방이 뭐가 좋을까. 요는 만취한 상태로 부인과의 첫날밤을 보냈고, 평생 단 한번 뿐인 첫날밤을 그리 험하게 보낸 부인은 해가 뜰 때까지 뜬 눈으로 밤을 지새지.
'술김에... 술김에 그러실 수도 있어. 어제는 좋은 날이었으니까... 다른 황자님들도 다 많이 취하셨다고 그랬잖아'
이게 부인이 자기 자신을 위로하기 위해 할 수 있는 유일한 말이었음. 술김에 그런 것이라고. 술에서 깨면 3황자는 자신을 소중히 다뤄 줄 것이라고.
물론 그런건 없음. 요는 오히려 술이 깨고 나서 부인을 더 차갑게 대하기 시작했지.
황후가 요를 권력의 도구로 보듯, 요도 부인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으니까.
이제 정말 혼인을 한 이상 부인은 더이상 자신이 신경 쓸 존재가 아닌거임.
그래서 요는 합방 이 후 부인을 찾지도 않고, 부인이 자신을 찾아와도 바쁘다 피곤하다는 핑계로 피하기만 했음.
-
오랜 시간 혼자 연모하는 감정을 쌓아 온 탓인지, 요를 향한 부인의 마음은 쉽게 시들지 않았음. 요가 차갑게 대하고, 부인을 막 대해도 부인 스스로 요를 위한 해명을 만들어 자기 자신을 이해시키려고만 들었지. 요가 잘못하고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어.
요가 자신을 연모하지 않는다는걸 알게 되면 무너지는건 자신 뿐이라는걸 너무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지.
알면서 모른척 하는게 더 힘들다고, 부인은 날이 갈수록 수척해져. 집안은 또 어떻고, 아주 그냥 한여름에도 공기가 차가울 정도였음.
늘 화목하고 따스해 보이는 8황자네와는 확연히 다른 풍경이었지.
어떻게든 자신이 행복하다고 믿고 살던 부인이 무너진건 바로 8황자와 해씨부인 때문이었어.
해씨부인 건강이 안좋다 들어 좋은 약재를 전달하기 위해 8황자네를 찾았다가, 8황자가 해씨부인을 얼마나 귀하게 아끼는지를 보게 된거야.
8황자는 부인이 혹여 바람에라도 쓰러질까 어깨를 감싸주고, 신이 벗겨지면 비단옷에 흙을 묻혀가면서 몸을 숙여 부인을 살폈지.
내가 원한 행복이 저런 거였는데.
싶어서 갑자기 자신이 부정해오던 모든 것들을 인정하게 된거야. 나는 행복하지 않아. 황자님은 나를 연모하지 않으시지.
나는 황자님께 아무 의미가 없는 사람이야.
그렇게 인정하기 싫던 사실들을 다 인정하고 나니, 비참한 기분에 눈물이 났지만 한편으로는 속이 시원하기도 했어.
자신의 형제 자매들은 모두 정략결혼을 했지. 다 부모가 맺어준 이와 혼인했어.
부인은 자신만큼은 연모하는 이와 혼인한다는 사실에 기뻐했지만, 결국 자신도 다를게 없었다는걸 알게 되었지.
3황자와 자신 또한, 부모가 억지로 맺어준 인연일 뿐인거야.
그제서야 부인은 알게 되었음.
왜 형제자매들이 자신을 그렇게 걱정했는지. 왜 자신을 그리 바보라고 놀려댔는지, 그제서야 알게 되었지.
------------------------------------------------------------
1편인데 너무 우울한가..싶다가도 요 성격상 처음부터 로맨스는 바랄 수가 없는 것 같아요 ㅠ.ㅠ
개인적으로 요는 굉장히 매력적인 캐릭터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이렇게 스핀오프나, 썰 형식으로 다시 쓸 때 너무 즐거운 것!